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자 : 1220년 11월]

나는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옮겨 그녀를 뒤로 한 채 교회를 나왔다.
내가 신을 섬기는 입장이라는 것이 이만큼이나 원망스러웠던 적이 없었다.
나는 태어났을 때부터 무엇이든 가질 수 있었고, 마음에 드는 것이라면 그게 뭐든 간에 손에 넣을 수 있었다.
그래서였을까. 나는 실패라는 경험을 거의 쌓지 못한 채 어른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8년 동안 사귀었던 유일한 친구는 내가 자리를 비운 2년 동안 저만의 날개를 펴고 내 손이 닿지 않는 높은 곳으로 훌쩍 날아가 버렸다.
언제나 내 말을 잘 들어주었던 그녀가 나와 같은 방향을 바라볼 거라 생각했던 것, 몇 달이면 꼬리를 내릴 거라 생각했던 오랑캐 무리들이 2년씩이나 왕국의 발목을 붙들었던 것.
나의 판단 미스. 그것이 내 실수였다.
그녀를 갖고 싶었다면 2년 전에 찾아가 정식으로 청혼했어야 했다.
정녕 그녀를 취하고 싶었다면 왕위계승자라는 지위를 전면에 내세워서라도 로스하임 가의 부녀를 설득했어야 옳았다.
시간은 언제든 있다고, 아직은 적절한 시기가 아니라고 자신을 타이르며 하루하루 날짜를 미루던 것이 차곡차곡 쌓여 2년이 되었다.
물론 그녀가 나 아닌 다른 남자에게 한 눈을 팔 수 있으리란 가능성을 일단 염두에 두고는 있었다. 단지... 신시아라면 절대 그런 짓을 하지 않으리라 안심했을 뿐.
설령 염려했던 대로 그녀가 다른 곳에 눈을 돌렸다 해도 힘으로 빼앗으면 그만이었으므로 그리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던 것이 크나큰 실수였던 것이다.
그녀가 돌발행동을 하더라도 내가 통제할 수 있을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거늘...
설마 그녀가 남자가 아닌, 인간을 아득히 초월한 자에게 충성을 맹세할 것이라곤 솔직히 전혀 생각지 못했다.
한 나라의 군주가 못 하는 게 없을 거라 생각하는 자는 아직 인생을 덜 산 것이나 마찬가지.
종교가 왕국에 미치는 힘은 실로 어마어마하다. 하물며 신의 지팡이에게 손을 댄다는 것은 설령 왕족이라 해도 용서받을 수 없는 중죄.
그녀가 정녕 원해서 신을 섬기기로 한 것인지, 아니면 단순히 내 정체를 눈치 채고(그녀는 왕위 수여식이 열릴 때까지 내 정체를 몰랐다고 했지만 혹시 모를 일이다), 내게서 벗어나기 위해 제이 ㄹ안전한 방법을 택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이유를 파헤치는 것도 이젠 부질없는 짓.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그녀를 찾아가 이 모든 걸 없던 일로 할 수 있는지 알아보는 것 뿐.
만약 그녀가 내가 내민 손을 붙잡기만 한다면 일말의 가능성은 있었다.
간택된 왕자비는 어쩌냐고? 그건 전혀 문제될 게 없었다.
제 아무리 잘난 집안이라 해도 별로 무서울 건 없었다. 신의 자녀를 넘보는 것에 비하면 후작 가문의 영애 따윈 아무것도 아니지.
그녀가 나를 받아들여 준다면 나는 강권을 발동해서라도 혼약을 파기하고 그녀를 손에 넣었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일을 마무리 짓자마자 그녀가 살고 있는 곳으로 달려간 것인데...
한 나라의 최고 권력자라는 지위가 무색하게도, 나는 보기 좋게 퇴짜를 맞았다.
게다가 그 이상의 설득을 막기 위해서였는지, 신시아는 내가 짊어진 권력의 무게와 왕국의 크기를 들이밀며 처신이나 똑바로 하라고 쐐기까지 박아버리지 않았는가!
내 자존심을 건드리는 걸 피하면서 도리어 내가 가진 힘과 권력을 이용해 나를 밀어내는 말솜씨와 내 성향을 귀신같이 파악하고 먼저 방어하는 행동력이라니.
신시아 로스하임, 그녀는 실로 영리한 여자였다. 그 지력을 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오로지 왕국을 위해 바쳤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천사와도 같은 그 미소를 오롯이 나만의 것으로 만들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나는 입맛을 쩝쩝 다시며 교회 앞에 서 있던 화려한 육두 마차에 올랐다. 시종이나 대신이 봤다면 체통을 지키라느니 품위를 잃어선 안 된다느니 하며 온갖 잔소리를 늘어놓았겠지만 다행히도 나의 작은 일탈을 목격한 사람은 내 걸음걸이에 맞춰 마차의 문을 열어준 마부 한 명 뿐. 알아서 입조심 하는 자로 골랐으니 아마 별 문제없을 것이다.
점점 멀어져 가는 십자가의 잔상을 뒤로 하고 나는 펜던트 속에 간직되어 있던 작은 초상화를 꺼내 잘게 찢어 바람 속으로 흘려보냈다.
신시아의 말이 옳았다. 내가 그녀를 아무리 사랑한다 한들, 그녀가 최우선이 될 수는 없었다.
신시아를 사랑하고, 신시아를 좀 더 빨리 손에 넣지 못한 것은 못내 유감이지만... 권력을 버리고 신의 노여움을 사면서까지 그녀를 얻고자 하는 마음은 없다.
손에 넣을 수 있다면 좋겠지만, 나 자신을 포기하면서까지 매달리고 싶지는 않다고 하면 이해하기 쉬울까.
내게는 신시아보단 나 자신과 내가 다스려야 할 왕국 쪽이 더 소중하니 말이다.
난생 처음 여자에게 차인데 대한 씁쓸한 이 감정은 오늘 안으로 털어내는 게 좋겠지.
나는 가볍게 한숨을 쉬어 보이고는 양손에 깍지를 껴 거위 깃털을 잔뜩 넣어 푹신하게 만든 마차 좌석에 살며시 기대버렸다.
도착하기까진 아직 시간이 좀 있으니, 잠시 눈 좀 붙여보도록 할까...

