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 : 이렇게 인터뷰에 응해 줘서 감사합니다, 실비아 풀 양.

실비아 : 아닙니다.

기자 : 극단을 통해 데뷔한 미모의 여가수! '어린 멋쟁이'라는 곡으로 핫 뉴스 10에서 1위! 듣자 하니 실비아 양이 부른 노래들은 전부 직접 작사/작곡한 거라면서요?

실비아 : 네, 그렇죠.

기자 : 자아, 쓸데없는 탐색전은 나중에 시간 나면 검토해 보기로 하고...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죠. 지금 실비아 양을 둘러싸고 있는 가장 큰 이슈들이 뭔진 알고 있죠?

실비아 : (약간 쓴웃음을 지으며)글쎄요... 잘 모르겠는데요. 어떤 이슈인지 궁금하군요.

기자 : (일부러 고개를 갸우뚱하여)아실 것 같은데... 그럼 얘기하죠. 미스 헤이스가 최근에 발표한 소설 'I want to be a princess'의 등장인물들이 미스 헤이스와 실비아 양을 포함해 예전의 프린세스 후보들을 모델로 차용한 거란 이야기가 있는데 그게 사실입니까?

실비아 : (단호히 고개를 젓는다)얼마 전 사인회를 열었던 다렐르 양도 같은 대답을 한 걸로 기억합니다만... 제 대답도 그와 같습니다. 사실이 아니에요. 서문에 분명히 언급했을 텐데요. '이 이야기는 픽션입니다. 실존하는 인물, 단체, 배경, 지명 등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라고.

기자 : 아하, 그럼 일단 읽어는 보셨단 말이군요?

실비아 : 네, 그렇죠. 친구의 작품이니까요.

기자 : (작은 수첩에 뭔가를 끄적인다)흐음... 그럼 다음 질문으로 넘어가죠. 최근에 빈 야드 백작과 열애설이 났다고들 하는데, 그건 사실입니까?

실비아 : (아까보다 더 강하게 고개를 가로저으며)그건...


- 실비아 풀의 인터뷰 중 일부 발췌

 

 

 

#1

헤이스가 소녀와 처음 만난 건 기나긴 여정을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오던 때였다.
저 멀리 외국에 나가 있는 동안 나라에 생난리가 났었다는 소식이 사람들을 통해 헤이스의 귀에 들려왔을 무렵에는 이미 두 용사의 활약으로 전쟁이 종식된 뒤였다.
헤이스는 이제껏 고수했던 떠돌이 광대 짓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전쟁의 타격을 입고 앓는 조국 속에서, 꿈과 안식을 구하면서도 먹고 살기 위해 되레 꿈을 부수며 자기 마음을 상처 입히는 자신의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다.
이대로 기약 없이 방랑하며 배고픈 예능인으로서 살아가는데 신물이 나기도 했고.
자존심도 없냐며 손가락질해도 좋다. 그로서는 자존심을 지키는 것보다 당장 한 끼를 때울 빵 한 조각이 더 절실했으니까.
뭐, 이런 이유로 헤이스는 당분간 방랑예술가 짓을 관두고 부지런히 걸어 드디어 그의 나라로 귀환했는데...
맨 처음 헤이스가 마주한 것은 전란의 쓰라린 아픔을 딛고 마을을 재건하기 위해 기를 쓰는 사람들의 모습과 여기저기 방치되어 돌아다니는 시체들과 누군가의 돌봄이 필요한 병자와 어린아이들이었다.
송장들은 아무데나 처박혀 썩어가고 있었고(심하게도 까마귀들로 뒤덮인 사체들도 몇몇 있었다), 병자들은 제 때 적절한 치료를 받지 못해 신음을 흘리며 죽어가고 있었으며, 어린아이들은 땟국이 흐르는 얼굴로 구걸하기도 하고 구석에 처박혀 뭔가를 열심히 뒤지기도 했다.
그 참담한 광경에 헤이스는 그저 눈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나름대로의 지위가 있다거나 많은 부를 쌓아 두었다면 어떻게든 도울 수도 있었겠지만, 이제 막 귀환한 가난한 방랑 예술가가 무슨 힘이 있겠는가?
돕고는 싶지만 도울 수 없는 자신을 탓하면서 외면하는 수밖에.
다른 마을도 사정은 마찬가지일까, 10여 년 전까지 자신이 살던 고향도 여기랑 별반 다르지 않을까를 고민하던 헤이스는 그만 앞을 제대로 살피지 못하고 맹렬한 기세로 돌진하던 누군가와 정면으로 부딪히고 말았다.
덕분에 몸의 중심을 잃고 쓰러지는 헤이스.
그와 부딪혔던 상대도 사정은 그닥 차이가 없었다.
그 상대가 어린 소녀였단 걸 깨달은 것은 어딜 보고 다니냐는 항의라도 할 겸 누구랑 부딪힌 건지 보기 위해 그가 주변을 두리번거린 뒤였다.
상대가 어른이라면 기어이 사과를 받아냈겠지만, 어린아이를 윽박질러 어른의 권위를 세워봤자 뭣에 쓰겠는가.
헤이스는 작게 한숨을 쉬곤 어기여차 하며 몸을 일으켰다.
다음부턴 앞을 잘 보고 다니란 충고라도 건네 볼까 싶어 말을 붙이려는 순간, 뜻밖에 소녀가 짤막한 부탁과 함께 헤이스 뒤로 숨어버렸다.
어찌된 일이냐고 물을 셈이었다. 소녀의 그 짤막한 부탁이 살려달라는 생의 간청이 아니었다면 말이다.
사정 설명 듣는 건 나중에 하고, 일단 아이를 달래야겠다고 마음먹었을 때 몇몇 무리가 그에게 다가왔다.
허름한 옷차림은 헤이스와 그닥 차이는 없었으나, 딱 2가지 다른 게 있었다. 분노로 이글거리는 눈동자와 한 눈에 알아차릴 수 있는 독기.

