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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담과 하와가 선악과에 손을 대어 에덴동산에서 쫓겨났을 때, 나는 스스로의 복을 차버렸다며 그들을 비웃었다.
내가 그들과 동류라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 내가 그들과 같은 짓을 벌이기 전까지는.
금단의 과실에서 흐르는 감미로운 향기에 굴복해 버린 인간의 후손이라는 것을.
누군가에게는 평범했을 일상 & 9. 영원한 비밀은 없다
근 며칠 간, 시라사기 학원 전체의 분위기가 미묘하게 가라앉았다.
시험이라는 이벤트가 끼어 있기 때문이었지만, 사실 그것만 빼면 매일 반복되는 평탄한 하루라는 점은 변하지 않는다,
또래 학생들이 들으면 손가락질할만한 생각을 하며 카고메는 신발장을 열었다.
툭.
열자마자 바닥으로 떨어지면서 주인에게 자신의 존재를 알린 쪽지 한 장.
되는대로 찢어낸 스프링 노트 조각에 생각보다 반듯한 글씨가 또박또박 박혀 있다.
"오늘, 17시, 학교 운동장."
일상생활에서 쓰이는 평범한 단어들의 짧은 나열.
카고메는 자신에게 이런 식으로 이런 내용의 쪽지를 보낼 사람이 누군지 생각해 보았지만 도무지 떠올릴 수 없었다.
내용을 단서로 떠올리자니 아무래도 글씨체가 걸렸고, 글씨체를 염두에 두자니 되는대로 찢어낸 듯 한 종잇조각과 너무나도 단순한 내용이 마음에 걸린다.
무엇보다 그녀를 잘 아는 친구들이라면 이런 번거로운 방법 대신 직접 얘기하거나 혹은 전화나 문자를 통해 용건을 전달했으리라.
"이런 식으로 편지 보낼 사람이 없는데... 대체 누가 보낸 걸까?"
"누가 뭘 보냈는데? 혹시 러브레터?"
"우와아아앗!"
옆에서 속삭이는 장난스런 일갈에 카고메는 엉겁결에 들고 있던 쪽지를 확 구기면서 신발장으로 달라붙었다.
"히로코잖아. 놀래키지 마..."
친구를 놀래키는데 성공했다는 기쁨 때문인지, 히로코는 깡충거리며 카고메에게 다가왔다.
"그래서, 대체 뭘 읽고 있었던 거야? 신발장 앞이라는 건 러브레터나 협박장, 아니면 도전장 중 하나라는 건데... 널 싫어하는 애는 제노와즈밖에 없지만, 걘 이런 식으로 시비 걸지는 않을 테니까... 역시 러브레터?"
"아니, 그건 아무래도 아닌 것 같은데..."
아무래도 얘는 영화를 너무 본 것 같았다.
문득 들고 있던 게 종이쪽지가 아니라 포장된 선물이었다면 폭탄이라고 난리를 쳤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떠올리면서 카고메는 몰래 구긴 쪽지를 주머니 속에 우겨넣었다.
"아무것도 아냐. 그냥 장난 쪽지였어. 실제로 나한테 오는 게 맞는지도 의심스럽고. 이딴 건 신경 쓰지 말고, 더 중요한 게 있잖아! 안 그래도 1교시가 수학인데 얼른 들어가서 문제 하나라도 더 풀어봐야지. 안 그래?"
"어, 응..."
"체육이랑 지리도 들어 있는데 공부는 많이 했어?"
카고메는 호기심 많은 친구가 의문을 제기하지 못하도록 연거푸 질문을 퍼부었다.
"아, 그건 그렇고 우리한테는 센터 시험 전에 치르는 마지막 시험이나 마찬가지니까 정신 차리고 똑바로 봐야 해. 예전에 에미리가 시험시간에 긴장하다가 답지를 하나씩 밀려 썼었던 거 기억나지? "
"뭐, 그렇지..."
히로코는 미심쩍은 표정을 지으면서도 고개를 끄덕여 동의를 표하며 1교시에 치르게 될 수험에 대한 고충을 토로하기 시작했다. 학생들의 사정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 냉혹한 처사라면서.
카고메는 말이 끊긴 중간중간에 적당한 추임새를 넣으며 히로코의 주장 겸 푸념에 연거푸 동의의 의사를 건넸고, 히로코는 그녀의 행동에 아주 만족스러워하면서 교실에 도착할 때까지 (시험을 포함하여) 일상생활과 관련된 잡담 꾸러미를 연거푸 풀어냈다.
