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사람이 나를 믿고 그 앞길을 응원해 주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축복이 아닐까?

 

 

누군가에게는 평범했을 일상 & 8. 결정은 신중하게

 

 

집에 도착했을 때, 시간은 이미 11시를 훌쩍 넘어 있었다.

잠깐 나갔다 오겠다고 말씀드리고 나왔는데, 아무래도 잔소리를 피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현관문을 열기 전, 카고메는 어머니와 큐브의 잔소리를 덜 들을 수 있는 효과적인 변명거리를 강구할 수 있도록 시험기간 한정으로 발산하는 집중력까지 끌어내 보았다. 하지만...

그런 거 없다.

희망을 갖는 건 좋지만 그 때문에 현실을 부정해서는 곤란하다.

굳이 방법을 꼽아보라면 딱 하나. 쓸데없는 생각할 시간에 그냥 집에 들어갈 것.

카고메는 달콤한 분위기에 심취해 정줄을 놓고 마냥 행복해했던 과거의 자신에게 책임을 떠넘기며(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얼굴에는 보조개가 방울방울 피어올랐다) 조심스레 문을 열었다.

"아가씨! 잠깐 나갔다 오신다더니, 왜 이렇게 늦으셨어요? 저랑 주인님이 얼마나 걱정하셨는지 알아요? 행선지도 말씀하지 않으시고, 핸드폰도 뇌두고 가시고!"

아니나 다를까, 문을 열자마자 충직한 집사의 걱정 섞인 잔소리가 어깨를 투닥투닥 때렸다.

늦은 데는 그 만한 이유가 있었지만(어디까지나 본인 기준), 걱정하다 못해 화를 내는 상대 앞에서 이유를 늘어놓는 것은 비겁한 변명으로 비춰질 수 있음을 다년간의 경험으로 파악한 지 오래다.

일단 최대한 반성하는 표정을 지으며 상대가 조금이라도 화를 누그러뜨리기를 기다릴 것. 사과나 변명은 이성을 되찾고 나서 해도 늦지 않다.

게다가, 진짜로 넘어야 할 산은 따로 있었다. 아마- 아직까지 주무시지 않고 거실에서 그녀가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계씰 그의 어머니.

현관에서 거실까지의 거리는 짧다. 훈계조로 몇 마디를 더 던진 큐브는 거실로 그녀를 데려가면서 나직한 목소리로 무조건 잘못했다고 싹싹 빌라며 충고했다.

고개를 세로로 흔들어 살짝 긍정의 뜻을 비친 카고메는 한번 크게 숨을 들이마시고,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자신을 주시하는 어머니 앞으로 다가섰다. 소파 한 귀퉁이를 가리키는 것으로 무언의 의사를 전한 그녀는 딸을 데려온 집사가 예의바르게 고개를 숙이고 거실을 나가자 늦게까지 돌아다닌 이유를 설명해 보라며 팔짱을 꼈다.

올 것이 왔다.

카고메는 손가락을 꼭 쥐며 어떻게 해야 이 무거운 침묵을 깰 수 있을지 고심했다.

단순히 친구와 놀러나갔다 온 거라면 진작 실토하고 용서를 구했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은 카고메에게 있어 그 어느 때보다도 특별한 날이었다.

사춘기를 겪은 뒤로 친구관계와 생활에 대해 잘 털어놓지 않게 되어버렸는데... 켄이치에게 받았던 프러포즈를 여기서 공개해 버려도 괜찮은 걸까?

지금은 얘기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언젠가는 털어놓아야 할 얘기다. 그것도 근시일 안에.

프러포즈를 받아들인 직후 달콤한 시간을 보내면서 서로의 결심이 흔들리기 전에 추진하는 게 좋겠다며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바로 식을 올리자고 둘이 약속하지 않았는가.

졸업까지 남은 기간은 석 달 남짓. 본래 계획대로라면 센터 시험을 치르고 터뜨릴 예정이었는데.

