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이란 복잡기괴한 사업에 불과하다.
그것에 대해서 무엇이나 알고 있는 사람은 하나도 없으며 다소간이라도 알고 있는 자도 드물다.

 

 


싸움의 불을 당긴 것은 마계의 왕자가 집어던진 주문이었다.
에이미가 알지 못하는 짧은 리듬의 주문을 흥얼거리듯 중얼거린 직후.
와장창창!
통상 파이어볼의 몇 배는 됨직한 수 개의 화염구들이 별안간 출현하여 상대의 전의를 위협하는 우악스런 울음을 토해냈다.
주문을 피해 도약한 에이미는 허리춤의 칼을 뽑으며 그에게 접근하려다 - 문득 깨달았다. 자신이 애용하던 미스릴 검은 아까 마왕의 싸움 중 그의 어깨에 찔러 넣은 후 회수하지 못했다는 것을.
어떤 상황에서든 검을 잊어선 안 된다고 귀에 딱지가 앉도록 설교를 들으며 자라왔던 지난 세월이 무색해지는 순간이었다.
깨달은 직후 에이미는 자신의 어리석음을 책망했지만, 이미 지나간 일을 지금 와서 후회해 봤자 소용없는 짓이었다.
허리춤에 가져갔던 손을 거두어 주문을 외우기 위한 예비 동작으로 바꾸며, 에이미는 풀숲을 뛰어내렸다.
샤를과 싸우는 그의 얼굴을 보았을 때, 에이미는 뇌리를 스치는 확신을 얻었던 것이다. 나에 대한 정보를 어느 정도 가지고 있으면서, 사실을 거짓 없이 알려줄 수 있는 유일한 자.
나를 알고 있는 건지, 나에 대한 어떤 사실을 알고 있는 건지 그것까지는 모르겠지만.
아무 연고도 관계도 없는 사이라면, 적으로서 처음 조우했을 때 정신을 잃었던 자신을 고이 살려 보낼 이유가 없었다.
줄곧 그 일이 마음에 걸렸었는데... 그렇게 생각하면 설명이 된다.
그가 알고 있는 정보를 어떻게 털어놓게 할지는 좀 더 머리를 굴려야 하겠지만, 일단은 대화를 시도할 필요가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한창 전쟁 중이었고, 대화하고자 하는 자는 적의 수장.
친구를 만나듯 평범하게 연락을 취해 시간을 잡고 담소를 나누는 것은 불가능. 서로의 이익과 영토를 걸고 싸우는 만큼 협상의 여지도 없음.
그러면 어떻게 대화를 해야 할까?
대답은 단순. 다시 한 번 실력의 자웅을 겨루는 것이다. 가장 합리적이고 누구라도 납득할 수 있는 방법.
이 계획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1가지 전제가 필요했다. 반드시 1:1의 상황이어야 한다는 것.
그렇기 때문에 에이미는 후에 하극상이라는 죄책에 대한 변명을 준비하든지 그에 따른 처벌을 달게 받든지 해야 한다는 위험 부담을 감수한 채, 샤를로부터 그를 떨어뜨리고자 한 것이다.
계획의 불확정 요소는 단 하나. 그가 의도대로 자신을 따라올 것인가?
그것만금은 그녀도 어쩔 수 없었다. 그저 운에 밭기고 하늘의 뜻을 기다릴 뿐.
은혜로운 하늘이 내려주는 미약한 생명의 불꽃마저도 삼켜버리는 나무들은 가지 빽빽이 들어찬 잎사귀들을 과시하며 음험한 기세를 일대에 뿌려놓았다.
평범한 인간이라면 성수나 별도의 방어구 없이는 발을 들이는 것조차 거부할 만큼 기분 나쁜 음기 충만한 곳에서 에이미는 이유를 알 수 없는 안락함을 맛보며 자신 외의 기척이 없는지 필사적으로 살피고 있었다.

"......!"

