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결과 리스트
글
세르니아는 빨래터 한 구석에 자리 잡고 묵묵히 빨래를 쥔 손을 움직이고 있었다. 그녀가 흰 거품을 머금은 손을 움직일 때마다 빨랫감에 들러붙은 흙먼지가 조금씩 자취를 감추었다.
점심을 거른 탓인지 간간이 꼬르륵거리는 소리가 들리기도 했으나 세르니아는 묵묵히 손만을 놀릴 뿐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쉴 틈 없이 손을 움직이곤 있어도 그녀의 마음은 한창 콩밭에 가 있었기 때문이다.
체통 따윈 아랑곳하지 않고 다 큰 처녀가 보는 앞에서 빨래통에 뛰어든 왕자.
격식 차릴 필요 없다며 지켜야 할 예의범절에 대한 부담을 줄여 준 왕자.
그의 체면이 깎일 것을 우려해 올린 조언에서 세르니아의 처우를 걱정하던 왕자.
누구한테 무슨 얘기를 들었는지는 몰라도 세르니아의 이름을 알고 있던 왕자...
머릿속을 온통 좀 전에 만난 왕자로 가득 채운 채로 일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소동에 휘말려 시간이 지체되었기 때문에 점심은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콩밭에 간 마음을 다잡는데도 시간을 써버려서, 아마 오후의 티 타임도 포기할 수밖에 없을 터였으나 세르니아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꿈에서나 그리던 왕자의 존안을 코앞에서 보고 대화를 나눴는데 그깟 밥 한 끼쯤 굶는 게 무슨 대수며, 어찌어찌 일을 끝내고 자리에 앉는다 한들 도저히 평정심을 유지할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무슨 일 있냐고 주변에서 물어볼 게 뻔한데 도저히 그 호기심어린 눈동자들에게서 도망칠 수 있을 것 같지도 않고. 그렇다면 역시 사람 없는 구석에 콕 처박혀 묵묵히 일하는 편이 100배 나았다.
"세르니아!"
지금 막 흙먼지를 몰아내고 본래의 색을 되찾은 빨래를 통에 걸쳐놓고 다음 손길을 기다리는 세탁물에 팔을 뻗은 순간, 옥이 구르는 듯한 영롱한 목소리가 그녀의 이름을 건드렸다.
"파드마? 여긴 웬일이야?"
궁 안에서 유일하게 마음을 허락한 친구가 등장하자 한시름 덜었다는 표정을 덧씌운 세르니아는 반갑게 친구의 이름을 입에 담았다.
"식사 시간에 안 보이길래 무슨 일인가 싶어서 와봤지. 내 오전 일은 다 끝났거든. 근데..."
파드마는 구석에 쌓인 빨래거리와 애벌을 마친 세탁물을 번갈아 보며 물었다.
"아직 끝나려면 먼 것 같네... 무슨 일 있었어? 평소엔 빠릿하더니 웬일이니?"
"아, 그게... 별거 아니야. 그냥, 몸 상태가 좀 안 좋아서..."
세르니아는 말을 얼버무렸다. 아주 잠시 사실을 털어놓아도 좋지 않을까 싶었던 마음이 바로 사그러들었기 때문이다. 누구에게도 가르쳐주고 싶지 않은 나만의 비밀로만 간직하고 싶은 이유도 있었다. 혹여 털어놓았다가 누군가에게 말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아주 약간 고개를 들었다는 까닭도 있었다. 그리고... 분명 친한 친구임에도 불구하고 어째서인지 믿어서는 안 된다는 촉이 왔다는 것도 근거가 될 수 있을 테지. 왕자가 자신의 이름을 기억해 줬다는데 대해 되도 않는 질투나 선망을 느껴 우정이 틀어질지도 모르는 일이니까.
"...그래서인가, 오늘따라 일이 손에 안 붙어서 그래."
세르니아는 몸 상태가 별로라는 핑계를 계속 밀고 나갔다. 언제든 써먹을 수 있는 변명이 있음을 신께 감사드리면서.
"그럼 내가 좀 도와줄게. 아직 여유 있으니까."
파드마가 팔을 걷어붙이고 나섰다.
굳이 그럴 필요 없다고 거절하려는 찰나, 파드마는 소매를 걷어붙인 팔을 뻗어 주머니에서 작은 꾸러미를 꺼냈다. 꾸러미에서는 식욕을 자극하는 냄새와 함께 희미한 김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샌드위치야. 네가 자리에 없길래 몰래 만들어 가져왔지. 같이 먹자."
세르니아의 시선을 알아차린 파드마가 가볍게 말했다.
"아, 응. 고마워... 신경 써 줘서."
세르니아는 말끝을 흐리며 샌드위치를 받아들었다.