다행스럽게도, 아무래도 화제를 돌리는데 성공한 것 같았다.
카고메가 학교를 빠져나온 것은 하교를 알리는 종소리가 울리기 10분 전.
침착하게 시험을 치르고, 잽싸게 자리를 맡아둔 도서관에서 한참 공부를 하다 나온 참이었다.
그녀 말고도 하교하는 몇몇 학생들이 드문드문 보인다.
가방도 교과서도 그대로 놔둔 채 몸만 살짝 빠져나온 그녀는 아침에 발견한 쪽지가 시키는 대로 학교 운동장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누가 어떤 목적으로 보자고 하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것도 곧 밝혀질 테지.
"오래 걸리지 않았으면 하는데 말이야."
카고메는 덩그러니 남겨진 교과서와 가방을 보고 놀랄 켄이치를 상상하며 조용히 중얼거렸다. 하교 종소리가 울릴 만큼 얘기가 길어진다면 켄이치가 알아서 가방을 챙겨줄 테니 상관없나.
잠깐 딴 생각을 하며 운동장을 가로지른 그녀의 눈앞에, 생각지도 못했던 의외의 인물이 기다리고 있었다.
"생각보다 일찍 왔네."
코바야카와 미치루는 살짝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의자 대신으로 사용하던 철봉에서 읏차 하고 뛰어내렸다.
"혹시나 해서 묻는 건데... 오늘 아침에 내 신발장에 쪽지를 넣은 게 너였니?"
일단 카고메는 그녀에게 물어보았다. 정말 의외라는 속마음이 얼굴에 떠오른 걸 읽어냈는지, 그녀는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여 긍정해 보였다.
"그래, 맞아. 내가 그랬어. 그 얼굴 보니까 내가 보낸 거라고는 전혀 생각지 않았나 봐?"
"아니 뭐... 사실 떠오르는 사람도 없었어..."
카고메는 '네가 그렇게 글씨를 반듯하게 쓸 거라곤 상상도 못했으니까'라는 생각을 입 밖에 내지 않으려 애쓰면서 무난한 대답을 들려주었다. 항상 이곳저곳을 달리면서 말보다 몸(혹은 주먹)이 먼저 나가는 코바야카와였기에 어쩐지 글씨도 당연히 악필일 거라고 무심코 단정 짓고 있었던 것이다. 그제야 카고메는 한 번도 코바야카와가 쓴 글씨를 제대로 본 적이 없었다는 사실을 기억해냈다.
"그건 뭐 그렇다 치고... 불러낸 용건을 말해야겠지? 그러니까..."
코바야카와는 애꿎은 손톱을 물어뜯으면서 상당히 뜸을 들였다. 이상하다. 매사에 당당하며 꾸물거리는 것을 싫어하던 친구였는데.
"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그러는 거니?"
카고메는 계속 머뭇거리는 동급생을 향해 어서 용건을 말하라고 재촉했다.
"저기 그게... 너, 켄꼬맹이랑 결혼하기로 했다면서?"
"...뭐?"
그녀의 말에 카고메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쟤가... 그걸 어떻게 아는 거지?
"그러니까, 너랑 켄꼬맹이랑 고등학교 졸업하고 결혼하기로 한 게 사실이냐고."
"...그래. 사실이야. 켄이치가 프러포즈를 했고, 내가 받아들였어. 근데... 누구한테 들었어?"
그렇게나 자세히 알고 있다면 그녀에게 정보를 흘린 자가 누구인지 대충 예상이 되었지만 그래도 카고메는 일단 질문을 던져 보았다. 그리고... 그 예상은 적중했다.
"켄이치가 말해줬어. 뭔가 좋은 일이 있는지 싱글벙글하기에, 네 이름을 대면서 살짝 떠봤더니 술술 털어놓더라고. 하하하..."
코바야카와는 멋쩍게 웃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그 웃음 속에서 억지라는 미립분자를 잡아낸 카고메는 불길한 예감이 어깨를 감싸는 것을 느꼈다. 적어도 축하한다는 말을 전하러 불러낸 것을 아닐 터.
카고메의 심경의 변화를 알 리 없는 코바야카와는 자신을 납득시키듯 계속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역시 그랬구나. 하하... 뭐라고 할까, 처음에는 저게 대체 뭔 소릴까 싶었는데 잘 생각해 보니 당연하다는 생각이 들더라구. 너희들 하는 꼴을 보면, 아무리 내가 둔하다고 해도 눈치 깔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으니까..."
"......."
"...그런 이유로, 우리 이제부터 어느 정도는 거리를 두는 게 좋겠어. 그럼."