"무슨 일입니까?"

헤이스가 물었다. 최대한 정중하게.
성인 남자의 난입으로 그들은 잠시 주춤했으나 이내 본연의 모습을 되찾았고, 그 중 가운데 있던 남자(아마 우두머리이리라)가 한 발짝 앞서나와 헤이스를 쏘아보았다.
이에 질세라 그의 행동을 따라하는 헤이스. 태생적으로 키가 작아 헤이스 쪽이 좀 많이 불리했지만 그건 말하지 않는 방향으로.

"그딴 건 알거 없고 뒤에 숨은 계집애나 내놓으슈."

남자가 으르렁대듯 대꾸했다.
헤이스는 힐끗 뒤로 시선을 돌렸다.
소녀의 고사리 같은 손이 헤이스의 옷깃을 꼭 붙드는 촉감이 느껴졌다.
표정까지는 알 수 없었지만 1가지는 알겠다. 아이가 무서워하고 있단 걸.

"아이는 물건이 아닙니다. 그쪽이 내놔라 마라 할 이유가 없단 말입니다. 인계받고 싶다면 사정을 설명해 주시죠. 아무것도 모르고선 그쪽 말을 따를 순 없습니다."

헤이스는 한층 더 강경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무 연고도 없지만 무서워한단 걸 알면서도 어린 소녀를 살기등등한 놈들에게 넘겨주기엔 헤이스의 양심이 상당히 찔리기도 했지만, 자기보다 키도 크고 건장한 남자들을 보고 있자니 어쩐지 부아가 치밀었던 것이다.
쉽게 말하자면 열폭이라는 녀석이다.

"이 자식을 그냥!"

헤이스에게 시비를 건 놈이 달려들었는데... 아직 멀었다.
헤이스는 타이밍을 계산해 재빨리 그에게 매달려 있던 소녀를 감싸면서 동시에 몸을 반쯤 돌려 놈의 공격을 피해냈고, 그 반동을 이용해 인간의 급소에 냅다 발차기를 먹였다. 남자라면 그 고통을 참을 수 없을 테지.

"으그그그극...!"

예상대로 비틀거리는 놈의 다리를 걸어 엎어뜨리고 마지막으로 배를 걷어차 놈들의 일행 쪽으로 나가떨어지게 만든 뒤, 헤이스는 무표정으로 아직 달려들지 않는 일행들에게 눈길을 돌렸다.
-상대가 키 작은 한 사람이라고 얕보니까 이런 꼴을 당한 게지.
속으로 중얼거리는 헤이스.
그라고 해서 아무 대책도 없이 10년 가까이 떠돌이 광대 짓을 한 건 아니었다.
돈도 지위도 없이 혼자 여행하다보면 각종 트러블에 휘말리게 되는 건 당연지사.
그래서 헤이스는 자신을 지키기 위한 최소한의 호신술을 익혀 왔고 그 덕에 마을 건달들 정도는 그럭저럭 상대할 수 있는 실력을 얻었던 것이다.

"......"

다굴에는 장사 없다는 옛 어른들의 말씀을 받들어 일제히 달려들 거라는 예상과는 달리 남자들은 헤이스를 노려볼 뿐 선뜻 앞으로 나서지 않았다.
-아하, 알겠다.
헤이스는 놈들이 머뭇거리는 이유를 알아챘다.
아마 녀석들도 한꺼번에 달려들어 몰매를 때리면 이길 수 있으리란 것 정도는 알고 있을 거다. 하지만 제일 먼저 덤벼들었다가 본인이 제물이 되는 것은 사양하고 싶을 테지. 더구나 맨 먼저 헤이스에게 달려들었던 놈이 당한 꼴을 생각한다면...

"...그냥 가자."

구원의 손길은 의외로 헤이스가 쓰러뜨렸던 남자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어떻게든 일어서서 일행에게 기대어 선 남자는 헤이스를 죽일 듯 노려보다가 이내 고개를 돌리며 그렇게 내뱉었던 것이다.
이의를 제기하지 않을까 했던 헤이스의 우려와는 달리 그들은 군말 없이 남자의 명령에 따랐다. 우두머리일 거라 생각했던 그의 추측이 맞아떨어진 것 같다.
휴으...
놈들이 완전히 사라졌단 걸 확인하고 나서야 헤이스는 안도의 한숨을 쉴 수 있었다.
겉으론 줄곧 태연한 척했지만 속으론 한꺼번에 달겨들어 몰매를 때리는 게 아닐까 벌벌 떨고 있었으니.
혹시라도 놈들이 아군을 더 데려와 덮칠 경우를 대비해 얼른 이 마을을 뜨자고 맘먹고 움직이려다가, 겨우 생각해 냈다. 소녀의 존재를.
이 소녀는 어떻게 해야 할까 싶어 잠시 바라보고 있자니 잔망스럽게도 소녀가 먼저 헤이스에게 말을 걸었다.
소녀는 그 작고 고운 입으로 분명히 말했다.

"아저씨, 저도 아저씨 따라가면 안 돼요?"

헤이스는 한순간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따라가고 싶다고? 네가? 나를?"

