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즈음 아가씨의 상태가 이상하다.
이런저런 잡다한 얘기들을 조잘거리던 평소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시질 않나, 퀘스트를 수행한 공로로 받아낸 전리품을 하나하나 정리하시질 않나.
심지어 퀘스트에 임하는 모습에서도 예전 같은 열정을 찾을 수가 않다.
나태해졌다는 뜻이 아니다. 퀘스트에 임하는 걸로만 따진다면 오히려 집착하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매달리고 계시니까.
하지만 어쩐지 그 모습이 아가씨의 본심이 아닌, 만들어진 형상이 아닐까 하는 의혹을 감출 수가 없다.
마치 뭔가를 떨쳐버리려는 듯 한 그런 형상.
주인님께선 1등을 지키기 위한 일시적인 불안일 뿐이라며 내 진언을 일축했지만... 아무래도 아가씨가 겪는 심경의 변화에는 뭔가 특별한 이유가 있으리라는 의심을 떨칠 수가 없다.

- 큐브의 집사 일지에서

 

 


정신을 차려 보니 나는 침대에 누워 있었다.
-저승이란 게... 의외로 평범한 곳이었네.
아직 몽롱한 와중에 나는 망연히 생각했다.
축 늘어진 손발은 힘이 들어가지 않았고, 친절하게도 머리에는 차가운 얼음주머니가 올려져 있었다.
제 몸을 녹여가며 차갑게 식혀 주는 감촉은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시원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머리를 짓누르는 지끈거리는 고통은 참을 수 없었다.
눈을 뜬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지금 내가 누워 있던 곳이 어디인지 알고 싶은 마음에, 나는 없는 힘을 쥐어짜내 조심조심 상체를 일으켰다.
아까 잠이 덜 깬 상태에서 농담 삼아 저승이라고 중얼거리긴 했지만... 설마 진짜 여기가 저승일 리는... 없겠지...?
눈을 들어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아무 기척도 존재도 보이지 않았다. 다소 살풍경해 보이는 방 안에는 내가 누워 있는 침대와 작은 석조 테이블과 의자가 전부.

"어, 일어났네?"

나를 부르는 소리에 다시 시선을 움직이자 대체 언제 들어왔는지 한 남자가 문가에 서서 내게 말을 걸고 있었다.
진주와 비슷하게 생긴 머리 장식, 비취색 머리칼의 상당히 수려한 미남 청년이었지만, 같은 색 눈동자며 머리에는 아직 앳된 기색이 엿보였다.
덧붙여 말하자면 내가 모르는 인물이다. 들어온 타이밍과 말하는 투로 봐선 아무래도 날 여기로 데려온 장본인 같은데...
밑져야 본전이니 일단 물어보기나 하자.

"혹시... 그 쪽이 날 이리로 데려온 건가요?"

"그래. 쓰러져 있는 걸 못 본 척 할 수는 없었거든. 사흘 밤낮을 꼬박 자고 있길래 죽었나 싶었는데, 일어난 걸 보니 이제 멀쩡해진 모양이네."

"......"

-멀쩡히 잘 살아 있는 사람을 눈앞에 두고 그렇게 신랄하게 얘기할 필요가...
나는 눈을 모로 하고 그를 노려보았다.
날 구해준 사람이 아니었다면 욕이든 손이든 발이든 뭐 하나는 진작에 나갔을 것이다.

"혼수상태에 빠져 있다 겨우 정신 차린 사람한테 와서 한다는 말이 악담 비스 무리한 거였다는 걸 따지고 싶지만 굳이 그건 입에 담지 않기로 하고... 어쨌든 고맙다는 인사는 해야겠죠."

성격이야 어쨌든 눈앞의 청년은 나를 구해준 은인. 그렇다면 일단 감사 인사는 해 두는 것이 옳을 터.

"말에 가시가 있는 것 같은 생각이 드는 건 내 기분 탓인가?"

"네, 무진장."

청년은 잘못 건드렸다는 듯 뒷머리를 벅벅 긁었다.

