인생은 거대한 농담이다.

- 밀란 쿤테라

 

 

누군가에게는 평범했을 일상 & 7. 영원히 네 곁에

 

 

프린스 아스팔로부터 귀환 권유를 받고 약 1개월에 가까운 시간이 흘렀다.

번번이 찾아와서 귀찮게 굴 것이라는 예상을 깨고, 아스팔은 공원에서의 만남 이후로 단 한 차례도 카고메 앞에 나타나지 않았다.

혹시나 또 찾아오지는 않을지, 이상한 농간을 부려 주변 사람들에게 폐를 끼치지는 않을지 걱정했던 것은 한낱 기우에 불과한 것일까.

아무 탈 없이 시간이 흐르면서 점점 마음을 놓고 있었지만, 저 깊숙한 구석에 엉킨 실타래가 자리를 가로막은 듯 가슴 한 켠에는 항상 답답한 느낌이 남아 있었다.

그 답답한 느낌이 무엇인지 궁금해 하면서도 카고메는 이 느낌이 얼른 떠나 주기를 빌었다.

이제 센터 시험이 불과 1달도 채 남지 않았기 때문이다.

귀환하지 않고 이 세계에서 살겠다고 선언한 이상, 카고메는 무언의 성과를 통해 이를 증명해 내야만 했다. 센터 시험은 학생으로서 올릴 수 있는 최고의 성과였다.

또한 자신의 연인과 함께 운명을 개척해내겠다고 하였으니(설령 그것이 본인 혼자 내린 결정이라 하더라도), 아스팔과 만나기 전에 켄이치와 같은 대학에 갔으면 좋겠다고 막연히 바래왔던 소망은 반드시 이루어야 할 현실의 짐이 되어 카고메의 어깨를 무겁게 짓눌렀다.

"큰 소리는 빵빵 치긴 했지만... 정말 생각대로 잘 풀릴 수 있을까...?"

카고메는 탁자 앞에 의자를 끌어당긴 채 털썩 하고 상체를 웅크렸다.

다가오는 시험에 대한 초조감과 노력한 만큼 결과를 기대할 수 있는지에 대한 불안감, 가뜩이나 흔들리는 수면 위에 돌을 던지듯 마음을 파고드는 정체성의 혼란 등등.

-시험 하나만으로도 걱정거리는 충분한데 이제 와서 더 얹어 주는 이유가 뭐냐고! 바보 왕자!

불안감에 냉정을 잃은 마음은 날카로운 비수가 되어 그 끝을 아스팔에게로 돌려놓는다.

과거를 알게 된 6년 전도 아니고, 이 세계에 발을 들일 무렵도 아니고, 시험을 앞두고 성인이 되기를 기다리는 지금 불쑥 찾아와서 사람을 흔드는 저의는 대체 무엇일까?

또한 1달이 지난 지금까지 신경 쓰이는 요소가 하나 더. 아스팔이 보인 여유로움이었다.

왕자라는 직위가 가져다준 것은 아니다. 카고메 본인은 그의 정체를 듣고 나서 그를 거부했던 터였다. 그럼 설마...

"무슨 생각을 그렇게 골똘히 하고 있는 거야?"

귓가를 간질이는 청량한 목소리에 카고메는 몸을 부르르 떨며 생각의 늪에서 빠져나왔다.

"켄이치...! 왜 이렇게 오래 걸린 거야? 점심시간 다 끝나겠다."

카고메는 눈앞에 나타난 자신의 소중한 연인을 향해 사랑스런 미소를 지어보였다. 방금까지 고민하던 걱정거리들을 저 멀리 치워 버린 채.

"아, 미안미안. 날씨가 요새 추워져서 그런지 따뜻한 걸 찾는 애들이 많이 늘은 것 같아. 줄서고 나서 5분은 족히 기다렸다니까."

푸념조로 말하며 그가 품에서 꺼낸 것은 따뜻한 캔 커피 2개.

어쩔 수 없다는 듯 커피를 받아드는 카고메의 얼굴을 요목조목 뜯어보며 켄이치는 기다리느라 꽤 추웠겠다며 두르고 있던 목도리를 거칠게 벗겨내 다시 둘러주었다. 카고메와 자신의 목에.

1인용으로 제작된 탓에 꽤 우스꽝스러운 모습이 연출되었으나 콩깍지가 씌어 서로의 장점밖에 눈에 뵈지 않는 풋풋한 커플들에게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간간히 주변을 지나가는 학생들이 여러 상념이 담긴 시선을 던지곤 했으나 그것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할 말이란 게 뭐야?"

목도리 하나를 둘이 두른 탓에 필요 이상으로 밀착하게 되어 얼굴을 살짝 붉힌 카고메는 고개를 살짝 돌려 불러낸 이유를 재촉했다.