지금 얘기하나 그 때 얘기하나 결국 털어놓아야 한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미성년자가 스스로의 의지로 결혼하기 위해서는 부모의 조력이 절대적으로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 상황에서 거짓말로 얼버무린 들 별 의미가 없다. 또한 들킬 가능성도 무시할 순 없다. 차라리 정직하게 고백하고 자식으로서 호소하는 것이 더 나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마음을 정한 카고메는 흔들리는 마음을 뒤로 하고, 애써 침착한 어조로 말을 꺼냈다.

켄이치가 자신에게 프러포즈한 것, 자신이 그것을 받아들였다는 것, 졸업 후 식을 올리고 싶다는 것-

물론, 프린스 아스팔이 자신을 찾아와 마음을 흔들어 놓은 것에 대해서는 일언반사도 하지 않았다.

귀가가 늦어진 것과는 별로 상관없었을 뿐만 아니라, 그녀의 마음 한 구석에서 얘기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는 신호를 보내왔기 때문이다.

프린스 아스팔은 카고메와 자신을 거두어 키워 주는 용자의 정체성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만약 여기서 그 이야기까지 끄집어낸다면 미래를 살아갈 장소와 정체성 확립 등의 문제가 거론되어, 가장 중요한 결혼 얘기가 흐지부지 무산될 확률이 높았던 것이다.

"...그리고 저하고 켄이치는 해안 광장에서 산책하면서 많은 얘기를 나눴어요. 주로 미래에 관한 얘기들이요. 같이 사는 얘기부터 시작해서 시험이랑 대학에 관한 것들... 하지만 공부는 나 몰라라 하면서 연애만 한 건 아니에요. 지난번 성적표를 봐서 아시겠지만 저희 둘 다 성적이 그렇게 나쁜 것은 아니고 둘 다 목표하는 대학에 갈 수 있는 성적은 충분히 되니까 그 점에 대해서는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거라 생각해요..."

"카고메."

거의 횡설수설하듯 이런저런 말들을 꺼내놓는 딸의 모습을 물끄러미 지켜보던 어머니는 딸이 잠시 말을 멈춘 틈을 타 조용히 이름을 불렀다.

"귀가가 늦은 것에 대한 이유는 잘 들었어. 하지만 얘기를 들으니 그것과는 별개로 다른 질문들을 좀 해야겠구나. 혹시 지금 한 이야기 말고 더 숨기는 건 없는 거니?"

"....!"

카고메는 어머니의 질문에 살짝 몸을 웅크렸다. 그녀는 딸의 행동을 못 본 체 넘기며 다시 입을 열었다.

"너희가 사귄 기간이 적은 시간도 아니니 그 아이가 네게 청혼한 건 이해할 수 있어. 아직 둘 다 미성년자라 경험도 짧으니, 둘이 좋다는 이유나 같이 있는 시간이 많았으면 좋겠다는 이유로 일찍 결혼하려 하는 것도 공감할 수는 있어. 부모로서 납득할 수 있느냐는 별개의 문제지만.

하지만 그런 점을 감안한다 해도 네 행동에는 이해할 수 없는 구석이 좀 있구나."

카고메는 의아한 얼굴로 어머니를 올려다보았다. 자신은 켄이치 얘기밖에 입 밖으로 내지 않았는데, 자신의 어머니는 대체 무슨 이유로 납득하지 못하시는 걸까?

"고3이 시험을 코앞에 두고 청혼을 했다는 건 어떤 이유로 갖게 된 초조감 때문에 서두른 거라는 뜻이 되지. 그건 아마도 본인의 개인사정 혹은 애인의 행동이나 심경에 변화가 일어났기 때문일 거고, 하지만 난 켄이치 그 아이에게 사정이 있었던 게 아니라 네게 변화가 있었을 거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구나. 청혼을 그 자리에서 승낙한 이유가 뭐지?"