"뭐, 네가 그렇게 말한다면 그건 그렇다고 치고... 내가 멋대로 구해준 거니까 그렇게 고마워 할 필요 없어. 그리고 나 생각보다 나이 많지 않으니까 말 놔도 돼."

그는 손사래를 치며 내 인사 같지 않은 인사를 마다했다.

"그것보다 나도 하나 묻고 싶은 게 있는데, 너 대체 거기서 뭐하고 있었던 거야?"

"쓰러져 있었는데?"

바로 되받아쳤다.
그는 잠시 기가 막힌다는 듯이 나를 쳐다보고는 몇 마디를 덧붙였다.

"아니... 그건 나도 알고 있어. 내 말은 왜 모래 구덩이 속에서 쓰러져 있었느냐는 거지."

그의 구체적인 질문에 나는 잠시 입을 다물고 양손을 맞잡았다.
지금의 대화로 혹시 눈치 챈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지금 우리가 있는 곳은 아마 타마란 사막 한 가운데.
내가 타마란 사막으로 발을 들여놓은 건 며칠 전. 저녁 해가 산 끝으로 넘어가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해가 떨어진 사막에서 날 기다리고 있던 것은 몸을 움츠러들게 만드는 건조한 냉기.
나는 그것을 대단찮게 여겼다.
사막의 일교차가 심하다는 것은 기본 상식이었고, 당연히 그에 대한 대책도 마련해 뒀으니까.
사막의 밤은 별로 문제될 게 없었지만 문제는 태양의 위세를 등에 업고 제 세상 만난 듯 설치는 이글거리는 열기였다. 모래바람은 덤이었고.
준비해 둔 마실 것이 전부 떨어졌음에도 나는 드넓은 모래밭을 헤매야만 했고...
설상가상으로 오아시스를 비추는 신기루에 홀려 방향까지 잃고 정처 없이 떠돌다가 어느 순간 정신을 잃어...
퍼뜩 정신을 차리고 보니 이 곳에 누워 있었던 것이다.

"뭐야, 그냥 사막에서 길 잃고 헤매다가 일사병으로 쓰러진 것뿐이었잖아?"

내 설명을 들은 청년이 김샌다는 어조로 중얼거리며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럼 사막에서 달리 뭘 기대했던 거니, 넌?

"근데 넌 대체 날 어떻게 발견한 거야? 근처가 다 모래뿐이라서 쓰러진 사람을 발견하기는 힘들었을 텐데..."

"별로. 산책 겸 순찰 겸 해서 하늘을 날고 있었는데 마침 네가 모래 속에 엎어져 있는 게 보이더라구. 샌드 레이더스 흉내라도 내는 건가 싶었는데 숨을 안 쉬는 거 같기에 그냥 두면 위험하겠다 싶어서..."

"자, 잠깐!"

그에게서 뭔가 걸리는 말을 들은 나는 황급히 끼어들었다,

"왜?"

"타마란 사막이 얼마나 넓은데, 거길 하늘 위에서 순찰하고 있었다고?"

"그게 왜?"

"말이 안 되잖아! 그런 짓을 했다간 얼마 지나지 않아 마력이 바닥날 거라고!"

내 말에 그는 불쌍한 동물을 보는 듯 한 연민의 눈길을 보내왔다.

"야, 너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야? 하늘을 나는데 마력을 쓰다니, 용이 날면서 마력 쓰는 거 봤냐?"

과연. 그렇다면 문제 없...지 않잖아!
나는 다시 욱신거리기 시작하는 머리를 부여잡았다. 그러니까...

"저기 말야, 네 말을 듣고 있자니 왠지 네가 용이라는 것처럼 들리는데..."

"당연히 그렇게 들리겠지. 내가 그렇게 말하고 있으니까."

-역시...
나는 머리를 부여잡았던 손을 내리고 뒤로 엎어지듯 다시 침대에 누워버렸다.
그러니까... 저기 앉아 있는, 어딜 보나 인간으로밖에 안 보이는 저 남자가 용이란 말이지...?
옆에서 보면 꽤 웃길 것처럼 보이는 내 행동을 지켜보던 자칭 용이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뭐야, 너 설마 몰랐던 거야?"

