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메4] 臥薪嘗膽 프메소설 2012. 10. 28. 21:10

엄청나게 호화로운 마차가 와서 나와 내 딸을 찾는다는 큐브의 호들갑에 못 이겨 대문 밖으로 향한 나는 전혀 예상치 못했던 전개에 그저 넋을 놓고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생각해 보라.
일개 참전 장병에게 귀빈을 맞을 때나 사용하는 호화 마차를 보내고, 왕에 대한 직언권을 가진 대신을 딸려 보내다니.
지금 당장 입궁하라는 재촉을 받고 마차에 몸을 실은 나는 불현듯 떠오르는 불안감이 엄습하는 것을 느꼈다.
아닐 거라며 자신을 다독이면서도 나는 끝끝내 불안감을 떨쳐내지 못했다.
단정치 못한 감정이 얼굴 밖으로 새어 나오는 나와는 달리 내 딸은 모든 것을 초월한 듯 한 은은한 미소를 내보이며 이 나라 최고의 숙녀답게 조신한 태도를 고수하고 있었다.
이따금 눈이 마주칠 때마다 살짝살짝 보여주는, 이자벨을 쏙 빼닮은 초연한 눈웃음.
나와 내 딸은 단 한 마디의 대화도 없이 서로 침묵을 지켰고, 마차는 단 한 번도 멈추는 일 없이 빠르게 달려 성 안으로 들어섰다.
나와 내 딸의 입궁을 알리는 시종장의 전언이 있은 지 수 분 후, 나와 내 딸은 폐하가 계시는 알현실에 무릎을 꿇고 대기하고 있었다.
대체 무슨 말씀을 하시려는 것인지, 나와 내 딸을 제외한 모든 인간들을 물려 보낸 후 헛기침을 하며 목을 가다듬던 폐하께서 마침내 결심한 듯 근엄한 어조로 입을 여셨다.

"오늘 그대들을 부른 것은 다름 아닌... 브레스 그대의 딸 때문이다."

나는 말없이 고개를 숙인 채 폐하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아닐 거라며, 내 가슴을 채운 불안감이 덧없는 기우이길 바랐던 나의 작은 희망이 산산조각 나는 순간이었다.

"왕궁에서 우연히 만난 이래, 짐은 루비의 청초한 그 모습을 잊을 수가 없었도다. 내게는 이미 정실이 있으니...(이 부분에서 국왕은 멋쩍은 듯 목을 가다듬었다) 그대의 딸을 나의 측실로 맞아들이고 싶구나. 어떠한가?"

백발이 성성한 왕이라도 프러포즈는 쑥스러웠는지(이게 프러포즈가 맞는지는 차치하고), 수염 아래 드러난 살갗이 살짝 홍조가 든 것을 눈치 채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솔직히 말하자면... '뭣이라고~?!' 라고 외치고 싶었다.
내 앞의 이 남자가 한 나라를 다스리는 왕이 아니었다면 장담하건대 앞 뒤 잴 것 없이 주먹부터 나갔을 것임이 틀림없다.
딸아이가 왕조차 욕심낼 정도로 아름답게 자라준 건 인정하는 바이고, 그 사실은 부친으로서도 자랑스러운 일이다. 그렇지만...
아무리 미인이어도 그렇지, 딸 뻘의 여자와 결혼하겠다는 도둑놈 심보라니!
같은 남자로서는 전혀 이해하지 못 할 것은 아니었지만, 딸 가진 아버지로서는 절대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알겠습니다, 폐하."

대체 어떻게 거절해야 불똥이 튀지 않을지, 애초에 거절할 수나 있는 건지 고심하는 나의 번뇌를 한 방에 날려버리는 청아한 목소리가 들렸다.

"루비...?"

나는 자그마한 목소리로 딸아이의 이름을 불렀다.
하지만 딸은 나의 부름에도 불구하고 한없이 기뻐해 마지않는 얼굴로 폐하의 명을 기쁘게 받들겠다는 의사를 표현하고 있었다.
그 얼굴이 내가 알던 딸이 아닌, 한 없이 낯선 여인의 모습으로 보였던 것은 나의 착각이었을까.