 


[드래곤 유스 : 1218년 4월]

-모든 것이 자업자득이다...
어린잎을 달인 쓰디쓴 약을 들이켠 나는 자조적인 미소로 중얼거렸다.
1216년, 자신의 이름을 대고 멋대로 나를 악당 취급하며 싸움을 걸었던 인간 여자는 나를 가볍게 쓰러뜨렸고, 그걸로 모자라 나의 마음까지 앗아가 버렸다.
오해할까봐 말해두지만 난 딱히 마조히스트는 아니다. 다만... 나보다 강한 연상(그렇다고 나이차가 너무 심하지는 않은)이 내 취향이었을 뿐이지.
그녀는 나의 완벽한 이상형이었다. 용이 아닌 인간이었다는 게 좀 마음에 걸렸지만 뭐 어떠랴. 사랑에 국경이 어디 있담. 그냥 밀어붙이면 그만이지.
처음에는 그냥 무작정 찾아가 그녀에게 청혼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혹시라도 일생일대의 중요한 일을 그르칠까 하는 일말의 불안감이 덮쳐, 결국 나는 그랑파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협력을 약속받았다.
인간 여자가 좋아하는 게 뭐냐고 묻자 꽃이나 현금이라는 대답이 돌아왔기에, 둘을 동시에 선물하면 더욱 효과가 좋을 거라 생각하고 큼직한 꽃다발과 10,000G를 가지고 그녀의 집을 찾았다.
...그랑파가 어떻게 그녀의 집을 알고 있었는지는 신경 쓰지 말자...
그랑파의 소개로 경계를 풀고 그녀에게 청혼을 한 것까지는 좋았다.
10,000G라는 거액으로 그녀의 아버지의 환심을 산 것까지도 좋았다.
하지만... 그녀의 마음만은 결코 사로잡지 못했다.
어쩌면 내가 청혼했을 때 떠오른 그녀의 탐탁찮아 하는 얼굴에서 이미 나의 고백이 파경을 맞을 것이란 걸 알아차렸던 걸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그녀의 아버지가 결혼을 허락했을 때 냉큼 돈을 넘기고 도망치듯 빠져나왔던 건지도.
생전 처음 보는 자(물론 구면이지만, 그녀 입장에선 초면이나 마찬가지였을 터)의 청혼이라면 마뜩찮아 하는 게 당연하다며 스스로를 위로하고, 그녀가 성인이 되기까지 2년이라는 시간이 있으니 그 때쯤이면 그녀도 내게 마음을 열 것이라 스스로를 다독였다.
하지만 2년 후 나는 정식으로 거절당했다. 그것도 그녀 본인이 아닌, 그 집에 기거하는 마족 집사에 의해서. 지참금으로 건넸던 10,000G와 함께.
그녀는 신의 자녀가 되어 나를 피해 영영 떠나버렸다.
뿌린 대로 거둔다는 게 이런 걸까?
내가 소유하려 들었기 때문에 자유를 갈망하던 그녀가 날개를 펴 멀리 도망친 걸까?
나는 답을 알 수 없는 질문을 몇 번이고 던져보았다. 어째서 내가 실연을 당해야만 하지?
어째서 그녀는 내 마음을 훔쳐 놓고 돌려주지 않은 채 떠나버린 거지?
아니, 어차피 거절할 거라면 처음부터 거절했어야 하는 게 아닌가? 돈만 돌려준다고 다가 아니잖아.
차라리 2년 전에 제대로 거절했으면 제대로 납득이라도 했을 텐데... 그동안 희망고문만 잔뜩 하고서 내쳐버리면 나는 어떻게 하라는 거야?
...인간은 원래 그런 걸까? 아니면 여자란 족속 자체가 이런 걸까?
앞으로 두 번 다신... 아니, 적어도 이 상처가 아물 때까지는 여자를 믿지 못할 것 같다...

