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께
건강히 잘 지내고 계신가요?
전 지금 먼 이국의 대지에 서 있습니다.
아버지와 피로 맺어진 사이는 아니지만 그래도 전 정직한 귀족의 딸.
약자를 돕고 악당을 물리치는 여행이 될 거라는 생각에 매일이 두근거린답니다.
그렇지만 수행의 나날은 새로운 일 뿐이어서 너무 적응하기 힘들어요.
검술엔 아주 자신이 있지만 여행을 하다 보면 아무래도 마법의 힘이 필요할 때가 있더라구요.
검술과 체술 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해 왔는데, 요새 부쩍 마법을 배워두었더라면 조금은 편하게 지낼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자주 해요.
그치만 공교롭게도 전 마법이라면 아주 싫어하고... 여행 용병으로서 실격일까요...
이럴 줄 알았으면 클로버에게 마도의 기초라도 조금 배워 두는 건데 그랬어요.
하지만 이미 지난 일을 후회해 봤자 별 수 없죠. 몸은 고되지만 긍정의 힘을 기운 삼아 매일 즐겁게 생활하려 하고 있어요.
언젠가 정말 용사로 불리는 그 날이 오면, 떳떳하고 당당히 아빠가 계신 곳으로 달려갈게요.
여행 선물로 제 모험담을 잔뜩 들고 갈 테니, 그 때까지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아빠의 딸, 엘리너로부터

 

 


"천계와의 화합이라고?"

뜨거운 홍차를 한 모금 목으로 흘려 넘기고, 나는 미심쩍은 시선으로 로사의 얼굴을 훑어보았다.
이야기는 대략 열흘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8년간의 퀘스트 수행 목적용 여행을 마치고 귀환한 후보들은 나름대로의 공로를 인정받고, 각자의 인생을 헤쳐 나가기 위해 법의 울타리를 벗어나 냉혹한 사회의 세계로 나서기 위한 또 다른 여행을 떠났다.
8년 간 들인 노력의 결실을 그대로 돌려받은 자, 노력에 걸맞은 보답을 받지 못한 자, 그런 건 아무래도 좋은 자(참고로 그게 나다), 실타래처럼 얽히고설킨 운명을 피해 이 세상에서 나가버린 자 등, 반응은 제각각이었지만...
개인이 결과에 납득하건 말건 시간은 멈춤 없이 흐르고, 세상은 별 탈 없이 잘 돌아간다.
애초에 다른 꿈을 갖고 있었던 터라 처음부터 프린세스가 되기를 포기하고, 오히려 프린세스 후보 자리를 개인의 꿈을 이루는데 이용했던 나는 성을 나오자마자 어릴 때부터 줄곧 계획했던 자아 찾기 여행을 시작했다.
세상을 배우겠다는 목표 하에 이곳저곳을 기웃거리고, 여행하면서 발견한 도적단을 박살내고, 가도에 눌러앉은 몬스터를 쫓아버리고, 마을을 공포에 떨게 만든 현상수배범의 신병을 확보하여 관청에 넘기는 여행을 계속하던 도중-
퀘스트 수행 중에 후보들끼리 연락을 받기 위해 종종 이용했던 전서용 비둘기를 한 마리 받았다. 비둘기 입장에서는 날 찾아왔다고 표현해야 옳겠지만.
전서용인지 어떻게 한 번에 알아보았냐고 묻는다면 대답은 간단하다. 일단 비둘기 다리에 두툼한 양피지가 매달려 있었다는 게 첫 번째. 그리고... 밭을 어지럽히는 코볼트 무리를 토벌한다는 조건으로 얻어낸 지방 명물 카르테 버섯을 훔쳐간 코볼트들을 검으로 때려잡는다는 살벌한 상황에서 내개 다가 올 간 큰 짐승이 달리 있을 리 없다는 것이 두 번째.

"읏차..."