...결론을 말하자면, 딸은 기꺼이 결혼식을 맞았다.
레긴 국왕은 당사자가 OK한 이상 더 이상의 허락은 필요 없다며 바로 그 자리를 물렸고, 혹여나 딸아이의 마음이 변할까 싶었는지 우리 부녀를 성으로 불러들인 지 단 사흘 만에 지금껏 본 적조차 없는 호화로운 결혼식을 거행시켰다.
아무래도... 싫다고 거절할 수 있는 자리가 아니었던 것 같다.
국왕 폐하께서는 결혼을 승낙받기 위해 나와 내 딸의 의사를 물은 것이 아니라, 한 나라를 통치하는 군주로서 간청의 형태로 명령을 내린 것이리라.
이미 모든 준비를 싹 끝내놓고 결혼 명령을 내린 것이 아니냐는 뜬소문을 뒤로 한 채, 딸은 국왕 폐하의 측실로 입궁하였다.
하지만... 왕궁의 생활에 젖어든 딸은 변했다.
왕의 총애와 딸아이를 지지하는 세력의 지위를 빌어 계속되는 사치와 방탕한 생활...
딸의 사치는 도를 넘어 이제는 국고를 압박할 정도가 되어버렸다는 이야기까지 들린다.
사람들의 평판도 좋지 않으니 아버지로서 매우 고민이 많다.
어째서 이렇게 되어버린 것일까...

 

 


나는 꿈을 꾸었다.
이젠 손을 뻗어도 잡을 수 없는, 머나먼 곳으로 날아가 버린 그와 함께 손을 맞잡고 대지에 서 있는 꿈을.