이쪽은 시답잖은 이유로 거짓말을 했는데, 상대에게서 친절을 받자니 어쩐지 마음 한 구석이 쿡쿡 쑤셨다.
양심의 가책이라는 녀석이다.
"뭐해? 빨리 먹고 마저 해치우자."
식음을 재촉하는 파드마의 권유에 밀려, 자시 일거리에서 손을 떼고 바닥에 앉아 그녀가 건네 준 샌드위치를 한 입 크게 베어 물었다.
"...맛있어."
무심코 감상이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머스터드를 뿌려 통째로 구운 햄에 슬라이스 피클과 양상추, 레몬 조각이 식빵과 어우러져 묘한 조화를 이루어낸다.
-...진짜 신경 많이 썼구나.
순식간에 샌드위치를 해치운 세르니아가 목이 멘 듯 칼칼한 목소리를 냈다.
파드마는 자신을 생각해서 이렇게나 배려해주는데, 본인은 별것 아닌 이유로 거짓말이나 하고...
뱃속을 가득 채운 포만감은 아주 잠시 머물렀을 뿐, 곧 죄책감이라는 새로운 감정이 그 자리를 파고들었다.
사실을 말하는 게 뭐 그리 어렵다고 발을 빼는 것인가. 이 정도로 자신을 챙겨주는 친구라면 솔직히 말해줘도 문제 될 건 없지 않을까.
...게다가 아주 조금, 누군가에게 이 감정을 털어놓고 싶은 마음도 조금은 있었고.
"저기, 파드마."
거짓말에 대한 사과와 해명을 목적으로 친구의 이름을 입에 담은 세르니아는 어느새 자신을 뚫어져라 바라보는 파드마의 눈초리에 도둑이 제 발 저리듯 놀라 어깨를 움츠러뜨렸다. 혹시 거짓말을 눈치챈 걸까? 아니, 하지만...
"있잖아, 세르. 너한테 하나 물어볼 게 있는데."
"어... 뭔데?"
"그러니까... 너 몇 달 전에 나한테 말해준 적 있었지? 그... 넌 요정 여왕님의 은총으로 인간이 된 요정이라고..."
세르니아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이 본디 요정이었다는 것, 인간 왕자의 프린세스가 되고 싶어 요정 여왕을 졸라 인간이 된 것, 꿈을 이루기 위해 시녀가 되어 입궁하게 된 것... 그 모두를 파드마에게 털어놓았던 것이다.
사실을 확인하는 것뿐인 대화에 동조하는 건 전혀 어렵지 않았다. 다만 왜 지금 파드마가 이런 얘길 꺼내는지는 알 수 없었다. 혹시 터무니없는 거짓말이었다고 다그칠 셈인가? 이제와서?
"아니, 네가 생각하는 그런 게 아냐."
마치 세르니아의 생각을 읽고 있었던 듯, 파드마가 과장된 손짓으로 부정했다.
"네 말 믿어.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네게 확인 겸 부탁하고 싶은 게 있어서 그런 거야. 그러니까... 요정 여왕님의 가호를 받았던 너라면... 네가 원한다면 아무 때고 요정을 만날 수 있는 걸까 싶어서..."
사정을 설명하는 파드마의 목소리는 점점 작아져 끝은 제대로 들리지도 않았다.
점점 작아지는 목소리와 얼굴에 떠오르는 미안한 기색이 마음에 걸렸지만, 세르니아는 일부러 모른 척 고개를 끄덕였다.
"응, 원한다면 언제든 만날 수 있어... 라기보다, 요정 하나가 우리 집에서 집사 노릇을 하고 있는걸."
세르니아가 말했다.
"정말?"
"정말이야. 나 혼자 인간계로 보내기엔 불안하다고 여왕님께서 딸려 보내셨지. 그뿐만이 아냐. 그럴 마음만 있다면 다른 요정들도 얼마든지 볼 수 있다?"
세르니아는 어린 시절 아버지와 함께 바캉스를 가서 요정들과 어울렸던 추억을 떠올렸다. 그러고 보니 그 당시에는 자신과 우즈 외에는 아무도 요정을 보지 못한다는 사실에서 문화적(?) 충격을 받았었지.
"헌데 갑자기 왜 이런 게 궁금해진 거니?"
세르니아가 물었다.
세르니아가 파드마에게 정체를 밝힌 것은 몇 달 전이었다. 인간이 요정에 대해 이것저것 궁금증을 가지는 건 별로 신기할 일도 아니지만, 왜 굳이 이 타이밍에 이런 얘길 꺼낸 걸까?
파드마는 난처한 표정으로 에이프런 끝자락을 말아 올렸다. 말하고 싶은 건지, 아니면...
