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을 꾸었다.
본의 아니게 진실을 알게 된 뒤로는 같은 꿈을 꾸는 일이 잦다.
꿈속에서 나는 세상 물정 모르는 어린애의 모양새를 하고 있었다.
크고 화려하고 장엄하지만, 한편으로는 무미건조하고 쓸쓸하고 살풍경한 공간에서 뛰쳐나와 - 누군가와 만나게 된다.
하지만 그 누군가가 누구인지는 모르겠다. 서로를 바라보며 대화를 하는데 얼굴도 내용도 기억할 수가 없다.
아무리 달려도 그 누군가와의 차이를 좁힐 수 없다.
달리고 또 달리다 보면 어느 새 잠에서 깨어 있다.
가슴 한 구석이 아려오는 애잔한 그리움... 그 누군가는 나와 만난 적이 있는 걸까?

1448년 8월 2일, 에이미의 낙서장에서

 

 

-뭐야, 이거?
눈앞을 가르고 뛰쳐나가 수면에 반짝이는 비늘처럼 괴상한 빛을 내뿜는 화살을 보고 그들은 어쩐지 무사태평한 감상을 떠올렸다.
다음 순간, 화살촉을 쓰다듬던 괴상한 빛은 작은 불기둥이 되어 어린 포효를 뿜어냈다.
그들이 태세를 정비하기도 전에 잿빛 하늘에 매달려 발갛게 물든 꼬리를 드리우는 물고기들의 무리가 한데 뭉쳐 있던 기사단을 정확히 노리고 그 둔탁한 품을 향해 거칠게 달려들었다.

"한 놈도 살려 보내선 안 된다. 놈들의 목을 모두 베어 광장에 장식하도록 하라!"

꿈틀거리는 울분을 명령으로 버무려 끄집어낸 것은 인간인가, 아니면 마군인가.
작은 주문을 외어 푸르스름한 빛의 구체를 불러낸 근위대장은 어서 소식이 닿아 부하들의 생명이 다하기 전에 응원군이 도착해 주기를 간절히 바라며 적진을 향해 제일 먼저 뛰쳐나갔다.
반쯤 멍하니 서 있던 에이미도 동료들을 따라 감각이 나간 다리에 힘을 넣었고-
적의 군대를 향해 돌진하던 기사단은 마계를 지배하는 거부할 수 없는 존재감을 의식하고 무심코 발을 멈추었다.
커다란 맹수와 맞닥뜨렸을 때나 느낄 수 있는 공포감이 등을 타고 흘러내렸다.
볼을 타고 흐르는 땀 한 방울은 머리를 급습하는 외포에 조금이나마 저항하려는 헛된 몸부림이었다.
갑자기 출현한 그 기척은 음기를 먹고 자라는 마계에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스며들어 있었다.

"마왕 다이쿤..."

누군가 망연히 중얼거렸다.
중앙에 서서 군사들을 통제하는 적의 수장은 일전에 샤를이 직접 이끌던 군대를 함정으로 몰아넣었던 마장군도, 에이미를 궁지로 몰아넣었다가 어째서인지 풀어준 마족도 아니었다.
마계에 녹아든 이들이 절대 충성을 약조한 단 하나의 맹주. 초저주파로 먹잇감을 지배하는 야수와도 같은 절대적인 존재감을 내세우는 마족의 수장.
허무의 빛이 깃든 심연의 눈동자 속에는 고요히 들썩이는 잔잔한 파도와 미쳐 날뛰는 악몽이 조화를 이루며 저절로 서로의 살을 섞고 있었다.
저 자에게는 이길 수 없다...
검을 맞대기도 전에 패배의 문장이 수면 위에 떠오른다.
마왕의 성을 찾아 언젠가는 대적해야 할 적이라는 것은 진작에 알고 있었다.
전쟁터에서 죽어가는 동료들을 마주하면서, 성한 몸으로 반드시 돌아갈 거라는 단꿈도 꾸지 않았다.
허나 그래도 무서운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저, 저런 녀석이랑 싸우다 죽긴 싫어...!"

에이미 근처에 있던 기사 하나가 피를 토하듯 절박한 어조로 중얼거리더니 냅다 줄행랑을 놓았다.
에이미는 뒤통수라도 얻어맞은 듯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날 살려라 도망치는 인간을 주시했다.
아까 전까지 주변을 지나가던 이들을 적이라는 이유로 무참히 짓밟아 놓고선, 자기는 죽기 싫다고?
출렁이는 욕지기는 메스꺼운 토기가 되어 식도를 타고 기어올랐다.
힐끗 옆을 보니, 주변의 동료들은 용케 도망치지 않고 자리를 지키고 있지만, 그들에게 떠오른 절망감 속에서 할 수 있다면 같은 행동을 취하고 싶다는 감정을 읽을 수 있었다.
이건 배신이다.
인간이... 인간이 이런 추잡스러운 생물이었다니.
인간이 이런 생물이라면... 나는 더 이상 인간이고 싶지 않아...