소녀는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헤이스는 난감한 빛을 지울 수 없었다.
아이의 부모가 걱정할까봐서가 아니다.
아까 남자들이 득달같이 달려들려 했던 걸 보면, 이 소녀에겐 부모나 가족은커녕 책임지고 돌봐 줄 보호자조차 없을 것이다. 전란으로 모두 사망했겠지.
아마 의지할 사람 없이 홀로 마을에 남겨져 있었던 게 아닐까? 어째서 그 놈들한테 쫓기고 있었는진 모르겠지만.
헤이스가 걱정하는 건 다른 문제였다.
소녀 앞에서 아까 그 난리를 피웠으니 여기에 이 아이만 남겨두고 마을을 떴다간 결국 그 놈들에게 잡힐 게 뻔하니 다른 고아원이든 마을이든 데려다 주는 게 좋을 거라곤 생각한다만...
하루가 되건 이틀이 되건 헤이스가 소녀를 데리고 다닐 수나 있을까 하는 게 문제.
까딱하면 헤이스가 소녀의 보호자가 되어버려 떠맡는 처지가 될 지도 모르는 거다. 망설이는 게 당연지사.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살기도 힘든 배고픈 예능인한테 아이는 사치이자 짐덩이일 뿐...

"꼬마야, 아저씨는 가난해서 누군가를 건사할 입장이 못 된단다. 게다가 아저씨를 따라가면 네 엄마 아빠도 걱정할 텐데?"

"저한텐 가족이 없어요. 전쟁 때 저만 빼고 전부 돌아가셨거든요..."

혹시나 싶어 던졌던 말에 예상대로의 대답이 돌아왔다.

"제발 부탁이에요! 방해는 안 되게 할게요. 제가 먹을 빵은 제가 구걸해서 얻을게요. 아저씨 꺼 안 훔치구요. 그러니까 같이 가게 해주세요. 네?"

헤이스가 망설이고 있단 걸 알아차렸는지, 소녀가 다급한 얼굴로 허둥지둥 그에게 매달렸다.

"아까 빵을 훔쳐서 쫓겼던 거야?"

헤이스가 묻자 소녀가 풀이 죽어 고개를 끄덕였다.

"네. 여긴 너무 가난해서 구걸하기도 힘들거든요. 훔치는 게 나쁜 거란 건 알지만... 너무 배가 고파서 어쩔 수 없었어요..."

"......"

헤이스는 가만히 소녀의 때가 낀 얼굴을 응시했다. 소녀의 맑은 두 눈과 양쪽으로 묶은 빠알간 리본을 보고 있자니 어쩐지 방금 고민하던 문제 따윈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유는 모른다.
어쩌면 죽은 눈을 갖고 있던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소녀의 눈에선 내일의 희망이 빛나고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아니면 눈물 점을 갖고 있는 것과는 달리 당찬 소녀의 모습이 부러워서였는지도.
어찌됐건... 헤이스는 이 소녀의 푸른 눈동자를 배신하고 등을 돌릴 수는 없었다.
잠시 망설이던 헤이스는 이내 마음을 돌렸다. 소녀와 함께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가기로.
언제부터 자신이 미래를 준비했다고,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일을 갖고 걱정한단 말인가?
진작 미래를 걱정하는 타입이었다면 애초부터 방랑예술가 따위는 안 해먹었을 것이다.
문제가 생기면 그 때 걱정해도 늦지 않는다. 예전엔 사서 걱정하는 것이야말로 제일 바보 같은 짓이라며 조소하지 않았던가.
헤이스는 쓴웃음을 지으며 소녀를 향해 다시 입을 열었다.

"좋다. 어쨌거나 너나 나나 이 마을을 벗어나는 것이 좋을 거 같으니, 일단 같이 마을을 나가도록 하자. 근데 꼬마 이름은 뭐지?"

헤이스의 질문에 소녀는 누구라도 빠져들지 않곤 못 배길 만큼, 천사와도 같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제 이름은 다렐르예요!"

 


#2

마일라노는 말없이 뮤스 산 와인을 따라 잔에 채웠다.
탁한 우윳빛 액체가 코를 찌르는 신내를 뿜어대며 투명도가 낮은 글라스를 조금씩 빨아들인다.
-이걸로 마지막이로군.
마지막 한 방울까지 탈탈 털어낸 것을 확인한 마일라노는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표정으로, 마치 가문의 원수라도 되는 양 가득 채워진 글라스를 노려보았다.
아니, 가문의 원수라는 비유는 너무 심한 건지도 모르겠다. 마지막까지 따라낸 이 와인은 약 반 세기 동안 마일라노 가문과 동고동락했던 각별한 것이니까.
50년이 지나는 동안 뮤스 산 와인은 조금씩 그 이름을 알려 지명도를 넓혀갔지만 마일라노 가문은... 쇄로의 길을 걷게 되었다지.
마일라노의 조부가 가문의 몰락을 원한 건 아니었다. 모든 건 다 그 놈의 빌어먹을 돈 때문이었다.
영지는 물론 귀족으로서의 체면을 유지하기 위해선 정기적인 지출이 필요했지만 유감스럽게도 그 지출을 감당하기엔 마일라노 가문의 수입은 현저히 부족했다.
허나 수입이 부족하다 해서 체면치레를 안 할 순 없는 법.
마일라노 가문은 유지비를 대기 위해 영지를 매각하고, 값나가는 보배들을 매물로 넘기며, 급기야는 여기저기 빚까지 져 가며 체면을 유지했고...
그 행위가 결국 제 살을 깎아 먹는 짓이란 걸 알아차렸을 무렵에는 이미 파산 직전까지 몰려 있었다.
결국 궁지에 몰린 가문은 나라에 도움을 청했고, 꼴랑 500G짜리 연금을 타먹으며 이름뿐인 작위를 유지하는 현재에 이르게 되고 말았다.
삼대가 즐겼던 뮤스 산 와인은 더 이상 찾을 수 없다. 아끼고 아끼던 이 와인도 결국 지금 이 순간이 지나면 영영 이별해야만 한다.
평민이 먹는 것과 같은 질의 빵을 먹어야 한다는 것도, 아리나 거리의 끝자락에서 은신하듯이 살아야 한다는 것도 충분히 고통스러웠지만... 물만큼이나 즐겨 마시던 뮤스 산 와인을 이젠 포기해야 한다는 것과 앞으론 평민들처럼 일을 해서 돈을 벌어야 한다는 사실만큼은 목에 칼이 들어와도 받아들일 수 없을 것 같았다.
뭐, 배가 고파지면 생각이 바뀔 수는 있겠지만.
와장창!
-이 내가, 마일라노 가의 장남인 내가, 가문의 작위와 혈통을 이어받는 유일한 직계 자손인 이 내가 평민 따위처럼 제 손으로 일해서 먹을 빵을 벌어야 하다니!!!
그런 생각을 떠올리자 속에서 천불이 일어난 그는 알 수 없는 분노에 사로잡혀 단숨에 잔을 비우고 글라스를 내던졌다.
쨍그랑 하고 외마디 비명을 지르는 그 행태에 더욱 부아가 치밀어 눈에 띄는 것, 손에 집히는 것 모두를 낚아채 패대기쳤다.