마법석의 응축된 힘을 받아 묘한 요기를 흩뿌리는 나의 고향, 나의 터전.
기억조차도 희미한 나의 어린 시절, 나의 사촌은 항시 내 곁에서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성에서 시중을 들어주는 하수인들을 제외한다면, 그는 나의 유일한 친구였다.
어린 시절 나의 놀이 상대가 되어 주었던 몇 살 위의 나의 사촌은, 나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인간계로 맡겨져 어린 시절의 추억을 잊고 평범한 인간 여자로 살아가던 도중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고 발을 들여놓은 다크타운에서 우연히 재회하여 십수 년만에 다시 마주할 수 있었다.
철모르던 시절의 어린 페르소나를 벗어던지고 성인에 걸맞는 의식을 치른 나는 이번에야말로 그와 헤어지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어른들의 사정으로 헤어졌다 어렵게 다시 만난 사이.
리즈 시절의 추억에 쌓여 얼굴을 잊을 법도 했건만, 오히려 그를 다시 만났을 때 나는 강렬한 기시감을 느꼈고, 그 덕에 나의 어렸을 적 기억을 되찾을 수 있었다.
그의 말을 빌리자면 '운명'이라는 녀석이다.
뭐, 여기서 이야기가 끝난다면 '오랫동안 행복하게 살았습니다'라는 여타 동화와 다를 바 없었을 테지.
여기까지 말했다면 아마 결말을 눈치 챈 사람도 있을 것이다.
서로의 마음이 같다는 것을 확인한 것까지는 좋았지만, 불행히도 운명은 우리를 축복할 생각이 없었던 모양이다.
부모님이나 친구들과의 관계? 아아, 그건 전혀 문제가 없었어.
아버지에게도 큐브에게도, 8년지기 친구들에게도 내가 연정을 품을 상대에 대해선 전혀 가르쳐 주지 않았지.
전쟁에 별로 관심을 두지 않는 크리스티나나 예술 활동을 위해 마계에 가 보고 싶다고 말하는 마리는 별개로 하고, 마군에게 아버지를 잃고 분노하던 리제나 마족 집사를 부리면서도 마계에 대해 민감하게 반응하시는 아버지에게 차마 마계의 왕자를 사랑한다고 말씀드릴 수는 없었거든.
문제는 다른 데 있었다.
마법석의 오묘한 마력에 눈이 멀어 마족의 영토를 침범한 인간과 자신의 영토를 사수하기 위한 마족의 몸부림.
마족과 인간은 몇 년 째 서로 대치 중이었다.
...그래.
일단 인간으로서 살고 있는 나와, 장차 마계를 이어받아 통치할 마계의 왕자님의 관계는 제3자의 눈으로 보자면 금단의 사랑이나 마찬가지.
가랜드 장군이 붙잡힌 이후 마족은 점점 수세에 몰렸고, 보다 못해 직접 마군을 지휘하기 시작한 뒤로 나의 사촌은 상처와 긴장의 역습으로 날이 갈수록 수척해졌다.
서로 얼굴을 보기 위해 만나는 것조차 여의치 않을 만큼 상황은 점점 악화일로를 걸었고, 결국 중간에서 고민하던 내가 크나큰 결단을 내리기에 이르렀다.
12년간 내가 살아왔던 인간계. 가슴으로 낳아 지금까지 품어준 양아버지를 등지고 나는 내가 태어났던 세계로 돌아가기로 마음을 굳혔다.
하지만.
운명은 우리가... 아니,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잔인했다.
어렵게 내린 결정을 들고 몰래 마계로 건너간 내게 닿았던, 인간의 승전을 알리는 거센 함성소리.
피투성이 고깃덩이로 변해 대지의 양분이 되어 썩어가는 패잔병들.
치열한 교전이 있었는지, 주변 일대는 인간과 마족의 시체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시취와 비릿한 피내음이 어우러져 올라오는 토악질을 누르며 나는 자리를 텄다.
즐비한 시체 속에 나의 사촌은 없었다. 다행이라 가슴을 쓸어내리고 싶었지만...
그의 지위를 생각해 보면 마냥 기뻐할 수만도 없었다.
운 좋게 도망쳤을 수도 있지만, 살았든 죽었든 인간군이 끌고 갔을 가능성도 충분히 생각할 수 있었다.
마왕 다이쿤과 왕자 바로아, 이 둘의 목에 걸린 현상금은 3대가 평생 동안 놀고 먹고도 남을 액수였고, 왕국이 눈독을 들이는 대광맥을 영원히 자기들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들의 신병을 확보할 필요가 있었으니.
불안한 마음을 가슴에 품고, 나는 달리고 또 달렸다.
그를 찾고 싶었지만, 방도가 없었기에 정처 없이 숲을 헤쳐 달릴 뿐이었다.
얼마나 달렸을까.
턱까지 차오르는 숨을 부여잡고 잠시 다리를 멈춘 내 눈 앞에 오랜 전쟁의 타격을 고스란히 끌어안고 신음하는 광야가 들어왔다.
언젠가 그가 내게 보여 주었던 비밀 장소.
자기 말고는 아무도 찾지 않는다며, 꼭 내게 보여주고 싶었다는 그의 수줍은 얼굴.
아무 근거도 없이 그저 감이 이끄는 대로 나는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지금은 망그러지는 추억을 붙잡고 있을 때가 아닌데.
나의 소중한 연인이 살아 있는지, 어디에 있는지부터 찾아야 하는데.
머리 속의 이상이 지르는 명령을 무시하고, 종종 그와 함께 거닐던 숲의 안쪽에 도착한 내게 지금까지와는 다른 이질적인 향취가 감도한다.
살아보고자 발버둥치는 심장 소리. 죽음의 그림자가 성큼 다가오는 감미로운 환영.
곁에 다가갈 때마다 맡을 수 있었던 푸른 세레나데의 내음.
광활하게 펼쳐진 대지를 적시는 누구보다도 순수하고 고귀한 피.
나의 부츠 사이를 파고드는 피의 주인을 알아챈 나는 한껏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피가 흐르는 방향을 따라 앞으로 달려 나갔다.

"바로아..."

가슴을 꿰뚫은 상처를 움켜쥐고, 반쯤 꺾인 나무에 등을 기대 앉아 거친 숨을 쌕쌕 몰아쉬는 나의 사촌. 나의 친구, 나의 단 하나뿐인 연인...
속삭이듯 중얼거리는 나의 목소리를 들었는지, 그는 겨우 눈길을 돌려 멍하니 서 있는 나와 시선을 맞춘다.
한창 전쟁 중인 땅에 드나들다니, 무신경한 것도 정도가 있다며 쓴웃음을 흘리는 그의 얼굴에 스며든 완연한 죽음의 그늘.
나도, 아마 그도 이후의 운명을 가늠할 수 있었다.
마법석이 묻혀 있는 대광맥은... 인간의 차지가 될 것이다.
오랫동안 살아온 주인들을 몰아내고, 인간의 탈을 쓴 침략자가 득달같이 모여들어 본인의 영토임을 입증하는 승기를 여기저기 세워둘 테지.
나는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절대... 절대 그렇게 되도록 내버려 둘 수는 없어.
나는 완전히 얼어붙어버린 다리에 기합을 넣어, 서서히 그와의 거리를 좁혔다.
그가 말을 걸듯 입술을 열어 몇 마디를 중얼거리는 것을 무시한 채 그에게로 다가섰다.
무슨 말을 해야 할 지, 어떻게 해야 할 지 알 수 없어, 나는 그의 꿰뚫린 상처에 가만히 손을 댄 채 말없이 주저앉았다.
몇 년 동안 흘려본 적 없었던 눈물이 흘러나와 나와 그의 손을 적셨다.
아무 말 없이 가슴에 얼굴을 묻고 흐느끼는 나의 마음을 알아챘는지, 바로아는 힘없이 늘어뜨린 다른 손을 들어 힘겹게 나의 볼을 쓰다듬었다.