"실은... 오늘 점심 때 시녀장님께서 주방장님과 얘기하시는 걸 어쩌다 듣게 됐어. 더위 탓인지 왕비 마마께서 식욕을 잃으셔서 식음을 전폐하고 계신다더라고. 주방장님께서 더위로 잃은 입맛을 되돌리는 데는 요정의 꿀이 최고네 어쩌네 하는 얘길 하시고, 시녀장님께선 그걸 무슨 수로 구하느냐 뭐 그런 얘길 나누시더라. 근데 요정의 꿀 하니까 딱 네 생각이 나서..."
아, 그랬구나.
그제야 세르니아는 파드마의 의도를 알아차릴 수 있었다.
요사이 기온이 급격히 오른 탓에 식욕을 잃는 사람이 종종 나온다는 소문은 그녀도 몇 번 들은 적이 있었다. 그렇다면 아마 파드마의 말은 사실일 터. 그 소문의 대상에 왕비님도 들어가 있을 줄은 몰랐지만.
파드마는 성에서 세르니아가 입궁한 이유를 알고 있는 유일한 사람이다. 아까 일부러 식사를 챙겨준 것도 그렇고, 세르니아가 화상을 입었을 때 치료해 준 것도 그렇고, 충분히 그녀를 배려하고 이해해주는 친구이다. 아마 요정의 꿀 이야기를 전해준 것도, 성 사람들에게 점수를 딸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 주기 위해서이리라.
기본 3대 욕구 중 하나인 식욕을 잃었다는 건 보통 일이 아니다. 식음을 전폐하는 사람이 몰리뉴 왕국을 지탱하는 국모라면 더더욱.
자신을 생각해서 이런 얘기를 해주다니, 세르니아는 그 마음 씀씀이에 감사를 느끼는 한편 죄책감에 더욱 마음이 괴로워졌다. 이렇게나 자신을 염려해주는 친구를 믿을 수 없다느니 누구에게 말할 것 같다느니 하는 얼토당토않은 상상을 근거로 의심이나 하다니, 부끄러워 얼굴을 들 수가 없다.
"말해줘서 고마워."
세르니아는 파드마의 손을 잡고 감사를 표했다.
"요정의 꿀 같은 거 얼마든지 구할 수 있어. 시녀장님께 말씀드리고 나가서 가져오면 돼. 우리 둘이 같이."
파드마의 눈이 놀라움으로 동그랗게 변했다.
"나도 같이?"
"네가 말해준 정보니까 너도 같이 가야지. 나 혼자서만 가면 불공평하잖아. 안 그러니?"
"하지만 직접 가서 구하려면 시간이 많이 걸리지 않아? 궁녀가 둘이나 오랫동안 자리를 비우는 건 좀 그럴 거 같은데..."
"아니야, 하루면 충분한걸."
세르니아가 킥킥거렸다.
요정에 대해, 세르니아 마티에르라는 소녀가 요정 여왕과 맺은 특별한 관계를 모르는 파드마로선 당연히 떠올릴 수밖에 없는 의문이지만, 모든 사정을 알고 있는 세르니아의 입장에서는 바로 코앞에 답을 두고도 굳이 먼 길을 빙 돌아가는 것처럼 느껴졌던 것이다.
사람 머리 꼭대기에 눌러앉는다는 게 바로 이런 기분일까?
해명을 요구하는 파드마의 눈길을 애써 외면하며, 세르니아는 재빨리 머릿속에 요정의 꿀을 구하기 위한 동선을 그려보았다. 좋아, 이 정도면 충분해.
"무슨 생각하는지 말 안 해줄 거야?"
기다리다 지친 파드마가 대놓고 물었지만 세르니아는 고개를 흔드는 걸로 답변을 대신했다. 나가 보면 알 거라는 두루뭉술한 대답과 함꼐.
"어휴..."
파드마가 어쩔 수 없다는 듯 한 얼굴로 뒷머리를 벅벅 긁었다. 이 이상 추궁해도 그녀가 말해주지 않으리란 걸 깨달은 모양이다.
"그래, 알았어. 그럼 일단 시녀장님께 말씀드려서..."
"잠깐만."
세르니아는 파드마의 말을 가로막았다.
"그것보다 먼저 급하게 처리해야 할 일이 하나 있는데."
"뭔데?"
고개를 갸우뚱하는 파드마를 향해, 세르니아는 수북한 빨래를 가리켜 보였다.
시녀장을 설득하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왕궁의 규모에 걸맞게, 성의 이곳저곳에선 진위를 알 수 없는 크고 작은 소문들이 꼬리를 흔들다 자취를 감췄고, 자취를 감춘 만큼의 새로운 소문이 흘러들어왔다. 신분이 높은 사람이 얽힌 소문일수록 그 파급력은 강했고, 그 덕분이라 할지, 왕비가 식욕을 잃어 건강을 해치고 있다는 소문은 머잖아 왕궁 전체로 퍼져버렸다.
