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실을 아는 것은 피곤하다. 그러나 알아야만 한다.

 

 

누군가에게는 평범했을 일상 & 11. Time To Love(前)

 

 

새파란 달빛이 바람을 타고 살며시 미끄러져 공중에서 왈츠를 추었다.

마차에 오르며 뒤로 한, 묵직한 바위로 뒤덮인 커다란 성에는 온갖 빛이 꼬리를 문 채 피어오르고 있었다.

"멋진 야경이네요."

카고메는 그 풍경을 이렇게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프린스 아스팔이 처음 자신의 몫을 보여주겠다며 이끌 때는 반신반의했었다.

켄이치와 행복하게 지낼 무렵, 권유를 받았다면 매몰차게 뿌리쳤으리라.

하지만 그와 크게 다툰 후 카고메는 상황을 냉정히 판단할 능력을 잃었고, 그 때문에 아스팔과 그 이외의 무언가가 잡아끄는 강렬한 힘을 내치지 못한 채 이곳으로 발을 딛게 된 것이다.

"세상에..."

세계사를 통해서만 들여다보던 중세의 역사가 바로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소설이나 영화에서만 볼 수 있던 타임 슬립과 비슷한 경험에 대한 신기함 때문인지. 카고메는 연신 고개를 돌리며 주위의 풍경을 눈동자로 쓸어 담았다.

"풍경이 그렇게 마음에 드나?"

화려함으로 겉을 한껏 치장한 육두마차 너머를 향해 연신 감탄사를 쏟아내는 카고메를 보며 아스팔은 눈웃음과 함께 약간 놀란 표정을 지어보였다.

통치자가 거머쥐게 될 금은보화를 보여주기 전, 기분전환을 겸해 마을을 한 바퀴 도는 방법을 택했을 뿐인데 벌써부터 이리 경계심이 풀려버리다니, 아스팔은 약간 김이 새는 것을 느꼈다.

자신이 아는 이 여자라면 경계심도 심하고 묘하게 자존심이 센데다 여자치고는 지나치게 똑똑해서 설득에 좀 더 애를 먹을 줄 알았던 것이다. 기껏 멋진 대사까지 준비해왔는데 맥이 풀려버리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마음에 든다고 해야 할까... 책에서만 봤던 광경을 직접 눈으로 볼 수 있다는 게 놀랍네요."

카고메는 아스팔에 대한 불쾌함을 완전히 벗어버린 듯, 한층 들뜬 목소리로 대꾸했다.

"책에서만 보다니... 10년 전쯤에는 너도 이 공간에서 생활해 왔을 텐데."

"그렇다고는 해도 그 부분의 기억은 거의 없으니까 처음 보는 거나 마찬가지죠. 어머나...!"

아스팔의 말에 즉각 대꾸하면서도 카고메의 시선은 항상 창밖을 향해 있었다.

고개를 조아리는 백성들을 향해 손을 흔들기도 하면서 마을 곳곳을 밝히는 불빛들에 시선을 주었다.

이름 모를 빛들이 검게 물드는 하늘을 형형색색으로 물들이고, 빛을 머금은 수많은 별들은 꼬리를 드리우고 대지에 내려앉아 마을을 장식하고 있었다.

"...별들이 이렇게 많은 건 처음 봐요. 내가 살고 있는 곳에선 망원경 없이는 달밖에 볼 수 없는데."

카고메는 이 순간 켄이치와 크게 다투어 우울했던 감정을 완전히 잊고 있었다. 중세의 마력은 우울한 감정들을 완전히 털어내지는 못했지만 한 순간이라도 몰아내기에는 충분한 매력이 있었던 것이다.

연신 시선을 돌리던 카고메는 문득 한쪽 구석에서 발갛게 꿈틀거리는 불빛들을 보았다.

규칙적인 움직임을 보이는 그것들은 마을 곳곳에 내린 빛 속에서 이질적인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저것들은 뭔가요?"

카고메는 자신이 본 광경을 가리키며 아스팔에게 처음 질문을 던졌다. 아스팔은 맞은편에서 그녀의 곁으로 자리를 옮겨 붉은 불빛들을 확인했다.

"군사 훈련이다. 요즘같이 어수선한 시기에는 필수 요소지. 평화로운 때라도 게을리 해서는 안 되겠지만. 그러고 보니 넌 이 세계의 훈련은 처음 보는 건가?"

아스팔은 다시 자리를 고쳐 앉으며 만족스런 어조로 말했다.

"그러고 보니 너도 검을 다룰 줄은 알고 있겠지? 내가 보기에 움직임은 아주 잘 돼있는 것 같은데... 네가 보기엔 어떻지?"

