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인님! 아가씨께서 나오는 방송 시작해요! 이번 의상도 엄청 귀엽네요!"

카부라기는 얼른 거실로 나오라며 재촉하는 큐브의 등살에 밀려 하던 일을 멈추고 방 밖으로 나왔다.
일에 치여 잠시나마 큐브에게 녹화를 부탁해 볼까 생각했지만... 역시 딸이 나오는 방송은 직접 봐 두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녀가 TV 앞에 자리를 잡았을 무렵에는 이미 방송이 시작한 뒤였다.
맨 앞에 서서 그룹을 주도하며 춤과 노래를 선보이는 딸아이의 모습만이 눈에 들어온다.
현란한 춤 솜씨와 무심코 마음을 빼앗길 것만 같은 낭랑한 목소리, 보는 이들을 사로잡을 귀여운 의상까지.

"이야, 이번 곡도 좋네요! 이걸로 연속 첫 등장 1위 기록을 갱신하실 겁니다!"

TV를 주시하던 큐브가 방송 하단에 나오는 자막을 분석하며 말했다.
카부라기는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이 알기로도 자신의 딸은 이 그룹을 끌어올리기 위해 상당한 노력을 쏟아 부었다.
그 노력만큼의 대우를 받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아가씨께서는 매스컴 평판이 안 좋습니다. 최근에 건방져졌다던지... 그룹의 불화설 이야기도 들고... 안티 팬이 꽤 많아진 듯합니다... 아, 이야기 시간이군요. 아가씨께 질문을 하는가 봐요."

큐브가 지나가듯 흘리는 이야기가 카부라기의 심경을 어지럽힌다.
그의 말이 단순한 풍문임을 바라며, 나는 카메라에 클로즈업 된 딸의 밝은 미소에 시선을 고정시켰다.
사회자가 질문을 하고, 그룹의 리더인 딸이 질문에 맞는 대답을 착착 내놓는 정경이 반복되었다가-
이걸로 질문을 마치겠다는 사회자의 말을 끊으며 딸은...

"잠시만요. 이 곳을 빌려 여러분들께 알릴 것이 있습니다. 저는 이번 싱글을 마지막으로 그룹을 탈퇴하게 되었습니다. 이제부터는 솔로로 활동을 시작할 거예요. 여러분, 앞으로도 응원해 주세요!"

폭탄선언을 해 버리고 말았다.
카부라기는 무심코 옆에 앉은 집사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아마 자신의 얼굴도 집사의 표정과 그리 다르지 않으리라.
완벽하게 허를 찔린 것은 자신들만이 아닌 듯, 사회자 역시 약간 과장된 얼굴로(하지만 어느 정도 예상했다는 듯 담담히) 반응했다.

"갑자기 중대 발표가! 역시 멤버들과의 불화가 원인인가요?"

"네? 그런 거 아니에요."

딸은 당치도 않다는 듯 휙휙 손을 흔들었다. 하지만...

"아가씨... 저런 거짓말쟁이 같은 얼굴을!"

옆에서 큐브가 탄식했다. 역시 그도 눈치 챘나.
하지만 오랫동안 딸을 알아 온 우리들과는 달리, TV 속의 사회자는 전혀 눈치 채지 못한 듯(어쩌면 티를 내지 않는 것뿐일지도 모르지만), 유감스럽다느니 향후 활동에 대해서 어떻게 하겠냐느니 하는 질문을 쏟아내고 있었다.

"어쩌죠, 주인님? 역시 아가씨의 자존심이 높은 것이 화근이었나 봅니다... 아가씨께서도 심사숙고 끝에 결정하신 일이겠지만, 아무래도 이런 시기에 그만두는 것은..."