"있지 바로아... 나... 나 말이죠... 마계로 귀환하기로 결심했어. 아무리 생각해 봐도 내가 있어야 할 곳은 여기뿐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아직은 좀 낯설지만... 당신이 좋아하는 곳이니까... 나도 분명히 좋아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그렇죠...?"

나는 내가 힘겹게 결심했던 이야기를 더듬더듬 풀어놓았다.
가볍게 나의 얼굴에 손을 대고, 가만히 나의 이야기를 들어주던 바로아는 갑자기 손을 풀고 나를 끌어안았다.

"약속해 줘요... 평생 내 옆에서 살아주겠다고... 날 위해서라면 어디에 있든 반드시 달려오겠다고 말했잖아요, 바로아..."

"...잘 들어, 루비..."

바로아는 끊어져 가는 목소리와는 반대로, 나를 끌어안은 팔에 더욱 힘을 주었다.
-아아...
나는 밀려오는 슬픔을 주체하지 못하고 그의 상처에 얼굴을 묻었다.
강하게 끌어당기는 힘과는 별개로, 그의 목소리에는 서서히 생기가 빠져나가고 있었다.
헤어져야 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의 얼굴도, 목소리도, 강직한 의지도, 편안해지는 손길도, 더 이상 붙잡아둘 수 없으리라.

"마계의 왕자로서 명령하건대... 넌 절대 마계로 귀환할 수 없다... 그런 일은 내가... 내가 용납하지 않을 테니까..."

바로아는 한 마디 한 마디 힘을 주어 중얼거렸다.

"넌 지금까지처럼 계속 인간으로서 살아가면 되는 거야... 평범한 인간 남자를 만나서... 널 닮은 아이와 널 사랑해 주는 남자와 평생을 살도록 해... 그렇게 되면 네 팔에 흐르는 마계의 피는 결국 힘을 잃게 되겠지... 약조해라. 지금 당장. 내가 말한 걸 지켜주겠다고..."

"못해요, 그런 짓은..."

나는 항의를 위해 고개를 들었으나, 그가 더욱 거세게 끌어안는 탓에 계속 그의 품에 안겨 있을 수밖에 없었다.

"제발 이성적으로 생각해라... 네가 나를 따르겠다고 해서 달라지는 건 없어..."

그의 목소리가 파르르 떨리기 시작했다.

"나는 내 영토를 지키지 못했다... 부하들의 기대에도 부응하지 못했고... 마계를 원수의 손에 넘겨줄 수밖에 없게 되었다... 적의 손에 넘어가기 전에 도망쳐 온 것이 다였어... 이런 마당에, 무슨 염치로 널 취하겠다고 말할 수 있겠나..."

자조 섞인 어조로 현실을 곱씹던 그는 별안간 손을 들어 나를 한쪽으로 밀쳐냈다.

"...가라. 지금 인간들은 혈안이 되어 나를 찾고 있다. 종전과 승리를 알리기 위해서는 반드시 나의 존재가 필요하니까 말이다..."

"그렇다면 나도 안 가요. 무슨 꼴을 당할지 뻔히 아는데 어떻게 내가 당신을 혼자 두고 갈 수 있겠어요...!"

"지독히도 말을 안 듣는군... 하긴... 어렸을 때도 넌 고집이 남달랐었지..."

그의 목소리는 어느새 애원조로 바뀌고 있었다.

"제발 부탁이다... 가거라. 넌 아무것도 못 본거야... 나라는 존재도 모르고... 마계에도 와 본 적 없는 평범한 인간이란 말이다... 널 키워 준 인간에게로 가서...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조용히 살도록 해라... 그게... 내가..."