바스락, 하고 흔들리는 수풀의 울음소리가 들린 쪽을 향해 황급히 몸을 돌리는 에이미.
묘하게 기분 나빠질 정도로 쥐죽은 듯 고요한 숲 속에서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차가운 멜로디.
생생하리만치 강렬하게 배어 있는 녹음의 자취. 거무칙칙한 짙은 색을 띄고 있는 하늘과 같은 색을 가진 요기.
인간 동료들과 함께 있을 때는 몰랐던, 독기를 물에 풀어 묽게 만든 듯 한 이상한 기운이 여기저기 퍼져 있다.
일대는 겁먹은 듯 잔뜩 움츠러들어 있었고, 숲이라면 으레 있을 법한 흔한 벌레소리 하나 들리지 않는다.
한창 전쟁 중인 것을 감안하면 그리 이상할 것은 없지만 충만한 요기는 달라붙어 어린 시절 들었던 이야기의 한 부분을 떠올리게 한다.
그래. 마치... 옛날 동화나 괴담 속에 나올 법한, 한 번 들어가면 두 번 다시 나오지 못한다는 죽음의 숲처럼...
나무 옆에서, 마른 흙 위에서, 풀에서 떠도는 묘한 기미 속에서 에이미는 원하던 것을 찾을 수 있었다.
계획은... 아직까지는 순조롭게 흘러가는 것 같다.
저만치 떨어진 곳에서 창백한 모습을 드러내는 핏빛 눈동자를 직시한 에이미는 저도 모르게 꿀꺽 침을 삼켰다.
눈으로는 분명 자신이 꾀려 했던 얼굴을 보고 있는데, 그 기척을 느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주변 일대와 완벽하게 동화되어 있는 것이다.
마족이 생각보다 굉장한 능력을 가지고 있는 건지, 그냥 숲이 자신의 맹주와 같은 기운을 가지고 있는 건지...
뭐 일단 지금 그런 것은 아무래도 좋다.
에이미는 한 걸음 다가서는 그의 위세에 억눌려 조금씩 뒤로 물러서며, 뭐라고 얘기를 꺼내는 것이 좋을지 중요한 시험을 앞두었던 때처럼 집중하여 머리를 굴렸다.
이런 젠장. 나무에 가로막혀 더 이상 뒤로 물러날 수 없잖아.

"당신... 대체 나에 대해 뭘 알고 있는 거지?"

문득 정신이 들고 보니, 에이미는 저도 모르는 새 그렇게 지껄이고 있었다.
평소에는 책임 회피나 칭찬 독차지를 위해 적당히 말을 바꿔 상대를 쥐락펴락할 정도의 경지에 오른 그녀의 화술 스킬은, 적어도 지금은 그 진가를 전혀 발휘하지 못하고 있었다.
-감정에 호소하는 것도, 논리적으로 접근하는 것도 아니고 밑도 끝도 없는 말을 던져서 어쩌자는 거야!
에이미는 후회했지만 말은 이미 내뱉은 뒤였다. 후회해 봤자 부질없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마계의 왕자는 에이미의 말을 씹고 천천히 다가서고 있었다. 마치, 고양이가 잡은 쥐를 가지고 노는 것처럼.
별로 도움은 안 되겠지만, 견제를 위해서라도 검은 들고 왔어야 하는 건데...
에이미는 쓸데없는 통회를 떠올리며 주문을 외우듯 양손을 모아 자세를 잡았다.
그 순간, 그녀가 차고 있던 팔찌 속의 마법석이 찬란한 빛을 토해냈다.
마법사들 사이에서 불리우는 '공명의 빛'. 특정 주문을 건 마법석이 아주 가까운 거리에 놓인 다른 마법석을 향해 비춘다는 그 빛이 보인다는 것은...

"호오... 네가 가진 마법석은 속박의 주문을 걸어 놓은 것인가."

국어책을 읽는 듯 한 담담한 목소리가 가감 없이 전달되었다.
확실히 마법석을 잃어버릴 경우를 대비해 양쪽 다 속박의 주문을 걸어놓은 것은 사실이지만. 에이미 역시 그 말에는 대꾸하지 않고 다른 질문을 던졌다.
이미 자기가 가지고 있는 카드는 알아서 상대에게 보여준 뒤였다. 어차피 엎질러진 물, 차라리 대놓고 솔직히 나가는 편이 나을지도 모른다...라기보다, 다른 선택지가 없는 거지만.

"댁한테 조금 묻고 싶은 게 있으니까 싸움은 좀 있다 하는 게 어떨까 싶은데...? 만약 내가 댁한테 져서 목숨을 잃는다면 저승길 가는데 가져갈 선물이라 치고, 혹시라도 내가 그쪽을 이긴다면 승리에 대한 포상이라 치고... 어때?"