카고메는 자신의 검술 스킬이 상당한 수준에 머문다는 것을 어떻게 아스팔이 알고 있는지 구태여 확인하려 들지 않았다. 그녀는 아스팔의 이름과 직위 정도밖에 모르지만, 그는 카고메에 대해 훤히 꿰뚫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 자신이 말하지 않은 사실을 그가 알고 있다 해도 별로 놀랄 일은 아니었다. 기분이야 나쁘지만.

"...규칙적이고 절도 있는 움직임이네요. 지휘자의 지시도 잘 따르는 것 같고, 태도라고 할까,,, 칼로 똑바로 자른 듯 한 동작이 몸에 배어 있는 게 전체적으로 훈련이 잘 되어 있군요. 혁명 세력을 제압하기 위한 방편인가요?"

"뭐, 그렇지. 우리라고 손 놓고 가만히 앉아서 당하고 있을 수는 없으니. 안 그래도 얼마 전에 인간계 혁명군의 중심에 있는 비스코티 공작을 해치우는 성과를 올렸다. 그 덕이라고 할지, 마을의 치안도 보다 나아지고 혁명 세력의 기도 꺾어놓고 여러모로 편해졌지. 물론 여기서 만족하고 방심할 수는 없지만."

그 뒤로도 아스팔은 나라의 안위며 통치자로서의 자세에 대해 한껏 열변을 토했지만 카고메는 그것을 적당히 대꾸하며 대충 흘려들었다. 그가 뭐라고 떠들든 그것은 결국 자신과는 상관없는 일이라 생각했던 것이다.

우울한 감정을 잠시 내려놓았다고 해서 본인의 위치까지 잊어버린 것은 아니다. 눈은 경치를 보고 있었지만 마음의 눈만은 항상 자신만을 바라보던 남자를 향하고 있었다.

"지금 어딜 가는 거죠?"

마차가 북적이는 가도를 지나쳐 아무도 없는 널찍한 언덕에서 멈추자 그녀는 아스팔을 돌아보았다.

언덕의 대부분은 풀로 덮여 있었지만, 겨울의 괴상한 매력에 본연의 빛을 잃고 고개를 숙인 터였다.

겨울이 지나고 봄이 온다면 마법의 망토를 벗어던지고 다시 찬란한 생명의 빛을 뿜어낼 수 있으리라.

잠깐 걷자며 내리는 아스팔을 따라 대지에 발을 딛자 마차가 달각거리며 시야에서 사라졌다.

"한 바퀴 돌아본 소감이 어떤가?"

말없이 들판을 거닐던 아스팔이 별안간 고개를 돌려 질문을 던졌다. 그의 얼굴에서는 '네가 무슨 생각을 하던 난 이미 알고 있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카고메가 입을 앙다문 채 말을 꺼내지 않자 아스팔은 입 꼬리를 올리며 재차 말했다.

"아까 마을을 보던 네 표정을 혼자 보기 아깝더군. 애피타이저로 준비한 이벤트에 그리 넋을 놓을 줄이야. 정작 메인이벤트 상자는 열지도 않았는데. 다시 묻도록 하지. 장차 네 것이 될 소유물을 미리 구경한 기분이 어때?"

아스팔의 마지막 대사에 카고메의 눈매가 무섭게 번뜩였다.

"장차 내 것이 될 거라니 대체 무슨 뜻이죠?"

"그 말 그대로인데. 나와 결혼하게 되면 공동으로 소유하게 될 것이란 뜻이지. 덧붙여 아직 보여주지 않은 국고의 재산도 같이."

"허어..."

카고메는 기가 막힌다는 듯 콧소리를 냈다. 이 남자... 뭔가 단단히 착각하는 듯하다.

잠시 망그러졌던 경계심이 심장을 뚫고 천천히 밖으로 기어 나온다.

"당신, 뭔가 단단히 착각한 것 같은데 꿈 깨시죠? 당신을 따라나서고 마을의 정경에 조금 들뜬 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당신과 결혼하겠다고 마음먹은 적은 없어요!"

"아직도 그 소리냐. 이제 운명에 충실할 때도 되었어. 언제까지 어리광을 부릴 셈이지? 지금 네가 살고 있는 곳에 있는 것들은 너의 것이 아니란 말이다. 네가 가져야 할 몫은 여기 있는 것이다!"

아스팔은 짜증을 밖으로 드러내며 카고메를 힐난했다. 그의 그러한 태도에 카고메는 더욱 방어적인 자세를 취하며 뒤로 몇 발자국 물러났다.

"난 절대 당신하곤 결혼하지 않아요. 당신은 본인의 감정을 속일지 몰라도 난 아냐. 난 내가 사랑하는 사람하고 결혼할 거라고요! 단 한번 뿐인 인생에서 사랑이 아닌 이해관계만을 토대로 진행되는 결혼생활이 행복할 리가 없다고요. 난 당신하곤 다르니 절대 그렇게 살지 않을 거야!"