"저기... 난 널 오늘 처음 만났다구. 모르는 게 당연한 거 아냐?"

"얘가 더위를 먹더니 실성을 했나... 야! 너 나랑 만난 적 있었잖아! 아무리 인간이 머리가 나쁘다고 해도 그렇지, 주문으로 날려 버린 상대 얼굴 정도는 예의상으로라도 기억하라고!"

점점 영문 모를 소리를 하는 자칭 드래곤. 그렇게 말한다고 해도 말이지...
요 며칠 내내 나는 계속 사막을 헤매고 있었지만, 맹세하건대 그 누구도 주문으로 날려 보낸 적은 없다. 밤에 체온을 유지하기 위해 모닥불 대신으로 불 계열 공격주문을 외운 게 전부.
그럼 사막을 들어서기 전에는 공격주문을 외운 적이 없느냐고 묻는다면... 물론 있긴 하다. 다만, 거기까지 범위를 넓힌다면 대상자가 너무 많아지기 때문에 도움이 안 된다는 게 문제지.
대체 언제 내가 저 녀석을 날려 보냈다는 걸까. 고개를 갸웃거리는 나를 향해 드래곤이 외쳤다.

"기억 안 나는 모양인데... 그럼 너한테 유적 입장료를 받으려다 깨진 용이라고 하면 알아듣겠냐?"

"용의 유적... 그럼 설마 네가?!"

"이제 기억이 났냨... 컥!!"

"너였구나아아아앗! 그 때 그 건방진 꼬맹이가 너였단 말이지이이이잇! 그 땐 잘도 꽃다운 처녀에게 아줌마라는 망언을 퍼붓고 도망쳤겠다!"

그의 정체를 파악한 나는 전의를 불태우며 그에게 달려들어 멱살을 휘어잡아 흔들어댔다.
-응? 아깐 힘이 빠져서 몸도 제대로 못 가누지 않았냐고?
그거하고 이건 달라!
그 때 문답무용으로 아줌마라 매도당한 내가 열 받았던 걸 생각하면 지금 아파서 기운이 안 나는 것 따윈 별 것 아니라고!

"야, 너 생명의 은인한테 너무하는 거 아냐? 기껏 구해줬더니 은혜는 못 갚을망정..."

"은혜는 나중에 갚을 테니까 일단 그 때 내뱉었던 망언에 대해 먼저 책임져!"

우리가 그렇게 아웅다웅 신경전을 벌이고 있을 때-

"아가씨가 눈을 뜬 모양이군."

제3자의 등장에 나와 그 젠장 맞게 건방진 꼬마는 목소리가 들린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얼굴 여기저기에 검버섯이 올라오기 시작한 초로의 사내. 흰 눈이 내려앉은 머리와 자글자글한 주름살이 그의 나이를 말해주고 있었다.

"그랑파!"

무심코 손을 놓은 틈을 타, 나와 설전을 벌이던 꼬마가 그의 호칭(설마 그게 이름일 리가)을 부르며 달려갔다.
그랑파라 불린 노인은 꼬마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나를 향해 온화한 미소를 지었다.

"환자가 눈을 떠서 참으로 다행이오. 기운도 되찾은 것 같아 한 시름 덜었소."

"예... 소란 피워 죄송합니다."

겨우 내 상황을 깨달은 나는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아니, 아니오. 밖에서 듣자 하니 내 손자가 아가씨께 큰 결례를 범했구려. 예끼, 이 녀석! 여자에겐 아줌마란 말을 쓰는 게 아니다. 특히 이렇게 아리따운 아가씨에게는 말이다!"

손사래를 치며 내 사죄를 마다한 노인은 별안간 자신에게 온 손자에게 역정을 냈다.
-잠깐, 방금 손자라고...

"저, 실례지만... 손자라 함은 역시 어르신께서도..."