툭.
그의 마지막 부탁은 끝내 봉오리를 맺지 못하고, 하롱하롱 부서져 바람을 타고 날아가 버렸다.
나는 그의 이름을 부르짖으며 엎어지다시피 하여 그의 품에 몸을 던졌다.
어떻게 이런 상처를 입고도 그토록 버틸 수 있었을까 싶었던 상처에선 더 이상 피가 흐르지 않는다.
붉디붉은 그의 눈동자는 빛을 잃었고, 꺼져버린 생의 기운은 완전히 시들어 더 이상 그 기색을 찾을 수 없다.
얼마나 눈물을 흘렸을까.
멈추지 않을 것만 같았던 눈물도 시간이 흐름에 따라 차츰차츰 말라갔고, 가물대로 가물어 늘어져 버린 물안개 속에서 나는 잔혹한 현실을 받아들여야만 했다.

"나쁜 사람..."

나는 굳은 피로 얼룩진 그의 파리한 손을 잡고 중얼거렸다.
무심한 태도 속에서 간간이 보여 준 서툰 배려와, 들을 때마다 묘하게 안정되는 그의 목소리는 더 이상 기대할 수 없다.
날카롭고 강인했던 이 얼굴도 이제는 추억 속에 묻어야만 하겠지.
저승의 문턱에 서 있으면서도 그랬던 것처럼, 나는 조용히 손을 들어 그의 눈을 감기고, 서서히 굳어가는 그의 얼굴을 어루만졌다.
몇 번이나 사랑한다고 말해 주었던 그 입술은 끝내 내가 듣고자 갈망했던 영원을 맹세해 주지 않았다.
서로의 마음이 같은 방향을 바라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우리는 같은 길을 걸을 수 없게 되어버렸다.

"......"

나는 피로 얼룩진 소맷단을 들어 말라버린 눈가를 거칠게 문질렀다.
급격히 수분이 빠져나간 눈이 참을 수 없을 만큼 뻑뻑했지만, 지금 그딴 것은 아무래도 좋다.
나는 주문을 외워 매장 준비를 마치고, 혹여라도 그가 인간 병사에게 발견되어 욕보는 불상사가 일어나지 않도록 그의 몸을 둘러싸고 몇 개의 주문을 걸어 놓았다.
이 정도면 내노라하는 마도사들이 탐지하더라도 절대 찾지 못하리라.
나는 곧 대지와 융화도리 남자의 곁에 무릎을 꿇고 앉아, 다른 이를 취해 평범하게 살라는 야속한 유언을 남긴 그의 입술에 진한 이별의 표식을 남겼다.

"...이걸로 됐어."

나는 지금이라도 그의 뒤를 따르고 싶다는 열망을 억눌렀다.
그는... 내가 살아가기를 원했다. 인간으로서, 평범한 삶을 살아가기를.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하나밖에 없었다.
그를 따르는 것.
마계로 귀환하겠다고 결심했을 때부터, 그를 따르겠다고 맹세하지 않았는가.
그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이자 홀로 남겨진 내가 나아가야 할 방향이었다.
내키지 않는 몸을 일으켜 간단한 매장 절차를 치른 뒤 나는 마지막으로 그가 묻힌 땅 주변에 다시 한 번 주문을 걸음으로써 견고한 봉인을 만들었다.
약간의 시간을 두고 그의 명복을 빌어준 뒤, 손가락을 깨물어 핏방울을 떨어뜨려 맹세의 말을 입에 담는다.

"약속을 지킬게요, 바로아. 나는... 당신 말대로 용감히 살아가도록 하겠어요. 나만의 방식으로..."

 

 


"루비, 그대는 어떠한가? 꽃다운 나이에 늙은이에게 시집 와 수청을 드는 것을 후회한 적은 없는가?"

상념에 잠겨 아련한 추억을 떠올리던 나는 나를 부르는 왕의 목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런 말씀 마시옵소서, 폐하. 저는 폐하의 명을 받들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해 신께 항상 감사드리고 있사옵니다."

측실로 나를 맞아들인 왕이 내게 말을 걸 때는 항상 그 방식이 정해져 있어 대충 패턴을 읽을 수 있었다.
대사의 내용을 패턴에 적용해 분석한다면 가장 그럴 듯한 모범 답안을 내놓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나는 재빨리 의도를 알아채고, 국왕이 듣고 싶어 하는 대답을 들려주었다. 진심으로 그런 척하는 미소와 함께.
남자의 애간장을 녹이는 가느다란 목소리. 그 어느 성이라도 함락시킬 수 있는 고혹의 시선.
인간의 역사의 시작과 동시에 등장한 전쟁과 매춘의 이면에는 영웅호색이라는 진리가 숨어 있는 셈이다.

