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중한 것은 손에서 놓지 말아야 하는 법이다.

 

 

누군가에게는 평범했을 일상 & 12. Time To Love(後)

 

 

"열이 아직 높네요."

입에 물렸던 체온계를 들어 정상 체온과 가늠해 보면서 큐브는 걱정스러운 투로 말했다.

"일단 몸이 낫는 게 중요하니까, 시험이니 뭐니 다른 생각하지 말고 누워서 푹 쉬세요. 아셨어요?"

카고메는 큐브의 걱정이 서린 말에는 대꾸하지 않은 채 갈라진 목소리로 되물었다.

"...지금 몇 시야...?"

"오후 3시요."

카고메는 약기운에 눌려 몽롱한 의식을 겨우 제어하여 있었던 일을 하나하나 천천히 떠올렸다.

켄이치와 싸운 일, 프린스를 만나 고향 세계를 둘러본 일, 떠나기 전 그에게서 정체를 확실히 밝히라는 협박을 받고 집으로 돌아온 일...

기분 나쁜 한기가 스멀스멀 올라오기 시작한 것도 아마 그 무렵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카고메는 그 한기를, 허세를 부리고 조금 잘난 척이 심할 뿐, 기본적인 인정머리는 있었을 것으로 생각했던 프린스 아스팔이 보여준 거침없는 비정함을 본 탓이라고 성급히 단정 지어 버렸다. 그리고 앞으로도 치를 시험이 많이 남았다는 현실을 상기하며 밤늦도록 시험공부에 매달렸고-

그 결과는 곧 또 다른 현실이 되어 그녀를 덮쳤다.

떨쳐내려 할수록 더욱 집요하게 달라붙는 바이러스의 방해 공작에 밀려 한창 시험을 치르던 중 수마의 공격을 받고-

눈을 뜨자 걱정스러운 모습의 노란 눈 한 쌍이 있었다.

감기가 도져 쓰러진 걸 겨우 옮겼으니 혹여라도 일어나서 딴 짓할 생각은 말라며 못을 박아둔 큐브는 카고메의 머리에 찬 물수건을 조심스레 올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까도 말했던 거지만 딴 짓할 생각은 추호도 마시고, 생각하지 않고 실행에 옮기는 것도 안 됩니다. 전 밖에 나가 있을 테니까 필요한 거 있거나 어디 아프시면 바로 부르시고요... 뭐 먹고 싶거나 필요한 건 없으세요?"

카고메는 멍한 눈빛으로 큐브의 얼굴을 주시했다.

아직 치러야 할 시험이 있으니 누워 있어서는 안 된다는 말 따위를 했다간 또 잔소리를 듣게 될 것이 틀림없었다.

큐브라면 한창 잔소리를 퍼붓고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지금 무리하다 종합병원에 실려 가는 것보다는 차분히 쉰 다음 남은 시험에 매진하는 편이 훨씬 낫다고. 사실, 그 말이 정답이기도 했다.

카고메는 힘없이 고개를 저은 뒤 걱정을 끼쳐 미안하다는 말을 중얼거렸다. 운동으로 단련한 덕에 체력에는 자신 있다고 항상 믿어왔는데, 별 것도 아닌 감기에 무너져 내린 자신이 꽤 우스웠다.

빌어먹을 원인 제공자는 따로 있었지만, 어차피 책임져야 하는 것은 자기 자신.

그러나 기다렸다는 듯 치고 올라오는 갖가지 사건에 혼자 대처해야만 하는 현실은 솔직히 감당하기 어려웠다. 생활에 좀 더 여유가 있고, 웃으면서 헤쳐 나갈 수 있는 연륜이 있다면 좋으련만.

카고메는 푹 쉬라며 방문을 닫고 나서는 큐브의 뒷모습을 주시하면서 모든 것을 말해버리고자 하는 강한 충동에 휩싸였다.

켄이치에게 털어놓기에는 마음의 준비가 부족했다. 전혀 관계없는 사람을 끌어들인다는 것도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 머지않아 곧 관계될 것임이 틀림없지만, 원래 그는 프린스 아스팔과는 관계없는 사이였다.

하지만 처음부터 관계가 있는 자라면?

프린스 아스팔에 대한 문제를 상담할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단 두 명밖에 없었다.

용사로서 이름을 날렸던 자신의 양어머니와, 방금까지 자신을 진심으로 걱정하며 돌보던 충직한 집사.

그 둘이라면 그녀의 고민을 진지하게 들어줄 뿐 아니라 그녀에게 가장 도움이 되는 조언을 아끼지 않을 터였다.

"나도 참... 정신이 오락가락하니 별생각을 다 하는구나."

