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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 사랑과 감사의 마음을 가득 담아 편지를 띄웁니다.
오랫동안 정성껏 보살피고 키워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8년을 고생한 끝에 전 훌륭한 프린세스가 될 수 있었습니다.
설마 아빠도 방랑예술가의 딸이 프린세스가 되리라곤 생각도 못하셨겠지요.
저는 시련의 여행을 이겨낸 보람이 있어 폐하께도 인정을 받았고 사랑을 성취하는 일도 이뤘습니다.
지금부터 왕자님과 둘이서 새로운 인생을 걸어가려고 합니다.
왕궁생활은 어려운 일도 많아 테이블 매너 같은 아주 기초적인 궁중 예법부터 다시 배우는 나날로 너무나 고된 생활을 하고 있어요.
퀘스트 수행을 위해 여행을 하던 때와는 비교도 안 될 만큼.
하지만 지금까지 프린세스라는 꿈 하나만 바라보고 달려왔던 만큼, 이번에도 열심히 노력 중이에요.
저는 평민 출신인 만큼 수많은 시선들이 제 행동 하나하나를 날카롭게 지켜보기 때문에 더더욱 실수해서는 안 되니까요.
이제 제가 프린세스가 되었으니 아빠는 더 이상 옛날처럼 이 곳 저곳 유랑하며 예술을 팔 필요는 없어요.
성에서 저와 함께 생활할 수 있도록 왕자님께 얘기해 두었으니까요...
아빠의 딸, 로사로부터
나는 지금 한 시녀의 안내를 받으며 성의 안쪽으로 들어가고 있다.
평소 같았다면 나 같은 평민은 들어가는 것도, 나가는 것도 허락되지 않았을 테지.
만약 뭔가 잘못해서 끌려가는 거라면 성 안이 아니라, 지하 감옥으로 향했을 것이다.
좋아, 질질 끄는 것은 성미에 맞지 않으니 솔직히 말하겠다.
나를 포함한 몇몇 소녀들은 평민이면서도 특별대우를 받아 여느 귀족 못지않은 호사를 누렸다. 성에 자유롭게 출입할 수 있는 권리는 우리가 누리는 호사 중 하나였고 말이다.
물론 공짜는 아니다.
아무 이유 없이 각종 특권을 하사한다면 신분제 같은 건 진작에 폐지됐을 터.
폐하께서는 특권을 주시는 대신 퀘스트를 수행하도록 지시하셨고, 우리들은 프린세스 후보라는 미명 하에 여러 가지 퀘스트를 완수하여 폐하를 기쁘게 해 드렸다.
퀘스트는 8년 간 지속되었고, 우리들은 인간이 할 수 있는 온갖 수행-수확제에 참석하거나 공원을 돌보는 별 것 아닌 퀘스트에서부터 왕가의 골짜기며 드래곤 계곡을 탐험하는 것까지-을 치르며 나름대로 인생 공부를 해 왔던 것 같다.
그냥 그럴 듯한 직함 하나 던져주고 실컷 일 부려 먹는 것 아니냐는 설도 있었지만, 다른 부호들은 어찌 생각했는지 몰라도 적어도 내게는 중요하지 않았다.
곧 왕위를 물려받을 제1왕위계승자의 프린세스를 후보들 중에서 간택한다는 발표가 있었기 때문에...!
이 곳 저곳을 떠돌아다니며 예술을 팔아 겨우 생활하는 아버지 밑에서 자란 나는 본의 아니게 어렸을 적부터 현실을 깨달아야만 했다.
가난한 방랑예술가 딸이 자수성가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남자라면 전문 기술을 갈고 닦아 실력을 인정받는 방법도 있었지만, 여자라면 얘기가 다르다.
유일한 방법이라 한다면 여자로서의 무기를 갈고 닦아 좋은 집안에 시집가는 것 뿐.
그나마 다행이라 할 수 있는 것은, 강한 체력과 뛰어난 센스를 무기 삼아 여행하는 아버지 덕에 내 체력은 괜찮은 편이었고, 센스도 매력도 상당히 좋은 축에 들었다는 것.
여자가 가져야 할 스텟은 기본적으로 갖고 있었으므로 나머지는 내 노력 여하에 달린 셈.
이런 내게 왕가에서 단물 빨아먹고 버리려 한다는 뜬소문에 혹해 긴장을 풀 여유 따위는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이쪽으로 들어가시죠."
