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 저는 내일 결혼합니다. 사교계에서 만났던 기사님의 청혼을 받았거든요.
참 묘한 일이에요. 프린세스가 되지 못하고 절망하고 있었는데, 거짓말 같이 눈앞에 나타난 사람과 결혼을 약속하게 되다니 말이에요.
왕자님과 결혼하지 못한 것은 아직까지도 미련이 남아요. 아무래도 어릴 적부터 꿈꿔 왔던 일이니까...
그래도 그 분만의 프린세스가 된다는 사실로 애써 위로합니다. 이런 기분으로 결혼이라니, 왠지 그이에게 미안하네요.
시원섭섭한 이 기분은 오늘밤을 끝으로 잊어버려야겠죠?
세상일이라는 게 참 신기해요. 갖고 싶었던 왕자님의 마음은 클로버에게 가 있고, 그 껍데기 역시 로사에게 빼앗기고...
로사가 프린세스로 선택되었을 때는 너무 슬퍼서 죽을 것만 같았는데, 그래도 시간이 지나니 어떻게든 살고 있는 저 자신을 발견했으니 말이에요.
좋았든 싫었든 8년 간 동고동락했던 후보들에 대한 마음도 이젠 내려놓았답니다.
로사가 식에 맞추어 보낸다는 선물도 이제는 담담히 받을 수 있을 것 같아요.
내일 결혼식에서 제 모습을 본다면 아빤 아마 눈물을 참지 못하실 거예요.
안 그러신다고요? 두고 보세요. 아버지는 항상 엄하고 무뚝뚝하셨지만 내일은 귀신 눈에도 눈물이란 속담을 체감하시게 될 테니까.
하지만 우리 그이 너무 미워하진 마세요. 얘기해 봤더니 아빠를 굉장히 잘 알고 있던 걸요. 그 사람도 기사니까, 현역에 있을 당시 아빠의 소문을 자주 들었었나 봐요.
우리 부녀만의 생활도 오늘이 마지막이라니 왠지 섭섭하네요. 아, 우즈가 있으니 3명인가?
지금까지 키워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려요.
오늘밤만큼은 어릴 때의 나로 돌아가 아빠에게 어리광을 실컷 부리고 싶네요. 괜찮죠? 아빠~

아빠의 딸, 헤베로부터

 

 


시간이 어떻게 흘러갔는지, 지금의 나로서는 알 길이 없었다.
기억하는 것이라고는 몰리뉴 왕국의 프린세스가 지금 막 결정되었고, 그 대상이 내가 아니라는 것뿐이었다.
-어째서야? 왜 내가 프린세스가 되지 못한 거야?
그 애한테 꿀리는 건 아무것도 없었어! 성적도 평판도 동등했다고! 오히려 집안만으로 따졌을 때 같은 평민이라도 내 쪽이 그나마 우수하단 말이야! 그런데... 그런데 왜...?
가슴까지 차오른 울분은 끝내 날개를 펴지 못하고 아롱지어 바닥에 흩어진다.
충격에 빠져 멍하니 서 있는 나는 프린세스를 간택한 의미 있는 자리에서 들러리 중 하나로 전락해 버렸다.
발표하기 전까지만 해도 동등했던 각자의 위치는 발표 후를 기점으로 극단으로 치닫고 말았다.
아니, 정정하겠다.
냉정히 말해 프린세스에 관심 없었던 엘리너로서는 프린세스로 간택 받지 못했다 한들 마음이 아프기는커녕 별로 신경 쓰지도 않을 터.
지금 이 세상에서 사라지고 없는 클로버 역시 왕자님보다는 다른 쪽에 관심을 두고 있었으니 논외 대상.
프린세스로 간택된 로사도 제외한다면... 결국 상처받는 건 나 하나 뿐.
그러거나 말거나 시계의 초침은 멈추지 않았다.
방금 인생에서 패배한 잉여 따윈 신경 쓰지 않고 힘차게 태엽을 감아 본연의 목적에 충실한다.
하긴, 나 같은 사람들을 일일이 신경 썼다간 세상이 제대로 굴러갈 턱이 없겠지만...

"헤베, 너 괜찮니?"

