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략...)
제가 라벤더 아가씨를 따라 인간계에 정착한 지 어언 10년이 흘렀습니다.
아가씨가 염원하던 프린세스는 결국 될 수 없었지만, 미래를 개척하려는 꿈만은 포기하지 않았지요.
장사로 성공한 양아버님의 뛰어난 두뇌를 이어받은 아가씨는 프린세스 간택을 위한 여행 중에서도 짬을 내어 열심히 지식을 쌓았고, 2년 전 후보 자리에서 물러난 뒤에는 더욱 공부에 매진하여 결국 전 과정을 마치고 마침내 박사 학위를 따냈다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라벤더 아가씨가 꿈을 이루지 못한 건 유감이지만, 그래도 본인이 하고 싶어 하는 일을 찾은 것 같아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라벤더 아가씨와 경쟁했던 다른 분들 역시 각자 살 길을 찾았답니다. 다렐르 아가씨는 특유의 센스를 살려 소설가로 등단했고, 실비아 아가씨는 극단에 들어가 가수로 데뷔했고, 캐널 아가씨는 2년 전부터 성기사가 되어 서부 변방에서 활약하고 있다 합니다.
내용에서 이미 짐작하셨으리라 생각합니다. 저는 지금 라벤더 아가씨 곁에 있지 않아요.
저는 현재 라벤더 아가씨의 명으로 실비아 아가씨의 곁을 지키고 있습니다.
예능인이 되었으니 매니저 하나쯤은 있어야 하지 않겠냐며 라벤더 아가씨가 밀어붙인 탓이랍니다.
어차피 자신은 그동안 밀린 공부를 해야 하니 집사가 필요 없다면서 말입니다.
그래서 지금은 실비아 아가씨와 여러 마을을 다니며 아가씨의 노래를 들려드리고 있어요. 쓰다 보니 든 생각인데, 퀘스트 해결을 위해 여행하던 과거로 돌아간 것 같은 기분이네요.
아, 실비아 아가씨가 절 부르기 시작하네요. 보나마나 새로운 노래가 대중에게 히트칠 수 있을지 들어달라고 할 요량이겠죠.
아무래도 보고는 여기서 마쳐야 할 것 같아요. 아가씨들 사이에서 또 무슨 일이 생긴다면 바로 소식을 띄우도록 하겠습니다...

- 요정여왕에게 보내는 우즈의 편지 중 일부 발췌

 


다렐르는 방금까지 무서운 기세로 펜을 놀리던 손을 멈추고 쭈욱 하고 기지개를 켰다.
그 반동으로 주인의 손에 매달려 임무를 충실히 수행하던 새하얀 거위 깃털이 파르르 떨리며 잔뜩 빨아들였던 검은 잉크를 한 움큼 토해내고 말았다.
떨어진 잉크가 자신의 얼굴을 파고들어 마치 진짜 눈물처럼 한쪽 볼을 타고 흐른다는 것조차 눈치 채지 못한 채, 다렐르는 책상에 널브러진 양피지 뭉치들을 순서에 따라 집어 들어 한데 모아 커다란 종이봉투에 넣어 봉해버렸다.

"이제야 다 끝마쳤어!"