잠깐 옛 회상에 잠긴 나를 현실로 이끌기라도 하듯, 나를 인솔한 시녀가 직접 문을 열어주며 말했다.
"여기서 기다리면 되는 건가요? 다른 후보들은요?"
"이미 대기 중입니다. 폐하께서 도착하시면 알려 드릴 터이니 그 때까지 이 곳에서 기다려 주십시오."
더 이상의 질문은 허용하지 않겠으니 빨리 들어가라는 말투였다.
어차피 더 이상 질문할 거리도 없었기에 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안쪽 세계로 발을 들여놓았다.
"...옛날 생각난다. 8년 전과 전혀 달라진 게 없어."
불안한 마음을 가득 안고 입문했던 8년 전의 나를 문득 떠올려, 나도 모르게 혼잣말을 중얼거린다.
나를 데려다 준 시녀의 멀어지는 구두소리를 신호 삼아 밖과 안을 연결하는 결계를 봉했다.
한파를 동반한 강추위에 대항하듯 활활 타오르는 난로도, 국왕 폐하와 왕비 마마의 초상화가 걸린 액자도, 마계에서 구해 왔다는 마법석을 세공한 장식용 매직 아이템도, 바닥을 완전히 덮은 붉은 카펫도. 모든 것이 8년 전 그대로였다.
달라진 것은 단 2가지.
하나, 10살의 나이에 문턱을 밟았던 프린세스 후보는 18세의 성인이 되었다는 것.
둘, 4명이었던 후보는 1명이 줄어 3명이 되었다는 것.
"안녕, 로사."
문이 닫히는 소리를 들었는지, 먼저 불려나와 난롯가를 차지하고 앉은 두 사람이 아는 척을 한다.
"안녕 엘리너. 안녕 헤베."
나는 반가운 미소를 지으며 그들에게 다가섰다.
만나서 반갑기도 했지만 살을 에는 듯 한 강추위에 얼어붙은 몸을 녹이기 위해서이다.
"언제 왔어?"
손을 뻗어 온기를 빨아들인 나는 실없는 질문을 한 마디 던졌다.
"그야 엘리너가 1등이지. 집이 부자들이 사는 고급 주택가에 있으니까 성하고 제일 가깝잖아. 우리 집은 성아래 마을에 있으니까 아무래도 시간이 좀 걸렸지."
"아 맞아. 그랬지."
"뭐어, 그래도 로사보다는 낫지. 슬럼가는 성에서 제일 멀리 떨어져 있으니까 말야."
나는 무심코 헤베를 째려보았다. 다 알고 있는 사실인데 굳이 사족을 달 필요는 없잖아.
아무래도 1가지 더 달라진 점이 있는 것 같다. 그것은... 지금 이 공간을 지배하는 무거운 공기.
아무것도 모르던 때는 또래 친구를 만난 기쁨에 아무 경계도 허물도 없이 서로 친하게 지냈지만... 8년의 세월은 어린 시절의 우정을 무색케 할 만큼의 요력을 가진 것 같다.
후보라고 해서 모두 프린세스 자리에 혈안이 되어 달려들었던 건 아니다.
지금은 이 세상에 없는 클로버나, 몰락했다고는 하나 그래도 귀족 집안에서 자란 엘리너는 여러 퀘스트를 해결해 오면서도 왕자비 자리에는 그다지 욕심을 부리지 않았지만...
지긋지긋한 가난을 이겨보고자 벼르는 나나, 인간 왕자와 결혼하겠다는 꿈을 품고 요정계에서 날아온 헤베는 당연히 그 자리를 두고 경쟁하는 사이가 되었고...
어느 정도 퀘스트에 익숙해지고 사춘기를 겪어 성숙해지면서부터는 친구가 아닌 라이벌로 돌아서 버렸다.
쓸데없이 견제한답시고 가시 돋친 말을 던져 시비를 건다거나 퀘스트를 해결하는데 있어 서로 협력하지 않고 기싸움을 한다거나.
물론 성인이 된 지금에야 그런 유치한 감정싸움 따윈 더 이상 벌이지 않지만, 예전만큼 사이좋게 지내지 못하는 건 사실이다.
그래... 예를 들면 지금처럼.
"자자, 어차피 다 같이 폐하를 알현할 테니 누가 먼저 도착하든 상관없잖아."
"그건 그래. 그러고 보니 헤베. 혹시 오는 길에 클로버네 집에 들르진 않았어?"