노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나도 드래곤이라네. 아가씨가 있는 이 곳은 용의 유적이거든. 그러니 드래곤들이 있는 건 당연한 게 아닌가?"

"그럼... 왜 인간의 모습으로..."

"그야 아가씨가 놀랄 것 같아서 그랬지. 환자니까 놀라게 하면 안 된다고 손자 녀석이 어찌나 성화를 하던지 원... 끌끌."

"그랑파, 내가 언제 그랬어요?!"

"언제 그랬냐니, 이 녀석아.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아가씨를 들쳐 업고 와선 치료를 도와달라며 이 할애비를 닦달하지 않았느냐, 루바."

"......"

나는 어떻게 반응해야 할 지 모르겠다는 얼구롤 번갈아가며 시선을 돌렸다.

"한 대 때려주고 싶어질 만큼 건방 떠는 저 꼬마가 정말 그렇게 말했단 건가요?"

쉰 목소리로 내가 물었다.

"야! 곤란한 얼굴 하고서 아무렇지도 않게 남 욕하지 마!"

"그건 오해야."

옆에서 따지고 드는 루바를 향해 시선을 맞추고 나는 단호히 말했다.

"난 네 욕 같은 건 한 적 없어. 그냥 은근슬쩍 하고 싶은 말을 끼워 넣은 것 뿐이라구."

"...그래? 그렇다면야..."

.............

"그게 그거잖아!"

짤막한 침묵이 흐른 뒤에야 루바는 얼굴을 붉히며 화를 냈다. 겨우 눈치 챘냐.

"자자, 서로 쌓인 게 있다면 이걸로 다 풀기로 하게나. 서로 으르렁거리고 있어봐야 피곤하기만 할 뿐이니."

"그것도 그렇군요."

중재를 나선 그랑파 씨의 제의에 재빨리 찬성하는 나.

"잠깐! 난 인정 못 해, 이런 거!"

대체 뭐가 불만인 건지 요 녀석이 계속 물고 늘어진다. 그렇다면...

"그럼 다수결로 결정합니다. 방금 그랑파 님이 말씀하신 의견에 찬성하는 사람!"

말 끝나기 무섭게 손을 드는 나와 그랑파 씨.

"그럼 결정되었구려. 인석아, 민주주의로 결정한 거니까 남자답게 받아들이거라."

손자가 곤란해 하는 모습이 즐거운 걸까. 그랑파는 함박웃음을 지으며 손자의 어깨를 툭 치며 결과를 수용할 것을 종용했다. 나 역시 그 의견에 목이 꺾어지도록 고개를 끄덕였다는 사실은 굳이 말할 필요도 없으리라.
사실 여기서 이건 '다수의 폭력'이라고 한 마디 던진다면 조금 유쾌한 반응을 볼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런 짓을 했다간 나와 그랑파 양쪽의 체면이 왕창 뭉개질 테니 그냥 입 다물고 있기로 하자.

"그런데 아가씨는 대체 무슨 일로 이 사막에 발을 들여놓았는가?"

내가 그 질문을 받은 것은 소박한 식사를 마치고 식후의 차를 마시고 있을 때였다.

"근처에 세워진 경비소에 주둔하는 인간 병사들이나 성당에 있는 수녀는 가끔 본 적 있지만, 그 뿐이라네. 보통 이런 황량한 사막에선 아가씨 같은 미인은 좀처럼 볼 일이 없거든."

"...전에 인간 수녀더러 미인이라고 침 흘리실 때는 언제고..."

아까의 불만이 아직 가시지 않았는지, 옆에서 루바가 작은 소리로 중얼거린다. 뭐, 직후 그랑파에게 팔꿈치로 옆구리를 찔렸지만.

"그런데 어째서 아가씨는 두 번이나 이런 곳에 왔는지 그게 궁금하구먼."