"허억..."

더 이상 손에 집히는 것이 없단 걸 깨닫고 나서야 마일라노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아까 소란의 여파를 뒤집어써 여기저기 생채기를 입은 책상 앞에 주저앉아 그대로 스르르르 바닥으로 무너져 내렸다.
못난 놈, 등신 같은 놈이라며 스스로를 힐난하고 있을 무렵-
마일라노는 무심코 제 눈을 비볐다.
먼지가 들어가서는 아니었다.
별 하나 보이지 않는 어두컴컴한 밤하늘에서 마치 수를 놓듯 유성 비스무리한 게 한 줄기 꼬리를 늘어뜨리며 낙하했던 것이다.
받아들이기 힘든 현실 앞에 떠밀려 제대로 뚜껑이 열린 탓에 헛것을 본 건가 싶어 몇 번이고 눈을 깜박였지만 빛의 꼬리는 사라질 기색이 없었다.
대체 저게 뭐냐는 질문만 홀로 반복하던 마일라노는 결정을 내렸다.
궁금한 게 있다면 직접 가서 확인하면 되는 게 아닌가. 귀찮다면 아예 신경을 끄던가.
여기저기 널브러져 신음하는, 이젠 쓰레기에 불과한 과거의 잔재들에게 잠시라도 벗어나고자 마일라노는 코트를 챙겨들고 밖으로 나갔다. 언젠가 자신의 결정을 엄청나게 후회할 거라는 미래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채.

"......!"

유성 비스무리한 것이 머무른 곳에 다다른 마일라노는 소리 없는 비명을 질렀다.
정체를 판별할 수 있을 만큼 가까이 간 그 곳에는 눈부시게 밝은 빛의 구슬이 떠 있었다. 거기다 그 안에는 자그마한 여자아이가...!
중력의 법칙을 깡그리 무시하는 빛의 구슬은 여자아이를 품은 채 한동안 공중에 떠 있었다.
대체 저게 언제까지 저러고 있을지를 생각하고 있을 때-
빛의 구슬이 서서히 아래로 가라앉기 시작했다. 정확히 마일라노가 서 있는 쪽으로.
-대체 이게 어떻게 돌아가는 상황인지 알 시간 정도는 줘야 하는 거 아냐?!
마음속으로 절규하면서도 마일라노는 자기 쪽으로 하강하는 빛의 구체를 향해 천천히 손을 내밀고 있었다.
내비뒀다간 여자아이가 다칠 것 같다는 배려라든가 호기심 때문이 아니었다.
그가 손을 뻗은 이유는, 굳이 설명하자면... 자신 쪽으로 물건을 던지면 그게 뭐든 간에 무심코 받아버리는 게 인간의 습성 때문이라서, 정도로 해 두자.
아무도 밟지 않은 눈길처럼 순결한 흰 옷을 걸친 여자아이가 그의 품으로 날아들자 구체는 빛의 힘을 잃고 서서히 망그러들었다.
-무심코 받아버렸지만... 이 계집애는 대체...?
이제야 아주 당연한 의문을 떠올리고 있을 무렵, 별안간 어디선가 굵직한 목소리가 들렸다.

"마일라노여..."

그 목소리는 어째서인지 그의 이름을 알고 있었다.
자신을 토성신 새턴이라 소개하는 그 목소리가 다름 아닌 자신의 머릿속에서 울려퍼지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을 땐 이미 다음 대사가 마일라노를 강타한 뒤였다.

"소녀의 이름은 테티스... 테티스는 태어나서 오늘에 이르기까지 성스러운 빛에서 자라 현세의 더러움을 일절 알지 못하는 순수한 영혼이라네..."

밑도 끝도 없이 여자아이의 신상을 고백.
-아니, 그딴 건 아무래도 좋은데, 왜 이 계집애를 나한테 떨어뜨린 거냐고?
따져묻고 싶은 건 많았지만, 마일라노는 성을 내기는커녕 입도 벙긋할 수 없었다.
눈치...라기보단 본능이라 하는 게 더 정확하려나.
본능과도 같은 감각이 그의 입을 틀어막고 있었다.
여기서 말을 끊거나 딴지를 걸었다간 목숨을 부지하지 못할 거라는 공포와, 왜인진 몰라도 절대 거역해선 안 된다는 경외심이 뒤섞여 뇌에 혼선을 일으켰던 것.
인간이 맹수가 쏘는 초저주파를 정면으로 마주한 경우라고 하면 적절한 예시가 될 수 있을까?
...무튼, 마일라노가 멍때리고 있는 동안 '목소리'는 묵묵히 저 할 말만을 전달했다.
빛의 구슬을 제일 먼저 발견한 게 그라는 것, 그래서 마일라노에게 인간의 가능성을 시험하기 위해 아이를 맡기겠다는 것, 테티스인지 뭔지가 죽든 살든 어떤 인생을 살든 그건 마일라노에게 달렸다는 것...
...멋대로 애 떠넘기지 마. 멋대로 애 딸린 홀아비로 만들지 마.
새턴의 말이 끝날 때마다 머릿속에서 따져보지만... 입은 뜻대로 움직여 주지 않는다.