 


[케링턴 로스하임 : 1218년 2월]

성인이 되기 며칠 전, 딸은 긴히 할 말이 있다며 서재로 들어왔다.
딸이 하는 말이라면 하늘이 두 쪽 나더라도 언제나 들어줄 준비가 되어 있던 나였으므로, 딸의 청을 흔쾌히 허락하여 의자를 내주고 딸의 이야기를 들어줄 자세를 취했다.
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 거길래 저리도 비장한 각오를 하고 나를 마주하는 걸까? 귀여운 것.
작년처럼 댄스파티에서 같이 춤을 춰달라는 깜찍한 부탁일까 싶어 미리 승낙의 말을 준비하려던 내게, 딸은 낮지만 분명한 어조로 말했다.

"...방금 뭐라고 했지?"

완벽하게 의표를 찔린 내가 망연히 되물었다.

"큐브와 평생을 함께 하고 싶으니 허락해 달라고 했어요."

딸이 분명하게 다시 한 번 청을 되풀이했다. 딸의 풍성하고 아름다운 속눈썹이 잠시 파르르 하고 흔들렸지만, 따뜻한 다갈색 눈만은 그 어떤 풍파에도 흔들리지 않겠다는 굳센 의지로 반짝이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절대 안 된다!"

딸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딸의 말에 반대하고 나섰다.

"어째서 안 된다는 거죠? 며칠만 지나면 저도 성인이라고요!"

딸이 외쳤다.
생각지도 못했던 딸의 공격에 정신을 차릴 수 없었던 나는 문득 딸의 항변에서 수상한 구석을 발견해내, 그 부분을 물고 늘어지기로 했다.

"며칠만 지나면 성인이라니... 그건 마치 네가 어른이 되면 내 허락 여부와는 상관없이 멋대로 행동할 거라는 것처럼 들리는데?"

딸은 살짝 얼굴을 붉혔지만, 예의 단호한 목소리로 다시 자신의 방어에 나섰다.

"아버지께서 정 허락해 주시지 않으시겠다면 그럴 의향도 있어요."

낮지만 의지가 실린 딸의 목소리를 듣자니 어쩐지 조금 괴롭히고 싶어진다.

"그래? 그렇단 말이지? 네가 정 그리 하겠다면 나로선 말릴 수 없지만... 너와 혼약한 그 대빵 큰 ㅇ... 아니, 드래곤 청년은 어찌할 셈이냐? 내가 혼담을 수락했었으니 파혼도 그 청년에게 내가 대신 말하란 뜻인 게냐?"

입을 다무는 딸을 보며 나는 득의양양한 미소를 지었다.
8년간이나 함께 살아온 딸이다. 이 아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바로 알 수 있다.
내 집에서 기거하는 마족을 사랑한다고 말한 거야 뭐, 예상 밖이었지만...  언젠가 2년 전 청혼하러 찾아온 드래곤 청년이나 혹은 다른 남자를 좋아한다고 결혼 의사를 밝힐 거라고는 예상하고 있었다...라기보다 그게 보통 인간으로서 당연한 수순이지.
그래서 일단은 구두 상으로 혼약한 이름 모를 젊은 용의 경우를 들먹인 것인데...
딸은 처음에 그랬던 것처럼 또다시 내 예상을 뒤엎는 행동을 취했다.