입으로는 말을 꺼내면서도 머릿속에서는 남자가 문답무용으로 공격해올 때를 대비한 플랜을 필사적으로 짜고 있었다.
하지만 그 다음 순간, 에이미는 그가 던진 말에 머릿속의 계획들을 하얗게 태울 수밖에 없었다.
그는... 분명 이렇게 말했다.

"머리가 참 많이 길었군. 확실히 예전보다는 나아."

에이미는 모닝 스타로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 한 강렬한 충격을 받았다.
생뚱맞아 보이는 그 대사는 그녀에게 있어 2가지의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하나, 그가 나에 대해 뭔가를 알고 있을 거라는 그녀의 예측이 맞았다는 것. 그렇지 않으면 세월과 함께 조금씩 길러 온 머리칼에 대한 얘기를 알 리가 없었으므로.
둘, 전혀 기억이 나지는 않지만 아주 오래 전에 이 남자를 만난 적이 있다는 것. 아직까지는 추측에 불과하지만, 어쩌면... 이 남자가 바로 꿈속에서 봤던 그 누군가가 아닐까...?
근거 따윈 없었다. 그냥 감일 뿐이었다. 하지만 에이미는 근거 없는 예감에 끌리는 자신을 제어할 수 없었다.
아니 잠깐. 그건 그렇다 치고.
왜 싸움을 안 하고 토론을 벌이려는 자신의 행동에 장단을 맞춰 주는 건지, 지난번엔 왜 아무 짓도 안 하고 살려 보낸 건지, 대체 무슨 생각으로 날 따라와 준 건지 등등, 에이미는 산적해 있는 궁금증들 속에서 겨우 0순위에 올려놓은 질문을 찾아냈다.

"당신은... 내가 누군지 말해 줄 수 있어?"

진실을 찾아 헤매던 나날, 문 밖에서 엿들어 찾아낸 것은 그림자의 파편 뿐.
절대 말해줄 리 없는 사람에게서 진실을 끌어내는 것은 진작에 포기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을 찾는 걸 포기한 건 아니다.
과거를 찾아 나서기보다는 갑자기 밝혀진 정체성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혼란에 빠져있느라 시간을 보냈다는 사실은 저 멀리 치워두도록 하자.
에이미가 질문을 던지자, 거짓말처럼 그의 얼굴에 빛이 들어왔다. 자세히 관찰하지 않으면 알아채기도 힘든, 희미한 미립자일 뿐이었지만.
또한 기분 탓인지는 몰라도, 요기로 가득한 숲 속에서 살짝, 자신 외의 기척이 얼굴을 내민 것 같았다.
그의 얼굴에서 어쩐지 안도하는 듯 한 기색이 보이자, 에이미는 살짝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아무래도 자신이 생각했던 최악의 상황으로 치닫는 것은 피한 것 같았다.

"...사실을 알아버린 모양이군."

몇 분 뒤 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의 목소리 속에 숨은 감정이 고개를 내밀고 그녀를 향해 말없이 손짓한다.

"말투를 보아하니 완벽하게 알아차린 건 아닌 것 같지만 말이지. 진실을 알고 싶은 건가?"

에이미는 그의 말에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전에 내가 하나 묻고 싶군. 어째서 너는 내가 진실을 알고 있고, 그것을 네게 정확히 알려 줄 거라고 생각하는 거지? 나는 너희들의 적이라는 걸 잊어버린 것 아닌가?"

"한 달 전이라면 댁의 말이 맞을지도 모르지만... 반인반마의 피가 섞였다는 걸 알게 된 지금은 대답하기 애매해... 하지만 이것만은 말해줄 수 있어. 마족은 거짓말을 할 수 없다는 걸. 물론 진실을 오해하도록 왜곡해서 말하는 방법도 있지만, 그건 제대로 걸러서 들으면 되니까..."

에이미는 가슴을 차분히 가라앉히려 애쓰면서 머릿속에 뒤엉켜 있던 실타래를 풀어냈다.

"...그래? 그거 재밌겠군. 그 의견 받아들이도록 하지. 단..."

마계의 왕자가 쥐고 있던 검의 도신이 검은 아지랑이를 피워 올리고, 칼자루를 쥔 손에서는 살기가 배어나왔다.