"그럼 부탁하겠네. 나는 하늘 위에서 그대들의 삶을 지켜보고 있겠네..."

그 뒤로도 몇 마디를 더 지껄인 새턴은 마일라노가 가만있는 틈을 타 별안간 작별 인사를 건네고선 깨끗이 사라져버렸고-

"...아차아아아아앗!!!"

제정신으로 돌아온 마일라노가 털썩, 대지에 무릎 꿇고 비통한 절규를 내지른 것은 시커먼 빌 로드 천에 우유를 엎지른 것처럼 하늘의 경계에 균열이 생기고 달이 서산마루에 걸리기 시작했을 무렵이었다.

 


#3

"당신에게도 자식이 있다면, 그리 냉혹하게 우릴 내칠 순 없을 겁니다...!"

저주에 가까운 악담을 퍼붓고도 파트라가 눈 하나 깜박이지 않자, 그제서야 겨우 자기들이 처한 상황을 파악했는지 그에게 추하게 무릎 꿇고 매달린다.
파트라는 눈을 추켜올려 그들을 둘러싼 경비병들을 채근했고, 파트라의 신호를 받아들인 경비병들은 찰나의 망설임도 없이 그의 바짓가랑이를 붙든 여윈 손을 잡아채 무자비한 손길로 그들을 끌어냈다.
그와 동시에 파트라가 손가락을 가볍게 튕기자 파트라의 뒤에서 대기하고 있던 건장한 장정들이 붉은 딱지들을 한 아름 들고 그들의 허름한 집으로 쳐들어갔다. 아마 조금 있으면 여기저기 붉은 압지로 도배된 장경을 감상할 수 있을 테지.
파트라는 울부짖는 전 주인을 끌고 가는 경비병들을 향해 가벼이 모자를 흔들어 보인 뒤 4인승 마차에 몸을 실었다.
아까 그들이 붙잡고 늘어졌던 바짓단에 거지 균이 옮은 것만 같아 기분이 더러웠다.
사실 아까 자신에게 매달렸을 때 어딜 감히 손을 대냐며 걷어차고 싶었지만 그럴 순 없었다. 섣불리 손을 댔다간 폭행 시비에 휘말려 벌금이나 합의금 따윌 내줬어야 할지도 모르니.
아끼던 양복이 더러워진 건 유감이지만... 뭐어, 이미 엎질러진 물이니 어쩔 수 없지. 사기에 기물파손 혐의까지 같이 얹으면 되니까.
파트라가 머릿속을 정리하는 동안 어느 새 마차는 고급 주택가로 들어서 있었다.
귀족들의 저택이 모여 있는 아리나 거리를 지나 그대로 서쪽으로 직진.

"주인님, 자택에 도착했습니다."

마부가 짧은 언질과 함께 손수 문을 열어주었고, 지극히 당연하다는 듯(실제로 그랬지만) 파트라는 마부의 시중을 받으며 집안으로 들어왔다.
들어오자마자 파트라는 서재에 들어가 여러 장부들을 꺼내들고 돈 계산에 들어갔다.
돌아봐야 할 거래처들과 물건 매입들, 뿐만 아니라 가게들이 잘 돌아가는지 체크도 해야 했고, 아까처럼 빌린 돈도 받아내야 하는 등 내일도 할 일이 산더미였기 때문이다.

"주인님, 우편물이 도착했습니다."

예의바른 노크와 함께 서재로 들어온 충직한 비서가 간단한 식사 접시와 함께 편지 몇 장을 가져다주었다.

"그 맨 뒤에 있는 건 뭐지?"

꼬깃꼬깃한 양피지의 주름을 발견한 파트라가 물었다.
비서는 잠시 주춤했지만 결국 그 시선에 맞서지 못하고 백기를 들었다.

"버클러 씨가 보낸 편지입니다."

"흥, 보나마나 납부 기한을 늘려달란 거겠지."

파트라가 콧방귀를 끼었다.

"읽어봐야 시간 낭비야. 그 친구도 멍청하군. 가뜩이나 살림도 부족한 주제에 양피지마저 축내다니."

파트라는 혀를 끌끌 차며 질 나쁜 양피지를 낚아채 대충 글씨를 읽어 내렸다.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로군.

"답장은 자네가 대신 작성해 주게. 잔말 말고 기한 내로 돈을 갚으라고. 그렇지 않으면 미랜더 일가의 전철을 그대로 밟게 될 거라고 말이야."

덥석 양피지를 구기며 파트라가 지시를 내렸다.

"알겠습니다."

비서가 억양 없는 어조로 대꾸했다.
대답하기 직전, 파트라는 비서의 얼굴 근육이 살짝 찌푸려지는 걸 잡아냈으나 구태여 입에 올리지는 않았다.
그 부분을 지적했다간 조금은 동정심을 갖는 게 어떻겠냐는 설교를 듣거나 파트라가 잘못 봤다는 변명을 늘어놓을 것이 뻔했으므로.