"뭣들 하나? 어서 싸우지 않고!"

앞서 달려 나갔던 근위대장이 부하들을 채근했다.

"우리는 백성을 수호하고 국가에 충성을 다하는 자랑스러운 군인이다. 눅어도 명예롭게 죽는 것이니, 결코 죽음을 두려워해서는 아니 된다!"

식은땀을 흘리면서도 단호하게 한 마디 한 마디를 내뱉으며 재스퍼는 생에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명령을 내렸다.

"...제군들, 죽을 각오로 적들을 막아라."

우와아아아앗!!
말이 끝나자마자 우레와 같은 함성소리가 일대를 뒤덮었다. 기가 막힌 타이밍이다.

"네 녀석은 내가 상대하마!"

언젠가 들었던 목소리가 조소를 흘리며 일갈을 날렸다.
쨍강!
붉은 투구로 눈을 제외한 얼굴 전체를 감싼 거구의 사내가 마왕을 향해 달려 나가는 근위대장을 향해 요사스런 빛을 뿜는 검을 내리쳤다.
간신히 막아내는 재스퍼.
어떻게든 마법으로 원호해달라고 신호를 보내고 싶었지만, 눈앞의 적을 상대하는 데만도 온 신경을 쏟아 부어야 하는 상황에서는 도저히 무리였다.
제발 눈치껏 행동해라. 그럼 아까의 명령 불이행은 불문에 붙여주겠다며 마음속으로 간절히 빌면서 근위대장은 상대가 부모의 원수라도 되는 양 혼심의 힘을 다해 달려들었다.
에이미는 들고 있던 검을 끌어당기는 것도 잊은 채, 자신을 상대하러 친히 다가와 준 적을 가만히 노려보고 있었다.
아까 누군가 그의 이름을 입에 담았었지.
이자가 바로 그... 마왕.
다른 기사들은 마왕이 보여준 존재감만으로도 발이 얼어붙은 것 같았지만... 어째서인지 에이미는 황폐하고 미친 그 존재감으로부터 편안함을 맛보고 있었다.
만지는 순간 얼어붙을 것 같은 시린 냉기가 아닌, 태양의 만행에 반발하여 기분 좋게 달라붙는 속삭임 같다고 할까.
아주 그리운 듯한... 한없이 익숙한 공기.
휘이익!
멋대로 딴 생각을 하는 동안, 기다려 줘야 할 의리가 없는 마왕은 군더더기 없는 날카로운 움직임으로 급소를 노리고 바스타드 소드 사이즈의 장검을 휘둘렀다.
인간이란 존재에 회한을 느꼈다곤 해도, 상황 자체가 변한 것은 아니다.
눈앞의 마족이 죽이겠다고 검을 휘두르는데 가만히 앉아 맞아 줄 바보는 없을 것이다.
펄쩍 뒤로 뛰어 피하는 에이미.

"네 실력... 시험해 보마!"

의미심장한 한 마디를 던지고 마왕은 응축된 에너지들을 날렸다.
한 발 한 발의 위력은 그리 높은 것 같지 않았지만, 물론 일부러 맞아볼 생각은 추호도 없다.
몇 개는 피하고, 몇 개는 검을 휘둘러 떨어내며 에이미는 간신히 주문을 외웠다.
마법을 쓰며 싸우지는 않겠다고 멋대로 말해버린 적이 있었던 것 같은데... 잠깐 동안이지만 상대의 칼 쓰는 솜씨를 구경한 그녀는 자신이 던졌던 말을 버리기로 마음먹었다.
온 힘을 다해 덤벼도, 자기 실력으로는 이길 수 없는 녀석이다.
어느 쪽을 섬길지에 대한 답은 찾을 수 없었지만, 눈앞에 던져진 문제는 쉽사리 풀 수 있었다.
여기서 죽고 싶지 않아.
살고자 하는 본능은 어수룩한 윤리 의식보다 훨씬 강했다.
아까 본인이 한 짓은 생각도 않고 냅다 줄행랑을 놓은 기사를 비난하고 인간에게 실망했네 어쩌네 멋대로 떠든 자신에 대해서는... 저기 마음 한 구석으로 치워두기로 하자.

