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에서의 승리를 아름답게 여기는 자는 곧 살인을 즐기는 것이다.

-노자

 

 

채애애애애앵! 채앵!
그리 넓지 않은 공터에서 검과 검이 부딪히며 끈적끈적한 비명소리가 울려 퍼졌다.
짐작하는 대로 - 에이미가 속한 기사단은 적과 한창 검을 맞대고 있는 중이다.
그리고 지금 - 인간의 군대는 또 하나의 성과를 쏘아 올리려는 참이다.
그 경위는 다음과 같다.
새로운 침투 경로를 찾아낸 기사단은 지난 실패의 교훈을 삼아 각별히 주의를 기울이면서 전진하고 있었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그게 애초부터 잘못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에이미가 복귀하기 전, 인간의 군대가 먼저 그 경로를 발견, 탐색했다면 그들과 마주치지 않았을지도 모르고, 그녀가 고민을 접어두고 나아갈 방향을 결정해야만 하는 자리에 끌려 나가지 않아도 되었을지 모른다.
아니, 그럴 리는 없다.
시간의 초침을 약간 늦추는 것 뿐, 결국 언젠가는 마주쳐야 할 일이었으니까.
여기까지 얘기하면 아마 대부분 눈치를 챘을 것이다.
완전무장을 하고 무릎을 뒤덮는 이름 모를 풀들을 떨어내며 행군하던 중 선두에 있던 자가 조용히 수신호를 보냈다.
근처에 누군가가 있다는 의미였다. 그것도 복수.
순간 매복이나 함정이라는 가능성이 떠올랐지만, 2가지 이유로 그 가능성은 무시되었다.
매복이라 하기에 상대들은 기척을 지우기는커녕 숨기려는 노력조차 보이지 않았다는 게 첫 번째.
함정이라 단정하기엔 그들의 기척이 너무나도 이질적이었다는 게 두 번째.
대놓고 기척을 드러내는 함정이라면 십중팔구 죽음을 각오하고 상대의 관심을 끌기 위한 동정을 보이지, 피난민들 특유의 불안하면서도 어쩐지 단호한 티를 풀풀 흘리고 다니지는 않을 것이다.
걸음을 멈추고 자세를 낮춘 기사단은 숨을 죽이고 감지한 기척이 가까이 오기를 기다렸다.
운 좋게도(기척을 흘리며 다가오는 이들에게는 재수 없는 일이 되겠지만), 그 기척들은 줄곧 이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거리가 가까워지면서 그들이 주고받는 이야기도 대충 알아들을 수 있었다. 건질만한 건 없었지만.
푸슉!!
엿들을 필요가 없다고 판단한 병사 하나가 독을 바른 화살 3개를 동시에 장전하여 목표물을 향해 정확히 날렸던 것이다.
거무튀튀한 수염을 기른 마족이 비명을 지를 새도 없이 고꾸라지는 것을 신호로, 숨어 있던 인간 병사들은 함성을 터뜨리며 마족 무리를 습격하기 위해 뛰쳐나왔다.
행색을 보아하니  정규 훈련을 받은 군사들이 아니었다.
남녀노소 다양한 나이 대에, 그들이 가진 것은 자신들을 보호할 수 있는 무기가 아닌 되는대로 챙겨온 짐꾸러미 뿐.
아무래도 책에서만 보았던 유랑족들인 것 같았다.
마족들 자체가 원래 방랑벽이 심해 한 곳에 진득이 정착하고 사는 타입들이 아니기 때문에 마계 자체를 제 집 삼아 쏘다니는 부류들이 대부분인데, 인간들이 유랑족이라 멋대로 이름 붙인 이 부류들은 그 정도가 심한 편이었다. 그래, 마치 인간의 집시처럼.
사기 충만한 병사들 틈에 섞여 달려 나간 에이미는 그 와중에도 책 속의 내용을 떠올려 버렸다.
뭐, 그들이 무슨 생활을 하며 살아가는지는 싸우는데 별로 도움이 되지는 않을 테지만.
가만, 유랑족들은 항시 떠돌아다니는 주제에 자신들을 지킬 힘은 부족하단 얘기도 있었던 것 같은데... 아니, 착각인가보다.
어디서 꺼낸 건지, 모닝 스타를 휘두르며 달겨드는 마족을 시야에 포착한 에이미는 덮어놓고 책을 믿어선 안 된다며 고개를 흔들었다.
서로의 무기를 맞대던 중, 복부를 노리고 차올리는 발을 피해 몸을 살짝 비틀고, 그 반동을 이용해 검을 끌어당겨 상대의 옆구리에 움푹 팬 상처를 새긴다.
약해.
세 녀석을 검만으로 요리하며 에이미는 상대의 전력을 파악할 수 있었다.
이들의 싸움 방식은 그저 힘으로 밀어붙이는 것뿐이었다. 연계도 체계도 잡혀있지 않았다. 단순한 오합지졸.
싸움을 모르는 일반인에게 검을 쥐어주고 사지로 떠민 격이다.
상대의 실력이 형편없어 다행이라면서 에이미는 잔뜩 솜을 먹은 듯 무거워진 주제에 예리함이 빠져버린 검을 연신 휘둘렀다.
처음 달겨든 녀석은 반사적으로 상처를 남겼지만, 적이라고는 해도 같은 피가 흐르는... 동족일지도 모르는(아무래도 어지간히 인정하기 싫었던 모양이다) 녀석들을 문답무용으로 단칼에 베어버리는 것은 아무래도 저항이 있었기에, 그녀는 급소에 타격을 주어 기절시키는 방법을 쓰기로 마음먹었다.
누군가 이 행위에 대해 추궁하며 상대가 너무 약하다는 핑계를 대면 된다. 신용해주지는 않아도 변명 정도는 될 것이다.
덧붙여 마법이 아닌 검만을 사용하는 이유에 대해서도 말이다.
하지만 에이미의 노력도 부질없이 그 작은 계획은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하나는 전투에 특화된 그녀의 반사 신경이 머리가 내리는 명령을 멋대로 거부했다는 것.
하나는 상당히 차이 나는 실력 때문에 아군들이 피를 흘리지 않고 쓰러진 적들을 손수 처리했다는 것.
전투도 싸움도 아닌, 완전무결한 일방적 살육이 끝장나는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벨 맛도 없는 녀석들뿐이었군."