"참말이냐? 그렇다면 짐은 정말 행복한 사내로구나!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자를 내 것으로 만들었으니 말이다. 하하하!"

"과찬이십니다."

나는 적당히 겸손을 떨며, 레긴 국왕이 손수 따라준 와인을 한 모금 입에 댔다.
나를 입궁시킨 후, 하루가 멀다 하고 별궁으로 찾아오는 국왕을 나는 성의를 다해 섬겼다. 아니, 적어도 국왕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듯 했다.
오늘은 달이 비워낸 속을 가득 채워 태양의 자리를 넘보는 날.
나와 국왕은 이제는 일과가 되어버린 농후한 정사를 거친 후, 새카만 빌 로드 천 위에 떠올라 세상 만물에 공평하게 흰 빛을 뿌리는 만월을 안주 삼아, 발코니에서 레드 와인을 마시고 있었다.
나의 간청은 샤도네이를 발효시킨 샤사르 몽리쉐를 즐겨 마시는 왕의 취향마저도 바꿔놓았다.
내가 마음을 품었던 누군가를 연상토록 만드는 그르나슈.
이미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원수와 관계를 치른 뒤 들이키는 그것은 그윽한 향내를 뿌리는 겉내와는 달리 천남성을 달인 사약처럼 쓰디쓰다.
하긴, 와인의 맛이 쓰지 않으면 의미가 없지.
술을 좋아하지 않는 내가 매일 밤 억지로 들이키는 그르나슈는 영원을 맹세한 반려자를 떠나보낸 데 대한 나름의 속죄니까...

"폐하, 여색에 빠져 국정을 돌보지 않으시면 후에 백성들의 원망을 듣습니다. 저를 사랑해 주시는 만큼 민생에도 신경을 써주셨으면 합니다."

국왕은 내가 따르는 와인을 받으며 신기한 물건을 보는 듯 한 눈으로 나를 주시하였다.

"그대는 참으로 특이하구나. 보통 여자들은 남자를 잡아놓지 못해 안달이거늘, 그대는 어찌하여 이리도 짐의 애간장을 태우는 것인가?"

나는 키스하려 다가오는 왕의 손길을 부드럽게 밀어내며 마법과도 같은 눈웃음을 지어보였다.

"폐하의 혜안을 흐리게 하는 간사한 여자라는 오명을 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오나..."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발코니를 가로막은 대리석 난간을 가볍게 쓸어 넘겼다.
물론, 왕의 시선이 닿는 지대에 서서 우수어린 페르소나를 덮어 쓰는 것도 잊지 않았다.

"왜 그러느냐? 흡사 무슨 고민이 있는 얼굴이로구나."

국왕은 예상대로의 질문을 던져왔다.
나는 가면을 덮은 얼굴을 왕에게로 돌려 천천히 다가갔다. 왕의 발치에 무릎을 꿇은 나는 간절한 투로 입을 열었다.

"...폐하. 저 역시 한 떨기 꽃과 같은 나약한 여자... 소청이 있사온데 부디 들어주실 수 있으시온지요...?"

"말해 보거라. 짐이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들어주겠다."

나는 폐하의 무릎에 손을 올린 뒤 간절한 열망을 담은 촉촉한 눈동자로 그를 바라보았다.

"폐하... 저의 역할은 폐하에게 기쁨을 선사하는 일이라 생각하옵니다. 폐하께선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물론 짐도 그렇게 생각한다. 당연한 게 아니냐. 그대는 짐의 것이니까."

"그렇지만..."

나는 영원히 섬길 것을 맹세한 지아비와 영원히 헤어지게 된 날을 떠올리며 한 방울 눈물을 흘렸다.

"절세가인이라 하더라도 겉모습에 신경을 쓰지 않는다면 그저 향기가 없는 꽃에 불과하옵니다. 향기가 없는 꽃에는 벌과 나비가 가까이 하지 않지요. 저는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단지 폐하를 기쁘게 해 드리기 위한 의도로 제 자신을 꾸몄을 뿐이옵니다. 헌데..."