카고메는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꾹 누르며 스스로를 질타했다.

두 사람 모두 훌륭한 조언자들이기는 하다. 하지만 예전에 그녀는 스스로 다짐하지 않았는가. 프린스 아스팔과 정식으로 대면한 날, 절대 이 두 사람을 끌어들이지 않겠다고. 모든 짐을 혼자서 끌어안고, 어떤 결과가 발생하더라도 스스로 선택한 것을 받아들이겠다고.

두 사람에게는 지금도 충분히 폐를 끼치고 있다. 이 이상 기대며 어리광부릴 수는 없다.

독립심이 높고, 다른 고교생들에 비해 지나칠 만큼 근성과 책임감이 남다른 카고메는 자신의 이러한 성격이 문제를 질질 끌어왔다는 것을 눈치 채지 못했다.

프린스와 정식으로 만났던 시점에서 모든 걸 털어놓고 조언을 구했다면 상황은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자신의 입으로 정체를 밝혀야만 하는 상황이 오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카고메는 자신에게 닥친 문제를 두고 너무나도 고심한 나머지, 한 발짝 물러서서 냉정히 바라보면 당연히 떠올릴 수 있는 의문을 간과하고 말았던 것이다.

"...잠이나 더 자야겠다..."

잠시나마 누군가에게 이 감정을 털어놓고 싶다던 마음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지금은 잘 억누르고 있지만, 혹여라도 계속 깨어 있다가 둘 중 하나라도 다시 마주했다간 더 이상 참지 못할 것 같았기에, 카고메는 머리끝까지 이불을 뒤집어쓰고 달아나려 안긴 힘을 쓰는 온기와 잠기운을 억지로 끌어당겼다.

"아가씨, 아가씨! 쉬시는데 죄송하지만 잠시 들어가도 될까요?"

카고메는 사이를 두고 지속적으로 방문을 두드리는 집사의 요청에 한껏 무거워진 눈꺼풀을 겨우 들어올렸다.

뜨뜻미지근해진 물수건을 쳐내면서 들릴락 말락 한 목소리로 웅얼거리자, 큐브는 허락의 뜻으로 받아들였는지 실례하겠다는 전언과 함께 잽싸게 문을 열고 발을 들여놓았다.

대체 무슨 일이기에 이리 야단스럽게 구냐는 눈빛을 담아 째려보자 큐브는 황급히 고개를 숙이며 서두른 용건을 꺼냈다.

"아가씨 친구 분께서 문안 차 방문을 하셨습니다. 지금은 주무시고 계시니 나중에 다시 찾아달라고 말씀드렸는데, 얼굴만 비추고 돌아가시겠다고 한사코 부탁하셔서... 쉬시는데 염치 불구하고 왔습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래서 얘가 갑자기 모자를 푹 눌러쓰고 들어온 거구나...

큐브의 말을 반쯤 흘려들으면서 카고메는 이 와중에 태평한 생각을 떠올렸다.

자신과 함께 이 세계로 건너온 큐브는 이질적인 외모 탓에 사람들의 시선을 피하고자 바깥출입을 거의 삼가고 있었다. 부득이하게 외출을 하거나 누군가와 마주칠 때에는 지금과 마찬가지로 귀까지 덮는 커다란 모자를 쓰고 반쯤 정체를 감추곤 했다.

덕분에 카고메는 그의 말을 제대로 듣지 않고서도 지금 돌아가는 상황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었다.

시험 기간임에도 불구하고 애써 짬을 내어 자신을 보러와 주는 친구라면 그리 많지 않다. 성의를 생각한다면 어서 가서 데려오라고 해야 마땅하겠지만-

"나 지금 약 먹고 자고 있으니까... 미안하지만 오늘은 가달라고 전해 줘. 그리고 혼자 있고 싶으니 너도 빨리 나가고."

카고메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출입 금지의 의사를 밝혔다.

누구든 찾아와준 것은 고맙지만 지금 당장은 아무도 만나고 싶지 않았다. 가족도, 친구들도. 헌신적인 큐브가 같은 공간에 머무른다는 사실도 괴로웠다.

계속해서 누군가가 자신과 함께 있어준다는 사실이 거북하기만 했다. 겨우 마음을 추스르고 있었는데.

이대로 가다간 정말 이성을 잃고 누군가를 붙들고 하소연하게 될 것 같았다. 당장 마음은 편해지겠지만 그 뒷감당을 할 자신은 없었다.

알겠다며 문턱을 나서는 뒷모습을 눈으로 배웅하며 침대의 안쪽으로 자세를 바꿀 무렵, 큐브의 당황한 목소리가 뛰어 들어와 매달렸고, 그녀가 새파랗게 질린 얼굴을 감추기도 전에 닫혔던 문이 다시 열렸다.