나는 말없이 찻잔을 내려놓고 무릎 위에 양 손을 가지런히 올려놓았다.
말해도 되는 걸까?
한순간 주저했지만 나는 곧 마음을 정하고 그들에게 시선을 맞췄다.
애초에 내 목적은 친서 전달을 위해 용의 유적을 방문하여(조금 꼬여버렸지만 결과적으로는 잘 도착했으니 이건 제쳐두자), 용족의 우두머리를 알현하는 것이었다.
우두머리를 만나기 위해선 이 드래곤들에게 어느 정도 사정을 설명할 필요가 있었고, 어차피 친서를 넘기게 되면 이들이 사정을 파악하는 것도 시간문제이다.
게다가... 내 생명의 은인이라는 사실도 무시할 수는 없었고.

"실은요..."

나는 어렵사리 운을 떼고 아녀자가 사막을 헤매게 된 경위와 왕국에서의 나의 위치 등을 간략하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여기 있네, 아가씨. 아가씨가 섬기는 왕에겐 이걸 주면 될 게야."

모든 사정을 설명하여 내가 이 곳까지 발걸음을 하게 된 이유를 납득한 그랑파는 내가 건네준 친서를 몇 번이고 정독한 후, 그 자리에서 양피지와 깃펜을 소환하여 한참동안 뭔가를 끄적이더니 빼곡히 글씨를 채운 양피지를 봉인하여 내게 넘겨주었다.

"아, 예... 감사합니다."

나는 내심 놀랄 수밖에 없었다.
인간의 경우 보통 일처리를 하려면 어느 정도 시간을 날릴 것을 각오해야만 하는데, 그 자리에서 용건을 확인하고 바로 답변을 달다니... 일처리를 상당히 빨리 하는구나 싶었던 것이다.
이 용족 어르신이 내가 만나고자 했던 우두머리였다는 사실도 놀라는데 한몫했고.

"하하하, 그런 눈으로 볼 것 없다네. 나는 원체 일거리를 쌓아두는 스타일이 아니라서 말이야. 귀찮은 일은 빨리빨리 해치워야지, 계속 미루고 있어서야 쓰나."

내 시선의 의미를 알아차렸는지 그랑파가 너털웃음을 터뜨려 묻지도 않은 질문에 대한 대답을 꺼내주었다.
상대의 눈빛만으로 그 심정을 읽다니, 그냥 나이만 먹은 건 아니라는 건가.
하기야 큐브도 상대의 언행이나 기색만을 보고서 원하는 정보를 곧잘 손에 넣곤 했으니까, 이 연륜 높으신 드래곤도 못하리라는 법은 없겠지.

"그보다 아가씨, 이 늙은이가 하나 묻고 싶은 게 있소만."

"예, 하문하십시오."

생각지 못했던 전개에 나는 무심코 등을 바로 세워 자세를 고쳤다.
예상컨대, 그 그랑파가 궁금해 하는 것은 적어도 국왕 폐하께서 보내신 친서에 대한 내용을 아닐 터. 그에 대한 질문을 할 것이라면 드래곤들의 의견을 대표하는 목소리를 담은 양피지를 건네주기 전에 먼저 말을 꺼냈을 것이다.
하지만 딱히 용들이 궁금해 할만 한 짓은 별로 하지 않았던 것 같은데... 대체 무얼 물어보려는 건지 도저히 감이 잡히지 않는다.
설마 이제 와서 왜 자기 손자를 손봐주었냐고 물어보시려는 건 아닐 테고.

"아가씨는 자신을 프린세스 후보로서 왕의 친서 전달을 위해 이 곳을 찾았다고 설명했어. 저번에 건방지게 굴던 손자에게 본때를 보여주었던 것도, 오아시스에서 무지갯빛 조개껍질을 찾기 위해 들렀다가 시비가 붙는 바람에 그리 된 게고, 지금 우리가 이렇게 마주하고 있는 것도 그 인연이 닿은 것이라 할 수 있겠지."

"네, 그렇습니다."