푸른 두 호수 속에서 조용히 타오르는 열정과 환희를 여과 없이 방출하면서, 다렐르는 꼭 닫아 두었던 방문을 열어젖히고 뛰쳐나와 자신의 동거인을 향해 새된 목소리로 끽끽거렸다.
아니, 동거인이라는 표현은 옳지 못하다. 엄밀히 따지자면 다렐르가 라벤더의 집에서 신세를 지는 중이었으니까.
18세가 되어 성인이 된 소녀들은 현실로 닥친 시련을 딛고 일어나 자신들이 가진 능력을 살려 제2의 인생을 계획해 나아갔다.
캐널은 성기사가 되어 충직한 집사와 함께 타마란 사막으로 떠났고, 실비아는 가수가 되기 위해 극단에 들어갔고, 라벤더는 박사 학위를 받기 위해 책과 씨름하는 나날을 보냈고, 다렐르는 양아버지의 영향으로 갈고 닦은 감수성을 이용해 작가의 길로 들어섰다.
왕실에서 8년간 추진했던 프로젝트를 갑자기 엎어버린 날, 캐널을 제외한 소녀들은 라벤더의 집에 모여 신세 한탄과 앞으로 어찌해야 할지에 대해 논의하여, 프린세스가 되는 것 외에 본인들이 하고 싶었던 것을 떠올려 또 다른 미래를 손에 넣기 위한 노력에 들어갔다.
가가가 무슨 꿈을 꾸건 서로 격려하며 도와주자는 약속에 따라, 소녀들은 자신이 나갈 방향을 정하자마자 친구들에게 자세한 사정을 알렸고-
그 중심에 서서 본인들이 원하는 목표에 정진할 수 있도록 특히 힘써 준 것은 전(前) 프린세스 후보들의 리더 격이었던 라벤더 벨로우즈였다.
가수가 되겠다며 입단한 실비아에게 이런저런 핑계를 대고 우즈를 딸려 보낸 것이라든지, 집필 활동에 전념하겠다는 다렐르를 불러 와 굳이 자신의 집에서 같이 살게 한다든지 하는 것 등등.
우연의 일치인지 다렐르, 라벤더, 실비아의 아버지들은 모두 직업 특성(?) 상 집에 붙어 있는 날이 거의 없었다.
거기다 실비아는 극단에 들어간답시고 집을 나왔으므로, 이래저래 슬럼가에 아는 사람 없이 홀로 처박혀 있을 다렐르가 불쌍했기에 라벤더가 먼저 같이 살자며 손을 내밀었던 것이다.
물론 이런 속사정을 낱낱이 고백하는 건 그녀의 자존심이 허락지 않았으므로 혼자 집 지키기는 심심하다느니 공부하다 자칫 해이해질 수 있는 마음을 다잡아줄 친구가 필요하다느니 하는 핑계거리들을 전면적으로 내세웠지만,

"그래? 다 끝났다니 일단은 안심이네. 하도 방 밖으로 나오질 않기에 글 쓰다가 병조림이라도 된 게 아닌가 싶었거든."

안락의자에 앉아 따끈한 홍차를 즐기던 집주인이 장난스런 눈웃음을 흘렸다.

"다 썼으면 어디 좀 보여줘. 보내기 전에 먼저 이 언니가 한 번 읽어 봐야지."

"누가 언니야, 누가."

"내가 생일이 넷 중에서 제일 빠르니까 당연히 언니지!"

"잘났어, 증말. 대신 다 읽고 나서 솔직한 감상평 부탁해. 참, 원고는 13일까지 넘겨야 하니까 잃어버리거나 더럽히면 곤란해. 말 안 해도 잘 알고 있겠지만."

라벤더의 반응을 어느 정도 예상했었던 걸까.
다렐르는 라벤더의 요구가 떨어짐과 동시에 밀봉한 종이봉투를 끄집어내 그녀에게 넘겼다. 그래도 혹시 모를 사태를 대비해 잔소리를 곁들이는 것도 잊지 않았다.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봉투에 필기체로 크게 휘갈긴 'I want to be a princess'라는 제목을 대충 훑어 넘기던 라벤더의 움직임이 딱 멈췄다. 잠깐만, 13일이라고?

"오늘이 무슨 요일이지?"

라벤더가 물었다.
다렐르는 대체 뭘 묻느냐는 시선으로 라벤더를 빤히 바라보았다.

"방에 처박혀 있던 나보단 네 쪽이 더 날짜 감각이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의외네. 가만있어보자... 목요일이야."

"...그래? 그럼 이건 나중에 읽어봐야겠다. 먼저 가 봐야 할 데가 있거든."

라벤더는 솜씨 좋게 봉투를 비어 있던 소파에 휙 던졌다.