환자 앞에서 뭐하는 짓이냐며 항의하는 큐브에게서 고개를 돌린 카고메의 흔들리는 시선이 말없이 우뚝 선 동급생에게로 옮겨져 파르르 떨렸다.

"켄...이치... 네가 여긴 무슨 일로...?"

자신이 생각해도 참 바보 같은 질문이었다. 병문안을 온 사람에게 용건을 묻다니.

켄이치는 근심에 찬 얼굴을 여과 없이 드러내며 조용히 말을 꺼냈다.

"당연히 걱정이 되어서 왔어... 시험 보던 중에 쓰러져서 얼마나 놀랐는데. 실은 끝나자마자 오려고 했는데, 준비할 것도 있고 병원에 입원했는지 집에 있는지 알 턱이 있어야지. 핸드폰도 연락이 안 되고, 무슨 일이 있었는지 너무 걱정이 돼서 견딜 수가 없었어..."

켄이치는 한 마디 한 마디 말을 던지면서 천천히 그녀에게 다가섰다. 그 탓에 정신을 차린 큐브가 그를 저지하고자 그의 팔을 붙들자, 카고메는 황급히 상체를 일으키며 자신이 내린 명령을 충실하게 이행하려는 집사를 만류했다.

"아무래도 둘 다 할 말이 있을 것 같으니까... 큐브는 그만 나가 줘."

큐브는 약간 의심스러운 표정으로 두 사람에게 시선을 던졌다. 잠시 기다리라고 분명히 말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뒤를 따라 남의 집에 발을 들여놓은 무례한 남자와(그와 카고메의 관계를 감안하면 절대 이해하지 못할 것도 아니지만), 아무도 만나려 들지 않다가 갑자기 손바닥 뒤집듯 마음을 바꾼 그녀 사이에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카고메는 자신을 탐색하듯 눈동자를 굴리는 큐브를 향해 약간 인상을 썼다. 그제야 큐브는 켄이치에게서 손을 떼고, 두 사람을 위해 조용히 자취를 감췄다.

소란스러운 공기가 빠져나가자 방 안에는 쥐죽은 듯한 적막감만이 감돌았다.

카고메는 어째서 아무도 보지 않겠다던 내면의 다짐을 깨고 그를 받아들인 것인지 이유를 찾기 위해 잠시 침묵에 빠졌다. 하지만 켄이치는 그 침묵을 참을 수 없었는지 단걸음에 그녀와의 거리를 좁히고 온기가 빠져나간 얼음장 같은 손을 잡아 올렸다.

"미안해..."

켄이치는 그녀의 손에 깍지를 끼며 진심어린 어조로 사과했다.

카고메가 입을 열려고 하자, 그는 우선 자신의 말을 들으라는 뜻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정말 미안해. 면목이 없다. 난... 난 정말 별 뜻 없이 미치루에게 말한 건데, 그것 때문에 네가 그렇게 스트레스를 받았을 줄은 몰랐어. 말하기 전에 먼저 네 생각을 했어야 했는데. 바보같이 들떠서 널 전혀 배려하지 못했어..."

켄이치는 카고메의 손을 꼭 붙든 채 고개를 푹 숙였다. 꽉 잡은 손을 통해 느껴지는 미세한 떨림이 날카로운 비수가 되어 그녀의 마음을 여기저기 쑤셔댔다.

그는 지금 커다란 오해를 하고 있다. 그녀가 쓰러진 것이 자신 탓이라며 가슴아파하고 있다.

카고메는 빠르게 눈을 깜박여 북받치려는 감정을 애써 눌렀다. 조금이라도 방심했다가는 그의 앞에서 희읍할 것만 같았다. 그가 고개를 숙인 덕에 자신의 얼굴을 보지 못하는 것이 천만다행이었다.

그녀의 방은 환자를 배려하여 히터가 쌩쌩히 돌아가고 있었지만, 그녀에게 달라붙은 냉기는 떨어질 줄 모르고 차가운 입김을 퍼뜨렸다.

이 냉기를 가라앉힐 방법은 한 가지 뿐이었다. 카고메 자신이 입을 열어 이야기를 꺼내는 것이다.

어떤 이야기를 해야 할 지는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켄이치의 오해를 긍정하고픈 유혹을 쉽사리 떨치지 못했다. 그렇게만 할 수 있다면... 모든 것을 원래대로 되돌릴 수 있으리라. 단 한 가지만을 제외하고.

"네게 줄 게 있어."