동의한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홍차를 한 모금.
아깐 설명을 지나친 것 같아서 보충해 두자면, 내가 저 루바라는 드래곤과 처음 마주한 것은 오아시스에서 무지갯빛 조개껍질을 찾아 오라는 퀘스트를 받아 타마란 사막으로 발을 들여놓았을 때였다.
그 퀘스트를 받았던 당시에는 막 가을에 들어설 무렵이었기 때문에 이번 경우처럼 더위에 지쳐 쓰러지는 일은 면할 수 있었던 거고.
어쨌든 나는 퀘스트 수행을 위해 애써 오아시스까지 가봤지만, 원하는 아이템을 손에 넣는데 실패하고 말았다.
오아시스를 지키는 정령의 말로는 그 조개껍질이 얼마 전 갑자기 사라져 버렸다나.
나는 어쩔 수 없다고 단념했지만, 물론 내 의견 따위가 중요할 리가 없었다.
그래서 나는 전서구를 통해 퀘스트를 내렸던 왕실에 전후사정 설명과 함께 이 시간 이후로 취해야 할 행동에 대해 여쭈는 편지를 보냈고, 답변을 기다리는 동안 주변을 탐험하기로 한 것.
주위를 어슬렁거리던 나는 얼마 안 가 신비한 장소(그것이 지금 내가 들어와 있는 용의 유적이었다)을 발견했고, 순수한 호기심에 들어가 보려던 찰나 어떤 용이 앞을 가로막으며 통행료를 내라고 윽박질렀지.
평소 같으면 치사해서 안 보고 만다며 물러났겠지만, 퀘스트 수행에 문제가 생겨 초조해진 탓에 짜증이 나 있었던 난 정의라는 명분을 내세워 그 맹랑한 꼬맹이를 혼쭐을 내줬던 것이다.
그 뒤로 그 일은 내 마음 속에서 과거의 한 페이지가 되어, 망각의 강물에 떠내려간 줄 알았는데 - 이런 식으로 상기하게 될 줄이야.
잠시 회상의 바다를 헤엄치는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랑파는 양손을 깍지를 끼며 재차 말했다.

"아가씨가 찾던 무지갯빛 조개껍질에 대한 소문은 우리도 익히 알고 있다네. 그것을 소유하는 여성은 반드시 프린세스가 되는 전설이 있다지? 그런데 아가씨가 그걸 찾으러 왔던 시기를 기점으로, 얼마 전에 사라져 버렸고 말야."

"말씀하신 대로입니다."

나는 그의 말에 맞장구쳤다. 왕실을 설득하는데 조금 애를 먹긴 했지만 결국 그 퀘스트를 취소한다는 답변을 받았으니까.
헌데 왜 갑자기 이런 얘기를 꺼내는 걸까?

"여기서 처음 만났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아가씨가 마음에 들었다네. 그래서 가능하다면 아가씨의 행적을 지켜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지. 그래서 아가씨에게 하나 물어보고 싶다고 했던 건데... 아가씨는 왜 프린세스 후보를 지원했나?"

나는 뜻밖의 질문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설마 이렇게 대놓고 개인적인 질문을 할 거라곤 전혀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건... 프린세스가 되어 몰락했던 가문을 다시 일으켜 세우기 위해서예요."

10살 때, 어린 가슴에 품었던 이상을 그대로 들려드렸다. 사실은 반쯤 타의였다는 건... 굳이 운운할 필요는 없을 테지.
그러자 그랑파가 태연한 어조로 말했다.

"그래? 그럼 질문을 바꾸겠네. 아가씨는 지금도 프린세스가 되고 싶은가?"

"아..."

나는 무심코 탄성에 가까운 신음을 토했다.
여자라면 누구나 한번쯤은 꿈꾸는 프린세스의 자리.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숙녀라는 가장 확실한 증거.
그 자리를 동경하느냐고 묻는다면 나는 주저 없이 고개를 끄덕였을 것이다.
하지만... 그 자리를 차지하고 싶냐고 묻는 거라면...
-어...?
문득 나는 한 가지 의문을 떠올렸다.
왜 나는 질문에 대답하지 못하는 거지?

"그랑파! 이제 그만하세요. 뭘 물어보는가 했더니, 왜 그런 사적인 걸 묻고 그래요?"

보다 못한 루바가 불만스런 어조로 중간에 끼어들어 그랑파를 말렸다.