"너 대체 지금 무슨 얘길 하는 거니? 원고 달랬다가 갑자기 나가야 한다니. 이게 다 무슨 소리야? 그리고 원고 함부로 다루지 말랬지!"

2년 내내 책하고만 씨름했던 탓에 애가 뒤늦게 맛이라도 간 건가 싶어 걱정이 된 다렐르가 물었다. 딴죽도 잊지 않고 확실히 걸었다.
라벤더는 다렐르의 딴지를 무시하고 말없이 손을 들어 탁자 끝자락에 수북이 쌓여 있던 양피지 더미들을 단숨에 무너뜨렸다. 널브러진 종이들을 헤집길 수 초, 이윽고 라벤더가 다른 종이에 비해 작고 두꺼운 초대장 하나를 꺼내 다렐르의 눈 앞에서 흔들었다.
대체 뭔가 싶어 라벤더로부터 종이를 건네받아 정독한 다렐르의 파란 눈이 서서히 커졌다.

"...실비아의 공연일이 오늘이었구나. 완전히 까먹고 있었네."

다렐르가 미안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뭐, 나도 너한테 무슨 요일이냐고 묻기 전까진 까먹고 있었으니 쌤쌤이지. 다행히 오후에 시작한다니까 지금이라도 준비하면 늦지 않게 도착할 수 있을 거야."

라벤더가 다렐르의 손에서 초대장을 가로챘다.

"근데 왜 초대장이 저 안에 끼어 있었지?"

"그거야 하필이면 한창 논문을 쓰던 중에 초대장이 날아왔으니까 그렇지. 한 번 읽어보고 아무데나 던져놨었거든."

라벤더가 별 것 아니라는 투로 답했다.

"뭐, 그건 아무래도 좋지만... 근데 그걸 꺼내는데 굳이 양피지를 잔뜩 어질러야만 했니?"

다렐르가 물었다.
라벤더는 귀찮다는 식으로 손을 휙휙 내저었다.

"다렐르 너 초대장 앞만 대충 읽고 뒤는 안 봤구나? 실비아가 공연 다 끝나면 휴가 얻어서 바로 우리 집에 온다고 써놨잖아. 그럼 우즈도 같이 올 게 뻔한데, 그 때 치우라고 하면 돼."

라벤더는 한 손을 휘둘러 낚아챈 초대장을 등 뒤로 가뿐히 날려 보냈다. 그리고는 멍하니 서서 뭐 이런 게 다 있느냐고 태클을 걸어야 하나 고심하는 다렐르를 향해 장난기 가득한 미소로 다시 말을 걸었다.

"부탁이 하나 있는데."

물음표를 떠올리는 다렐르를 향해 일침을 가한다.

"준비하기 전에, 세수 좀 할래?"

 

"실비아 아가씨, 진짜 이번 의상도 최고예요. 다행히 화장도 잘 먹혔고요. 좀 어두운 것 같긴 하지만. 무대에서 받을 조명 빛을 고려하면 이 정도가 딱 좋은 거 같네요."

우즈는 실비아의 주위를 요리조리 날아다니며 어디 빠진 것은 없는지, 주목받을 때 걸리는 구석은 없는지 등을 정밀히 살폈다. 이는 라벤더의 명령에 따라 실비아를 보필하게 되면서 우즈에게 맡겨진 가장 중요한 임무 중 하나였다.

"다 좋은데 우즈 너 화술 실력 좀 키워야겠다?"

수박 겉 핥기 식 칭찬을 남발하는 우즈를 향해 실비아가 제동을 걸었다.

"왜죠?"

"열심히 도와준단 건 알지만 끝이 항상 똑같잖아. 매번 같은 칭찬을 하면 결국 상대도 질리게 된다고. 호감을 얻으려면 패턴을 좀 바꿀 필요가 있어. 나중에 여자 친구 사귀려면 내 말 명심해야 할 걸?"

"전 여친 사귈 생각 없으니까 명심 안 해도 될 거 같은데요."

