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박을 즐기는 모든 인간은, 불확실한 것을 얻기 위해서 확실한 것을 걸고 내기를 한다.

- 파스칼

 

 

누군가에게는 평범했을 일상 & 10. Unwelcomed person

 

 

땅거미가 지고 있었다.

붉게 타오르는 노을은 마지막 발악이라도 하듯 이곳저곳에 찬란하지만 어딘가 힘이 빠진 빛을 있는 힘껏 내뿜었다.

지는 해의 권세에 밀려 힘없이 물러난 바람은 애꿎은 모래에 심통을 부린다.

바람의 심통을 이기지 못하고 이리저리 흔들리는 그네 위에 한 소녀가 앉아 있었다.

바람에 흔들리는 그네 위에서 그녀는 망연자실한 채 주저앉아 있다.

한겨울의 차가운 공기가 그녀를 감싸 안고, 피어오른 물보라를 훔쳐내었다. 하지만 이러한 냉기서린 서투른 위로는 그녀에게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집에 갈 수는 없었다.

이 꼴을 하고 집에 갔다간 가족에게 무의미한 질문 공세를 받을 게 뻔했다.

들들 볶이면서 따뜻한 침대에 눕느니, 아무도 없는 이곳에서 추위에 떠는 게 백배는 나았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이곳으로 온 이유는 뭐지?

문득 고개를 든 의문 하나가 머릿속에서 카고메를 괴롭혔다.

무작정 달려 학교를 빠져나올 때는 아무 생각 없이 발길 닿는 대로 간다고 생각하고 있었으나, 말라가는 눈물과 자리를 바꾸듯 되살아나는 이성이 세차게 고개를 흔들고 있었다.

그녀가 이곳으로 온 데는 이유가 있었다. 하지만 그 이유가 뭔지는 도통 알 수가 없었다.

혼자 있을 장소를 원하는 거라면 다른 곳도 많았다. 그런데 왜 그녀는 굳이 이곳을 고른 걸까?

누군가를 기다린 건가? 대체 누구를?

아무도 없고, 이 시간에 누구도 올 리가 없는데... 대체 누구를 기다린 걸까?

싸우고 돌아선 그녀의 연인...은 아니다. 날렵하고 재빠른 그녀와는 달리 그는 운동신경이 짧았다. 남녀의 신체능력차도 전속력으로 달리는 그녀를 극복하지는 못한다.

그렇다면 대체 누가...

카고메는 머리를 거칠게 흔들었다.

생각날 듯 하면서 나지 않는 것이 원망스러웠다. 떠올리든지 잊어먹든지 하나만 택할 것이지.

"새로운 놀이법인가?"

한 달 만에 들어보는 능글맞은 목소리가 들리자 카고메는 머리를 헤집던 손을 내릴 생각도 않은 채 멍하니 그 쪽을 돌아보았다.

탐색하는 듯 한 눈동자를 떨쳐내면서 아스팔은 쓴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내가 온 걸 예상한 것도 아닌 것 같은데, 상당히 김빠지는 환영식이군. 마지막으로 봤을 때는 큰소리 땅땅 치던 당당한 얼굴이었는데 무슨 바람이 불었기에 기운이 빠진 거지?"

"그 쪽한테는 설명하고 싶지 않아요."

카고메는 고개를 돌리며 조용히 쏘아붙였다.

"굳이 입아프게 설명할 필요 없어. 무슨 일인지 대충 감은 오니까. 인간은 참 재미있는 생각을 한단 말이야. 지금 겪는 일이 자신에게만 일어나는 일이라고 착각하면서 남의 충고 따윈 들으려 하지 않거든. 그게 자신에게 아무 도움도 되지 않는다는 걸, 어떨 땐 해가 될 수도 있다는 걸 알면서도 말이지."

뜻 모를 소리를 중얼거리면서 아스팔은 카고메 옆에서 외로이 흔들리는 빈 그네에 털썩 걸터앉았다.

다른 앉을 자리를 다 놔두고 굳이 자신의 옆에 앉는 의도가 살짝 궁금했지만, 카고메는 구태여 질문을 던져 확인하려 들지 않았다. 그럴 기운도 없었을 뿐더러, 물어보나마다 실없는 대답이 오겠지.