어떻게든 무거운 공기를 날려버리려 시도하는 엘리너에게 맞장구치며, 나는 헤베에게 화제를 바꾸기 위한 질문을 던졌다.
"아니, 걔네 집은 우리 집보다 아래에 있잖아. 굳이 둘러볼 만큼 시간이 많지도 않았고. 게다가 이미 프린세스 후보를 사퇴한 애한테 굳이 신경 쓸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는데?"
...진짜 안 도와주는 구나. 거기다 태연한 얼굴로 매정한 대답을 잘도 하고 있고.
엘리너도 같은 생각이었는지 살짝 얼굴이 굳는다.
"야...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8년 가까이 지낸 친구한테 너무하는 거 아냐? 아니면 설마 나랑 너랑 입씨름을 벌일 때마다 클로버가 공격주문으로 날려 보낸 걸 아직도 맘에 담아두는 건 아니겠지?"
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헤베의 어깨가 흠칫 떨린다. 정답이었던 거냐.
"...흥!"
헤베는 콧방귀를 뀌며 고개를 돌렸다. 그런 걸 아직까지 마음에 담아두고 있다니, 기억력이 좋다고 해야 할 지 쪼잔 하다고 해야 할 지...
아, 같이 날아간 나는 어떻냐고?
우리끼리 얘기지만 나는 곧잘 공격주문에 얻어맞던 쪽이었지만... 사실 그리 마음에 두고 있지는 않다.
...정말이라니까.
나와 헤베가 싸우지 않는다면 클로버도 일부러 공격주문을 날리는 일도 없었고, 앞서 말했다시피 그 애는 프린세스 자리보다는 다른 사람에게 더 관심을 두고 있었던 것 같으니까.
프린세스 자리를 노리는 내 입장에선 헤베처럼 경계할 필요 없이 마음 편히 지낼 수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어떤 의미에서 나는 정말 클로버에게 감사하고 있다. 이유는... 비밀.
다만 헤베의 생각은 조금 달랐던 것 같지만.
헤베가 클로버에게 반감을 품고 있는 건 아마 공격주문으로 날아갔다는 하찮은 이유 뿐만은 아닐 것이다. 동경하는 금발의 왕자님이 클로버에게 호감을 갖고 있었다는 것도 한 몫 했겠지.
그런데 클로버는 왕자가 아닌 다른 남자에게 연심을 품고 있었으니, 헤베로서도 참... 복잡한 심경이었을 것이다.
"아하하... 역시 난 클로버처럼 사람 사이를 중재하는 힘은 없는 것 같아. 힘으로 누르는 건 자신 있는데."
헤베가 고개를 돌려버리자, 엘리너는 멋적은 듯 머리 양쪽에 매단 붉은 리본을 의미 없이 잡아당기며 커다란 두 눈을 연거푸 깜박였다. 넘실대는 푸른 파도가 눈동자를 타고 천천히 차오른다.
"저기 엘리너. 말참견하는 것 같아서 좀 그렇지만... 공격주문으로 날려버리는 거랑 힘으로 누르는 거랑 별로 차이 없는 것 같은데."
"그래? 그럼 나도 힘으로 밀어붙여도 돼?"
"...내가 잘못했어. 그것만은 그만 둬, 부탁이야. 작정하고 검을 휘두르는 게 훨씬 무섭다고."
"검이 뭐가 무섭다고 그래? 내가 말하긴 뭣하지만, 내려치기 전에 피해버리면 그만이잖아."
"그건 너 같은 숙련된 검사가 하는 말이고! 일반인에게는 위협이 되기에 충분하거든??"
덜컹.
엘리너가 내 말참견에 반응하기 전에.
은빛 섬유로 수놓은 붉은 예법을 단정하게 차려 입은 야도치 집정관이 벌컥 문을 열었다.
그녀의 서슬 퍼런 눈빛에 순간 기가 죽은 나와 엘리너는 자연스레 눈을 깔고 그녀의 눈치를 살폈다. 모르쇠로 일관하던 헤베는 태연했지만.
"뭔가 고성이 오가는 듯 한 소리가 들렸는데... 설마 품위 없이 다투고 있던 건 아니겠지요?"
"오, 오해예요! 그냥 토론을 좀 하고 있었어요. 검이 일반인에게 미치는 외포적 영향에 대해 다소 알기 쉬운 어조로 서로의 의견을 조금 과하게 주고받고 있었던 거예요. 그치 로사?"