코바야카와는 마지막 한 마디를 던지고 매몰차게 자리를 뜨려 했다.
"잠깐, 그게 갑자기 무슨 소리야? 내가 뭘 잘못했다고 그러는 거야?"
"누가 잘못했대? 그냥 얼굴 보기 껄끄러우니까 안 보고 살자는 거라고. 그게 서로에게 좋은 거 아냐?"
"지금 내가 켄이치랑 약혼했단 이유로 절교하자고 말하는 거잖아. 예전에 했던 말 기억 안 나? 고양이 찾으러 갔을 때 켄이치를 잘 부탁한다고 할 때는 언제고?"
코바야카와는 시선을 카고메에게로 맞추었다. 그녀의 얼굴에서는 억지웃음의 흔적이 싹 사라졌다.
"네가 말하는 그 얘기는 중학교 때였고, 지금은 그로부터 5년이나 지났어. 그 땐 켄꼬맹이 옆에 나보다 네가 있어주는 게 더 좋다고 생각해서 그렇게 말했었고, 그렇게 생각했기 때문에 너희 둘이 사귀는 것도 뒤에서 조용히 바라보기만 했어. 그런데 이젠 둘이 결혼하는 것까지 웃으면서 지켜봐 달라는 거야? 내가 왜 그래야 하는데?!"
"그건..."
"나 말야, 켄꼬맹이를 좋아했어. 그 녀석은 그런 쪽엔 둔한 편이니까 아마 말해주기 전까진 평생 모르겠지만... 그 녀석은 내가 아니면 안 될 것 같았고, 누군가 옆에서 계속 챙겨 줘야만 한다고 생각했어. 나한테 의지하는 녀석이 좋았다고... 하지만 난 그녀석이 원하는 이상형이 되지 못하니까... 그저 친구로라도 옆에 남길 원했어.
그런데... 그런데 성인식도 치르기 전에 결혼하니 뭐니 하는 얘길 들으니까 참을 수가 없더라. 보통 사람 대하듯 너희 둘을 마주하는 건 도저히 무리라고! 그렇다고 내가 연기를 잘 한다고 생각지도 않고 앞에서 가면을 쓰고 연기한들 나만 피곤할 뿐. 그러니까 거리를 두자는 거야. 너도 지금은 날 대하기 껄끄러울 거 아냐?"
코바야카와는 마지막 문장을 내뱉은 뒤, 그녀가 잠시 말을 잃고 있는 틈을 타 붙잡힐세라 성큼성큼 걸음을 옮겨 그 자리를 벗어나 버렸다.
카고메는 입술을 깨물며 잠시 멍하니 서 있다가, 먼발치에서 자신들을 흥미롭게 주시하는 몇몇 학생들의 시선을 의식하고 나서야 정신을 차렸다.
코바야카와는 이미 가 버렸다. 여기 서 있어 봤자 남 얘기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의 입방아에나 오를 터. 일단 학교로 돌아가야만 한다.
겨우 마음을 진정하고 실내화를 갈아 신으려는데 하교를 알리는 종소리와 함께 학생들은 어서 귀가하라는 방송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도서관 문이 잠기기 전에 서둘러야겠다고 생각하고 신발을 바꾸는 순간, 익숙한 목소리가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카고메는 한숨을 쉬며 다시 실내화를 집어넣고 쾅 소리가 나도록 문을 닫았다.
"너 잠깐 교사 뒤로 나와 봐. 얼른."
그녀는 켄이치의 얼굴을 보지도 않은 채, 그가 대신 챙겨온 가방을 낚아채며 교사 뒤편으로 앞장섰다. 대답 대신 자신을 따르는 발소리를 들으면서 그녀는 짜증이 나려는 것을 애써 참았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코바야카와에게 그런 말을 한 거야?"
아무도 없다는 걸 확인한 카고메는 팔짱을 끼며 바로 본론을 꺼냈다. 켄이치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쳐다보자 카고메는 눈을 치켜뜨며 보충 설명을 위해 입을 열었다.
냉정해지자고 생각했지만 마음과는 달리 감정은 말을 하면 할수록 격하게 끓어올랐다. 카고메는 점점 높아지는 목소리를 낮출 생각도 않은 채 재차 따졌다.
"아까 코바야카와가 잠깐 불러내서 나갔다 왔어. 너한테서 우리가 약혼했다는 걸 들었다면서 나랑 절교하자더라. 우리 얼굴을 똑바로 봇 보겠다는데 ,자신은 연기할 능력도 생각도 없으니 쿨하게 거리를 두자고 하더라? 어떻게 프러포즈한 걸 이틀 만에 다른 사람한테 떠벌일 수가 있니?"
