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린세스가 되고 싶다는 일념 하나로 요정계를 등지고 인간으로 다시 태어나 살아온 지 어인 8년.
왕자님과 결혼하여 그 옆에 서는 것만이 내가 걸어야 할 유일한 길이라 여겼었다.
하지만 10살의 어수룩한 소녀 티를 벗기 시작하면서 나는 점차 다른 꿈을 품게 되었다.
세상을 보고 싶다.
요정이었을 당시 프린세스가 전부라며 큰소리를 쳤던 나의 과거와는 완벽히 상반되는 바람이다.
권력이라는 요물에 영혼을 맡기고 신하들의 참견과 보살핌을 받으며 안전한 성 안에 갇혀 항시 인형처럼 생글생글 웃고 있어야만 하는 권태로운 평안한 삶 대신, 매일의 끼니를 걱정하고 제 몸을 스스로 지켜야 하며 어디든 맘 내키는 대로 발길 닿는 대로 세상에 발자국을 남길 수 있는 격동적이면서 자유로운 삶.
어째서 이렇게 다른 꿈을 품게 되었냐고?
요정 여왕님의 힘으로 나를 거둬들이기 전까지만 해도 나의 아버지는 이곳저곳을 자유롭게 여행하던 떠돌이였다.
아무리 대단하신 요정 여왕님이라 해도 무에서 유를 창조할 순 없는 법.
우즈의 말에 따르면 내 인간의 몸은 나의 아버지를 토대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내가 10살의 나이로 인간계에 정착할 당시 나는 내 아버지와 아주 흡사한 성향과 능력치를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였을까?
나는 점점 자라나면서 좀 더 넓은 세상을 보고 싶다는 욕망을 키워나갔다.
언제나 굳건할 줄로만 알았던 프린세스의 꿈은 점점 입지를 잃었고...
세상을 보고 싶다던 열망이 세상을 보고 오겠다는 결심으로 바뀐 발단은 지극히 사소했다.
아주 작은... 하지만 내게 지대한 영향을 끼친 사건 - 아버지의 죽음...
나를 친딸처럼 키워 주신 아버지의 죽음을 계기로 나는 결심을 굳혔다. 아버지의 유지를 받들어 이제는 내가 그를 대신해 세상을 떠돌겠다고.

- 1808년 4월 13일, 벨린다 사이클론의 마지막 일기장에서

 


"네 이야기는 잘 들었다, 우즈. 린다는 자신에게 솔직해지는 길을 택해 날개를 펴고 자신이 원하는 곳으로 훌쩍 날아가 버렸구나."

성인이 되어 자신이 걸을 길을 택해 떠난 벨린다를 배웅한 뒤 고향으로 돌아온 우즈는 곧바로 요정 여왕에게 불려가 8년 간 인간계에서 집사 노릇을 했던 이야기를 낱낱이 전했다.
단 한 차례도 끼어드는 일 없이 가장 이상적인 청중의 모습을 보여 준 여왕은 우즈의 이야기가 끝나자 납득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짧은 감상을 털어놓았다.
본인의 마음에 쏙 드는 결과라고 할 수는 없겠지만 뭐 어떠랴.
애초에 벨린다는 자신만의 확고한 꿈을 갖고 인간들이 사는 세계로 넘어왔고, 8년 뒤 성인이 되어 자신의 꿈을 향해 첫 발을 내딛었다.
중간에 꿈이 바뀌긴 했지만 결국 벨린다는 자신이 원하는 미래를 쟁취한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뒤에서 조용히 그 아이를 응원하는 수밖에.
하지만 아직도 그녀의 옛 꿈에 미련을 품은 자가 있는 것 같다.

"왜 그러니, 우즈? 표정이 어두운 것 같은데. 뭔가 마음에 켕기는 거라도 있나 보구나."

우즈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네 개인적인 일이니? 아니면..."

요정 여왕은 일부러 부드럽게 말끝을 흐렸다. 우즈는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만 같은 얼굴로 요정계를 다스리는 여왕의 잔잔한 파도가 이는 미소를 올려다보았다.

"...전 아직도 이해할 수가 없어요."

마침내 우즈가 겨우 조용하게 말문을 텄다.

"그렇게 프린세스가 되고 싶어 했는데, 어째서 다른 길을... 그것도 프린세스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쪽을 선택한 건지... 저로선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다구요."

"우즈..."

요정 여왕이 낮은 목소리로 그의 이름을 불렀다.