"그 사람... 아니, 그 용에게는 제대로 거절 의사를 밝힐 생각이에요. 하지만 그 전에 먼저 아버지께 제 생각을 말씀드리고 싶었어요."

"지참금을 돌려달라고 하면?"

내가 물었다. 2년 전 그 청년이 가져온 지참금은 내 휘하에 있고, 그나마도 얼마 남아 있지 않다.
10,000G는 상당히 큰 액수다. 이제 와서 파혼한다면 당연히 지참금은 돌려 달라고 할 것이 틀림없다. 아마 위자료도 내놓으라고 할지도 모르지.
용돈이 전혀 없는 딸로서는 내 도움 없인 절대 그 돈을 마련할 수 없...

"돈은 이미 마련해 두었어요."

딸이 걱정 말라는 듯 대꾸했다.

"무사수행과 수확제에 참가해서 얻었던 전리품을을 팔고, 헬파이어였나? 하여튼 뭐시기라는 몬스터들을 해치우고 얻은 돈을 모았더니 그럭저럭 액수가 맞던걸요."

딸이 태연히 말했다.

"참, 차인데 앙심을 품고 싸움을 건다면 제대로 물리칠 자신 있으니 걱정 마세요. 뭐, 그쪽 그랑파가 아버지를 잘 알고 계신 거 같으니 그럴 리는 없겠지만요."

나는 쓰디쓴 침을 삼키며 입맛을 다셔야만 했다. 딸은 내 생각보다 훨씬 더 머리가 좋았던 것이다.
하지만 이대로 당하고 있을 수만은 없지. 나는 다시 반격했다.

"좋다. 네가 큐브를 사랑한다고 치자. 그럼 큐브는 어떤데? 그 놈도 네 하잘것없는 사랑 놀음에 동참하겠다고 말했느냐?"

이번에야말로 대답하지 못하는 딸을 바라보며 나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딸이 어쩔 생각이었는지 그 속내를 알아차렸던 것이다.
큐브를 좋아는 하지만 제대로 고백할 자신은 없다. 아마 큐브가 어떤 마음인지 알 수 없기 때문이겠지.
그래서 일단 내게 자기 마음을 고백해 편들어 달라고 부탁한 뒤 함께 그에게 가서 (필요하다면 내 권위를 빌려서라도) 자신의 감정을 털어놓으려는 것일 터.
만약 내가 먼저 말을 꺼내지 않았더라면, 2년 전 내가 멋대로 정했던 혼담의 파기 역시 내게 떠넘겼을지도 모를 일이다.
이렇게까지 단서를 흘린다면 싫어도 눈치 챌 수밖에. 알든 몰랐든 딸의 부탁을 들어줄 생각은 없었지만 말이다.

"...아직 얘기하진 않았어요."

마침내 딸이 말했다.

"아버지께 말씀드릴 다음 그에게 고백하려고요. 큐브가 승낙하건 퇴짜를 놓건 제 마음에 솔직해지고 싶거든요. 오해할까봐 드리는 말씀이지만 어떤 결과가 나오든 전 그걸 받아들일 거고, 어떤 경우라도 아버지께서 마음대로 정하셨던 혼약은 따를 생각이 없어요."

"......"

나는 내심 신음했다.
고백하는데 도와 달라며 떼를 쓰는 거라면 얼마든지 구워삶을 수 있다. 하지만 결과가 어찌 되든 다 감수하고 자기 마음을 드러내겠다고 나온다면 대체 어떤 방법으로 막아야만 할지.
냉정히 생각해 보면 큐브가 딸아이의 고백을 반드시 받아들일 거라는 보장이 없으니, 50%의 확률을 걸고 도박을 해 보는 것도 그다지 나쁜 생각은 아닐지 모르지만...
나의 감은 무슨 일이 있어도 딸이 이야기하는 걸 막아야 한다고 경고하고 있었다.
날로 아름답게 성장하여 남자들의 청혼을 받아내는 딸의 아름다운 얼굴이라면 여자 보기를 돌같이 하는 집사라도 넘어갈 거라는 불안감 때문인지도 모른다. 어쩌면 아무리 마계에서 알아주는 놈이라도 딸아이를 마족 따위에게 넘겨줄 순 없다는 아비의 심정 때문인지도 모르지...
-어쩔 수 없군...
나는 마음속으로 결심했다.
아무래도 때가 된 것 같다.
10,000G를 조건으로 혼담을 허락하여 2년 동안은 딸을 내 곁에 둘 수 있었지만, 딸이 성인이 되면 그 대가를 치러야만 했다. 그걸 피하기 위해 그 드래곤 청년이 딸을 데리러 올 때를 계산해, 미리 딸아이에게 언질을 줄 생각이었으니... 그 시기와 상대가 조금 달라졌다 치고 딸에게 사실을 말해 주는 게, 이유 없이 무턱대고 막는 것보다는 나을 것 같았다.
딸이 평생을 독신으로 살겠다고 맘먹지 않는 이상, 어차피 언젠가 반드시 한 번은 거쳐야 할 일이었다. 지금이 바로 그 때라고 생각하면...