나는 잠깐 기다리라는 손짓을 보내고, 이미 전의를 상실한 코볼트들을 단숨에 정리하기 시작했다.
개중에 도망간 몇 마리도 있지만, 그렇게 얻어맞아놓고 제정신으로 돌아올 리는 없으니 걔들은 그렇다고 치고...
겨우 상황을 정리한 나는 비린내가 진동하는 검을 쓰러지지 않도록 땅에 대충 꽂아 넣고, 비둘기의 다리에 붙어 있는 양피지를 조심스럽게 떼어냈다.
움직이고 있는 사람을 찾으려면 생각 이상으로 많은 돈과 시간이 소요되는데 어째서 전서구들은 편지를 받은 인물을 정확히 찾아낼 수 있는 걸까?
문득 그런 궁금증이 솟아났지만, 지금은 그런 아무래도 좋은 지적 호기심을 충족시킬 때가 아니다.
몰리뉴 왕국의 휘장으로 봉인된 겉면을 뜯어내고 양피지 속에 고이 잠든 수려한 글씨들을 좇아 들어간다.
아, 나한테 편지를 전한 비둘기는 내가 양피지를 떼어내자마자 도망치듯 날아가 버렸다. 아무래도 더 붙어 있다간 제 명에 못 죽을 거라 생각한 모양이었다. 뭐, 탁월한 판단이긴 하다.
편지의 송신인은 과거 프린세스 자리를 두고 나와 경쟁했던 후보 중 한 명이었다. 나야 뭐 원체 프린세스에 관심이 없었으니 경쟁이라는 건 명목상이었지만 말이다.
염원하던 프린세스가 되어 왕자와 함께 왕국을 다스릴 터인 그녀는 간단한 인사로 안부를 묻는 것으로 편지의 서두를 채우고, 부탁이 있다는 말과 함께 편지를 보낸 진짜 목적을 어필하고 있었다.
국가의 전망이 달린 중요한 문제를 은밀히 상담하고 싶다는 것이 편지의 골자.
나는 양쪽 머리를 차지한 큼지막한 붉은 리본 중 하나를 피가 묻지 않은 손으로 가볍게 잡아당기며(무언가에 열중할 때 혹은 곤란할 때 자동적으로 튀어나오는 버릇 중 하나이다), 보내진 편지를 2번 정도 정독했다.
내가 주목한 것은 말미에 붙은 추신.

"이거 갈 수밖에 없겠는걸..."

양피지를 냅다 구기며 나는 조용히 중얼거렸다.
싸움을 걸면 받아주는 것이 예의... 다시, 8년지기 친구를 만나러 잠시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도 가끔은 나쁘지 않겠지.
그렇게 결론을 내린 나는 서둘러 의뢰를 종결짓고 고향으로 돌아가는 여행길에 올랐고, 길을 재촉한 결과 생각보다 일찍 수도의 흙을 밟을 수 있었다.
열흘 동안 이미 얘기가 되어 있었는지, 성을 지키는 문지기에게 내 신분과 방문 경위를 간단히 밝혔더니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다이렉트로 알현실까지 안내를 받을 수 있었다.
살아생전 딱 2번 방문했던 알현실과 크기며 디자인이 다른 걸 보면, 아무래도 같은 알현실이라도 방문하는 자의 신분이나 중요도에 따라 여러 실(室)이 있는 모양이다.
내어온 홍차와 피넛 버터 쿠키가 맛있어서, 몇 번이고 추가를 주문하는 사이 시간이 흐르고-
내개 편지를 보냈던 당사자가 도착한 것은 쿠키 그릇을 다섯 번째로 리필 받을 때였다.

"엘리너, 와 줘서 고마워!"

시녀의 인솔을 받으며 다가온 프린세스는 근엄한 어조로 물러나라는 명을 내렸고, 시녀가 모습을 감추자마자 내 손을 맞잡으며 새된 목소리로 끽끽거렸던 것이다.

"......?"

순간 어떻게 반응해야 할 지 몰라 멍 하니 서 있는 나.
내 손을 잡아 붕붕 흔들고 있는 이 여자는 분명 8년 동안 알고 지낸 절친이 맞지만... 퀘스트 성적표를 받은 이후부터는 명실상부한 이 나라의 프린세스. 예전처럼 허물없이 대했다가는 문답무용으로 지하 감옥으로 끌려가는 수가 있다.
아무리 예법을 등한시하는 나라도 몰락했다곤 하지만 그래도 귀족 반열에 있었던 집안에서 자랐기 때문에 기본적인 예법은 알고 있었다. 이렇게 손을 잡혀 있어선 아랫사람으로서의 예를 갖출 수가 없는데...