나는 내 볼을 타고 흐르는 한 줄기 눈물을 따라 애처롭게 통곡했다.
여자의 눈물은 때와 장소에 따라 잘만 이용하면 어줍잖은 무기보다 커다란 위력을 발휘한다.
어렸을 때는 갖고 싶은 것을 사 달라고 조를 때 아니면 잘못했는데 잔소리 듣기 싫을 때나 써먹었었지만, 성인이 되어 진짜 여자로 거듭난다면 다른 곳에도 응용이 가능하다.
예를 들면 지금처럼... 남자의 마음을 사로잡고 싶을 때라든가.
정말 어쩔 수 없다는 듯한 투로 성 안애서의 나의 입지에 대해 얘기함에 따라 왕의 얼굴은 가을의 잘 익은 사과처럼 붉게 물들었다.
부끄러움 따위가 아니다. 왕은 화가 머리끝까지 나 있었던 것이다. 물론 화를 내도록 부추기는 것은 나지만.
간간이 날아드는 아버지의 편지가 아니더라도, 성 내의 원수들과 백성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정도는 잘 알고 있다.
모르는 인간이라고는... 나를 취했다는 정복감에 자신의 혼을 바친 어리석은 이 남자 뿐.

"감히 어떤 놈이 그대를 모함하는 것이냐! 당장 이름을 대거라. 짐이 책임지고 큰 벌을 내리도록 하겠다!"

내가 온갖 비싼 물건을 사들여 국고를 바닥낸다는 소문(이 아니라 사실이지만)을 퍼뜨리는 불손한 세력이 있는 것 같다는 말을 흘리자마자 국왕은 얼굴을 한층 더 벌겋게 물들이며 호통을 쳤다.

"그대의 방은 이리도 소박하거늘, 어찌하여 그런 낭설을 지어내는 것인지 알 수가 없구나!

이것도 거짓말은 아니다. 그도 그럴 것이, 비싸게 사들인 호화로운 물건들은 전부 목록을 작성하여 시간의 틈을 두고 완벽하게 없애버리기 때문이다.
특별히 전문직에 종사하는 것이 아닌 보통 남자들은 방의 자잘한 장식품이나 보석, 드레스에 대해서는 무심한 법이니 어지간해서는 들킬 염려가 없었다.

"어서 말해 보거라. 유언비어를 퍼뜨리는 세력이 누구더냐?"

나는 한 층 더 가련한 표정을 지으며 슬프게 고개를 저었다.

"말씀만으로도 감사하옵니다, 폐하... 허나 공교롭게도 폐하의 질문에는 대답할 수 없습니다. 현재 저의 입지로는 알 수가 없기 때문이옵니다."

"으음... 생각할수록 괘씸하구나. 감히 짐의 비를 무시하는 자가 있다니... 걱정하지 말거라. 어떻게든 주동자를 잡아내 걸맞는 벌을 내리도록 하겠다. 알겠느냐?"

나는 국왕의 배려에 마음 속 깊이 감사하며 며칠 동안 타이밍을 재느라 속으로만 벼르던 말을 꺼냈다.

"폐하, 외람되지만 감히 한 말씀을 더 올려도 괜찮겠습니까?"

"말해 보거라."

"현재 왕궁의 국고 사정이 그리 좋지 않다 들었습니다. 그와 관련이 있는지 확실히는 알 수 없지만... 얼마 전 제가 홀로 은밀한 정원을 거니는 동안 불온한 소문을 들었습니다."

"소문이라니, 무슨 소문 말인가?"

나는 잠시 뜸을 들인 후 다시 입을 열었다.

"대화를 세세하게 기억하지는 못하지만... 제가 입궁한 시기에 맞춰 국고를 비우고, 그 책임을 저에게 뒤집어씌우겠다는 것이 그 요지였습니다."

"불경한 놈들 같으니...! 무슨 말인지 알겠다. 내 사실관계를 명확히 조사토록 하여 엄벌을 내리겠다고 약속하겠노라."