잠시 고개를 숙였던 켄이치는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교복 주머니에서 포장된 케이스를 꺼냈다. 카고메는 조금이라도 더 생각할 시간이 늘어난 것에 감사하며 그의 말을 경청하기 위해 상체를 숙였다.

"실은 그 때 줬어야 했는데... 내가 너무 정신이 없어서... 바보 같이 놓치고 말았지 뭐야."

자기처럼 둔한 사람은 세상에 또 없을 거라며 배시시 웃는 켄이치의 눈망울을 차마 직시할 용기가 나지 않아, 카고메는 손을 뻗어 케이스를 움켜잡았다.

"반지...?"

"어, 응. 프러포즈할 때 같이 줬어야 했는데 너무 기쁜 나머지 까먹고... 언제 건네줄지 타이밍을 보고 있었는데 싸우는 바람에 그만... 하, 하지만 어쨌든 줄 수 있게 되어서 다행이야. 네가 아파서 다행이란 말은 아니고!"

입술을 깨물고 눈을 질끈 감은 그녀의 행동을 부끄러운 탓이라고 단정한 켄이치는 손수 뚜껑을 열어 애써 마련한 실반지를 보여 주었다. 평생 행복하게 해주겠다며 약지에 반지를 끼워 주는 켄이치의 결연한 미소를 보자, 카고메는 지금이 바로 고백해야 할 시간이란 것을 깨달았다.

흔들이는 운명의 향방을 결정해 줄 중요한 시간.

정 입이 떨어지지 않는다면 오늘은 조용히 넘어갈 수도 있다. 하지만...

지금이 아니면 켄이치에게 자신이 직접 고백할 기회가 절대 오지 않을 것이라는 이유 없는 확신이 그녀의 마음을 호되게 질책하고 있었다.

따지고 보면 전혀 근거가 없는 것도 아니었다. 마음을 추스르기 위해 혼자 있겠다던 결심을 깨고 그를 방으로 들인 것도, 은연중에 지금이 고백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라고 느꼈기 때문이 아닌가.

방에 갇히게 된 원인을 제공한 프린스 아스팔의 경고. 말이 좋아 경고지, 그것은 명백한 협박이었다.

만약 카고메가 끝내 진실을 밝히지 않는다면, 아스팔은 당장에도 켄이치 앞에 모습을 드러내 모든 사실을 불어버릴 것임이 틀림없었다.

자신의 인적사항도 빠짐없이 꿰뚫고 있는 남자다. 대체 어떻게 알아낸 것인지는 전혀 알 수 없었지만, 그녀의 주변 사람들에 대한 정보도 술술 외고 있을 거라고 판단하는 편이 좋으리라.

어차피 밝혀질 거라면 차라리 스스로 말해 버리는 편이 나았다. 만약 다른 사람의 입에서 발설된다면 그 때는 어떻게 수습할 수도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될 터.

물론 전면 부정한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생각. 그러한 입장을 취한다면 아스팔 역시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가 믿도록 만들 것이다.

왕자라는 칭호는 겉멋도 아니었고, 그녀가 느끼기에 아스팔은 상당한 수완가. 그 사람이라면 능히 그러고도 남을 남자였다.

"저기, 켄이치... 너에게 꼭 해야 할 말이 있어."

카고메는 느닷없이 열린 깜짝 선물 상자에 대한 감상을 꺼내는 대신 파랗게 질린 얼굴로 띄엄띄엄 입을 열었다. 프린스 앞에서 호언장담했던 대로, 이 남자라면 자신을 구해줄 거라고 주문을 외우듯 연신 되뇌면서.

"...잘 들어. 그러니까... 그러니까... 난 이쪽 세계의 사람이 아니야... 인간인 건 맞지만 이 곳 출신이 아니야."

천천히 진실을 꺼내는 카고메의 눈동자가 부들부들 떨렸다.

켄이치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 소녀가 열에 들떠 헛소리를 하는 건지, 아니면 본인이 말을 잘못 들은 건지 분간이 가지 않았다.

"저기, 잘 이해가 안 가는데. 그게 무슨 뜻이야?"

그는 싱긋 웃으며 카고메를 달랬다.

멀쩡한 자신이 얘기를 잘못 들었을 리가 없다. 몸살 때문에 쓰러졌던 이 아이가 헛소리를 하는 것임이 틀림없다. 아마 본인도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모를 테지. 카고메는 지금 환자니까. 자신이 다독여줄 수밖에 없다.

"그러니까 난... 일본인이 아니라구. 얼마 전까진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지만... 사정이 달라졌어."

"카고메... 아직도 잘 이해가 안 가는데? 네가 일본인이 아니면 뭔데? 외국인? 영국 같은 데?"