"그렇게 얼어 있을 필요 없어. 여기에는 나랑 너 둘 뿐이고, 누가 우리 대화를 엿들을 염려도 없으니까. 딱딱한 격식 차릴 필요 없으니까 친구 대하듯 편하게 대해주면 돼."

내심의 갈등을 눈치 챘는지, 프린세스께서는... 아니, 로사는 그제서야 내 손을 놓고 내가 앉았던 자리 맞은편에 우아하게 앉으며 장난기 가득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8년 동안 수십 수백 번 보아왔던 저 눈웃음을 보고 나서야 겨우 긴장이 풀린다. 또 격식을 '갖춘다'가 아니라 '차린다'라고 말한 이상, 예의를 따지지 않아도 좋다는 그녀의 말은 믿어봐도 좋을 터.

"그래서, 국가의 전망이 달린 문제라는 게 대체 뭐니?"

내가 질문을 던진 것은 소녀 시절의 추억과 무용담, 그 간의 안부, 최근의 상태 등을 서로 낱낱이 공유하고 있던 중 겨우 방문의 목적을 기억해 냈을 때였다.
여기까지 불러낸 목적이 뭔지 다그치자, 로사는 우아하게 장식된 차관을 들어 새 홍차를 따르며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한 얼굴로 대꾸했다.

"별 거 아냐. 그냥 친구가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해서."

"중요한 문제를 의논하고 싶으니까 당장 튀어오라며!"

무심코 목소리가 거칠어진다.
프린세스의 자리가 겉멋은 아닌 듯, 로사는 나의 날 선 시선을 태연히 받아 넘기면서 기품 있게 새로 따른 홍차를 한 모금. 그 여유 있는 행동이 왠지 부아가 치민다.

"그렇게라도 얘기하지 않으면 네가 올 것 같지 않았으니까. 그냥 친구한테 보내듯 편지를 썼다간 바쁘다며 거절당할 게 눈에 보였거든."

"그, 그야..."

로사의 정론에 반박하지 못하고 우물거리는 나. 비슷하게 써 보내진 헤베의 편지에는 바빠서 어려울 것 같다는 짧은 답변을 보냈던 예전 일이 무심코 떠올랐기 때문이다.
아, 노파심에 말해 두지만 절대 헤베가 내게 정원에서 엄한 꼬장을 부렸던 걸 마음에 두고 그랬던 건 아니다.
....정말이라니까.
어쨌든... 둘이 그렇게 친한 사이는 아니었는데다 같은 자리를 놓고 경쟁하던 중 로사가 프린세스를 차지하면서 둘 사이는 완전히 데면데면해 졌으니 로사가 그 일을 알고 있을 리는 없겠지만... 하여간 눈치 빠른 건 알아줘야 한다니까.
나는 내심 혀를 내둘렀다.
눈은 웃고 있고 입에서는 달콤한 말이 나오고 있지만 그 속은 알 수 없다. 눈치 100단에 임기응변에 능한 로사는 진정 누군가를 지배하기 위한 위치에 잘 어울리는 여자였고, 왕자가 마음을 줬던 여자가 이 세상에 없는 지금 어떤 의미에서 전(前) 국왕은 가장 프린세스에 걸맞는 여자를 며느리로 맞이한 셈이다. 그런 의미에서는 전 국왕의 사람 보는 눈이 정확하다고 해야겠지.
이거라면 어째서 로사가 프린세스가 되었는지 설명이 가능해진다.
퀘스트 성적도, 마을의 평판도, 각자가 갖춘 스펙도 동등했던 로사와 헤베.
둘의 인생을 가른 선택의 기준은 바로 얼마나 합리적이며 자신의 기질을 잘 감추고 목표에게 접근하는가였다.
점잖은 이미지로 자신의 속을 감춘 채 접근할 줄 알았던 로사와는 달리 헤베는 성품을 너무 강조한 탓에 만인에게 친절하고 항상 자신의 수를 드러냈던 것이다.
사랑을 우선시하는 근가 프린세스가 됐다면... 아마 노련한 대신들에게 하루가 멀다 하고 이리저리 치였을 테지.
왕자의 사랑을 기대할 수 없는 정혼자 간택 자리에서는 철저히 후보가 갖춘 스펙과 능력으로만 심사되었고, 그 결과 두 소녀의 희비가 교차하게 된 것이리라.
뭐, 전부 내 상상일 뿐이지만.