국왕은 관자놀이를 실룩이며 분통을 터뜨렸다.
화를 내는데 온 신경을 집중 중이신 왕은 자신의 발치에 무릎을 꿇었던 내가 일어나 뒤로 돌아가 있다는 사실도 깨닫지 못했다.
나는 그의 목덜미에 턱을 대고 약간의 기교를 부렸다. 마법이라고 말하는 편이 좀 더 이해하기 쉽겠지.
사람을 조종하는 마술을 쓸 줄 안다면 처음부터 그렇게 하라는 설도 있었지만, 그런 짓을 하는 녀석은 초짜 중의 초짜.
처음부터 끝까지 마법으로 조종하는 것은 어렵지 않지만, 그랬다가는 왕궁의 마도사들에게 들키기 쉽다. 만에 하나 들켰다가는 목숨을 부지하지 못할 터.
그렇다면 조금 돌아가더라도 정통적인 방법을 쓸 수밖에 없다. 마법은 가벼운 양념 정도로 사용하는 것이 제일 좋은 것이다.
나는 왕의 귀에 대고 낮은 목소리로 마법과도 같은 소청을 흘려 넣었다.

"반드시 약조해 주십시오, 폐하... 저를 욕보이는 속된 무리들을 전부 숙청하겠다고 말입니다..."

 

 

 

 

몇 년 후.

요사이 마을은 조용할 날이 없었다.
대광맥이 인간의 손에 떨어진 이후, 큐브는 아버지의 밑에서 벗어나 마계를 떠도는 유랑길에 올랐고, 셋이서 북적이며 살아가던 추억은 시간의 저편으로 사라지고, 지금은 아버지 혼자 그 집을 쓸쓸히 지키고 있다.
성에서는 살아남기 위해 남을 모함하고 공공연하게 패를 갈라 아군은 끌어들이고 불순분자는 배척한다.
머지않아 왕위를 이어받을 거라 여겼던 샤를 왕자는 왕위계승권을 빼앗긴 채 어딘가로 잠적했고, 백성들은 자신들을 지탱할 커다란 축을 잃어버린 탓에 큰 혼란에 빠졌다.
1년 이상 공을 들여 기어이 탈취한 왕위계승권은 현재 공석이 되었다. 내 태에서 서자를 생산해 허수아비를 세우는 간교는 생각해 볼 가치조차 없는 것.
나라의 국고가 바닥난 지는 오래. 왕실은 텅 빈 국고를 채우기 위해, 나의 사치를 메우기 위해 만만한 백성들을 쥐어짰고, 백성들의 원성은 하루하루 하늘을 찌를 듯 무섭게 치솟는다.
두 번째 정실 세피나는 축출한 지 오래. 그리고 나에게 조금이라도 밉보인 자는 직위의 고하를 막론하고 숙청되었다.
한 땀 한 땀 공들여 짠 퍼즐은 내 예상을 훌쩍 뛰어넘는 기염을 토했다.
나의 몫을 앗아간 원수의 나라를 무너뜨리려는 내 계획은 아주 순조롭다.
왕자가 쫓겨나고, 충신들이 제거됨에 따라 나의 계획은 점점 더 추진력을 얻어 파죽지세로 나아간다.
지금은 약탈과 범죄가 일상이 되어버린 나라가 되었다.
매일 나를 찾아오는 왕은 마녀의 유혹에 빠져 제 스스로는 무엇 하나 결정하지 못하는 꼭두각시가 되었다.
더 이상의 충신은 남아 있지 않다. 어떻게든 제 몸뚱아리를 보존하려는 권태로운 자들만이 남아 있을 뿐.
게다가 한 가지 기쁜 소식이 더.
성을 나간 샤를 왕자가 자신의 지지자를 그러모아 힘으로서 왕권을 교체하려 든다는 풍문이 종종 들린다.
이 곳은 머잖아 전장이 될 테고, 일대는 대혼란에 빠질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내가 바라마지 않는 것이다.
남의 것을 탐내고, 피눈물을 뽑게 만든 불한당들에게 참으로 어울리는 말로로다.
인간의 추악한 욕심이 만들어낸 괴물의 울음소리는 어느 새 부메랑이 되어 스스로 금기를 어긴 인간들에게 그대로 돌아가겠지.
모든 것이 혼돈에 빠지고, 왕국은 소멸할 것이고, 대광맥은 관계없는 무수한 이들의 피를 빨아들여 더욱더 견고한 마력을 방출할 터.
나는 조만간 다가 올 그 날을 즐겁게 기다리고 있다.
투명한 작은 세계 안에서 출렁이는 그르나슈 와인에 시선을 고정하고, 나는 쓰디쓴 고소(苦笑)를 지었다.
당신도... 살아 있었다면 자신들이 뿌린 씨앗을 거두는 어리석은 인간들의 최후를 볼 수 있었을 텐데.
가엾은 내 사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