"...내기에서 이긴다면 말이다!"

살의로 점철된 날카로운 푸른 기가 응축되어 에이미를 향해 구슬픈 울음소리를 토해냈다. 온 몸을 꼬집는 듯 한 짜릿한 살기가 그녀를 거쳐 기대고 있던 나무에 내리꽂힌다.

"...이걸로 됐어?"

에이미는 자신을 향한 섬광의 눈을 주시하며 조용히 물었다.
툭.
도신에 매달려 아픔을 호소하는 붉은 꽃송이가 견디지 못하고 대지의 품으로 돌아가는 소리가 들렸다.
남자의 얼굴은 창백함 그대로였지만, 피에 젖은 그 눈동자에는 경악의 색이 떠올라 있었다.
에이미는 천천히 손을 뻗어 자신의 살갗을 엷게 도려낸 시퍼런 향취를 움켜잡았다.
마계의 왕자가 휘두른 검은 정확히 그녀의 목을 겨누어 위협적인 눈초리를 보내고 있었다.
그가 검을 휘두를 때 에이미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던 것이고... 그 판단은 옳았다.
근거 없는 감에 의지하여 목숨을 걸었던 도박에서... 이긴 것이다.
오히려 섣불리 피하거나 움직이거나 했다간 그를 설득할 수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일말의 불안은 남아 있었다.
만약 그가 공격을 멈추지 않았다면 어떻게 했겠냐고?
그럴 일은 없었다. 에이미는 알아버렸으므로.
자신이 던졌던 흥정의 조건에는 대꾸하지 않고 엉뚱한 말을 던졌던 마계의 왕자. 그 말을 들은 직후, 에이미는 근거 없는 자신의 감을 믿기로 확신한 것이다.
전시의 군인은 여자로 대접받기를 바라서는 안 된다며, 싸움에 방해되고 적에게 반격의 빌미를 제공할 수 있으니 자신처럼 머리를 짧게 자르라며 닦달하던 리제를 무시하고 굳이 긴 머리를 고수했던 이유.
저 남자와의 첫 대면에서 어쩐지 그리움이 들었던 이유.
자신이 소지했던 마법석을 발견하고 저 남자가 공격을 멈추고 고이 돌려보내준 이유.
그것을 깨달으면서 그녀는 확신할 수 있었다. 그는 나를 죽일 수 없다는 것을.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함부로 해코지를 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한 확신이, 죽일 듯 달려오는 마계의 왕자에게서 도망치지 말라는 명령을 내렸고, 그녀는 두말없이 명령에 따랐다.

"......"

마계의 왕자는 어딘가 체념한 표정으로 핏방울을 떨어뜨리는 검을 거두었다.
위협해서 어떻게 나오는지를 볼 요량이었는데 오히려 한 방 먹은 것 같았다.

"뭘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약속은 약속이니 내가 알고 있는 것은 말해주도록 하지..."

그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넌... 다이쿤 님의 딸이다... 나와 같은 성에서 태어나 자랐고, 세상물정을 알기도 전에 네 아버지에게 맡겨졌다고 들었다. 왜 인간에게 맡겨졌는지는 모르겠다. 네가 인간으로서 살아가기를 바란 건지, 두 속성을 가진 점을 이용해 공존을 모색하려 했던 건지... 
 너도 사실을 알게 된 시점에서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을 거라 생각했다. 설마 어중이떠중이의 소생이라고 짐작한 건 아니겠지?"

마계의 왕자는 에이미의 표정을 곁눈질하며 몇 마디를 덧붙였다.
에이미는 다리가 풀려버리는 것을 느꼈다. 기댈 나무가 없었으며 그대로 주저앉아 버렸겠지.
이 이상 놀랄 일은 없을 거라고 자위하고 있었는데, 그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가 버렸다.

"하... 하하..."