"그래서 프린세스가 된 기념으로 권력을 좀 남용해 볼까 해서 추신을 덧붙인 거야."

"묻고 싶은데... 만약 내가 긍정의 답변을 보내지 않았다면, 추신에 쓴 대로 세계 끝까지라도 쫓아가서 끌고 올 생각이었어?"

"아, 그렇게 받아들였니? 내 뜻은 그게 아니었는데."

"그럼 '결정하는 건 귀하의 자유지만, 만약 바람직한 답변을 보내지 않으면 그대가 세계의 끝에 있든 어디에 있든 상관없이 신병을 확보할 용의가 있습니다'라는 구절은 대체 뭐였어?"

"아, 그거?"

로사는 생긋 웃으며 소리 나지 않도록 조심하며 찻잔을 내려놓았다.

"수배령을 내려서 사람들이 널 쫓도록 할 생각이었지. 생포해서 데려오라 하면 그만이니까. 게다가 너라면 궁금해서라도 네 발로 찾아와 따질 것 같았고."

"......"

나는 무심코 할 말을 잃었다. 친구를 데려오겠다고 수배령을 내릴 생각을 하다니, 노는 물이 다르다고 할지, 실은 친구라고 생각하고 있던 건 내 착각일 뿐이고 얘는 속으로 내게 어떤 이유를 계기로 앙심을 품고 있었던 게 아닐까 하는 의혹이 불끈불끈 든다고 해야 할 지...

"야, 농담이야♡ 내가 설마 진짜로 친구 찾겠다고 수배령을 내릴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거야?"

로사는 깔깔거리며 가볍게 쥔 주먹으로 내 어깨를 툭툭 건드렸다.
-아니, 농담이라고 얘기해도... 수배령 얘기할 때 눈빛은 한없이 진심으로 보였는데...
이로써 결심할 수 있었다. 앞으로 무슨 일이 있어도 얘 신경은 건드리지 않기로 말이다.
 
"진심으로 저질러 버릴 것 같은 눈으로 지껄이는 농담은 전혀 농담 같지 않다고 따지고 싶긴 하지만 그건 굳이 입에 담지 않기로 하고... 다시 묻겠는데 대체 의논하고 싶다는 게 뭐야?"

"말했잖아. 별 것 아니라고."

같은 질문을 던지자 같은 대답이 돌아왔다.
......

"그럼 나, 네 얼굴도 봤고 과자도 잘 먹었으니까 그만 가볼게."

남은 찻물을 단숨에 들이켜고 나는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났다.
타악.
막 로사의 곁을 지나치려는 찰나, 더움 바람이 살짝 내 손을 건드렸다.

"뭐야?"

"...폐하를 알현하기 전 우리 셋이 모였을 때, 내가 헤베에게 클로버에 대해 물었던 거 기억나?"

내 손을 꼭 붙든 로사는 장난기 가득했던 페르소나를 어느 새 치워버리고 심각한 표정을 보이고 있었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로사는 재차 입을 열었다.

"헤베는 관심 둘 필요 없다고 말했지만 말이야."

"그야... 어쩔 수 없었잖아. 아무래도 헤베는 너랑 싸울 때마다 클로버가 공격주문으로 날렸던 걸 여태 마음에 두고 있는 것 같았으니까. 너도 그렇게 말하지 않았어?"

로사는 고개를 저었다.

"반쯤은 농담이었지만. 사실은 그 말, 맞기도 틀리기도 해... 헤베가 그 일을 마음에 두고 있는 건 아마 사실이지만 더 큰 이유가 있지. 너도 알다시피 헤베는 순두부처럼 흐물흐물 사람 좋은 애지만..."

칭찬인지 욕인지 모를 소리로 헤베를 평가한다.

"자기가 좋아하는 남자가 마음에 두고 있는 여자랑 친하게 지낼 대인배가 얼마나 있을 것 같니? 게다가 그 애는 프린세스가 되기 위해 모든 걸 걸었었어. 그런데 인생 목표였다고도 할 수 있는 중요한 걸 빼앗겨 버렸지. 마음은 클로버한테, 껍데기는 나한테. 그러니 그 애가 나와 클로버를 미워하고 날카롭게 대응한다 해도 어쩔 수 없는 일 아닐까?"