어떻게든 의식의 끈을 놓지 않으려 노력했기 때문에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만 같은 정신을 겨우 추스를 수 있었고, 그 덕이라 할 지, 일정을 끝낸 폐하께서 자리를 뜨실 때까지는 멀쩡하게 서 있을 수 있었다.
악몽 같은 시간이 이제서야 끝났다는 사실에 감사하며 나는 서둘러 알현실을 빠져나왔다.
지금은 아무 말도 하기 싫었고, 아무 생각도 하고 싶지 않았다.
그저 이불을 푹 뒤집어쓰고 흐느껴 울며 방에 혼자 틀어박혀 있고 싶었다.
하지만 그 작은 바람조차도 허락해 주지 않을 만큼, 신은 내가 고까웠던 모양이다. 아니면... 왕자님의 마음을 빼앗고 도망쳐 버린, 천계 출신이었던 클로버를 미워했다는 이유로 내게 벌을 내리신 걸까?

폐하께서 나가시자마자 서둘러 빠져나와 집으로 도망치려는 내 등에 대고 엘리너가 그렇게 물어왔던 것이다.
아마 내가 자리를 떴을 때부터 쫓아왔으리라. 지금의 내겐 명백히 나를 향한 질문을 뿌리칠 기운이 없었고, 그 덕분에 목소리를 듣고 멈춰 선 나를 두 사람이 따라잡았다.
뒤를 돌아보니 복잡 미묘한 표정들을 지으며 나를 따라잡은 두 소녀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그나저나 쟤네들, 알현실부터 여기까지 거리가 꽤 되는데, 그 거리를 거의 뜀박질하다시피해서 쫓아온 주제에 숨 한번 헐떡이질 않는구나.
참고로 지금 우리 셋이 서 있는 곳은 은밀한 정원.
엘리너야 뭐, 8년 내내 검술과 체술을 연마해 왔으니 그렇다 치고 로사는... 아, 방랑예술가 딸이어서 어릴 적부터 체력 하나는 끝내줬었지.
묘한 데서 감탄하는 나. 내가 생각해도 난 가끔씩 이상한 데서 감탄을 하곤 한다.

"저기, 미안. 일이 이렇게 돼서 정말 유감이야."

가만 내버려두면 내가 도망칠 거라 여겼는지, 날 따라잡은 엘리너가 내 어깨를 꽈악 붙잡으며 서투른 위로를 건넨다. 어째서 네가 사과하는 거니?

"......"

나는 애써 무시했다.
박정하다고 말하지 말길. 애당초 저 사과에는 진심이 담겨 있지 않은 것이다.
하기사 내가 프린세스로 간택 받지 못한 건 저들의 탓이 아니니 미안하게 생각하라고 주장하는 것 자체가 말도 안 되는 생각이지만 말이다. 더구나 이름뿐인 프린세스 후보로 밑밥을 깔아준 엘리너라면 더더욱.
운이 나빴다느니 그렇다고 인생이 끝난 건 아니라느니 하는 아무래도 좋은 말 뿐인 위로를 대충 흘려들으며 나는 슬쩍 로사를 넘겨다보았다.
화려한 위용을 뽐내는 티아라.
로사의 머리 위에는 몰리뉴 왕국의 프린세스라는 징표가 우아하게 얹혀 있었다.
빛을 받아 번쩍이는 티아라의 카리스마는 날 선 도신이 되어 나를 냉혹한 현실로 떠민다.
티아라를 차지한 로사 역시 무표정한 얼굴로 나를 지그시 바라보고만 있을 뿐이었다.
-빈말로라도 미안하단 말은 하지도 않는구나.
나는 내심 혀를 찼다.
언제나 합리적이고 냉정한 사고로 후보들을 이끌었던 저 얼음 여왕으로서 당연하다 하면 당연한 반응이었지만.
분명히 저 무표정 속에서는 '미안할 것도 없는데 빈말로 사과하는 것은 적에 대한 어줍잖은 동정'일 뿐이라 일축하고 뒷짐 지고 서서 구경만 하고픈 속내를 감추고 있을 테지.
가만히 냅두었더니 엘리너는 저 혼자 몸이 달아 의미 없는 위로를 계속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너무 상심하지는 말고... 네 재능을 꽃피울 수 있는 기회는 또 주어질 테니까 꾸준히 기다리다보면 언젠가는..."