"...먼저 내 말부터 듣거라, 신시아. 일단 얘기부터 먼저 듣고 나서 움직여도 늦지 않아."

나는 손을 들어 딸의 흥분을 가라앉히려 애썼다. 내 말을 듣고 나서야 딸은 당장에라도 자리를 박차고 달려나갈 것만 같았던 기세를 한 풀 죽이고 내 말을 경청할 자세를 취했다.
너의 비밀을 알게 되면 넌 과연 어떤 표정을 지을까?
가만히 나를 올려다보는 딸을 한동안 응시했다가, 나는 숨을 크게 들이쉬고 딸의 출생의 비밀에 대한 이야기를 풀기 시작했다...

 

그로부터 얼마 후, 딸은 18세 생일을 맞아 집을 나가 버렸다. 들리는 소문으로는 교회에 들어가 신의 지팡이가 되었다는 것 같다. 큐브를 시켜 몰래 알아본 결과, 소문이 사실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아무래도 일전에 말했던, 성의 관리가 되고 싶다던 꿈은 접은 모양이었다.
아마 수녀 쪽이 좀 더 자신에게 어울릴 거라 생각해서였는지도 모르지. 그렇게 되도록 그 아이의 등을 떠민 것은 나지만.
예상대로, 딸아이는 내 이야기를 듣고 최종적으로 집사에게 고백하려던 마음을 접었던 것이다.
천계에서 자라다 이 곳으로 내려온 자신이 마족에게 고백을 하는 것이 터무니없는 일이란 걸 깨달은 걸 테지. 덧붙여 천계 출신인 자신이 하려던 행위가 신의 노여움을 사기에 충분한 행위였단 것도.
허나, 일말의 의문점은 남아 있었다.
나는 왜 딸의 마음을 가로막은 것일까.
어째서 딸이 수녀가 되어 교회에서 금욕적인 생활을 영위하는 모습을 씁쓸히 떠올리면서도 되레 안심하고 만 것인가.
어린 딸 앞에서 큐브의 집안일 솜씨를 칭찬하여 일등 신랑감이라고 잔뜩 바람을 넣어 놓고선(아마 그것만이 이유는 아니었겠지만), 이제 와서 마족이라 상종해선 안 될 놈이라 매도한 이유는 무엇일까.
영원히 무덤까지 안고 갔어야 했음이 마땅한 딸의 비밀을 폭로하고, 그것도 모자라 못 믿겠으면 큐브에게 가서 직접 확인하라고 밀어낸 저의는 무엇인가.
-뭘 그리 거창하게 고민하는 거지? 답은 이미 알고 있으면서.
나는 곧 깨닫고 말았다. 줄곧 드러내길 거부했던, 내 마음 속 깊숙이 숨어 있던 추악한 실체가 고민거리들의 해답이 되어줄 거라는 걸.
그 추악한 실체는 또다시 내게 질문을 던져 답을 내라고 강요한다.
만약 내가 딸에게 출생의 비밀을 밝히지 않았다면 어찌 되었을까...?
...아니, 이건 애초에 불가능한 전제다. 상대가 집사가 아니었더라도, 언제가 됐든 딸은 내게 결혼하겠다며 누구든 신랑감을 데려왔을 테고, 그러면 나는 딸이 인간의 가능성을 시험하기 위해 천계에서 내려온 아이라는 비밀을 밝히고 말았겠지.
무한한 가능성을 가지고 천계에서 내려온 여자를 책임질 만큼 배포가 큰 사람은 거의 없을 테니. 사실을 알린다면 부담감 때문에라도 언젠가는 결국 딸을 떠나갈 테니까.
내가 그렇게 행동할 것이 틀림없다고 믿는 이유는 1가지 질문으로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대체 언제부터 나는 신시아를 한 사람의 여자로서 보고 있었던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