나는 한숨을 쉬고 로사가 손을 놓은 틈을 타 다시 내 자리로 가 앉았다.

"그래그래. 헤베가 너랑 클로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 지랑, 일련의 사건들에 대해 네가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잘 알았어. 근데 이 얘기 언제쯤 네 질문하고 연결되는 거니?"

"금방이야. 난 클로버가 어떻게 지내는지 알고 싶거든. 잘 살아 있는지 라든가, 천계는 어떤 곳인가 라든가. 하지만 난 이미 프린세스에 오른 몸. 당분간은 몸을 사려야 하기 때문에 너처럼 자유롭게 여행할 수 없어."

"그래서 대신 클로버에게 가서 안부를 묻고 오라는 거야? 그런 거면 편지로 전했어도 됐잖아."

내 대답에 로사는 칫칫하고 손가락을 흔들었다.

"훌륭한 명분이 있는데 그걸 이용하지 않으면 섭하지. 우리의 마지막 퀘스트가 뭐였는지 기억나?"

"그건 기억하고말고. 그거잖아. 무신의 사당에서 수련하는 거였고, 오이겐 사부님의 수련을 받다가 천계의 입구를 발견한 거였어. 좋아하는 검술 수련이 퀘스트 내용이어서 기억하고 있지."

"정답, 10점. 그래서 요새 왕자님과 나는 천계와 인간계의 관계에 대해 진지하게 얘기를 나누는 중이야. 그리고 아예 천계와의 화합을 도모하는 게 어떻겠냐는 얘기가 얼마 전에 나왔고."

로사의 말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입을 떠억 하고 벌리고서 로사를 멍청히 바라보는 것뿐이었다.
아니, 아니지. 멍 때리고 안자 있어봐야 시간만 흐를 뿐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일단 홍차를 들이켜 갈증을 치우고, 엄청나게 시리 중요한 이야기를 저녁 찬거리 얘기하듯 꺼내는 로사의 면전에 대고 확인 차 그렇게 물었던 것인데...

"그래, 서로 윈윈하는 거지. 몰리뉴 왕국은 천계와의 화합 도모를 시도한다는 소정의 목적을 달성하는 거고, 너랑 나는 친구 안부를 알게 되어 좋고. 꽤 합리적인 얘기 아니야?"

로사의 말투는 지극히 평화스러웠다.

"뭐 합리적이라고 하면 합리적이지만... 근데 괜찮은 거니?"

"뭐가?"

"그러니까... 왕자님은 클로버한테 마음이 있었잖아. 근데 타이밍 좋게 천계와의 화합을 도모한다니까... 아무래도 사욕이 전혀 없이 국익만을 생각하는 언행이 아니지 싶어서..."

"그래서?"

"그러니까 내 말은... 니가 기분이 나빠야 하는 게 아니냐는 얘기지..."

"난 또 뭐라고. 난 그런 거 신경 안 쓰는데?"

"...남편이 딴 여자를 생각하는 걸 신경 안 쓴다고?"

되레 당사자인 로사는 태연하고, 제3자에 불과한 내가 몸이 달아 매섭게 따진다, 라... 왠지 웃긴데, 이런 상황.

"왕이잖아. 다른 여자한테 한 눈 팔아도 어쩔 수 없지. 어차피 일부다처제고. 뭐, 왕비님께선 좀 바가지를 긁으셨던 것 같지만... 난 달라. 난 프린세스가 되길 원했지, 사랑하는 왕자님과 결혼하고 싶었던 게 아니야. 내가 원한 건 권력이라고. 부부간의 의무만 지켜준다면 그가 무슨 일을 하든 내버려 둘 의향이 있어. 난 첫 눈에 반해서 쉽게 남자한데 모든 걸 걸었던 헤베와는 틀리지."

"......"

이번에야말로 나는 입을 다물고 말았다.
로사는 8년 전의 내 기억과는 전혀 다른 눈을 하고 있었다. 아니...
어쩌면 내가 로사라는 여자에 대해 하나부터 열까지 잘못 알고 그녀를 대해왔던 건지도 모르겠다...