"그 밖에 뭐 보고할 거 있나?"

파트라는 다른 양피지 뭉치를 집어 들며 지나가는 투로 물었다. 젠장, 또 그 잘난 세금을 내라는 통보문이구먼.

"지금으로선 없습니다."

"그래? 그럼 나가보도록. 처리할 일도 많고 하니 별 일 없다면 오늘은 더 이상 들락거릴 필요 없네."

비서는 주인의 말을 알아들었다는 표시로 살짝 고개를 숙여 보이곤 뒷걸음질 쳐 그대로 서재 밖으로 나갔다.
파트라는 시간을 조금이라도 아껴보고자 세금을 내라는 둥 언제 어디로 초대하겠다는 둥 지껄이는 양피지들을 주르륵 펼쳐들면서 그가 좋아하는 건포도, 완두콩, 피클, 슬라이스 파프리카, 칠리소스에 백포도주를 끼얹은 닭고기를 곁들인 샌드위치를 한 입 덥석 베어물었다.
이런 식으로 식사하는 건 그다지 내키지 않지만 월말까지는 일이 잔뜩 밀려 있으니 어쩔 수 없지.
파트라는 식사하는 속도에 맞춰, 일전에 그가 세워놓았던 적절한 기준법에 따라 편지들을 분류하는 작업을 개시했다.
옆에서 보기엔 뭐가 뭔지 종잡을 수 없는 것처럼 보일지 몰라도, 이 방법을 쓰면 몇 배는 더 빨리 일을 처리할 수 있는 것이다. 본인을 기준으로 했을 때의 얘기지만.

"끄응차..."

얼마나 시간이 흐른 걸까.
파트라가 이상한 신음소리를 흘리며 기지개를 켠 것은 차올랐던 달의 무리가 눈에 띄게 기울어져 있을 즈음이었다.
무심코 시선을 준 벽시계는 이미 오래 전에 자정을 훌쩍 넘겼고 어느 새 새벽 2시를 향해 헐레벌떡 달려가고 있었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군..."

파트라는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끙차 하고 몸을 일으켰다.
오랫동안 한 곳에 처박혀 있었단 증거로 일어나자마자 몸 구석구석이 자지러지는 비명을 질러댔다. 거 참, 시끄럽구먼.
예전 같지 않은 자신의 팔다리에게 욕하는 것도 어쩐지 우스워져, 파트라는 욕지기 대신 인상을 찌푸리는 걸로 삐걱거리는 자신의 신체에 경고를 주곤 짤막한 입김을 불어 등잔을 끄고 서재를 빠져나왔다.
오늘은 피곤하니 잠이 참 잘 오겠다는 둥 실없는 농담을 중얼거린다.
신께서 그의 염원을 들어준 것인지, 거위 깃털을 잔뜩 집어넣은 베개에 머리를 얹자마자 졸음이 달려들어 눈꺼풀을 감기기 시작했다.

"......"

꿈과 현실의 경계선에 선 파트라는 저도 모르게 터져 나오는 하품을 막을 새도 없이 곧바로 잠의 세계에 빠지기 시작했고...
........
어둠 속에서 그는 하늘하늘한 푸른 비단을 걸친 한 여성과 조우했다.
누구냐고 묻는 파트라의 질문에, 태양까지 닿을 것만 같은 맑고 청아한 목소리로 그녀는 입을 열었다.

"그대, 이익을 추구하는 상인이여... 나는 대지의 새벽을 관리하는 자."

대체 뭔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인가 싶어 눈을 치켜뜨는 파트라에게 자칭 뭐시기라는 여자가 말을 잇는다.

"나는 요정의 여왕. 그대의 인생은 이익을 쫓고 이익에 쫓기며 재물을 쌓음에 안식은 없다..."

파트라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가 뭘 쫓든 뭐에 쫓기든 말든 대체 저 여자가 뭔 상관이란 말인가.
-꿈을 꿔도 뭐 이딴 꿈을 다 꾸냐.
뭐라고 한 마디 날릴까 싶어 입을 벌려 봤으나 공교롭게도 목소리가 나오질 않는다.
게다가 어째서인지...  꿈이 틀림없을 텐데도 다시 졸음이 쏟아지기 시작한다...
아, 젠장... 저 미친 년이 또 뭐라고 하는데... 들리지가 않...

"...그대에게 아이를 맡깁니다. 이름은 펠리시아랍니다... 이 아이는 꿈꾸는 여자아이. 아침이슬에서 태어난 순수한 꿈을 품은 소녀... 그대의 힘으로 이 아이의 꿈을 이루어 주세요. 그리고 당신도 좋은 꿈을..."

...서서히 눈을 감기 시작한 파트라의 귓가에 여자의 아련한 숨결이 다가와 마지막 숨결을 토해냈다...

"잠에서 깨면 그대는 과거의 일을 잊게 됩니다. 그리고 그대 앞에 새로운 인생이 펼쳐질 겁니다..."