"너무 그렇게 상심하지 마라. 겨우 너보다 몇 년 더 살았을 뿐이지만, 지금 네가 겪는 일들은 나도 예전에 겪어 봤던 일들이다. 상투적으로 들리겠지만, 그냥 시간이 흐르길 기다리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이지."

카고메는 약간 놀란 눈으로 마지막 빛을 꺼뜨리는 노을을 하염없이 바라보는 아스팔의 얼굴을 뜯어보았다. 건방진 잘난 척 대마왕 왕자님이 자신을 위로하고 있었던 것이다.

"저기... 잘 이해가 안 가서 그러는데... 지금 날 위로하는 건가요?"

다소 쉬긴 했지만 비교적 또랑또랑한 목소리가 들려오자 아스팔은 그녀 쪽을 돌아보았다.

"왜? 이상한가?"

"예, 무진장요. 잘난 척 설교라도 할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카고메는 말을 다 끄집어낸 후에야 아차 싶었다. 상대가 누구든 간에 어지간해서는 상처받지 않도록 말을 아끼거나 돌려서 하는 편인데, 어째서 이 남자에게는 생각한 그대로를 말해버리고 마는 걸까. 아셰트 제노와즈 외에는 이러는 경우가 없었는데.

제노와즈만큼이나 이 남자를 싫어하고 있는 건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왕자를 상대로 하고 싶은 말을 다 할 수 있다니, 어떤 의미에선 부러운 능력이로군. 아아, 그런 표정 짓지 않아도 돼. 애초에 문제 삼을 생각도 없었어. 그냥 신기해서 해 본 말이야."

"무례를 문제 삼지 않는다니 참 황송하네요. 그럼 무례를 저지른 김에 좀 더 묻겠는데, 그 쪽은 대체 여긴 뭐 하러 온 거죠?"

방금 전까지는 말할 기운도 없었지만 그의 서투른 위로를 들은 지금은 조금 힘이 나고 있었다. 궁금한 걸 참아봤자 별로 좋을 건 없으니 일단 물어보기라도 하자.

아스팔은 잠시 생각하는 듯 하다가 입을 열었다.

"질문의 의미를 정확히 해 줬으면 하는데. 네가 말하는 '여기'는 이 세계인가? 아니면 이 장소인가?"

"무슨 소릴 하는 거예요. 댁이 이족 세계로 온 건 저번에 이미 말해 줬잖아요. 내 말은 하고많은 곳들 중에서 왜 이 곳으로 다시 왔냐는 거예요."

"네가 울고 있었으니까."

"뭐라고요?!"

아스팔은 시시각각 변하는 그녀의 표정이 재미있다는 듯 낄낄거렸다.

"농담이다. 그렇게 정색할 필요 없어. 이곳은 내가 자주 들르는 장소 중 하나일 뿐이다. 오늘 들르게 된 건 그저 우연일 뿐이고, 멜랑콜리 상태의 너와 만나게 된 것도 한낱 우연일 뿐이지."

"쳇, 그럼 질문을 바꾸겠는데, 왜 당신은 계속 이 세계에 머무르는 거죠?"

아스팔은 도리어 놀랍다는 시선으로 카고메를 보았다.

"넌 한번 도끼질을 해서 나무가 쓰러지지 않으면 바로 포기해 버리나?"

"그...건 얘기가 다른 것 같은데요? 난 생명과 의지가 있는 사람이라고요. 나 같으면 나 싫다는 사람한텐 구차하게 매달리지 않아요. 잘 가라고 손 흔들어준다면 모를까."

"다들 말은 그렇게 쉽게 하지. 실제로 닥치게 되면 행동은 조금씩 달라지지만 말이야."

"흥, 세상 모든 사람들이 그쪽처럼 생각하고 처신할 거라는 편견이나 고치지 그래요?"

"흐음... 꼬박꼬박 말대꾸를 하는 걸 보니 이제 기운을 좀 차린 모양이지?"

"네?"

"아까까지만 해도 우거지상을 하고 풀이 죽어 있었는데, 떽떽거리는 걸 보니 좀 나아진 것 같아 보이긴 하는군. 예쁜 얼굴이 주름에 가려져서야 쓰나."