"훗, 나처럼 살지는 않겠다니. 전에 말했던 사랑하는 사람하고 정말 결혼하기라도 할 셈인가?"

"당연한 거 아닌가요? 여자는 결혼하면 여자로서의 인생은 거의 포기해야만 해요. 그나마 사랑하는 사람하고 산다면 모를까, 그냥 허울뿐인 결혼을 한다면 자기 인생은 그걸로 끝이라고요. 당신은 나를 왕비로 맞고 다른 사랑하는 사람을 후궁으로 들이면 그만이지만 난 그렇게 할 수도 없단 말이에요.

그리고 이런 걸 다 떠나서 결혼은 사랑하는 사람끼리 하는 게 당연한 것 아닌가요? 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당신과 달리 아주 순수해요. 당신같이 계산기나 두드리며 스펙이나 재는, 세상에 찌든 영혼과는 근본적으로 달라!"

"아, 그러고 보니 있었지 그런 게. 아사쿠라 켄이치...였던가? 하여간 희안한 이름이야."

아스팔을 조소를 흘리며 눈꼬리를 살짝 치켜들었다.

"재밌는 말을 하는데 찬물을 끼얹어서 미안하지만... 하나 물어보도록 하지. 그가 네 정체를 알고도 널 사랑해 줄 거라 생각하나?"

"!!"

신음소리를 막기 위해 입술을 깨물었지만 이미 때는 늦은 뒤였다. 아스팔은 서둘러 표정을 감추는 그녀에게 미소를 지으며 결정타를 날렸다.

"네가 잠시 도망쳐 와서 살던 세계 말인데, 잠시 머물러 본 나도 확연히 알 수 있을 만큼 평화로운 곳이더군. 분명 생명을 위협당하는 일 없이 한가롭고 편안한 삶을 살 수 있겠지. 이곳과는 근본부터가 달라. 고를 수만 있다면 누구나 혁명 세력에게 침범당하는 이쪽보다는 무사태평한 그 쪽을 택할 거다."

"......."

"그런데 이런 생각해 본 적 없나? 언제라도 전쟁이 발발할 가능성이 있는 나라에서 살아온 백성과 그렇지 않은 나라에서 살아온 백성은 마음가짐부터가 다르다는 걸. 전쟁도 모른 채 보호만 받으며 평화롭게만 살아온 꼬맹이가, 세계의 안녕과 조화를 이끌어야 할 여자를 책임질 배포가 있다고 생각하기는 어렵군."

"켄이치는... 절대 그렇지 않아..."

카고메는 있는 힘을 다해 부정하려 했으나, 목구멍에 걸려 페이스를 잃은 문장은 쉬이 나오지 못했다.

"그렇게나 자신 있다면 네 스스로 네 정체를 그 녀석에게 분명히 밝혀라. 만약 네가 정체를 숨긴다면 내가 직접 그에게 진실을 말해주도록 하지."

카고메의 입이 크게 벌어졌고, 그녀의 붉은 눈은 사정없이 아스팔을 노려보았다. 진짜 눈에서 빔을 발사할 수만 있다면 군데군데 찢겨나가 상처가 터졌을지도 모른다.

카고메는 씩씩거리며 거칠게 쏘아붙였다.

"좋아요. 그에게 말하겠어. 그는 나를 사랑한다고 했으니, 당신에게서 날 보호해줄 거야!"

카고메는 매서운 기세로 홱 돌아섰다.

어깨에 내려앉았던 우울한 기색은 어느 새 자취를 감추고 굳센 의지가 그녀의 전신을 휘감고 있었다.

"그럼 어디 한번 해보도록 하지. 고백한 뒤에도 그리 기세등등할 수 있을지 두고 보겠다."

아스팔은 의미를 알 수 없는 미소를 싱긋 지어보이고는 뭔가의 주문을 외워 마법의 빛을 쏘아 올렸다.

빛이 밝혀진 지 얼마 되지 않아 그를 매개로 공간이 일그러지고 이내 빛의 건너편에 카고메가 사는 집의 형상이 비쳐졌다.

눈짓으로 그 곳을 가리키는 아스팔을 무시한 채 그녀는 천천히 빛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그녀가 사랑하는 연인... 그는 그녀의 마지막 희망이 되었다.

그는 그녀의 손을 잡고 그녀를 빠뜨린 수렁으로부터 빼 줄 것이다.

그가 그녀를 사랑한다면, 정략결혼을 요구하는 저 건방진 왕자를 한 방 먹여줄 수 있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