실성한 신음소리는 목을 타고 올라와 바람 빠진 풍선소리를 냈다.
큐브가 '적의 핏덩이'라고 언급했을 때 알아들었어야 했다.
그가 언급한 '적'은 일개 마족 나부랭이가 아니었다. 마계를 다스리는 절대적인 맹주였던 것이다.
아버지의 친딸이 아니라는 사실만 의식한 나머지, 더욱 중요한 사실을 간과한 격이다.
내 어머니는 어째서인지 마왕가의 사이에서 나를 낳았고, 나를 지금의 아버지에게 맡겼다.
나를 받아들인 아버지는 그 때 무슨 생각을 품고 있었을까.
큐브가 말한 '적'이라는 것은... 정녕 서로의 목숨을 걸고 싸웠던, 그 1가지만을 의미하는 걸까.
1444년 성탄제에서 신의 축복을 받을 때, 검의 길을 걸어야 한다며 신의 지팡이로 키우면 어떻겠냐던 주교님의 권유를 거절했던 아버지의 의도는 무엇일까.
마계의 왕자와 처음 만났을 때 왜 끝장을 내지 않았냐며 호되게 질책하던 아버지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물리쳐야 할 적과 사랑하는 사람 사이에서 태어난 나를... 무슨 생각으로 받아들이셨을까.
...모르겠다. 독심술을 가진 것도 아닌데 말해주지도 않은 다른 사람의 생각을 명확하게 알 수 있을 리 없었다.
알고 싶다면 당사자에게 직접 물어야만 했다. 하지만... 과연 내가 물어본들 아버지는 대답을 해주실까.
...아니, 나는 정녕 그 사실을 알고 싶은 걸까? 알게 되면... 대체 어쩌려고?
에이미는 스스로 무너져내리듯, 천천히 주저앉아 무릎에 얼굴을 파묻고 두 귀를 손으로 틀어막았다.
-왜 나한테 이런 일이 일어나는 거야? 대체 내가 뭘 잘못했다고 이제 와서 이런 고민을 해야만 하는 거지?
근처에서는 한창 동료들이 싸우고 있다는 것도, 눈앞에는 8년 동안 적이라고 배워 온 자가 있다는 것도 잊은 채, 에이미는 입술을 깨물고 생각의 늪 빠져들었다.

"고뇌에 빠지는 건 네 자유다만, 적어도 지금은 참아줬으면 하는군."

그의 냉정한 목소리가 늪 속에 가라앉았던 에이미를 잡아내 거칠게 끌어올렸다.

"이번엔 내가 네게 물어볼 차례다. 넌 어느 쪽으로 살아갈 생각이지?"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고 쏘아보는 에이미의 눈초리를 알아차린 마계의 왕자는 뒷말을 덧붙였다.

"인간으로서 살아갈지 마족으로서 살아갈지를 묻고 있는 거다."

"...그게 중요해?"

에이미의 멍청한 질문에 마계의 왕자는 실소를 보였다.

"적어도 내게는 중요하다고 할 수 있지. 네 의중을 알아보라는 폐하의 직언이 있었으니까, 그렇지 않고서야 적의 우두머리를 내팽개치고 네 얕은 수작에 굳이 같이 장단을 맞추지는 않았을 테니까."

"......"

"말을 돌리고 싶어 하는 심정은 이해하지만 그래서는 운명으로부터 도망치는 꼴밖에 되지 않아. 시간은 절대 기다려 주지 않는다는 것을, 너도 모르지는 않을 텐데?"

그 말은 사실이었다.
진실을 알게 된 뒤로부터 수없이 고민하고 회피해보기도 했지만, 그것은 결국 자신을 옥죌 뿐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다.
괴롭지만 결국 한 쪽을 선택해야만 했다.
자신을 살아 숨 쉬게 한 세계를 선택할지, 이제까지 자신을 품어준 세계로 돌아갈지.
잠시 생각해 보던 에이미는 겨우 입을 열었다.

"하프의 속성을 이용해서 전쟁을 멈추고... 서로의 입장을 충분히 설명하고 타협할 수 있다면... 그러니까 내 말은, 어떻게든 평화적인 방법을 모색하는 것이... 어느 한 쪽의 편을 드는 것보다 훨씬 합리적이라고 생각하는데..."

나름 괜찮다 싶은 주장을 펼쳤지만, 마계의 왕자는 풋 하고 코웃음을 칠뿐이었다.