"다크 미스트!"

마왕이 내지르는 검을 크로스를 그리듯 내려친 뒤, 뒤로 뛰어 거리를 벌리고 착지함과 동시에 '힘 있는 말'을 발동한다!
찰나의 틈을 두고 검은 핵을 통해 서로의 시야를 완벽히 차단하는 시커먼 안개가 주변을 뒤덮었다.
어두워서 보이지 않는 수준이 아니다.
단순한 어둠이라면 눈이 익숙해지는 순간 주위를 식별할 수 있겠지만, 이 검은 안개는 핵을 날려버리기 전까진 눈으로 식별할 수 없는 어둠으로 생의 의지를 가진 자를 위협한다.
아군 적군의 구별이 없기 때문에 여차하면 같은 편끼리 칼을 주고받는 진풍경이 벌어질 수도 있으나, 지금은 적군의 숫자가 훨씬 많으니 그 점은 안심해도 될 것이다. 상대적으로는.
여기서 자기들끼리 싸우다 죽는 인간이 있다면... 뭐, 그것도 본인 팔자일 테지.

"......"

의지할 수 있는 것은 소리와 상대의 낌새. 하지만 그것은 상대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최대한 살기를 억누르며 에이미는 냉기의 창을 십 수개 만들어내 낌새가 있다고 판단한 공간에 쏟아부었다!
명중하는 대신 땅을 차는 퍽퍽한 소리만 들리고.

"베라이스 윈!"

마왕이 만들어낸 거친 바람이 울부짖으며 검은 안개를 물어뜯었다!

"파이어 볼."

안개가 모습을 감추고, 아군과 적군 관계없이 서로 제각각의 모습을 드러내자, 마왕은 자신이 노렸던 상대에게 타오르는 폭탄을 던졌다.
쿠과아아아앙!
생각보다 일찍 터지는 광구를 피해 그는 오른쪽으로 몸을 돌려, 뜨겁게 수놓는 불똥을 떨어내었고...
챙!
복부 안쪽을 노리고 파고드는 검 끝은 멈춰 세웠다.
기절시킬 요량으로 차올리는 발을 피해 검을 거두고, 에이미는 슬라이딩하는 자세로 빠져나와 검을 쥐지 않은 자유로운  손을 흔든다.
반 발자국 움직여 몸을 피한 배후에 소(小)폭발.
아까 마왕이 던진 파이어 볼을 격주시킨 소형 폭탄이리라.
-아무 말 없이 검과 검을 주고받는 커뮤도 나쁘지는 않군.
실력 차에 대한 심리적인 불안감과 여유를 떨어뜨리는 동요에 젖어 가쁜 숨을 몰아쉬는 여기사에게 눈길을 준 마왕은 장소에 어울리지 않는 웃음을 띠었다.
어미를 닮은 미모와 전투 실력, 아비를 닮은 마력과 끈질긴 집념.
마주한 상황은 최악이었지만, 이렇게나마 그 아이의 실력을 시험해 볼 수 있다니, 어찌 기쁘지 아니한가.
그는 검을 치켜들어-
그와 동시에 대세를 정비하던 에이미는 갑자기 땅을 찼다.
마왕이 검을 내리치는 방향 - 즉, 앞으로 내달린 것이다.
전혀 예상치 못한 행동에 마왕의 얼굴에는 의외의 미립자가 떠올랐다. 무슨 생각인지 채 분석하기도 전에 에이미는 공을 차듯 발을 내질러 그의 다리를 걸었다.
물론 그것만으로 마왕이 엎어질 리는 없었지만 - 한 수난 자세를 무너뜨리기에는 충분했다.
그가 비틀거리는 찰나, 에이미는 검을 끌어당겨 무작정 빈틈이 생긴 공간을 내리쳤다!

"쩝..."

무심코 검을 놓고 뒤로 물러선 에이미를 주시하며, 마왕은 쯧쯧 혀를 찼다.
에이미가 내리친 검은 힘이 부족했는지 아니면 다른 이유 때문인지, 그의 어깨에 매달린 채 하릴 없이 흔들리고만 있었다.
인간이 가진 것과 똑같은 장미 꽃잎이 아롱지며 대지를 적신다.
자신에게 상처를 입혔는데도 분노나 아픔이 아닌 평온한 표정을 떠올리는 그를 보며 에이미는 경악했다.
뭔가 잘못되었다.
그녀의 안에 숨은 감이 경종을 울린다.
어깻죽지를 베어내려던 작전이 실패한 시점에서 이미 잘못되긴 했지만... 그것과는 다른 무언가가 마음에 걸린다.
나는 뭔가... 큰 잘못을 저지르려 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다.
대체 뭐지? 뭔가 걸리는 듯 한 이 감정은?