죽어서 입을 닫거나, 죽음을 목전에 두고 생을 거둬들이는 자를 소환하는 희미한 신음소리를 흘리는 마족들에게 대충 시선을 던지며 누구낙가 말했다.

"아무렴."

"누가 아니래."

긴장이 풀어진 탓인지, 여기저기서 말을 받는 병사들의 웅성거림이 피웅덩이를 고이 채운다.

"야, 이거 봐. 이거 아직 살아있는 것 같은데, 죽이기 전에 잠깐 맛 좀 볼까? 여자 구경한지 꽤 됐잖아."

"됐으니까 버려. 더러워."

"성수도 있는데 뭔 걱정이냐?"

"성수가 있어도 드러운 건 드러운 거야, 임마. 그리고 개선하면 여자들이 줄을 설 텐데 뭐가 그리 급하다고 안달이냐? 변태 자식아."

...어쩐지 다 이긴 것처럼 지껄이는 게 마음에 들지 않는다.
쓰러뜨린 적들을 안주거리 삼아 사방팔방에서 수위 높은 섹드립들이 난무한다.
말려야 하는 거 아닌가 싶은 생각에 에이미는 자신보다 지위 높은 군인들에게 눈길을 주지만, 그들은 팔짱을 끼고 방관할 뿐 나설 기미가 없다.

"하여간 저 자식들은 머릿속에 든 게 그저 그것 뿐... 피해요!!"

혀를 끌끌 차며 빈정거리던 리제는 기분 나쁜 예감을 느끼고 옆에 서 있던 근위대장을 밀쳐냈다.
풀썩 하고 엎어지는 부드러운 소리를 등 뒤로 흘리며 재빨리 살기가 뻗어 나온 지점을 응시한 병사들은 하나같이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달려들려했다.

"잠깐 기다려!"

다급한 목소리와 동시에 누군가 그 앞을 막아섰다.

"뭐하는 짓이야? 비키지 못 해?"

병사 하나가 눈을 부라리며 그녀를 힐난했다.

"굳이 여기서 죽일 필요는 없습니다!"