"내 여자 보는데도 용건을 대고 불러내야 해?"

다소 느끼한 미소를 지으며 켄이치는 약간 차갑게 식은 손으로 그녀의 볼을 툭툭 건드렸다.

카고메는 씨익 웃으면서 한기가 도는 연인의 손을 잡아 입김을 불어넣으며 말했다.

"꼭 그런 건 아니지만... 그나저나 너 어려운 부탁이나 중요한 말을 할 때마다 느끼해지는 거 알고는 있는 거니?"

"그래서 싫어?"

"아니, 좋아. 그것도 켄이치의 일부잖아."

마음 속을 완전히 꿰뚫린 켄이치는 할 말을 잃은 채 가만히 앉아 있었다. 자신의 어머니나 미치루도 그렇고, 자신이 사랑하는 이 여자도 그렇고, 왜들 이렇게 감들이 날카로운 걸까.

거짓말이나 빙빙 돌리는 말 따윈 금방 간파되어 버린다.

장난기 가득한 미소를 머금고 빨리 말해보라며 손끝을 잡아당기는 카고메의 사랑스런 눈망울에서 애써 고개를 돌린 켄이치는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나는 것이 좋겠다고 판단했다.

",,,오늘 밤 9시, 해안 광장에 나와 줘. 아주 중요한 이야기야."

"안 하던 짓까지 하고... 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그러는 거람? 그 애는..."

카고메는 일방적으로 저 할 말만 하고는 서둘러 자리를 뜨다 목에 목도리가 걸려 푸푸거리던 켄이치의 우스운 마지막 모습을 떠올리며 불어오는 바닷바람을 피해 조용히 팔짱을 꼈다.

12월 중순의 첫째 밤을 알리는 바람 소리가 우두커니 서 있는 그녀의 머리카락을 거칠게 어루만졌다.

심각한 이야기를 하기 전, 짐짓 느끼하게 굴거나 답답할 정도로 뜸을 들인 적은 왕왕 있었지만 이런 식으로 행동한 적은 한 번도 없었던 것이다.

"설마..."

카고메는 불길한 생각이 들었다. 켄이치의 안절부절 못하던 모습, 속에 드리운 불안감.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고 정보망을 닫아버리면 대개의 인간은 멋대로 안 좋은 쪽으로 상상의 나래를 펼친다. 사람에 따라서는 스스로 무너지는 경우도 적지 않다.

그녀 역시 예외는 아니어서 아직까지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연인을 기다리며 스스로 불길한 상상을 하고 있었다.

이제 와서 헤어지자는 걸까?

아니, 그런 낌새는 전혀 없었다. 사귀는 동안 거의 싸움도 하지 않았고.

켄이치 본인은 잘 모르는 것 같지만, 그는 생각하는 것이 얼굴에 고스란히 드러나는 유형이라 거짓말이라든가 무언가를 숨기는 일 따위는 전혀 재능이 없었다. 기념일 축하를 위해 깜짝 이벤트를 준비하려다 표정에 떠오른 낌새 덕분에 카고메의 눈썰미에 걸려 멋지게 실패했다는 훈훈한 일화가 종종 있었을 정도로.

아니면 공부 때문에 자주 만나지 못한다는 얘길 하려는 걸까?

적어도 헤어지자는 말보단 신빙성이 있었지만 이것 역시 그리 가능성이 높진 않았다.

굳이 한적한 곳으로까지 불러내서 할 만한 얘기도 아닐 뿐더러, 센터 시험은 다음 달 중순 초예 예정되어 있는 탓에 이제 와서 말을 꺼내기에는 타이밍이 너무 늦었다.

그럼 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 것일까. 카고메는 전혀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감을 잡을 수가 없으니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은 저도 모르게 불안을 끌어들인다.

불안감에게 침입을 허용한 뇌는 주변에 대한 경계심을 낮추고 그녀를 혼자만의 세계로 끌어들였다.

때문에 카고메는 뒤에서 자신을 끌어안은 검은 인영의 출현에 소스라치게 놀랄 수밖에 없었다.

"많이 놀랐어?"

"아, 켄이치... 갑자기 나타나서 놀래키지 마..."

카고메는 살며시 손을 뻗어 켄이치의 손목을 잡았다.

"그런데 왜 갑자기..."

"바닷바람이 좀 찬 것 같아서. 이러고 있으면 따뜻하지?"

"어, 응... 고마워. 역시 넌 아주 상냥한 남자야."

어떻게 대화를 이어가야 할지 말문이 막힌 그녀 대신, 켄이치는 그녀를 끌어안은 손에 살짝 힘을 주며 다시 입을 열었다. 이야기를 꺼내는 그의 표정이 어떤지는 반짝이는 별빛만이 알고 있을 뿐.