"그럼 내 부탁 들어주는 거라고 생각해도 될까?"

말없이 자신을 응시하는 것을 긍정의 뜻이라 여겼는지, 로사는 품속에서 고급 양피지를 꺼내며 새된 목소리로 물었다. 성질도 급하셔라.

"...좋아, 알았어. 가능한 한 클로버를 만나서 전해주도록 할게..."

나는 한숨을 쉬며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것 외의 다른 선택지는 없는 거나 마찬가지였고, 나로서도 클로버의 안부가 궁금하던 참이었으니.

"그 전에 하나만 묻겠어. 너 정말 클로버한테 억하심정 품은 건 아니지...?"

"물론이야, 어떤 의미에선 클로버 덕분에 철저히 스펙만으로 프린세스 심사를 하게 됐고, 그 덕에 내가 그 행운을 거머쥘 수 있었잖아. 난 오히려 클로버에게 감사하고 있다구."

"좋아, 정말 그렇다면 천계로 가서 그녀를 만나도록 하겠어."

"고마워, 부탁할게."

로사는 해맑은 미소와 함께 고개를 끄덕이며 꺼내든 친서를 내게 건넸다. 나는 결의의 및을 담아 한 번 크게 고개를 끄덕여 보이고, 받아든 친서를 조심스레 품속에 넣고 일어섰다. 마침 하나 생각난 게 있는데... 아무래도 시험해 볼 때가 된 것 같았다.

 

 


"...이렇게 된 거야. 알겠지?"

나는 내 뒤를 충실히 따라오는 검은 인영을 향해 밝은 어조로 물었다.

"두 아가씨끼리 부탁을 주고받았다는 건 확실히 알겠지만요."

팔다리로 달라붙는 잎사귀들의 맹공을 귀찮다는 듯한 손으로 떨쳐내며 큐브는 가자미눈으로 나를 째려보았다.

"제가 물었던 건 아가씨들끼리 한 약속에 왜 제가 따라나서야 하냐는 건데 말입니다."

"...자! 무신의 사당까지 얼마 남지 않았어!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빨리빨리 가자!"

"잠깐만요. 왜 방금 제 말을 무시하고 나가시려는 거죠?"

"기분 탓이야!"

큐브의 불만을 한 마디로 일축하며 나는 앞으로 나가는 두 다리에 기합을 넣어 더욱 페이스를 올렸다.
몇 시간 전.
로사로부터 천계와의 화합을 위한 당부사항을 듣고, 왕의 이름으로 작성된 친서를 받아든 나는 몇 초 고민하지도 않고 바로 동부 수풀지대로 가서 엘프와 함께 노닥거리는 대마법사를 찾았다.
그녀를 찾은 이유는 2가지.
하나, 마법과 관련하여 이 세상에서 내가 알고 있는 사람은 현재 이 사람이 유일하다는 것. 내 목표는 이 사람이 아니라 다른 누군가를 찾으려는 것이고, 그 누군가를 찾는 데는 마법을 사용하는 것이 가장 빠르고 확실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둘, 내가 찾으려는 누군가는 이 대마법사와 어느 정도 친분이 있다는 것.
어쨌든 여차저차한 이유로 나는 대마법사를 붙들고 사정을 알렸고, 제3자의 연애문제와 트러블을 세 끼 밥보다 좋아하는 이 분은 흔쾌히 제안에 동의하여, 내가 찾으려는 사람을 단박에 찾아냈고 나는 대마법사로부터 그의 신병을 인계받아 천계의 입구가 연결된 무신의 사당으로 향하는 중이었다.
나는 이 과정이 굉장히 합리적이고 법적으로 문제가 없다고 생각하는데, 아무래도 대마법사에게 문답무용으로 끌려와 내개 붙들린 자 - 큐브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제대로 된 설명을 요구하길래 힘들여 사정을 설명해 줬건만, 자기가 했던 질문과 맞지 않는다며 궁시렁거렸던 것이다.
상대가 이렇게 협조를 안 해 주는데, 무시하고 제 갈길 가는 것 욍 ㅔ어떤 선택지가 있을까.

"이봐요, 엘리너 아가씨. 몇 년 전에도 말씀드렸다고 생각하지만 전 천계에 알러지가 있다고요. 어지간해서는 정말 가고 싶지 않단 말..."