 


#4

레이븐은 요근래 묘지를 돌아다닌다는 정체불명의 침입자를 퇴치하기 위해 묘지기의 의뢰를 받아 며칠 동안 그 대신 묘지를 지키고 있었다.
물론 처음에는 거절했었다.
묘지를 돌아다닌다는 정보에서 바로 유추할 수 있는 건 단 하나, 유령의 존재.
레이븐은 검이라면 어느 정도 다룰 수 있었지만, 아쉽게도 유령은 검만으론 어찌할 수 있는 녀석이 아니다.
실체가 없는 존재이기 때문에 격투나 검이 아닌 마법을 쓰거나, 유령의 성격을 분석해 전의를 깎는 방법밖에 없다.
그렇다면 레이븐 같은 떠돌이보단 마도사나 주술사를 고용하는 것이 당연지사.
그래서 레이븐은 의뢰를 거절하고 묘지기에게 그 이야기를 꺼냈는데...
묘지기에게선 이미 마도사는 고용해 봤으나 아무 소용이 없었다는 대답만 돌아왔다.
제발 어떻게 좀 해달라며 매달리는 그의 절박한 얼굴을 보고 있자니 레이븐은 차마 그 마도사가 돌팔이였을 거라거나, 마법으로도 어쩌지 못한 걸 떠돌이 검사에 불과한 자신이 어찌할 수 있겠느냐는 딴죽을 걸 수가 없었다.
결국 해결할 수 있다는 보장이 없으니 의뢰료를 안 받는다는 조건으로 '그것'이 나타날 때까지 대신 망을 봐 주기로 약속한 건데...
이미 한밤중을 훌쩍 넘긴 시각이었을 것이다.
달조차 구름 속에 숨어버려 의지할 수 있는 거라곤 허리춤에 찬 동방도와 왼손에 든 여리여리한 호롱불 뿐.
무섭냐고? 천만에!
마도사가 두 손 들어버렸단 대목이 조금 마음에 걸리긴 하지만... 보나마나 마도사 행세를 하던 돌팔이가 뻥치다가 제 능력 밖의 일임을 깨닫고 도망친 게 틀림없을 터.
그게 아니라면 마도사의 실력으론 어찌할 수 없는 굉장한 것이 이 주변을 어슬렁거린다는 말이 퇼 테지.
하지만 솔직히 말해 레이븐은 그다지 걱정하지 않고 있다.
만약 진짜 막강한 몬스터가 눌러앉은 것이라면 이 곳은 애저녁에 쑥대밭이 됐을 거다.
하지만 묘지기의 증언도 그렇고, 레이븐이 몇 번이고 둘러본 바로는 곳곳에 흔한 잡초가 자라는 것 말고는 이상한 점 같은 건 없었다.
당초 예상대로 유령이었다면 이미 누군가는 목격했을 테고.
그 존재가 뭔지는 전혀 가늠할 수 없었지만, 적어도 '그것'은 사람들을 해칠 적의는 없는 것 같았다.
그럼 그냥 놔둬도 괜찮지 않느냐고 말할지도 모르지만...
어떻게 처리할 지는 둘째 치고, 그 정체를 밝혀야 한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가만 냅둬도 문제없다고 절대로 확신할 수 있는 근거도 없고.
게다가 그게 뭔지 알 수 없는 이상 내면의 공포를 누르는 것은 불가능할 터.
인간이란 눈에 보이는 공포에는 익숙해질 수 있어도, 보이지 않는 공포에는 결코 견딜 수 없는 동물이니까.

"...?!"

또 슬슬 순찰이나 돌아볼까 싶어 대지와 일심동체가 되어 있었던 다리를 움직여 크게 한 걸음 내딛음과 동시에.
갑자기 대지 속에 움츠린 풀이 검은 기운에 매달려 실없이 흔들리고-
그 다음 순간, 누군가의 기척이 한 밤의 묘지에 불어 닥쳤다!
-왔구나!
내려앉은 기척을 감지하고 무심코 돌아본 그 곳에는 어둠을 등지고 튀어나오는 허여멀건 그림자가 하나!
하느작거리는 호롱불을 훅 불어 내버리고, 허리춤의 동방도를 꺼내 그림자가 자리한 곳을 향해 있는 힘껏 휘둘렀다.

"아니...?!"

상대를 놓치고 레이븐은 무심코 탄식을 내뱉었다.
완벽한 타이밍에 휘둘렀다고 생각한 검은 허무하게 허공을 갈랐을 뿐.
대체를 정비하고 고개를 들자 저만치 앞에 허연 그림자가 서서 다시 그를 도발하고 있었다.
아까와 다른 점이라면 그림자의 형체가 무엇인지 짐작할 수 있다는 점이랄까.
확신할 순 없지만 모양으로 유추했을 때... 하얀 순록이 아닐까 싶은데.
그 등에 뭔가 얹혀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지만, 이 거리에선 알 수 없다.
그 순간, 그림자가 다시 움직였다.
레이븐 쪽이 아닌 반대 방향으로.
묘지 밖으로 나갈 거라곤 예측하지 못했기에 레이븐의 대응이 일순간 늦었다.
어떻게 해야 할까 고민했던 건 아주 잠깐 동안이었다.
레이븐은 주저하지 않고 그림자를 따라 묘지 밖으로 뛰쳐나왔다.
호롱불을 내팽개친 탓에 아무것도 없이 칠흑 같은 거리를 내달릴 수밖에 없는 레이븐을 하얀 그림자는 끊임없이 유혹해 왔다.
이유는 간다. 그림자는 단 한 번도 그의 시야에서 벗어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얼마나 그림자를 쫓았을까. 피곤해지기 시작한 다리가 가혹한 처사에 비명을 지르기 시작할 무렵, 그림자의 움직임이 딱 멎었다.
이에 맞춰 걸음을 멈추고 한 발짝 한 발짝 천천히 다가서는 레이븐.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림자는 도망치는 기색 없이 그저 가만히 서서 다가오는 그를 응시하고 있을 뿐.
사정거리 안에 들어오고 나서야 레이븐은 그림자가 태우고 있던 존재가 무엇인지 알아볼 수 있었다.
어깨까지 내려온 바이올렛 향기.
미풍에 흔들리는, 유일하게 그녀가 소녀임을 가늠할 수 있게끔 하는 붉은 리본.
마치 기억상실증에라도 걸린 것처럼 아무 표정도 떠오르지 않은 파리한 얼굴.
미간 정중앙에 박혀 있는 볼록점.
-인간 소녀가 어째서 순록이랑 여기에...?
머릿속에 당연히 떠오르는 의문을 정리할 새도 없이, 순록에서 뛰어내린 소녀가 흰 옷자락을 흩날리며 레이븐의 품에 뛰어들어 안긴다.
이 상황을 대체 어떻게 받아들여야 좋을까 고심하는 동안, 하얀 순록의 형상을 하고 있던 그림자는 조금씩 그 형태를 무너뜨리더니 별안간 그 모습을 감춰버렸다.
-사라진 건가...?
레이븐의 품에 뛰어들어 움직이지 않는 소녀의 머리에 손을 얹으려는 찰나, 그림자가 서 있던 장소에서 다시 빛이 모여들더니 어떤 남자의 형상으로 변모했다!
이제 와서 일일이 놀라는 것도 바보 같은 짓.
레이븐은 짐짓 냉정한 표정을 지어 그것을 쏘아보았다.
레이븐의 표정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남자는 그에게 근접하더니 느닷없이 무릎을 꿇고 아랫사람이나 할 법한 예를 갖추고 말을 걸기 시작했다.