별안간 엘리너가 내 옆구리를 팔꿈치로 찌르면서 말을 맞추라는 눈짓을 보냈다.
하여간 갖다붙이는데는 일가견이 있다니까. 엘리너의 말을 알기 쉽게 말하면 결국 다투고 있었던 거라고 이실직고하는 거나 마찬가지였지만, 구태여 지금 그 얘기를 꺼내 점수를 깎을 필요는 없지.
나 역시 재빨리 고개를 세로로 흔들었다.
집정관은 사람을 뚫어볼 듯 한 날카로운 시선으로 우리들을 탐색했지만 다행히도 별 다른 지적 없이 따라오라는 손짓을 보였다.
휴우.
집정관이 등을 보임과 동시에 한숨을 쉬는 우리들. 잠깐이지만 정말 죽는 줄 알았다.
"여러분들은 이제 알현실로 가서 국왕 폐하와 왕비 마마를 뵙게 될 겁니다. 폐하께서 폐회 연설을 하시고 프린세스 후보 순위를 발표하실 테니 마음의 준비를 하시기 바랍니다."
우리들의 한숨을 어깨에 달린 견장으로 받아들인 듯, 야도치 집정관은 차분히 설명을 곁들여 앞으로 결정될 우리들의 운명에 대해 담담한 어조로 예고했다.
"저... 혹시 그 자리에 왕자님께서도 참석하시나요?"
헤베의 관심은 오로지 왕자님께 쏠려 있었다. 뭐, 나 역시 다른 의미로 궁금하던 거였지만.
집정관은 긍정의 뜻으로 살짝 고개를 움직였을 뿐,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윽고 걸음을 멈춘 집정관은 익숙한 동작으로 사자를 본뜬 문고리를 잡아 비틀어 안쪽 세계를 연결하는 문의 결계를 해제했다.
쫄래쫄래 그녀의 뒤를 쫓아가는 우리들 뒤로 문이 저절로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아까와는 조금 다른 의미의 무거운 공기가 실내를 지배하는 것을 피부로 느끼며, 네 명의 여자들은 제각각의 생각을 품고 폐하가 계시는 옥좌를 향해 나아갔다.
바닥의 중앙을 일자로 장식한 붉디 붉은 융단을 따라 걷는 발소리는 불안감에 찬 멜로디처럼 들렸다.
나는 긴장에 빠진 머리를 어떻게든 들어내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였다.
딱 1가지 좋은 점이라면, 이게 처음 겪는 일이 아니라는 거였다. 멋모르고 왕궁에 던져졌던 10살 때는 정말이지... 긴장만으로도 사람이 죽을 수도 있겠구나 하는 걸 느꼈더랬지.
하지만 지금은 달라.
다과회, 왕궁 서고 정리, 목욕탕 구경, 왕의 말벗 등 온갖 성과 관련된 퀘스트를 완수함으로써 쌓아올린 경험치가 있으니까.
그렇게 생각하자 터질 듯 요동치는 가슴이 겨우 가라앉는다.
우리들은 옥좌에 앉아 있는 폐하와 마마, 그리고 어떤 의미에서는 이 자리의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왕자님과 약 3m가 좀 못 되는 거리를 두고 걸음을 멈추었다.
엘리너가 제일 가운데에, 그리고 그녀를 사이에 두고 나와 헤베가 양쪽에서 줄을 맞췄다.
"성에 잘 오셨습니다, 프린세스 후보들이여. 지금부터 폐하의 말씀이 있을 예정이니 마음 깊이 새겨듣도록 하십시오."
집정관의 말이 떨어짐과 동시에 가운데 옥좌에 앉아 있던 폐하께서 다가오신다.
경험치를 쌓은 지금, 폐하의 존안을 똑바로 쳐다보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격려로 시작해서 온갖 칭찬의 말로 점철된 폐회 인사를, 우리들은 열심히 들으려 노력했다.
아마 다들 알고 있을 것이다. 우리들에게 진짜 중요한 건 다음 순서라는 것을.
프린세스에 그닥 미련이 없는 엘리너는 제외한다고 쳐도, 주변을 압도할 만한 집념으로 프린세스 자리를 보고 달려온 나와 헤베에게는 순위 발표가 8년 간의 노력을 평가해줄 것임이 틀림없다.