"어지간한 이유가 있으면 되는 거 아니야?"

나는 단호한 어조로 큐브의 말을 자르고 그의 말꼬리를 잡았다.

"...어지간한 이유라뇨?"

"너도 짐작은 하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데... 어쨌든 가보면 알아. 그러니까 그 때까진 딴 말 하지 말기."

예상대로라고 할 지, 생각한 그대로의 질문을 던지는 큐브에게 나는 일방적으로 선언했다.
더 이상의 반론도 질문도 허용하지 않겠다는 내 무언의 압박 때문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기 때문인지, 겨우 큐브는 입을 다물고 묵묵히 내 뒤를 따라 걷기 시작한다. 진작 그럴 것이지.
안하무인이라 말하지 말길. 나라고 해서 아무 이유 없이 부려먹겠다는 생각 하나로 끌고 온 건 아니다.
아마 큐브도 얌전히 입을 다문 걸로 봐서, 그 역시 내 생각을 어느 정도 눈치 챈 것 같았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천계에는 그 사람이 있으니까. 만날 수 있을지 없을 지 거기까지는 모르겠지만.

"...다 온 것 같네요."

얼마나 걸었던 것일까. 저만치 앞에서도 그 위용을 드러내는 무신의 사당이 위협적인 모습을 드러내자 큐브가 툭 하고 한 마디를 흘렸다.
나 역시 큐브를 따라 시선을 돌리고 무심코 미간에 주름을 잡았다.
드디어 도착했다.
무신 니시테의 강림을 기리는 뜻으로, 무인들의 청원으로 세워진 사당.
사계절 내내 눈이 쌓여 있는 빙산 지대에 세워진 건물답게 사당의 곳곳에는 눈이 둥지를 틀고 있었고, 응축된 한기를 품은 위요지는 싸늘한 멜로디를 연주하는 것 같다.
나는 큐브를 돌아보며 결심의 뜻으로 끄덕 하고 고개를 세로로 흔든 뒤, 천천히 손을 뻗어 굳게 닫혀 있는 사당의 문을 열었다.
오랜 시간 닫혀 있었던 것인지 고정된 경첩이 삐그덕 구슬픈 울음소리를 토해내는 소리가 들린다...
나는 결의를 담은 무거운 첫 걸음을 내딛으며 곧 저지를 깜짝 이벤트를 위해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다.
천계에 방문하는 목적은 크게 두 가지다.
로사가 부탁했던 대로, 인간계와 천계의 화합 도모를 위해 친서를 전달하는 것이 그 중 하나.
그리고 또 한 가지, 여기까지 겨우 끌고 온 큐브를 어떻게 혼자 천계에 떨어뜨려놓느냐는 것이 두 번째.
그럴 거면 뭐하러 데려왔냐고 주장할지도 모르지만, 실은 그 자체가 목적이었던 것이다. 어딘가로 잠적했던 큐브를 끌고 와 천계까지 나와 동행토록 한 뒤, 그 뒤에 나는 뒤로 쏙 빠지는 것.
왜 그렇게 정성 들여 장난을 치느냐고? 누군가를 만나게 해 주기 위해서라는 게 당연하잖아!
나도 그렇고, 로사도 대놓고 말은 안 했지만 아마 친서 전달보다는 이게 메인 이벤트일 터.
큐브도 대충 눈치채고 있을 게 분명함에도 불구하고 군말 없이 따르는 걸 보면 아주 싫어하는 건 아닌 것 같고. 클로버는... 내 장담컨데 처음에만 잠깐 놀랄 뿐, 진정이 되면 뛸 듯이 기뻐할 것이 틀림없다.
프린세스 후보 자리를 내놓고 천계로 돌아가는 그 뒷모습은, 그 누구라도 알아볼 수 있을 만큼 이 세상에 미련을 두고 있었으니까.
그럼 친구로서 조금 도와준다한들 문제가 있을 리가 없다.
멋대로 자기 합리화를 도모하여 긴장된 마음을 바로잡고, 나는 이따금 큐브가 잘 따라오는지를 철저히 확인하며 무신의 사당 안쪽에서 발견된 천계의 입구를 향해 부드럽게 손을 뻗는다.

자, 이제부터가 진짜 시작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