카고메는 고개를 숙이고 시선을 아래로 떨구었다. 이렇게 간단히 들켜버릴 거라고는 전혀 생각 못 했다.

"생각했다한들 어차피 결과는 같았을 테지. 하지만 그 자리에서 덥석 결정하는 것과 시간을 두고 천천히 결정하는 것은 완전히 다른 문제야. 대체 네가 숨기는 것이 무엇이기에, 앞뒤 돌아볼 겨를도 없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 하나를 바로 결정하게 만든 거지?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헤어 나올 수 없는 늪이라도 빠진 거니?"

사냥감을 몰듯, 부드럽고 나긋나긋한 목소리가 천천히 카고메가 자리 잡은 공간을 옥죈다.

카고메는 새삼스레 자신의 어머니가 본래 살던 고향에서 용자라고 불린 사실을 떠올렸다. 자신의 어머니를 용사라고 떠받들던 백성들의 눈썰미는 틀리지 않았다. 용사라는 호칭은 겉멋이 아니었던 것이다.

아니, 지금은 거기에 신경 쓸 여력이 없다. 이 상황을 어떻게 타파하느냐가 더 시급하다.

카고메의 어머니는 카고메가 관계없다고 판단하고 의도적으로 뺀 이야기가 있음을 단번에 간파했다. 이제 와서 숨기는 것은 도저히 무리다.

그렇다면 남은 문제는 - 전부 이야기하는 것이 옳을지, 사실에 기반을 두되 100% 이야기하지 않는 것이 옳을지 결정하는 것.

...아니, 다른 방법이 하나 더 있었다. 어쩌면 지금의 그녀에게 빛이 되어줄 최선의 방법.

성공할지 실패할지는 알 수 없지만 모든 걸 운에 맡기고 시도하는 수밖에 없다.

"사실... 어머니 말씀이 맞아요. 작정하고 숨겼던 건 아니지만... 그건 중요한 문제를 다소(카고메는 특히 이 부분을 강조했다) 경솔하게 결정하게끔 할 정도로 커다란 문제였어요.

아직 완전히 다 해결됐다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는 끝을 봤다고 할 수 있어요. 그게 뭔지 말씀드려야 하겠지만... 어머니, 절 믿고 조금만 시간을 주시면 안 될까요? 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아니, 센터 시험이 끝날 때까지만이 라도요, 그 때가 되면 다 말씀드릴게요. 정말이에요. 그러니까... 지금 당장은 아무것도 묻지 말아주셨으면 해요."

할 말을 모두 마친 카고메는 고개를 들고 가련한 눈빛으로 어머니에게 관용을 베풀어줄 것을 호소했다.

주사위는 던져졌다. 이제는 모든 것을 하늘에 맡기고 기다릴 뿐...

"...그래, 좋아. 네가 그렇게까지 말한다면... 어렸을 때부터 항상 똑부러지게 스스로 잘 해왔으니 이번에는 널 한 번 믿어 보마."

"정말...인가요, 어머니? 정말 고마워요...!"

"대신 조건이 있어."

눈에 띄게 밝아지는 분우기에 찬물을 끼얹듯, 그녀는 조건을 달았다.

"아까 네가 얘기했던 결혼 얘기도, 그 때까지는 판단 보류야. 일단 지금이 가장 중요한 시기라는 건 부정할 수 없으니, 끝날 때까지 당분간은 문제를 캐지 않으마. 자세한 얘기는 일단 시험을 치른 뒤 다시 하도록 하자꾸나. 오늘은 늦었으니, 그만 가서 자도록 해라."

자리에서 손을 털고 일어난 그녀는 몇 마디 더 말을 붙이려는 카고메를 눈짓으로 제압하고 조용히 방으로 돌아가라는 몸짓을 취했다. 카고메는 자신의 판정패임을 깨닫고, 방으로 돌아가기 전, 안녕히 주무시라는 인사를 건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