그러니 그 쪽에 신경이 가는 것은 당연한 거고, 때문에 예상보다 길어지는 폐하의 말씀에 신경을 덜 쓰는 것을 뭐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걸리면 점수가 깎일 수도 있으니 티를 낼 수는 없지만.
"에, 그럼 퀘스트 폐회 연설은 이쯤 하고... 이제 퀘스트 순위를 발표할 때로군."
어째서인지 왕비님께서 키우시는 고양이 캐서린 이야기로 연설의 백미를 장식하신 뒤, 폐하께서는 금빛 수염을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드디어 기다리고 기다리던 주제를 언급하시기에 이르렀다.
"하하, 뭘 그리 긴장하고 그러나? 각자 노력한 만큼의 성과를 갖게 될 터이니 너무 염려 말게. 야도치!"
폐하께서는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우리들을 살살 달래시곤 집정관을 호명하셨다.
미리 준비라도 한 것인지, 집정관은 고급 비단으로 감싼 푹신한 쿠션 하나를 들고 조심스레 폐하의 곁에 나란히 섰다.
그 위에 잠자고 있는 것은 휘황찬란한 빛을 머금은 화려한 티아라.
몰리뉴 왕국의 프린세스만이 소유할 수 있다는 국보 중의 국보.
그 신비한 마력에 엘리너조차도 압도된 듯, 옆에서 꿀꺽 하고 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폐하께서는 준비된 양피지를 꺼내 순위 발표 전 사항을 줄줄 읽어내셨다. 공정한 심사를 통해 순위를 선별했다는 등(이 부분을 읽을 때 왕자님의 얼굴이 씁쓸한 표정을 짓는 것을 나는 놓치지 않았다), 퀘스트를 가장 많이, 가장 빨리 해결하는 것 외에 프린세스로서의 덕목을 갖춘 후보에게 더욱 높은 점수를 내렸다는 등, 평가 요소에 대해 구구절절 풀어놓으셨다.
그 막간을 이용하여 나는 슬쩍 헤베의 얼굴을 넘겨다 보았다. 이건 내 상상이지만 왕자님의 얼굴이 씁쓸함으로 가득 찼을 때, 헤베의 가슴은 찢어질 듯 아프지 않았을까.
아까 비밀이라고 했던, 내가 클로버에게 고마움을 느낀다는 이유는 이것이었다.
만약 그 애가 이 자리에 있었다면, 성아래 마을 여행승려 아버지와 함께 이 마을에서 살고 있었다면, 그녀야말로 가장 막강한 우리들의 라이벌이 되었을 것이다.
프린세스에 관심이 있건 없건 후보는 후보.
뭐, 겉으로는 공정한 심사가 어쩌니 하지만 그건 왕자님의 마음이 누군가에게로 기울지 않았다는 전제가 깔려 있어야 신빙성을 인정받을 수 있다. 만약 누군가에게 명백한 호감을 품고 있다면-실제로 클로버에게 마음을 두고 있었지만-, 당연하게도 그 누군가에게 높은 점수가 주어질 것임이 틀림없었다. 왕자의 의사란 건 가볍게 무시할 수 있을 만큼 가벼운 것이 아니니까.
그러나 그 클로버는 이 자리에 없었고, 이 세상 어디에서도 그녀를 찾는 것은 불가능. 왕자님께는 안됐지만 그 덕에 퀘스트 순위는 그나마 공정하게 정해질 수 있을 테니 내가 클로버에게 감사의 마음을 갖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그리 생각하니 마음 한편으로는 헤베가 불쌍해진다. 동경하는 왕자님은 다른 여자-그것도 여기 존재하지 않는-를 마음에 품고 있다. 절대 그래서는 안 되지만, 헤베가 여기서 1위를 해서 프린세스가 되어봤자 왕자님의 마음을 차지할 수는 없는 거고, 1위마저도 되지 못한다면 왕자님의 마음도 차지하지 못하고 2번째도 될 수 없다는 거니까.
아, 그건 나도 마찬가지 아니냐고? 난 그런 거 상관하지 않아.
가난한 집안에서 자라게 된다면 좋든 싫든 현실 앞에 끌려 나가게 되어 버리니까. 평생 사랑만 가지고 살 수 있다는 허무맹랑한 망상 따윌 할 나이는 이미 한참 전에 지났고. 물론 정략결혼이란 게 그다지 듣기 좋은 건 아니지만, 그 상대가 왕자님이라면 한 번 해 볼 만하지 않겠어?