카부라기 역시 큐브의 의견에 동감이었다.
멤버들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조금 더 버텨볼 수는 없었던 걸까...
아무래도 조만간 딸에게 전화를 걸어 이 폭탄 발언에 대해 자세히 물어봐야겠다고 생각한 순간, 딸이 카메라를 향해 손을 흔들면서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어머니, 이 방송 보고 있나요? 솔로가 되면 휴가를 얻게 되니까 같이 여행이라도 가요! 기대하셔도 좋아요!"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로 나는 스스로 내 인생을 헤쳐 나갔다.
하늘에 맹세코, 어머니나 큐브에게 기댄 적은 결코 없었다.
이리스가 막 활동을 시작했을 무렵, 이리스의 입지는 결코 높지 않았다.
다른 꽃을 돋보이게 하기 위한 안개꽃처럼, 코지마 소속사가 전면적으로 내세우는 프로그램을 활성화시키기 위한 기획.
이리스의 위치는 딱 그 정도였다. 단지 그 뿐인 존재라는 것을 나는, 그리고 다름 멤버들도 알고 있었다.
당연히 알고 있을 수밖에.
최종 선발까지 남았던 후보들로 아이돌 그룹을 만든다는 제안을 수락한 건 어떡해서든 연예계에 데뷔하고 싶었던 내 의지였으니까.
그 들러리를 여기까지 끌어올리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던가.
절대 이대로 끝낼 순 없어, 그렇게 결심한 나는 필사적으로 달려들었어. 나뿐만이 아니라 다른 멤버들도 그랬다.
전국을 돌아다니며 자신들의 cd를 팔고, 때로는 몇 시간이고 악수회를 열기도 했다.
우리들의 노력은 방송을 통해 전국에 알려져 점점 사람들의 마음에 침투해 갔다.
여기까지만 들으면 마치 탄탄대로를 걷는 것처럼 순조로웠겠거니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아까 말했지? 이리스의 위치가 어느 정도였는지.
들러리 격의 신규 아이돌 그룹에게 아낌없이 투자할 만큼 코지마 소속사는 모험을 즐기는 편이 아니었다.
그 구멍을 메운 것은 나였다.
로또에 당첨됐다느니 하는 식으로 대충 얼버무리고 나는 모험을 떠나서 가져온 갖가지 전리품-금가루, 오래된 우유, 요정의 빛, 진혼의 오브, 기타 진귀해 보이는 온갖 것들-을 팔아 마련한 돈으로 부족한 자금을 보충해 왔고, 그것을 발판 삼아 이리스는 정상에 오르기 위한 초석을 하나하나 쌓아가고 있었다.
그러나, 언제부턴가 멤버들 사이가 삐걱이기 시작했다.
부족한 자금을 메워 주고 있었으니, 이리스의 리더 정도는 내가 가져도 상관없을 거라 여겼건만(자기 입으로 이런 말을 하기도 뭣하지만, 멤버 중에서도 내 비쥬얼이 가장 나았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으리라), 다른 멤버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다 지난 마당에 이제 와서 들추기도 뭣하지만, 내가 가져온 돈의 출처를 밝히기 위해 나름대로 뒷조사를 좀 한 모양이다.
이 바닥에서서 돈과 지위를 모으기 위한 것이라면 제일 먼저 성 상납이 떠오르겠지만, 난 그런 것을 고려해야 할 만큼 궁지에 몰리지는 않았다.
그런 식으로 자신을 버리면서까지 무대에 서고 싶었는지도 의문이고.
어쨌건, 카네코를 선두로 멤버들은 끈질기게 나의 허점을 노려 왓지만, 운이 좋다고 할지 나는 매번 미꾸라지처럼 잘도 빠져 나갔고, 그럴수록 나와 다른 멤버들 사이는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처럼 악화되어만 갔다.
꼬투리를 잡지 못 한 그들은 대놓고 날 공기 취급하거나 비아냥거리는 식으로 나를 까내렸다.
뭐, 거기까지는 좋았지만...(결코 내 입장에 있어선 좋지 않지만)
꼬리가 길면 밟힌다고 인터넷에선 '이리스 그룹 불화설'에 대한 카더라 통신을 연신 쏟아내기 시작했고, 인터넷에 관심도 없으셨던 어머니께서 어떻게 아셨는지 무슨 이 ㄹ없는지 물어보시는 지경에 이르렀다. 아마 어머니께서 가르치시는 학교의 학생들의 입에서 흘러나온 소문이라도 들으신 거겠지.
나는 나름대로 이리스에 애착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나 하나만 견뎌서 끝날 수 있는 문제라면 조금 더 버텨보았겠지만... 주변 사람들에게 걱정을 끼치면서까지 머무르고 싶지는 않았다.
그리하여-
나는 아이리스가 나간 방송에서 폭탄 발언을 입에 담았다.