"...헛소리라고 생각하는구나?"

켄이치는 당황하며 손을 휘저었다.

"그렇지 않아! 난... 난 그저... 네가 재미있는 농담을 하는구나... 싶었을 뿐이지."

"나도 이게 헛소리였으면 좋겠어. 한숨 자고 일어나면 '내가 그런 말을 했었나?'라고 되물을 수 있는 그런 농담... 하지만 이건 거짓말이 아니야... 전부 사실이야."

"네가... 진짜 외국인이라도 된다는 거야? 난 그런 거 별로 신경 안 써. 네가 설령 외국인이라고 해도, 감정 교류라거나 의사소통을 하는 데는 전혀 문제없잖아. 요샌 귀화하는 외국인도 많고."

카고메는 식은땀이 흐르는 얼굴을 닦으며 재차 말했다.

"외국인이 아냐... 아주 넓은 의미로 보자면 그것도 틀린 말은 아니지만... 이 세계에 존재하는 그 어떤 나라에서도 내 출신을 증명할 순 없어... 난 판타지 소설에서 흔히 나오는 소재처럼 차원이동을 통해서 이 세계로 온 거니까. 그건 내 생명이 달린 문제였고, 당연히 나한테 선택할 권한 따윈 없었지..."

카고메는 켄이치의 시선을 피하고자 눈을 감고 이야기 꾸러미를 풀었다. 정확히 언제인지는 모르겠지만 자신은 프린세스 후보로 정해졌다는 것, 성인이 되면 왕자와 결혼하게 된다는 것, 자신이 살던 나라는 다른 차원에 따로 있다는 것, 자객에 의해 가족을 잃고 이곳으로 도망쳐 온 것...

자신이 기억하고 있는 얘기를 전부 꺼냈다. 수분이 날아간 목이 따끔거렸지만 그녀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아니,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지금... 지금 나더러 그 말을 믿으라는 거야? 난... 난 네가 무슨 의도로 이런 말을 하는 건지 모르겠어. 아무래도 감기가 도져서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게..."

켄이치는 잔뜩 굳은 표정을 보이지 않기 위해 양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그제야 카고메는 켄이치의 손에서 빛나는, 자신의 것과 똑같이 생긴 실반지를 발견할 수 있었다.

지금이라도 질 나쁜 농담이었다고 말하고 싶었다. 그저 네 반응을 보고 싶었을 뿐이라며, 웃어넘기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다. 여기서 장난이라고 맥을 끊으면 정말로 그를 속이는 일이 되고 마는 것이다.

카고메는 마음을 다잡고 조용히 말했다.

"아픈 건 사실이지만 내 정신은 말짱해... 거짓말을 하는 것도 아니고. 잘 생각해 봐... 내가 널 이런 식으로 속여서 무슨 이익을 볼 수 있겠니? 난 싸운데 대해 옹졸하게 복수하는 사람도 아니란 거 너도 알잖아..."

켄이치는 그녀의 애원을 떨치려는 듯 거칠게 고개를 저었다. 힘을 가득 준 주먹이 바들바들 떨렸다. 당장이라도 벽을 치고픈 충동을 억누르며 그는 겨우 입을 열었다.

"난 너한테 믿을 만한 행동만 해 왔다고 자신했는데... 이런 농담으로 날 떠 볼 줄은 몰랐다. 됐으니까 장난이라고 말해... 이런 식으로 사람 인내력을 테스트하지 말라고...!"

카고메는 계속 고개를 돌린 채 그의 얼굴을 피했다. 아무리 노력해도 도저히 얼굴을 볼 용기가 나지 않았던 것이다.

"거짓말도, 헛소리도 아니야. 다 사실이라고. 난 이 세상 사람이 아니야...!"

잠시 사이를 두고, 문이 열렸다 닫히는 둔탁한 소리가 달라붙었다.

켄이치는 그녀의 말에 이렇다 할 대답도 없이 자리를 떴다.

아까까지만 해도 훈훈한 분위기였건만, 지금은 얼음장 같은 분위기가 공간을 지배하고 있다. 마치 꿈 같이...

하지만 절대 꿈은 아니다. 바닥에 떨어져 덩그러니 놓인 케이스가 현실임을 여실히 증명하고 있었다.

"미안해... 정말 미안해... 누구보다도 소중한 너한테 몹쓸 짓을 해 버렸어..."

카고메는 무릎을 끌어안은 채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후회, 연민, 분노, 슬픔, 자책감 등등. 똘똘 뭉친 마이너스 감정들이 진득하게 묻어나와 그녀의 마음을 적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