"있지... 난 말야, 카고메가 추울 때는 앞으로도 이렇게 해서 따뜻하게 해주고 싶어."

"어...?"

"그대로 들어줘. 시험을 코앞에 두고 이런 얘기하는 게 서로에게 좋지 않다는 건 알고 있어. 하지만 지금이 아니면 내 마음을 전하지 못할 것 같아. 왜냐하면... 네가... 네가 멀리 가버릴 것 같은 눈을 하고 있는 걸."

"!!!"

켄이치의 품에 안겨 그의 말을 듣던 카고메는 헉 하고 숨을 삼켰다. 자신과 아스팔 사이에 있었던 일을 그가 알 리는 없는데, 어째서 갑자기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인가? 그도 그 나름대로 카고메를 염려하는 마음이 일궈낸 성과일까?

"카고메... 나와 결혼해 주겠어?"

카고메를 품에서 떼어낸 켄이치는 겨우 그녀를 불러낸 용건을 전했다. 프러포즈.

"결...혼...?"

카고메는 얼빠진 표정으로 그가 했던 말을 되풀이했다.

솔직히 말해 전혀 예상하지 못한 전개였다. 마음속으로 언젠가 프러포즈해 주지 않을까 바라고 있었지만, 지금 바로 그 말을 들을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 못 했던 것이다.

"지, 지금 당장 대답해 달라고는 하지 않았어! 그러니까... 보름 뒤... 크리스마스 때까지 대답을 들려줬으면 해. 타이밍이 나쁘다는 건 나도 알지만... 그래도 진지하게 행각해 줘. 그럼..."

입을 다문 채 조용히 있는 카고메를 향해 애꿎은 두 손을 붕붕 휘두르며 켄이치는 횡설수설하며 겨우 자신의 남은 의사를 전달했다. 이미 주사위는 던져졌으니 이제 하늘에 운을 맡기는 수밖에 없다며 스스로를 다독이며 발걸음을 돌린 그의 뒷모습을, 소녀의 나직한 음성이 붙잡았다.

서서히 몸을 돌리는 사랑하는 연인의 모습을 시야에 가득 메우며 카고메는 그에게 한 걸음 다가섰다.

켄이치는 어렵사리 꺼낸 프러포즈에 대한 답신의 기한을 보름이나 주었지만, 솔직히 그렇게 긴 기간은 필요 없을 것 같았다.

운명이라는 헛소리에 매인 남자에게 그녀는 이미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하겠노라고 큰소리쳤다. 그리고 지금, 자신이 사랑하는 그 사람은 결혼하자며 프러포즈를 한 것이다.

인생의 동반자로서 평생을 함께 하는 것.

높은 시험 점수를 받아 그와 같은 대학에 가는 것보다 훨씬 막강한 카드였다. 그리고 또, 따지고 보면 시험을 잘 보려는 것 역시 그와 함께 행복하게 살기 위한 전제조건을 충족하기 위한 것 아닌가.

"좋아, 켄이치."

그녀는 켄이치를 향해 손을 뻗으며 말했다.

"좋다니... 설마?"

순간 무슨 뜻인지 이해하지 못한 켄이치가 되묻다 얼굴을 경악의 색으로 물들였다.

"그 때까지 기다릴 필요 없어. 나도... 너랑 결혼할 거야."

고개를 끄덕이며 수줍게 승낙의 뜻을 밝힌 카고메는 그의 목에 손을 감고 살며시 입을 맞췄다.

갑작스런 공격에 잠시 당황해하던 켄이치는 이내 정신을 차리고 답례의 표시로 자신의 뜻을 받아들여준 여자에게 열렬한 키스를 퍼부었다.

"...몰랐어. 이렇게 빨리 대답해줄 줄은."

"나도 몰랐어. 시험을 코앞에 두고 갑자기 프러포즈할 줄은. 그럼 서로 비긴 건가?"

짓궂게 굴지 말라며 꼭 끌어안는 켄이치의 손길에 순순히 몸을 맡기며 카고메는 조용히 승리의 미소를 지었다. 이대로 그 왕자가 나타나지 않는다면 그걸로 좋고, 설령 나타난다 해도 프러포즈에 대해 얘기하면 쫓아버리면 되는 것이다.

약 1달 동안 자신을 괴롭히던 문제가 이리도 쉽게 풀려버릴 줄이야. 정말 세상일은 알 수가 없다며 카고메는 행복한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 이 순간, 그녀를 괴롭히는 문제는 아무 것도 없었다. 황금이 깔린 탄탄대로가 그녀의 인생 앞에 깔려 있다.

그녀는, 행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