 

 


짐을 챙기기 위해 대기실로 돌아온 나를 맞이한 것은 최종 예선까지 자리를 함께하며 나름 동질감 비스 무리한 것을 쌓아온 그룹 멤버들의 이글거리는 눈초리였다.

"너, 아까 무대에서 하는 거 보니까 입에 침도 안 바르고 거짓말하더라? 그냥 가수 말고 연기자로 나서지 그랬니?"

"아니, 차라리 정치가로 나서는 편이 나았을지도 몰라. 거짓말은 기가 막히게 잘 하니까."

명백히 비웃는 얼굴로 깐죽이는 저 여자는 항상 나의 인기에 밀려 두 번째로 머물러 있어야만 했던, 쉽게 말해 2인자로 있었던 카네코. 옆에서 그녀를 부추기는 여자는 카네코의 친구...라기보다 추종자에 가깝다고 봐야겠다. 따질 건 따져야지. 안 그래?

"그럴까? 카메라에 비춰지는 건 대중에게 사랑받기 위해 우리들이 만들어낸 이미지, 다시 말해 '또 하나의 자신'아니야? 딱히 거짓말이라고 볼 수는 없을 것 같은데."

"흥, 뚫린 입이라고 말은 잘 하는구나. 뭐, 상관없어. 네 입으로 그룹에서 탈퇴하겠다고 했으니까 우리들끼리만 잘 해내면 되지. 안 그러니, 얘들아?

"그래, 맞아."

카네코가 동의를 구하자 나머지 다섯 멤버들이 저마다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쳤다.

"그렇겠지. '이리스' 그룹은 너희들만으로도 잘 꾸려나갈 수 있을 거야. 이젠 이리스 멤버가 아니라 같은 가수로서 얼굴을 비추게 되겠구나. 그런 의미에서 앞으로 잘 부탁할게."

앞으로는 어지간히 운이 꼬이지 않는 한 이 애들과 사적으로 얼굴을 마주칠 일은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마지막 인사 정도는 해 도는 게 좋을 거라 생각했는데.
기껏 배려해서 내민 손을, 카네코는 마치 벌레나 뭐 그런 걸 보는 듯 한 시선으로 쏘아보면서 내 손을 옆으로 쳐냈다. 사람 무안하게시리.

"그럴 필요 없어. 이리스가 막 궤도에 오르는 시점에서 돌연 솔로 선언을 해 버린 네가 잘 나갈리는 없다고 생각하거든. SNS에는 벌써 너 욕하는 애들도 있는걸?"

나는 쌤통이라며 깔깔거리는 전(前) 멤버들을 싸늘한 눈초리로 주시했다.
아마 카네코가 내뱉은 저 말은 사실일 것이다. 확인해 보지는 않았지만.
하지만 여기서 눈을 내리깐다거나 섣불리 화를 낸다든가 하면 지는 거다.
카네코의 목적은 내가 평정심을 잃고 길길이 날뛰는 것. 운 좋게 그 모습을 찍어 인터넷에 올리면 아마 갈 데 없이 방황하는 악플러들이 내게 달려들어 마구 물어뜯을 테지.
참는 자에게 복이 있다니, 참아야 하느니라.
내가 가볍게 받아넘기면 카네코는 필시 분해할 것이 틀림없다.
무심코 그러는 너야말로 매니저랑 그렇고 그런 사이 아니냐며 쏘아붙이고 싶은 욕구를 억누르며 나는 애써 냉정을 가한 목소리로 말했다.

"뭐어, 사람에게는 누구나 표현의 자유라는 게 있으니까, 인터넷에 자기 의견을 피력하는 걸 가지고 뭐라고 할 수는 없는 거 아니니? 잘 나갈지 못 나갈지는 두고 보면 알 일이고 말이지."

예상대로.
네 말 따윈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단 어조로 받아넘기자 카네코의 얼굴은 잘 익은 홍당무처럼 발갛게 물들었다. 그녀가 뭐라고 반론을 펼치려 할 때, 타이밍 좋게도 똑똑거리는 노크 소리와 함께 기세 좋게 대기실 문이 열렸다.

"모두 여기 모여 있었구나."