"어허, 인석이. 모르면 가만 있거라. 아가씨 인생에 있어 중요한 분기가 될지도 모르는 중요한 질문이란 말이다."

"할아버지도 참! 프린세스 후보한테 프린세스가 되고 싶냐고 물어보는 게 대체 무슨 의미가 있어요? 차라리 고양이한테 생선을 좋아하냐고 묻는 게 나을... 아얏!"

나를 변호하기 위해서였는지 아니면 그저 이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건지, 끈덕지게 물고 늘어지던 루바는 그랑파가 직접 내린 사랑의 꿀밤을 하나 먹고서야 겨우 입을 다물었다.

"아무래도 아가씨는 질문에 대답할 준비가 되지 않은 것 같으니, 방금 질문은 무시하도록 하게."

손자가 조용해지자 그랑파는 다시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려 진지하게 말했다.

"대신 아가씨보다 오래 산 늙은이로서 몇 가지 충고를 해 주지. 받아들일지 말지는 아가씨 자신이 결정하도록 하고..."

그랑파는 약간 뜸을 들였다 다시 입을 열었다.

"나는 드래곤이니 인간의 정치에 대해 간섭할 수 없는 입장이라 뭐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이것만큼은 분명히 말할 수 있다네. 난 아가씨가 확신이 없는 길을 걷다가 상처를 받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어. 후에 어떤 일이 발생하게 되더라도 항상 마음의 준비를 해서 넋 놓고 당하지 않았으면 좋겠고... 아가씨 자신이 어떤 길을 걷고 싶은지 당당히 대답할 수 있을 만큼 본인에게 솔직해지면 좋겠고... 길이라는 게 반드시 하나만 존재하는 건 아니니까, 너무 1가지 목표에만 매달려서 귀중한 시간을 놓치지 않았으면 하네."

"그 말씀은..."

그랑파는 한 손을 들어 끼어들려는 나를 제지하고 재차 입을 열었다.

"아까도 말했다시피 난 아가씨가 마음에 드네. 아가씨가 섬기는 군주와는 달리 제대로 예우하고 또 조심스럽게 대하고 싶다네. 아가씨는 쓰다 버릴 도구가 아니라 존중받아야 할 존재니까. 하지만 아가씨가 과거의 이상을 계속 품고 나아간다면 조만간 큰 상처를 받고 버려질 거라는 생각이 드는구먼. 경우에 따라선 목숨이 위험해질 수도 있을 걸세."

이번에야말로 나는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옆에서는 대체 무슨 얘기가 적혔기에 이러냐며 루바가 친서를 뺏으려 하고 있었지만 그랑파는 요령 좋게 루바의 손길을 피하며 내게 자애로운 미소를 보냈다.

"......"

대체 그랑파가 들려준 충고에 무슨 의미가 있는지는 모르겠다. 모르겠지만... 그와는 별개로 알게 된 사실이 2가지 정도 있다.
하나, 왕실에서 뭔가의 계획을 암암리에 추진하고 있다는 것. 그것도 나를 포함한 프린세스 후보들에게 나쁜 방향으로. 친서를 접한 후 이런 말을 들려줬다는 걸로 봐서, 내게 그에게 건네줬던 양피지에 비밀의 열쇠가 들어 있는 것임이 틀림없다.
둘, 어디까지나 추론이지만 그 계획은 아마도...
별로 생각하고 싶지 않은 가능성을 떠올리곤 몸을 떨었다. 그다지 생각하고 싶진 않았지만, 매우 있을 법한 일이라는 사실이 나를 불쾌하게 만들었다.
물론 이건 어디까지나 그랑파의 말을 듣고 떠올린 내 상상일 뿐이지만, 충고의 의미를 고려해 봤을 때 그 상상이 현실이 될 가능성은 상당히 높다. 가만히 있어서 좋을 건 없으니 최악의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이 늙은 드래곤의 충고를 가슴 깊이 새기는 편이 좋을 테지.

"저... 말씀은 감사합니다만 괜찮으시다면 저도 하나 묻고 싶은데요..."