바로 되받아쳤다.
실비아는 잠시 말문이 막힌 듯 우즈를 바라봤지만, 어째서인지 별 대꾸를 하지 않고 우즈의 감상을 직접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커다란 투명 거울로 시선을 돌렸다.

"처음 무대에 서시는 것도 아닌데 그렇게 긴장하실 거 없잖아요, 아가씨. 이번에도 분명 박수갈채를 받으실 수 있을 건데요, 뭐. 첫 공연을 했을 땐 심사위원들에게서 기립박수까지 받으셨잖아요?"

마무 말없이 거울 속에 비친 자신과 눈싸움을 벌이는 실비아를 향해 우즈가 조심스럽게 말을 걸었다.
방금까지 농을 걸던 사람이 맞나 의심하는 사람도 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2년 동안 옆에서 보필하고, 8년 동안 모시던 아가씨의 라이벌로서 관찰해 왔던 우즈나, 8년 간 우정을 나눴던 실비아의 친구들이라면 분명 그녀의 얼굴 속에 미세하게 드러난 흔들림을 잡아냈을 것이다.
중요한 공연을 앞두고 특정 시기를 기점으로 별안간 말이 많아지며, 특히 시답잖은 농담을 지껄이는 것 - 그것이 쌓인 긴장을 덜어내는 실비아 나름대로의 방식이었다.

"이 공연만 끝나면 휴가를 갈 수 있어요. 라벤더 아가씨의 집을 방문하겠다고 초대장이랑 편지 보내셨던 거 잊으셨어요? 다렐르 아가씨도 같이 살고 있으니까 오랜만에 다 같이 모일 수 있는 기회라고요!"

우즈가 상기시켜 준 다음 일정을 듣고서야, 실비아는 주름이 잡힐 만큼 힘을 주었던 눈을 살며시 내리깔았다.

"맞아... 그랬었지."

실비아가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캐널을 못 보는 건 아쉽지만, 이란 사족을 다는 것도 잊지 않고.
아무래도 생각 이상으로 긴장해 있었던 것 같았다. 이 중요한 스케줄을 잊어버릴 정도로.
아버지를 제외하고, 자신을 이해하고 인정해 주는 유일한 사람들.
이들을 만나는 일정을 까먹다니 내가 잠깐 어떻게 된 게 틀림없다고 푸념하면서 실비아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짜악!
느닷없이 울려 퍼지는 소음에 잠자코 실비아의 곁을 지키던 우즈가 깜짝 놀라 위로 튀어 올랐다.
자리에서 일어난 실비아가 갑자기 양손으로 자신의 뺨을 때렸던 것이다.

"괜찮으신 거예요?"

완전히 허를 찔려 당황한 우즈가 날아들었다. 실비아는 아까보다는 훨씬 여유로워진 표정으로 입가에 미소까지 걸며 손을 흔들어 우즈의 불안을 종식시켰다.

"정신 차리려고 그런 거니까 너무 걱정할 것 없어, 우즈. 분명히 기분 탓이겠지만 아까보단 한결 나아진 것 같고. 공연이 코앞에 닥쳤는데 계속 긴장하고 있을 순 없잖아?"

무대에서만 보여주는 눈웃음과 함께 윙크를 살짝.
우즈가 이에 대답하려는 순간, 타이밍 좋게 굳게 닫혀 있던 대기실 문이 벌컥 열리고 무대 관리자가 성큼성큼 실비아 쪽으로 다가왔다.

"무대에 오를 시간이에요, 실비아 양."

지극히 사무적인 어조로 방문한 목적을 알린다.

"알겠어요. 지금 갈게요."

지금까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실비아 역시 더할나위없이 형식적인 어조로 목소리를 바꿔 대답에 응했다.
문이 열림과 동시에 구석으로 숨어버린 우즈 쪽에 잠시를 눈길을 준 실비아는 이내 머리를 돌려 시간이 없다며 자신을 재촉하는 관리자를 향해 살짝 고개를 숙이곤, 무대에 오르기 위해 잰걸음으로 그를 따라 대기실 밖으로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