"합리적이라고 했나? 아직 세상 물정을 잘 모르는 것 같은데 분명히 얘기해 주지. 전쟁의 명분이란 사실 그리 중요치 않다. 이유는 어떻게든 만들어낼 수 있으니까. 요지는 전쟁이란 것도 결국은 하나의 복잡한 사업일 뿐이라는 거다, 아랫것들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시며 성장하는 거지.
 넌 공존 모색이 합리적인 것처럼 말하는데... 제일 합리적인 방법은 자신의 가치관에 반대하는 자들을 숙청하고, 힘으로 밀어붙여 원하는 것을 원하는 만큼 쟁취하는 것이다. 그게 가장 빠르고 편리한 방법이지. 공동의 적을 만들면 쉽게 단결하게 되고, 공포를 조장하면 우매한 자들은 알아서 재물을 갖다 바친다.
 선동하기도 쉽고, 조종하기도 쉽다. 그런데 그런 쉬운 방법을 놔두고 굳이 어려운 길을 돌아가는 수고를 감수할 거라 생각하나? 전쟁은 정치가가 시작하지만 마무리는 군인들의 몫이다. 전쟁은 원하는 걸 가장 빨리 얻을 수 있는 수단으로, 조금씩 양보하여 서로를 이해한다는 발상은 허울 좋은 이상에 지나지 않아."

...정면으로 부정당했다.
전부 맞는 말이라 반박할 수도 없는 현실이 슬프기만 하다.
에이미도 자신의 이론이 제대로 먹혀들 거란 기대를 한 것은 아니었다. 그렇기는 하지만... 그렇다 해도 이렇게 대놓고 반박 당했을 때는 대체 어떻게 해야 할 지.
양쪽을 취하면서 공존과 화합을 모색하는 것은 본인이 생각해도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그게 가능했으면 이 사단이 날 일도 없었겠지.
마법석을 사이에 두고 갈등하던 시기는 이미 지났다. 지금은 마법석이 아니라, 상대의 목을 두고 의미 없이 검을 맞대고 있을 뿐이었다. 죽이기 위해 싸우는... 무의미한 전쟁.
그런데 이제 와서 말로써 서로를 설득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공존을 모색하자는 주장은 그저 현실을 앞에 두고 도망치는 것일 뿐이었다.
어느 쪽이든 결정해야 한다는 것을, 머리로는 알고 있다. 하지만 가슴은 명령에 따르지 않는다.

"나는..."

무슨 말을 해야 할 지 고민하며, 에이미는 다시 입을 열러 말을 꺼내려 했다. 그러나.
휙!
가만히 서 있던 그가 에이미의 목을 움켜쥐듯 멱살을 잡고 강제로 일으켜 바람이 부는 방향으로 냅다 떠밀었다.
에이미는 그의 행동에 반항도 못 하고 휩쓸렸고, 그는 이미 전의를 상실한 그녀의 목에 검을 빼들었다.
멈췄던 피의 울음이 다시 흐느끼는 곡조를 연주하기 시작한다.

"...당장 그녀에게서 떨어져라."

노기가 가득 서린 샤를의 목소리가 바람을 타고 숲을 타고 울렸다. 샤를의 목소리를 듣고서야 에이미는 자신이 처한 상황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었다.
제대로 떨쳐냈다고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샤를은 사라진 자신들을 쫓아 여기까지 따라온 모양이었다.
딴 데 정신이 팔려 있던 자신과는 달리, 아무래도 마계의 왕자는 또 다른 기척의 출현을 알아채고 자신을 인질로 잡은 것이겠지.
그러는 척하는 건지, 아니면 이 참에 진짜 인질삼아 마계의 성으로 끌고 갈 생각인 건지는 모르겠지만.
대체 무슨 짓이냐고 따지려는 에이미는 샤를을 쏘아보는 그의 시선에 압도당해 무심코 입을 다물었고, 마계의 왕자는 갑옷을 타고 흐르는 그녀의 피를 곁눈질하며 속삭이듯 작게 입을 놀려 그녀에게 말했다.

"...네가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는 잘 알겠다.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도."

에이미는 감히 고개를 돌리지는 못하고, 살짝 눈을 들어 그의 냉정한 얼굴에 시선을 주었다. 마계의 왕자는 마치 복화술을 하듯 입을 다문 채 그녀에게 마지막 말을 속삭였다.

"...다이쿤 님의 전언이다. 이 시간 이후로, 다시는 네가 마족과의 전쟁에 대해 걱정할 일이 없도록 하겠다고..."

"뭐...?!"

그의 말을 이해하지 못 한 에이미는 벙찐 표정을 지었다.
에이미의 쉰 소리를 듣지 못한 것인지 무시하는 것인지, 마계의 왕자는 냉소를 지으며 자신을 위협하는 샤를을 쏘아보았다.