이리스의 스케줄 관리부터 음반 판매 마케팅까지 모든 것을 총괄하는 매니저였다.
그는 나를 포함한 멤버 하나하나에 눈을 맞춘 뒤 목을 가다듬어 말했다.

"뭐, 키요미가 아까 무대에서 얘기해서 다들 알고 있겠지만, 키요미는 이제 이리스를 탈퇴해 솔로로 활동하기로 했다. 멤버들에게는 갑작스러운 얘기겠지만 이미 소속사 사장님께도 탈퇴 의사를 밝혔고, 사장님과 나도 허가했다. 지금 여길 나간다고 해서 영영 못 보는 건 아니고, 앞으로도 같은 가수로서 얼굴 볼 수 있을 테니까 너무 섭섭해들 하지 말고(여부가 있으시겠어요. 나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자, 모두 떠나는 키요미한테 격려의 의미로 박수 한 번 쳐 주자!"

짝짝짝짝.
매니저가 손수 시범을 보여주는데 별 수 있을까.
나를 제외한 멤버들은 아까까지의 못마땅한 기색들을 싹 걷어내고, 대신 진심으로 아쉬워하는 가면으로 얼굴을 덮고 손바닥에 불이 붙도록 박수를 쳤다.

"키요미, 네가 이리스를 떠난다니 정말 유감이야. 싱글로 활동하더라도 우리 잊지 말고, 가끔씩 연락 하는 거다? 열심히 해서 나중에 우리 같이 뮤직 챔피언에 오르도록 하자."

누가 여자를 연약한 동물이라 했을까. 여자는 상황에 따라 상대가 누구든 진심어린 미소를 지을 수 있는 영악한 동물이었다.
적어도 카메라 속에서 각자의 그림자를 연기하며 대중의 사랑을 갈구하는 사람들은 그렇다고 생각한다.
아까까지만 해도 날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었던 카네코는 온데간데없이 자취를 감춘 채 이리스를 나가는 리더를 진심으로 염려하며 축복을 빌어주는 멤버의 모습만이 어른거린다.
그렇다면 나 역시 그 행동에 부응해 줘야겠지.

"응, 그래... 카네코, 그 때는 경쟁자로서 마주하게 되겠지만 서로를 거울삼아 같이 잘 해보도록 하자. 너흰 분명 나 없이도 잘 해낼 수 있을 거야."

나는 카네코가 두 팔 벌려 아쉬움을 표하는 연기에 장단을 맞춰, 똑같이 양 손을 벌려 진한 포옹을 나누었다.
연기 스킬이라면 나 역시 지지 않을 정도니까 이 정도는 문제없다.
아쉬운 듯 떨어지고 나선 매니저가 주는 이별의 꽃다발(모두가 각출해서 준비한 거라는데 그 과정에서 날 얼마나 씹었을지 안 봐도 눈에 선하다)을 받아들고, 기념으로 모두 모여 사진 한 장 찰칵.
배경화면으로 삼겠다느니, 스티커 사진으로 만들어 간직하겠다느니 떠들면서 나와 이리스 멤버들은 서로 마음에도 없는 아쉬운 소리를 늘어놓으며 다시 한 번 모두를 끌어안았다.
이걸로 정말 끝이야.
아예 날 잡고 송별 파티를 하는 것이 어떻겠냐는 의견을 흘려들으며, 나는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악수를 청하고 입에 발린 축복의 말을 주고받았고-
이로써 나는 근 2년 간 몸담았던 이리스 그룹에서 나가게 되었다.
방송에서는 조금 쉰 다음에 솔로 활동에 들어가겠다고 이야기해 두었다.
유명한 사람들이 종종 하는 말 있잖아. 재충전해서 다시 돌아오겠다고. 그거랑 비슷한 거지
괜찮냐고 물어보는데 몇 번이고 같은 대답을 하는 것도 불편하니, 역시 이 방법이 제일이지.
선글라스를 끼고 밖으로 나온 마치 누군가를 포옹하든 양팔을 벌리고 서서 하마사키 시의 탁한 공기를 들이마셨다.
일단... 집에 돌아가면 오랜만에 게이트라도 열어서 모험이라고 떠나 볼까?
어째서냐고? 그거야 뻔 한 거 아니겠어. 용돈도 벌 겸 스트레스를 해소하기 위해서라는 게 당연하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