"내 말 잘 들으렴, 우즈. 린다는 자신의 의지로 꿈을 키웠고 자신의 의지로 장래를 정한 거란다. 중간에 바뀌긴 했지만... 그건 어느 쪽이든 그 아이의 의지였단다, 아마 나보단 8년 동안 곁에서 물심양면으로 린다를 보살펴 준 네가 더욱 잘 알고 있겠지. 그렇다면 그 미래 역시 린다가 원한 미래였다고 이해해 줄 순 없을까?"

우즈가 낮은 목소리로 투덜거렸다.

"저도 머리로는 알고 있어요. 여왕님의 말씀이 백 번 맞다는 것도요. 하지만..."

"미련을 버릴 수가 없다?"

여왕이 미처 끝맺지 못한 우즈의 말을 이어 주었다.

"네... 만약... 만약 좀 더 제대로 된 환경이 마련되어 있었다면... 꼭 프린세스가 되지는 못하더라도, 음유시인이 되겠답시고 집을 나가 세상을 떠돌지는 않았을지도 모르잖아요?"

"과연 그럴까? 네 말은 어느 정도 일리가 있다고 생각한다만, 100% 맞을 거라 장담할 순 없겠구나."

여왕이 말했다.

"만약 린다의 보호자가 떠돌이가 아닌, 기사나 귀족이었다면 우즈 네가 말한 '제대로 된 환경'을 만들어줬을지도 모르지... 허나 그렇다 해도 린다가 프린세스의 꿈을 그대로 간직했을 거라곤 확신할 수 없단다. 린다와 함께 인간 세상으로 내려갈 때 내가 말했던 걸 기억하고 있겠지?"

"네. 인간으로 다시 태어나는 요정은 보호자가 되어 줄 인간의 몸을 본따 새로운 인간의 몸을 갖게 된다고... 그래서 보호자의 영향을 강하게 받을 수밖에 없다고 말씀하셨죠."

우즈가 대답했다.
요정 여왕이 사알짝 고개를 끄덕이며 우즈의 붉은 머리를 가벼이 쓰다듬었다.

"그렇단다. 린다의 보호자가 어떤 직업을 갖고 있더라도 마찬가지란다. 그 아이가 음유시인의 길을 택한 건 인간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서겠지. 기사나 귀족도 크게 다르지 않단다. 만약 린다가 그 밑에서 자랐다면 아버지의 뒤를 이어 기사나 재상이 되었을지도 모를 일이지."

"그럼 여왕님 말씀은... 아가씨의 처음의 꿈이 뭐였든 간에 결국 그녀를 키워 주는 인간의 직업의 영향을 받아 꿈이 바뀌게 된다는 건가요?"

우즈의 질문에 여왕은 부드럽게 고개를 저었다.

"직업의 영향을 받는다기보단 직업이 가져오는 환경의 영향을 받는다고 하는 게 더 정확할 거 같구나. 신분과 예법을 중시하는 귀족 밑에서 자랐다면 프린세스라는 꿈을 계속 간직했을지도 모를 일이지.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가능성일 뿐... 린다가 정말 원한다면 귀족 아버지 밑에서 자랐더라도 음유시인이 되겠다고 뛰쳐나갔을지도 모른단다."

"......"

여러 가지 설명을 곁들이던 여왕은 벙찐 얼굴로 멍하니 자신을 주시하는 우즈를 알아채고 잠시 말을 끊었다. 아무래도 그 작은 머리로는 단번에 이해하기가 어려웠으리라.

"그러니까 내가 말하고 싶은 건... 린다의 보호자가 어떤 직업을 가졌건 그 사실이 린다의 꿈을 완전히 결정하진 못할 거라는 뜻이란다. 꿈은 원래 자기 자신만이 결정할 수 있는 거니까."

"하지만... 그럼 자기 의사와 상관없이 꿈을 포기하는 경우도 있을 수 있나요?"

"그럴 수도 있겠구나. 나처럼 말이야."

"그게 무슨... 설마 여왕님께서도 인간계에...?!"

"그렇단다. 나 역시 한 때는 인간이었단다. 한 때는 요정이었고. 한 때는 나도 린다처럼 꿈을 품고 인간이 되어 살아가길 바랐지. 얘기하자면 길어질 텐데... 어떡할래?"

"듣고 싶어요!"

우울했던 기색은 온데간데없고, 새로운 호기심이 작은 요정의 눈동자 속에 가득 차오른다. 여왕은 생긋, 하고 미소를 짓고는 생각의 늪을 거슬러 올라가, 언제였는지도 모를 아련한 기억을 하나하나 건져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