"그게 뭐지?"

"어째서 처음 보는 제게 이런 말씀을 해 주시는 거죠?"

'마음에 들어서라고 말하지 않았나' 같은 대답이 들려오는 게 아닐까 했지만-
예상과는 달리 그랑파는 반쯤 삐져서 비죽 입을 내민 루바의 머리에 척 하고 손을 얹으며 호탕하게 말했다.

"그거야, 우리 손자가 아가씨를 신경 쓰고 있으니까. 대체 어떤 여자길래 우리 손자를 제압한 건지 호기심도 생겼고 말이네. 그래서 한 번 만나보고 싶었는데, 연이 닿아 이렇게 만날 수 있게 되어 참으로 기뻐서 그만 주제넘게 나서서 이것저것 참견한 것이라네. 불쾌했다면 사과하겠네."

"아닙니다..."

나는 손을 내저어 괜찮다는 의사를 밝혔다.
뭔가 얼렁뚱땅 넘어간 듯 한 기분이 드는데... 내 착각이려나?
...아니,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지.

"그럼... 방금 말씀하신 이야기를 제 친구들에게 이야기해도 괜찮을까요?"

내 질문에 그랑파는 느닷없이 미소를 지우고 심각한 표정을 떠올렸다.

"내가 아가씨라면 그리 하지 않겠네. 그건 결국 아가씨 뿐 아니라 아가씨의 친구들에게까지 악영향을 미칠 테니까."

그랑파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아가씨 표정을 보아하니 내가 말하고자 하는 걸 대충 이해한 거 같은데, 아가씨의 친구들도 아가씨처럼 냉철하게 상황을 받아들일 거라고는 생각하기 힘들어. 아는 사람이 많아질수록 비밀은 지키기가 힘들고. 같은 이유로 비관계인에게 알리는 것도 추천하지 않는다네. 함부로 입을 놀렸다간 분명 어디서 다치는 사람이 나올 게야. 그게 아가씨가 될 수도 있는 거고."

"그럼... 그냥 손 놓고 있어야만 한다는 뜻인가요?"

약간 쉰 목소리로 내가 물었다.

"지금 할 수 있는 최선은 그렇다네. 몰락한 가문을 일으키고 싶다고 말한 걸 보아하니 현재의 아가씨로선 대항할 힘이 없지 않나. 원하는 미래를 쟁취할 수 있을지도 의심스러워. 만약 내 손자랑 결혼해서 용의 원조를 받는 입장이 된다면 얘긴 달라지겠지만."

그랑파가 유감스러운 어조로 대꾸했다.
-...아무래도 좋지만, 진지한 얼굴로 남을 놀리는 농담은 안 해줬으면 좋겠는데...
옆에선 루바가 '또 같잖은 농담을 한다'며 방방 뛰고 있고.

"...알겠습니다. 친절한 충고 감사드립니다."

또 토를 달았다가 안 웃기는 농담을 듣고 분위기가 썰렁해지는 건 사양이었기에, 나는 어떻게든 상황을 종료하기 위해 내키지 않는 어조로 감사 인사를 웅얼거렸다.
관대한 응대에 감사드리며 갈 길이 머니 이만 실례하겠다는 인사를 남기고, 나는 환자인 만큼 좀 더 머물다 가라는 권유도, 손자를 시켜 바래다주겠다는 성의도 마다한 채 억지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생각보다 손쉽게 얻어낸 답장을 품에 소중히 감추고 유적 밖으로 나온 나는 얼마 전 나를 덮쳤던 태양빛을 떨치며 귀로에 올랐다.
어른어른 피어오르는 열기도 지금만큼은 생각에 잠긴 나를 방해하지는 못했다.
거의 무의식적으로 걸음을 옮기며 나는 그랑파가 던졌던 충고를 되새기려 애썼지만... 애를 쓰면 쓸수록 밑이 없는 수렁으로 빠져드는 듯 한 무력감만이 고개를 드는 기분이었다.
나는... 앞으로 어떡해야만 하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