"...순위를 발표하기에 앞서... '클로버 빅토리아 코르네르' 후보는 1달 전 프린세스 후보를 사퇴했기 때문에 순위에서 제한다. 때문에 순위는 3위부터 발표한다."
잠시 딴 생각에 잠겨 있었던 것인지, 어느 새 폐하께서 가장 중요한 부분을 발표하려 하고 계셨다. 그래봤자 변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지만, 그래도 무심코 자세를 바꾸는 나.
"3위는 엘리너 폴리아나 블레인!"
불호령 같은 고함소리가 넓은 알현실을 가득 메웠다. 엘리너는 왕국의 예에 맞춰 잠깐 고개를 숙였다.
8년 전처럼 4명이 모여 있었다면 모를까, 하나가 빠져 셋이 된 지금 3등이 누구일지는 뭐... 예상했던 바이다.
문제는 2등을 누가 차지하느냐는 것.
프린세스 자리를 두고 경계해야 할 대상은 단 1명.
퀘스트 자체 순위 1등을 사이에 두고 헤베와 엎치락뒤치락 싸우길 어인 몇 년인가.
곧 2위를 발표하겠지만, 이는 사실상 기나긴 여정의 우승자를 뽑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나도 헤베도 그동안 먹고 싶은 것, 하고 싶은 것을 잔뜩 참아가며 퀘스트에 매달렸기 때문에 순위를 가늠하기 쉽지 않았다.
결국 폐하께서 부르실 이름에 사활을 거는 수밖에 없는데...
"2등은..."
2번째를 발표하는 그 찰나의 시간이 영원처럼 느껴진다.
결과가 어찌 되든 빨리 끝나버렸으면 싶기도 하고, 아직 결과를 알 수 없는 이 순간이 지나지 않았으면 싶기도 하다.
나는 무심코 (초조해지면 어김없이 튀어나오는) 버릇으로 어깨까지 겨우 닿는 머리카락에 손을 댔고-
"헤베 유스티나 티에스!"
그러거나 2등의 이름이 드디어 불리고 말았다.
-잠깐... 누구라고?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한 뇌가 정보의 재전송을 요구한다.
살짝 눈을 들어 옆을 훔쳐보다 문득 엘리너와 눈이 마주쳐 버렸다.
엘리너는 복잡미묘한 표정과 함께 헤베 쪽으로 눈짓했고, 그제야 나는 헤베의 얼굴을 살필 수 있었다.
딱딱하게 굳어 얼어붙은 창백한 얼굴. 겨우 눈동자를 굴려 천천히 움직인다. 그 끝에 있는 것은 (아직 이름을 호명하진 않았지만) 나에게 축하의 시선을 보내고 있는 폐하의 존안...
...우승자는 지금, 결정되었다.
우승자는 나... 로사 미누엣 레드포드.
당연히 우승해야만 한다고 다짐하고 있었지만, 막상 우승을 쥐고 나니 생각만큼 마음이 떨리지 않는다.
아직 실감이 나지 않기 때문일까? 아니면 나도 모르는 새 우승을 지나치게 확신하고 있었기 때문일까?
헤베에게 미안하다거나 하는 건 물론 말도 안 되는 생각. 정정당당히 실력을 겨루어 떳떳하게 승리했는데, 상대에게 미안한 감정을 품는다는 것은 어줍잖은 동정심일 뿐이니까.
곧이어 내 이름이 1위로 호명되었고, 나는 지난 날 배웠던 예법들을 떠올리며 겨우 자세를 갖추고 앞으로 걸어 나간다.
우습다고 비웃지 말길. 생각만큼 마음이 떨리지 않는다고 해서 긴장되지 않는다는 듯은 아니다.
무릎을 꿇자, 가만히 앉아 계시던 왕비ㄴㅁ께서 자리에서 일어나 야도치 집정관이 서 있는 쪽으로 다가오셨다.
그 귀하신 손으로 손수 티아라를 들어 황급히 고개를 속인 내 머리에 살포시 얹고, 작은 목소리로 축하의 말씀을 읊어주신다.
어렸을 때부터 보고 달려온 1가지 목표... 지금 이 순간, 나는 그 목표를 이루고야 만 것이다.
노력의 결실은 정직했다. 이로서 나는 명실상부한 몰리뉴 왕국의 프린세스로서 그 첫발을 내딛게 되었다.
나는...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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