"저기 카고메. 내 말 좀 들어봐. 나도 처음엔 조용히 있으려고 했는데... 미치루가 다 알고 있단 식으로 얘기해서... 정말 그래서 솔직히 얘기한 거야. 사실 미치루랑은 친한 친구이기도 하니까 입 다물고 있기도 좀 그랬고. 너도 사카키바라랑 친하니까 이런저런 얘기 많이 하잖아?"
"이게 그거랑 같아? 이게 시시콜콜한 잡담 나누는 거랑 똑같냐고? 히로코랑 얘기를 많이 하는 건 사실이지만 이 얘긴 아직 하지도 않았어. 그리고 네가 모를까봐 하는 말인데, 그 앤 이런 얘기를 들어도 비밀을 지키지 코바야카와처럼 찾아와서 들먹이진 않는다고.
그리고 뭐? 코바야카와가 다 알고 있는 거 같길래 얘기를 해? 남자가 왜 그렇게 입이 싸니? 넌 살짝 찔러보는 사람이 있으면, 그게 누구든 간에 모든 걸 다 술술 분단 말이야? 난 아무것도 잘못한 게 없는데, 왜 같은 반 애가 절교하자는 말이나 듣고 있어야 하는 거야?!"
"잠깐, 말이 심하잖아. 미치루는 성별은 다를지 몰라도 진짜 그냥 친구일 뿐이라고. 친구한테 그런 것도 얘기 못 한단 말이야? 친구한테 비밀을 털어놓는 게 뭐가 잘못인데? 그리고 걘 비밀을 동네방네 떠들 애도 아니라고!"
"그래서 네가 지금 잘했다는 거야? 사과해도 모자랄 판에 왜 구차하게 변명만 늘어놓는 건데!! 코바야카와가 동네방네 떠들지는 않는다고 해도 남의 비밀을 듣고 입 다물 줄 모른다는 건 매한가지라고!!"
"내가 뭘 잘못했는데! 친구 사이에 비밀이 없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거 때문에? 가치관이 다른 것 뿐인데 왜 사과를 해? 아니면 미치루가 화를 낸 걸 내가 대신 사죄라도 해야 한다는 거야? 난 사실 그 애가 왜 너한테 그렇게 행동하는지도 모르겠다고!"
"그걸 모르겠다고...? 그것 참 편리한 대답이구나...!"
-모른다니? 코바야카와가 나에게 절교 선언을 한 이유를 정녕 모른다고? 다른 누구도 아닌 네가?
카고메는 입술을 깨물어 더 격한 말이 튀어나오려는 것을 겨우 억눌렀다.
코바야카와가 자신을 좋아한다는 걸, 켄이치는 모르고 있었다. 여기서 대신 사과해야 하는 이유를 얘기한다면 코바야카와가 털어놓은 마음을 낱낱이 들추어야만 한다.
하지만, 그러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코바야카와에 대한 마지막 의리라거나, 켄이치가 코바야카와의 마음을 알고 그녀를 피해 다니는 게 싫다는 그런 이타적인 이유가 아니었다. 연애감정의 문제를 두고 카고메 자신이 아닌 다른 여자에 대해 고민하는 게 싫었을 뿐이다.
요약하자면 결국 그것 때문이었다. 순수하지만 사나워서, 결코 길들일 수 없는 질투라는 이름의 야수.
"바보 멍청이..."
카고메는 자신의 눈에 물안개가 피어오르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것을 막을 수 없다는 것도.
사과 한 마디면 되는데.
바라는 건 그것뿐인데 몰라주는 그가 야속했다.
사과는커녕 핑계를 대며 변명만 늘어놓는 그가 미웠다.
제대로 된 이유를 설명할 수 없는 자신도 답답했다.
말을 하지 않으니 알 수 없는 것이 당연하건만 그녀는 그가 말을 해주지 않아도 알아주기를 바랐던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이니까.
"....켄이치는 바보야!"
카고메는 이 한 마디를 겨우 내뱉고는, 눈가를 훔치며 쏜살같이 달려 나갔다.
육상부가 탐내던 순발력이 지금 이 순간만큼은 아주 고마웠다.
그렇게- 그녀는 자신의 이름을 목 놓아 부르는 목소리를 무시한 채, 얼굴을 따라 흩날리는 뜨거운 물보라를 무시한 채 앞으로 앞으로 계속 달려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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