"잊어버린 물건을 찾아야 하는 거 아닌가?"

에이미가 고민에 빠져 있거나 말거나, 마왕은 어쩐지 우수에 찬 미소를 지으며 한 걸음 다가오며 말을 붙인다.
저도 모르게 뒤로 물러서는 에이미. 하지만 그것은 잘못된 판단이었다.
퍼어억!
검과 검을 맞대며 싸우며 내지른 누군가의 발차기를 옆구리에 먹고, 에이미는 제대로 땅에 엎어지고 말았다.
자신이 상대하던 쪽에 신경이 팔린 터라 피할 겨를이 없었던 탓이었다.
동요가 피어오르는 허무의 눈동자를 직시한 에이미는 저도 모르게 질끈 눈을 감아버렸다.
나는 여기서 죽어버리는구나, 하고 반쯤 포기하고 있을 무렵.
금속과 금속이 부딪히는 소리에 에이미는 실눈을 떴다.
얼마 전 상담을 청했던 낯익은 모습이 시야를 가득 메운다.

"내 제자에게 손대는 건 용서하지 않겠다."

낮고 중후한 목소리가 위협적으로 들렸다.
어느 새 나타난 것일까, 자신에게 검을 가르쳤던 사범이 듬직하게 마왕을 막아서고 있었다.
겨우 일어나 주변을 둘러보니, 언제 도착한 건지 원군이 마구노가 뒤엉켜 싸우고 있었다.
그제서야 에이미는 기억해 냈다.
마왕과 1:1로 싸우고 있었음에도, 다른 마족의 공격이 없었다는 것을.
그 때는 싸움에 정신이 팔려 잊고 있었지만, 아무래도 그 때부터 이미 원군이 와서 싸우고 있었음이 틀림없었다. 아마 자신이 안개를 출현시키는 마법을 쓴 시간을 기점으로 달려온 것이리라.
리제의 익숙한 밤빛 머리칼이 짧게 나부끼며 춤을 추었고, 샤를은 자신의 호위도 물리고 마족 사내와 칼을 주고 받고 있었다.
...마족 사내?
에이미는 자신을 대신해 마왕과 검을 겨누는 사범 쪽에 아주 잠시 눈길을 보낸 뒤, 작게 주문을 외우며 죽어라 싸우는 무리를 피해 샤를에게로 다가섰다.

"...이번에야말로 널 죽여 주겠다."

샤를은 분노로 눈을 번뜩이며 으르렁거렸다.

"원한다면 기꺼이."

얼음장 같은 맑고 어두운 목소리가 짧게 화답했다.
지난 번 마족의 계략에 빠져 스스로 함정에 몸을 담그어 전력 손실을 입었던 기억이 샤를의 마음 한 구석에서 불편하게 꿈틀댔다.
그 때 선두에 섰던 적은 그가 아니었지만 아무렴 어떤가. 어쨌든 마족 때문에 자신의 자존심이 상처를 입었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으니.
그 때는 마장군 따위에게 제대로 한 방 먹고 말았지만, 그거야 이자를 쳐서 되갚아 주면 되는 일이다. 녀석이 아닌- 마계의 왕자에게.
서로가 뒤엉켜 싸우며 특별히 상대의 구분 없이 사정거리 내의 적을 상대하는 병사들과는 달리, 그들은 의도한 건지 아닌지 검과 검을 주고받으며 서서히 주변으로부터 거리를 취했다.
샤를은 벌려진 만큼 상대에게 다가서며 접근전이 가능할 정도의 최소한의 거리를 확보하고자 했다.
자신이 가진 것은 체술과 검술이지만, 자신이 상대하는 마계의 왕자는 그 외에도 마법이라는 무기가 있었다.
위력만 감수한다는 전제 하에서는 마족이 마법을 사용하는데 주문 영창은 필요 없을지 몰라도 최소한의 정신 집중은 필요할 터. 거리를 벌려주는 것은 그 행위를 도와주는 꼴이다.
검을 주고받으며 정신을 빼놓고 방심한 찰나를 노린다.
샤를이 세운 계획은 그것이었다. 물론 본인도 방심하지 않도록 주의할 필요는 있지만.
자신이 세운 계획을 간파한 듯, 다시 거리를 취하는 상대를 향해 도약하려는 순간.
샤를이 미처 계산에 넣지 못한 불확정 요소가 그들만의 싸움에 끼어들었다!
상대의 힘에 밀려 본의 아니게 뛰어든 것인지, 아니면 스스로 싸움에 비집고 들어서 상대를 방해할 요량이었던 것인지.