"지금 상황을 인정하는 게 어떤가? 인질은 내 손에 있고 자네는 혼자야. 명령을 내릴 위치가 뒤바뀐 것 아닌가?"

"그건 네 희망사항이지."

어째서인지 샤를은 입가에 자신만만한 미소를 지으며 그의 말을 부정했다. 마계의 왕자는 눈살을 찌푸리며 그의 말을 받았고-
별안간 에이미를 샤를이 있는 방향으로 들입다 집어던졌다!
보통 자신 쪽으로 뭔가가 날아오면 받아 세우거나 피하기 마련이지만... 샤를은 아무 망설임 없이 후자를 택했다.
쿠당탕탕!
아무 준비도 없이 던져진 에이미는 우스꽝스러운 효과음과 포즈로 대지에 장렬히 처박히고 말았다. 물론 두 남자는 그녀에게 눈길도 주지 않았다.

"...미스 쿼츠. 주문을 준비해라."

샤를은 검을 쥔 손에 힘을 주며 작은 목소리로 그녀에게 명령을 내렸다.
에이미는 무심코 자신을 집어던진 마계의 왕자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 역시 살기를 부풀리며 태세를 갖추고 있다.
순간, 그의 입에서 뭔가 짧은 휘파람 같은 것이 흘러나온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검을 겨루다 저 자와 거리를 취하겠다. 넌 그 순간을 노려서 저 자에게 주문을 쏘아라. 종류는 네게 일임하겠다."

그녀의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샤를은 우렁찬 기합과 함께 마계의 왕자에게 달려들었다.
검을 끌어당기며 튕기는 쇳소리가 떨어져나가고, 크고 작은 불씨가 대지에 내려앉았다.
샤를은 그녀가 알아들은 것으로 믿고 뛰쳐나갔지만, 에이미는 주문을 외우지 않고 있었다.

"미스 쿼츠!"

복부를 파고드는 적의 공격을 피해 있는 힘껏 뛰어 거리를 벌린 샤를이 에이미를 돌아보며 신호를 보냈다.
자신의 충실한 부하가 주문을 날리는 광경을 상상했지만 - 아무 변화도 일어나지 않았다.

"뭐하는 건가?"

샤를은 그녀를 질책했지만, 에이미는 묵묵히 서 있을 뿐이었다.
무서워서 얼어버린 것이 아니었다. 그녀의 얼굴에 떠오른 것은 명령에 복종하지 않겠다는 확고한 의지.
샤를이 그녀의 속내를 읽는다면 배신감에 분노하여 펄펄 뛰겠지만... 에이미는 마계의 왕자가 핀치에 몰리는 것을 보고 싶지 않았다.
명분도 뒷감당도 생각하지 않은 채, 에이미는 그 순간 떠오른 자신의 의지를 받들어 자신이 모시던 군주의 명령을 거부한 것이었다.

"키아아아아악!"

샤를이 멍하니 그녀에게 시선을 둔 사이, 괴상한 생물의 울음소리와 함께 피어오르는 안개와도 같은 자욱한 흙먼지가 주변을 감싸고 서로의 시선을 막아버렸다.
샤를은 복병을 경계하며 망토를 휘둘러 자신에게 달라붙은 흙먼지를 대충 떨어내고, 마계의 왕자가 있던 공간을 향해 검을 휘둘렀지만 이미 그의 모습은 사라진 뒤였다.

"위...?!"

하늘 높이 떠오른 기척을 알아채고 샤를이 위를 올려다보았지만 이미 때는 늦은 뒤였다. 샤를의 바닷빛 두 눈동자에, 비룡에 올라탄 마계의 왕자가 무표정한 가면으로 얼굴을 덮고 검을 거두는 장면이 시야 가득히 들어오고 있었다.

"...이런 젠장!!"

샤를은 검을 내팽개치며 울분을 터뜨렸다. 그의 고함은 메아리가 되어 바람을 타고 맥없이 춤을 출 뿐이었다.

"......"

에이미는 주인의 부름에 달려온 비룡이 그를 태우고 하늘 높이 솟아오르는 광경을 묵묵히 바라보았다.
그들은 대지의 지배권을 벗어나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 그들은 하늘 높이 날아오르고... 마침내 가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