잠깐.
듣자하니 마지막 말이 마음에 걸린다.

"방금 뭐라고 했어?"

"어...?"

"방금 뭐랬냐고."

내 목소리에서 심상찮은 기운을 느꼈는지 내 어깨를 잡은 엘리너의 손이 살짝 떨리는 것이 느껴진다.

"...기회는 또 주어질 거라고 그랬니? 내 꿈이 뭐였는 줄이나 알고 그런 소릴 하는 거야? 아무 것도 모르면서 어설픈 위로하려 들지 마. 네가 뭘 안다고!"

무심코 목소리 톤이 높아진다.

"불쌍하다고 생각하는 거지? 죽어라 달렸는데 1등을 뺏기다니 불쌍해, 라고. 그렇게 생각하는 것뿐이잖아! 동정하지 마. 너한테 동정받아봤자 변하는 것도 없고, 오히려 더 비참해진단 말이야!!"

땅에 떨어져 아스라 졌다고 생각했던 울분이 단숨에 튀어나왔다.
그녀의 잘못이 아니라는 건 알고 있다. 날 약 올리려고 붙잡은 게 아니라는 것도 알고 있다. 마음은 안타까운데 그걸 어떻게 표현해야 할 지 몰라 쩔쩔매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다. 하지만...
그녀가 위로랍시고 건넨 말들은 나의 가장 아픈 부분을 건드렸고, 가장 신경 쓰고 있던 걸 별 것 아닌 거라고 치부하는 것만 같아 열이 받는다.
...그래. 프린세스가 되지 못한 데 대한 엄한 화풀이일 뿐이라는 설도... 조금은 인정하지. 그런 마음이 전혀 없었던 건 아니니까.

"그러게 내가 뭐랬어. 지금 당장 헤베한테 접근하는 건 바람직한 처사가 아니라고 말했잖아."

감히 대꾸하지 못하고 멍하니 나를 바라보는 엘리너의 팔목을 잡아 내리며 신데렐라가 된 소녀가 중재에 나섰다.

"지금 저 애한테 필요한 건 조용히 현실을 받아들일 수 있는 시간과, 생각을 정리할 수 있는 비밀 공간이야. 괜히 위로니 격려니 해봤자 전혀 귀에 들어오지 않을 걸. 괜한 반발심에 애꿎은 사람에게 화풀이하는 거 보니까 아무래도 내 말이 맞는 것 같지만."

어쩐지 깔보는 듯 한 투로 말을 맺는다.
한 마디쯤 반박하고 싶었지만... 그만두었다. 프린세스로 간택 받아 곧 왕비가 될 사람을 상대로 언성을 높여봐야 나만 손해일 뿐이라는 건 훼이크고... 인생의 패배자가 승리자에게 덤벼 본 들 어차피 패배자의 열폭으로밖에 들리지 않을 터. 그게 진짜 이유다.
거기다... 승리에 대한 도취 때문에 콧대만으로 하늘을 찌를 듯 한 자신감을 뽐내고 있는 그녀 앞에 서 있자니 어쩐지 내 자신이 한없이 초라해지고, 그 눈을 마주치지 못할 것 같은 위축감이 들었다는 것도 부정할 수 없다...

"가자 엘리너. 헤베는 자신이 스스로 현실을 받아들이고 일어설 수 있을 때까지 혼자 내버려 두도록 해. 그게 저 애한테나 주변 사람들한테나 제일 좋은 방법이니까."

-당사자를 눈앞에 두고 그렇게 냉정한 분석을 하다니...
내 마음 속 불만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로사는 강제로 엘리너의 손목을 붙들고 다시 성 안쪽으로 들어가 버렸다. 티아라를 얹은 채 돌아다니는 꼴을 보아하니 아무래도 다시 성 한으로 돌아오라고 명령이라도 받은 모양이다.

"후우..."

그들의 모습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짐과 동시에 긴장이 풀렸는지, 별안간 다리에 쥐가 나는 바람에 나는 정원에 주저앉을 수밖에 없었다.

"우... 흐윽..."