"......!"

예상치 못한 공격이었다. 저 잘난 맛에 사는 이국의 왕자가, 여자를 배려할 줄도 알다니.

아니, 중세 시대에 사는 남자라면 신분에 상관없이 기사도의 덕목에 대해 익혔을 것이다.

또한 고위 자제가 기본적으로 배우는 사교술이라면 레이디를 다루는 것도 식은 죽 먹기일 터.

그래, 이 남자가 보여주는 친절은 가식을 전제로 한 매너일 뿐이다. 하지만... 그걸 알면서도 가슴이 살짝 두근거리는 건 막을 수가 없다.

절대 넘어가서는 안 된다. 자신에게는 이미 인생을 약속한 동반자가 있다. 비록 싸우긴 했지만.

"왜 그러지?"

뚫어져라 쳐다보는 시선을 느낀 아스팔이 물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카고메는 새침한 어조로 말을 끊고 고개를 돌려버렸다. 싫어한다고 생각했던 사람에 대한 호감도가 이만큼이나 오를 수 있다니, 세상일은 겪어 봐야 한다는 옛말이 꼭 맞다.

"진정됐다면 얘기를 계속하도록 하지. 지난번에 내 말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은 듯 하니 다시 말해주겠다. 넌 나와 함께 가는 게 네게도 가장 유리해. 그러니 내 손을 잡는 게 좋아."

..................앞에 한 말 취소.

카고메는 눈알을 부라리며 그네에서 뛰어내렸다.

그래, 이게 저 남자의 본성이다. 저번에 단도직입적으로 얘기했다가 듣질 않았으니 이번에는 사탕발림으로 띄우고 꼬셔볼 생각이었던 거다. 뭐, 학습능력이 있단 건 인정해주겠지만.

"겨우 그딴 얘기나 하려고 공을 들인 거였어요? 대꾸한 내가 바보지!"

어차피 어느 정도 진정도 됐겠다, 집에나 가버려야겠다며 손을 터는 순간, 아스팔이 팔을 붙들었다.

항의의 말을 꺼내기도 전에 아스팔은 특유의 눈웃음을 지으며 먼저 선수를 쳤다.

"말만 번드르르하게 해봤자 증거가 없으면 아무 소용없지. 보여줄 테니 따라오지 않겠나?"

"싫다면 어쩔 거죠?"

카고메는 잡힌 팔을 거칠게 흔들어 빼내며 되물었다. 아스팔의 표정에서 순간 비웃음의 미립자가 스쳐지나갔다.

"네게 유리한 쪽을 선택할 수 있도록 도와주려는 거다. 강요하는 건 아니니 정 싫다면 뿌리쳐도 상관없어. 하지만... 내 사견으론 넌 순순히 날 따라올 거라는 생각이 드는걸. 특별한 이유는 없다. 그냥 감이지. 하지만 내 감은 아주 잘 맞는 편이야."

카고메는 내심 혀를 찼다. 저런 대사를 눈 하나 깜짝 않고 할 수 있다니.

원체 성격이 저런 건지, 아니면 중세의 사교술 강의가 대단한 건지. 만약 후자라면 솔로들이라면 필히 배워둬야 할 것 같았다.

"어디로 가려는 건데요?"

"네가 가진 정보는 매우 편중되어 있다. 그것도 나쁜 쪽으로. 정보를 공평하게 받아야 올바른 판단을 내릴 수 있지 않겠나? 그래서 내가 직접 보여주려는 것이다. 장차 네가 누리게 될 몫을."

"......"

카고메는 가만히 아스팔의 눈동자 속에 잠긴 고요한 바다를 들여다보았다.

조금의 일렁임도 없이 고요하기만 한 바다가 자신을 무서운 힘으로 잡아끈다는 걸 느꼈다.

뿌리치기에는 알 수 없는 무언가가 노래하는 유혹의 힘이 너무나도 컸다.

다 알고 있다는 미소와 함께 다시금 팔을 붙드는 아스팔의 손길을 내치지 못한 채, 카고메는 작은 호기심을 앞세워 '세계의 문'을 여는 아스팔과 나란히 서서 공간이 일그러져 본래 살던 고향의 문이 열리는 것을 망연히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