엉겁결에 동료들의 공격을 막아버린 군인 - 에이미 쿼츠는 정신이 들고 보니 그렇게 지껄이고 있었다.
무슨 소리냐며 아우성치는 동료들을 진정시키기 위해 에이미는 아무도 없는 공간에 파이어 볼을 먹여 침묵시키고, 저도 모르게 나서버린 행동에 대해 변명하기 위해 머리를 굴렸다.
왜 이 마족을 감싸는지, 에이미 본인도 알 수 없었다.
자신이 기절시켰던 적 중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자라서?
같은 피가 흐르는 종족이 살해당하는 걸 맨 정신으로는 볼 수 없어서?
일전에 자신의 손으로 숨통을 끊어주고, 그 눈앞에서 짓밟은 펜던트 속 초상화의 주인공이라서?
어떤 것도 이유가 되지 않을 수 있다. 반대로 모두 다 이유가 될 수도 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지금 이대로 상황이 흘러가도록 내버려두고 싶지는 않다는 것이다.

"일단 포로로서 대우를 요청하는 바입니다. 우리가 원하는 정보를 줄 수 있을지도 모르지 않습니까? 원하는 것을 힘들이지 않고 얻을 수 있다면 굳이 피를 볼 필요는 없을 듯합니다. 일단 이 자를 심문하여 얻어낼 수 있는 걸 얻어내고, 죽일지 살릴지는 그 다음에 결정해도 늦지 않습니다..."

"그럴 필요는 없다."

리제를 밀치고 다가온 재스퍼는 분노로 떨리는 목소리로 대꾸했다.

"그 정도로 중요한 녀석 같아 보이지는 않는군. 설령 정보를 갖고 있다 해도 그게 우리에게 독이 될지 해가 될지 판단할 수 없는 이상, 무의미한 거나 마찬가지다. 그리고..."

휘이익!
순간 다시 뿜어진 살기에 에이미는 반사적으로 몸을 돌려 피해버리고-
타악.
부하 중 하나가 쏘았던 피 묻은 독화살을 칼날로 떨구며 재스퍼는 쩝쩝 입맛을 다셨다. 그 얼굴에는 비열한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본인도 별로 희망하는 것 같지 않군. 그럼 원하시는 대로 숨통을 끊어줘야겠지?"

"하지만..."

"네게 선택권은 없다, 쿼츠. 명령하건대, 어서 저것의 목을 따오도록."

"......!"

도리어 역공을 받은 에이미의 얼굴에 그나마 남아 있던 핏기가 싸악 사라졌다.
군대, 그것도 전지에서의 상관의 하명은 절대적이다. 섣불리 사절했다간 명령 불이행으로 끽해야 영창행, 혹은 전시의 특수함을 들먹여 그 자리에서 즉결처분될 가능성도 높다.
검을 움켜잡은 손이 바들바들 떨렸다. 장갑을 비집고 새어나온 땀방울이 칼자루에 스며든다.
동료들의 치기어린 시선에 떠밀려 더듬더듬 포로에게 접근하는 에이미는 금방이라도 검을 놓칠 것만 같았다.
...어리석었어.
에이미는 내심 이를 갈았다.
지난 전쟁에서 제대로 힘도 못 써보고 당한 전력이 있는 세력이, 그것을 설욕할 수 있는 기회를 마다하고 제대로 된 매너를 보여 줄 리 없다는 사실을 진즉에 깨달았어야만 했다.
에이미가 살아남은 마족을 감싸건 말건 결국 이리 될 것이라는 것을 미리 예상했어야만 했다.
가만히 있었으면 중간이라도 갔을 것을, 괜히 긁어 부스럼을 만들어 놓은 격이다.
자신의 무지를 탓하며 에이미는 무겁디무거운 검을 간신히 들어올려 포로의 어깨에 대고...
풀썩.
에이미가 다음 행동을 취하기 전, 포로는 눈을 뒤집으며 천천히 대지의 품에 뛰어들고 있었다.
그녀의 목에 박혀 있는 큼지막한 화살.
살육의 도화선에 불을 당긴 화살 중 한 촉이었다.
급소인 목을 관통한 것도 충분히 치명상이지만 - 노랑투구꽃과 박새의 잎새와 꽈리의 새싹을 조합하여 만든 맹독성 물질이 목숨을 앗아가는 게 더 빨랐다.
상대의 손에 치욕스럽게 죽느니 자결을 택한 것이겠지만... 결국 에이미의 무단행동은 아무 짝에도 쓸모없어지고 말았다.
찬물을 끼얹은 듯 갑자기 조용해진 가운데, 근위대장은 말없이 에이미를 향해 걸음을 옮겨 오고...
별안간, 둘의 사이를 가로막은 태양의 화살 하나가 푹 하고 대지에 박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