후보들 중에서 그나마 친구라고 부를 수 있는 소녀에게 화를 냈다는 사실이 이제야 현실로 닥치면서 가슴 속 한 켠에 죄책감을 심어놓았다. 쏘아붙였던 말은 부메랑이 되어 나에게로 돌아온다.
나는 그 무게를 이기지 못한 채 결국 서러운 울음을 터뜨렸고, 그나마 다행이라 할 지 울창한 초목들이 정원의 이름에 걸맞게 적재적소에 위치하여 흐느껴 우는 내 모습을 가려 주었다...고 생각했는데.
스윽.
그리 많은 시간은 지나지 않았으리라. 마를 줄 모르는 눈물을 한껏 뽑아내던 중, 누군가의 기척과 함께 엄마 품처럼 따스한 기운이 내 곁을 감싸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괜찮아요?"

부드러운 목소리가 조심스레 내 어깨에 내려앉는다. 눈물에 젖은 눈동자를 들어 올려다보니, 흔들리는 초록색 인영이 아지랑이처럼 내 앞에서 하롱하롱 춤추고 있었다.
...아. 눈물 때문에 그리 보이는 거구나.
소리죽여 울고 있었다고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울음소리가 새어나가 이 남자를 부른 것 같았다. 창피한 생각이 들어 얼른 팔을 들어 대충 눈물을 닦아냈다.

"괜찮아요. 소란 피워 죄송합니다..."

아까의 기세는 어디로 숨어 버린 건지. 나는 모기만한 목소리를 겨우 짜내 그의 말에 대꾸했다.

"아뇨, 질책하려고 말 건 게 아닙니다. 정원을 산책 중이었는데 아름다운 모습을 발견하는 바람에 그만 실례를 무릅쓰고 접근하게 된 겁니다... 그런데 말이죠."

"네?"

내게 다가온 경위를 설명한 남자는 어색한 미소를 보이며 몇 마디 말을 덧붙였다.

"사람이 손을 내밀었으면 그 성의를 생각해서라도 그걸 잡으시든가 아님 뿌리치시든가 하시지, 그렇게 멍하니 보고만 계시면... 제 입장이라는 게 조금 많이 민망해지는데요."

"아, 죄송합니다...!"

순간 당황한 나는 앞뒤 생각하지도 않고 허둥지둥 손을 뻗어 그의 손을 잡고 일어나-

"꺄앗...!"

-려다가 중심을 잃고 비틀거린다.
...우느라 깜박했다. 다리에 쥐가 나서 주저앉아 있었단 걸...
진짜 쥐구멍이라도 있음 숨고 싶은 심정이다.
그나마 남자가 잡아준 덕에 넘어지는 것만은 모면해서 숙녀로서의 품위는 지킬 수 있었다.
남자는 피식 웃고는 쥐가 났으면 말을 하지 그랬냐며 운을 띄우고 나를 부축하여 가까운 의자에 앉힌다.

"이제 좀 진정됐어요?"

그가 그렇게 물어온 것은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 멈추지 않을 것 같았던 눈물이 완전히 말랐을 때였다.

"네... 덕분에요. 초면에 정말 실례가 많습니다..."

나는 부끄러움에 고개를 숙이고 겨우 입을 열어 웅얼웅얼 질문에 답했다.
왕자님의 손을 잡을 날만 손꼽아 기다린다는 이유로 지금까지 댄스 레슨을 받을 때와 양아버지 외에는 누구도 손잡는 걸 허락한 적이 없는데...
아무리 경황이 없었다곤 해도 외간 남자의 손을 잡아버리고 부축까지 받다니... 부끄러워서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집에 갈 때까지 고개는 숙이고 있어야지...
라고 결심한 다음 순간, 나는 그의 말에 내 결심을 철회할 수밖에 없었다.

"초면이라니 섭섭하네요. 꽤 자주 본 사이 아닙니까."

"그게 무슨 뜻이죠?"

"우리가 구면이라는 소리죠."

"그건 알거든요? 대체 우리가 언제 어디서 봤다는 거예요?"

호기심 때문인지, 방금 결심한 것도 잊어버리고 나는 고개를 빳빳이 들어 그의 얼굴을 응시했다.