"큭...!"

샤를은 갑자기 자신의 시계를 가로막는 전사를 아군인지 적군인지 판단하기에 앞서 순간적인 기지를 발휘하여 발로 걷어차 냈다.
아군인지 아닌지 판단하고 있다가는 대응이 늦어질 뿐더러, 신원이 확실하지 않은 녀석을 함부로 베어 버릴 수도 없는 노릇이었으니 의외로 현명한 판단인지도 모른다.
스스로를 격려하면서 샤를은 검을 고쳐 잡고 상대를 향해 뛰어들었고-
검을 내지르려는 순간, 갑자기 날아든 푸른 불기둥이 단말마의 비명을 지르며 위로 솟아올랐다.
허겁지겁 뒷걸음질 쳐 안전거리를 확보하려 하지만, 샤를은 불기둥이 내뿜는 기를 누르지 못하고 땅으로 밀려나 버렸다.
순간을 다투는 전투에서 태세가 흐트러지는 것은 목숨마저 위협할 수 있는 위험천만한 일.
그 기세를 몰아 자신을 향해 거리를 좁히는 마계의 왕자를 상대하기 위해 샤를은 다리를 움직여 겨우 자리에서 일어났다.
제대로 받아치기는 힘들 거라는 생각이 머리를 지배하는 동안에도 샤를은 싸우기 위해 검을 쥔 손에 힘을 넣었다.
그 순간, 거리를 좁히던 마계의 왕자가 황급히 뒤로 뛰어 몸을 사린다.
바로 그의 앞에서 터진 화염구가 타오르는 불꽃을 휘두른 것이다.
누군진 몰라도 일단은 살았다.
겨우 태세를 정비한 샤를은 위험한 순간에 자신을 구한 상대를 향해 무심코 시선을 들었고-
에이미는 마치 자리를 바꾸듯 샤를의 앞길을 막고, 방금까지 그가 상대하던 남자를 노려보았다.

"왕자님, 저 자는 제가 상대하도록 하겠으니 부디 옥체를 보존하여 주시옵소서. 감히 청하오니, 제게 맡겨주셨으면 합니다."

"뭐라고? 구해준 건 고맙다만, 지금 누구 맘대로 상대를 바꾸겠다는... 우왓?!"

자신이 쓰러뜨리겠다고 혼자 다짐한 적을 부하가 대신 정리한다-
어디서 하극상이냐며 훈계하려던 샤를은 에이미가 달고 온 떨거지... 다시, 샤를을 쫓아 온 에이미의 뒤를 따라 온 마군 몇 명이 문답무용으로 자신에게 휘두르는 검을 받아 세우기 위해, 그녀에게 쏟으려던 신경을 그 쪽으로 집중시켜야만 했다.

"미스 쿼츠!"

한 번에 몇 명이나 되는 마족들의 검을 상대하며 샤를은 마계의 왕자와 대치하는 에이미를 향해 목청껏 고함을 질렀다.
검을 맞대느라 눈앞의 적들에게 정신을 집중하기를 잠시, 샤를의 뒤에서 다시 대지를 붙잡아 있는 힘껏 흔드는 폭발음이 들려왔다.

"이런 젠장!!"

자신에게 달라붙은 마군들을 겨우 정리하고, 겨우 시선을 준 샤를은 한 발 늦었다는 것을 깨닫고 평소라면 하지 않았을 거친 말을 내뱉었다.
폭발을 기점으로, 두 사람의 모습은 깨끗이 사라져 있었던 것이다.
그냥 둬서는 안 된다. 그 녀석은 이 몸이 상대해야만 해.
샤를은 자신이 왜 마계의 왕자와 검을 주고받는 것에 대해 이토록 집착하는 이유는 댈 수 없었다. 자신도 정확히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마장군에게 받은 빚을 마계의 왕자에게 갚아주고 싶어서인지, 같은 왕자라는 점이 묘하게 자존심을 자극하고 있는 것인지.
샤를은 고개를 저었다. 요는 자신의 손으로 마계의 왕자를 제압할 수 있을지 없을지, 다. 이유 따윈 아무래도 상관없다.
사라졌다면 직접 찾아서라도 쓰러뜨려야만 한다.
바로 결정을 내린 샤를은 주위를 경계하면서도, 사라진 두 사람을 찾기 위해 그들이 걸음을 했다고 여겨지는 곳을 찾아 뛰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