"안녕하십니까, 레이븐 님. ('대체 내 이름은 또 어떻게 안 거야?' 레이븐은 속으로 절규했다) 예기치 못한 상황과 맞닥뜨려 지금 상당히 당황하셨겠지요."

"빙빙 돌리는 말투는 관두고, 대체 당신은 누구지? 이 아이는 또 뭐고?"

레이븐이 물었다.

"제 이름은 라파엘. 본 모습은 보셨다시피 하얀 순록입니다."

자칭 순록이라는 남자가 대답했다.
-아니, 내가 누구냐고 물어본 건 이름이 궁금하단 뜻이 아닌데...
레이븐이 마음속으로만 딴죽을 걸었다.
레이븐의 마음 속 갈등을 알 리 없는 라파엘은 살짝 고개를 들어 그 쪽으로 시선을 올렸다.

"저 소녀의 이름은 메이비스... 메이비스는 저번 전란 때문에 목숨을 잃고 구천을 떠돌던 가여운 영혼입니다. 어린 나이에, 그것도 제 명대로 살지 못한 메이비스를 성령왕께서 불쌍히 여겨 그녀를 소생시키고, 저를 시켜 메이비스를 대신 키워줄 부모를 찾고 있었습니다. 헌데..."

라파엘은 잠시 말을 멈췄다.
그러나 그는 이미 자신의 용건을 밝힌 거나 마찬가지였고, 레이븐은 저 라파엘이란 작자가 뭘 부탁하려는지 알아차리고 말았다.
이러니저러니 말했지만 그에게 안긴 메이비스라는 여자아이는 유령이었고, 제 2의 삶을 살기 위한 준비 단계로 그녀를 맡아줄 부모를 찾고 있었다는 건가.
왜 하필 그를 지목했는지는 모를 일이지만... 궁금한 게 있다면 물어봐야지.

"뭔 말을 하려는진 잘 알겠다만... 궁금한 게 있다. 왜 하필 나지?"

짧은 질문에는 여러 가지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 그걸 라파엘이 알아차릴지는 미지수.

"저와 메이비스를 알아본 인간은 당신이 유일했으니까요."

라파엘이 말했다.
과연, 그렇다면...
..............

"그런 걸로 납득이 되겠냐아아아앗!"

무심코 레이븐은 고함을 질렀다.
무엇이 문제냐는 듯 의문 부호를 떠올리는 그를 향해 레이븐은 재차 소리쳤다.

"아이의 부모를 결정하는데 그런 안일한 기준이 세상에 어딨나? 게다가 내 행색을 보면 당연히 눈치 챘을 거라 생각하는데, 내 입으로 밝히긴 좀 뭣하지만 난 별다른 직업도 없이 세상을 떠도는 방랑자라고? 딱 봐도 내가 제대로 되 부모 역할을 할 수 있을 리 없잖아?"

"...후우... 알겠습니다. 그렇게까지 말씀하신다면 어쩔 수 없군요."

레이븐의 진심어린 간청이 통한 건지, 라파엘이 한숨을 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행히도 그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잘 알아들은 것 같...

"제대로 된 부모 역할을 할 자신이 없어 거절한다는 건 바꿔 말해 역할을 잘 수행할 수 있다면 메이비스를 맡아 주겠다는 말씀이시죠? 걱정하지 마십시오. 이 라파엘이 당신의 집사가 되어 곁에서 있는 힘껏 돕도록 하겠습니다."

...기는 개뿔이.

"아니 잠깐. 내가 말하려는 건 그게 아니라..."

이대로 있다간 결혼도 안 한 총각(그의 얘기다)이 졸지에 애 딸린 홀아비가 되어 아낙네들의 입에 오르내릴지도 모른다.
어떻게든 라파엘을 설득하기 위해 레이븐은 그에게 다시 말을 걸었고, 소녀를 냅둔 채 대화를 질질 끌어-

"하아..."

레이븐은 한숨을 쉬었다.

"...하루종일 여기 서 있을 순 없으니 일단 돌아가서 이야기하지..."

레이븐은 라파엘의 끈덕짐에 결국 백기를 들고 말았다. 그에게 설득당해버리고 만 것이다.

"알겠습니다, 주인님."

대체 뭐가 그리 좋은 건지.
라파엘은 해맑게 웃으며 메이비스를 안아들었다.
레이븐이 할 수 있는 거라곤 보란 듯이 한숨을 쉬며 터벅터벅 원래 있던 곳으로 앞장서는 것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