"로즈 부인의 가든파티, 브로클허스트 백작의 피로연, 수확제의 댄스 파티, 코네트 후작의 생신 파티..."

남자는 직접 손을 꼽으며, 언젠가 내가 참석했던 사교 모임들을 일일이 나열했다.
-이 사람... 대체 무슨 일을 하기에 사교 모임들을 일일이 기억하고 있는 거지? 잠깐...?!
순간, 불길한 생각이 뇌리를 스쳐지나갔다.

"당신이 어떻게 그렇게 자세히 알고 있는 거죠? 당신 설마..."

나는 남자를 노려보며 말했다.

"...프린세스 후보 스케줄 관리인?"

"세상에 그런 직업이 어디 있습니까?"

어째서인지 항의하는 남자.

"난 그저... 티에스 양이 참석한 파티에 저도 참석했었다고 말하는 겁니다!"

"그래요? 전 기억이 잘 안 나는데..."

나는 볼을 긁적이며 솔직히 대꾸했다.
어째서 이 남자가 내 이름을 알고 있는지에 대한 의문이 떠올랐지만 그건 쉽게 설명할 수 있을 것 같다.
퀘스트 여행을 떠나기 전, 나를 포함한 프린세스 후보들은 왕국의 이름으로 전 백성들에게 소개되었던 적이 있다. 이름이며 출신지며 스펙 등등 각종 인적사항들이 알려졌으니, 내가 모르는 사람이 내 이름을 알고 있다 해도 그리 이상할 것은 없을 터.

"그럼... 매번 춤 신청을 했다가 거절당했던 남자라고 하면 좀 기억이 나겠어요?"

남자가 다른 힌트를 던지고 나서야 기억이 난다. 파티에 초대받을 때마다 내게 춤 신청을 했던 남자. 다른 후보들은 경험 삼아서라도 춤 정도는 춰 보는 게 좋지 않겠느냐고 말했지만, 그러면 왠지 왕자님에게 못할 짓을 하는 것 같아 결혼 전에 외간남자의 손을 잡아서는 안 된다며 거절했었던 것이다.

"이제야 기억이 나신 모양이네요."

내 얼굴을 살피던 남자가 미소를 지었다.

"그 때 티에스 양 아주 유명했었어요. 평민 출신의 프린세스 후보라는 것도 한 몫 했지만. 넘칠 듯 한 기품이라든가, 바라보는 남자를 사랑에 빠지게 할 정도의 미소라든가, 남을 먼저 생각하는 마음 씀씀이라든가, 하여튼 굉장했거든요. 다들 뒤에서 티에스 양을 뭐라고 불렀는지 알아요? '미소의 천사'라고들 했죠."

"아, 네에... 고마워요."

나는 갑자기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성의 없이 대꾸했다. 나도 모르는 새 내가 사람들로부터 미소의 천사라고 불렸다는 말을 듣는 순간 잠시 잊고 있었던 현실이 떠올랐던 것이다.
남들한테서 그런 찬사를 백날 받아봤자 뭐하는가. 정작 내 마음을 훔쳤던 사람에게는 인정받지 못했는데.
그러한 생각이 떠오르자 별안간 우울해지기 시작한 마음을 걷잡을 수 없었다.

"저... 도와주셔서 감사했어요. 전 바빠서 이만 일어나 보겠습니다."

우울해지기 시작하자 알현실을 뛰쳐나올 당시 느꼈던 절망감이 스멀스멀 차오르기 시작했고, 절망감이 차오르자 더 이상 밖에 나와 있고 싶지 않았다.
빨리 집에 가고 싶어.

"잠깐만요, 티에스 양."

그런 생각을 떠올리며 대충 인사를 건네고 자리에서 일어나려는데 남자가 내 팔목을 잡아 강제로 내 움직임을 멈추었다.
무례한 행동에 눈살을 찌푸리며 그를 쏘아보려는 순간, 나는 나를 물끄러미 응시하는 그의 눈동자와 마주치고 말았다.
내 팔을 꼭 붙든 채로, 그는 입을 열어... 끝났다고 생각한 내 미래를 다시금 움직이게 해 준 마법의 말을 입에 담았다.

"저와 한 곡 추시겠습니까, 레이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