아니, 소문이라 하는 건 옳지 못한 표현인지도 모른다. 세르니아와 파드마가 빨래를 마치고 왕궁의 복도를 청소하고 있을 때 지나가는 시종에게서 들은 정보에 의하면 왕비의 건강 회복을 위한 강장제 목록을 뽑아 그것을 구해오는 사람에게 상금을 주겠다는 포고령을 마을에 붙이라고 명령하셨다니까. 효율적인 방법인 것만은 틀림없다.
대충 들은 얘기로 보아 첨부된 강장제 목록은 여덟 개 남짓. 덧붙여 요정의 꿀은 난이도 A급이란 부제가 붙어 제일 높은 순위로 매겨져 있다고 한다. 여담이지만.
하루 일과를 마친 세르니아와 파드마는 일과를 보고받으러 온 시녀장에게 요정의 꿀을 찾으러 갔다 올 테니 허락해 달라는 청을 올렸고, 그녀는 살짝 떨떠름해 하면서도 반드시 구해 와야 한다는 신신당부와 함께 허가서에 사인을 해주었던 것이다.
그녀 입장에서야 들어온 지 얼마 안 된 궁녀 둘이서 진짜 요정의 꿀을 구해올 수 있을지 없을지 장담할 순 없었겠지만 거꾸로 말하자면 그녀들이 거짓말을 한다는 보장도 없었던 셈이다. 혹여나 진짜 구해올 수 있는 걸 근거 없는 의혹만으로 안 된다고 막아버릴 경우 자신이 책임 추궁을 당할지도 모르니, 그녀들의 요청을 받은 그 짧은 시간에 이것저것 재어보고 결국 의견을 수리하는 편이 낫다는 판단을 내린 것일 테지.
-파드마를 아버지와 우즈에게 소개하고, 요정 여왕님께 데려가고, 시간이 된다면 하밍과 아크론과의 만남도 주선하고...
세르니아는 머릿속을 온통 사심으로 채우고, 파드마와 함께 신의 은총을 받아 한산해진 거리를 걷고 있었다.
특별히 마을에 활기가 없는 건 아니다. 지금 이 시간에는 한창 교회에서 설교를 하고 있을 때이니 마을에 사람들이 별로 없는 것은 별로 이상할 게 없다.
"저기, 세르. 대체 어딜 가야 하루 만에 요정의 꿀을 구할 수 있는 건지 슬슬 설명하지 않을래?"
파드마가 그렇게 입을 연 것은 사람들이 잔뜩 모여 한창 찬송가를 부르는 교회를 막 지나쳤을 때였다. 좀 더 입을 다물고 당혹해 하는 얼굴을 보고 싶지 않은 건 아니지만... 이쯤에서 비밀을 털어놓도록 할까.
크흠, 하고 세르는 목을 가다듬었다.
"우리 집에 갈 거야."
대답이 떨어지자마자 파드마의 얼굴에 순수한 당혹의 빛이 떠오른다.
"너희 집...? 아 혹시 너희 집에 요정의 꿀을 보관하고 있다든가?"
"아니, 없는데."
사정을 이해시켜주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설명이란 건 알고 있지만 세르니아는 그 이상 얘기하지 않았다. 말로 설명하는 것보단 직접 보여주는 게 더 빠르다는 게 그 이유였다. 폭염이라 불러도 좋을 만큼 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거리 한복판에 서서 사정 설명을 할 기분이 아니라는 이유도 포함해서.
"암튼 우리 집에 가면 다 알게 돼. 그러니까 나만 믿어. 알겠지?"
세르니아는 팔을 뻗어 파드마의 손을 잡고 상점가 끝으로 그녀를 잡아끌었다. 조금씩 자리를 기울여 거리를 이글이글 태우는 태양이 내쏘는 화살을 피하기 위해.
"우즈! 나 왔어!"
여기가 자신이 살던 집이라는 짧은 소개를 마친 세르는 잠시 파드마를 문가에 세워 두고 집을 관리하는 집사의 이름을 애타게 부르며 가볍게 주먹을 쥔 손으로 몇 번이고 벨을 울렸다.
자기 집인데 안 들어가고 문밖에서 뭐하냐고는 묻지 말길.
아주 자연스럽게 열쇠를 꺼내들긴 했지만, 몇 달 만에 찾아온 집에 걸려 있는 자물쇠는 세르가 살던 때의 그것과는 다른 모양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어째서 다른 자물쇠가 걸려 있는지는 모른다.
한순간 가장 생각하고 싶지 않은 - 그리고 가장 신빙성이 높은 가설은 집주인과 집사가 딸을 두고 이사를 갔다는 거지만... 그런 슬픈 가능성은 생각 안 하는 걸로.
벨을 울리고 나서 잠시 사이를 두자, 굳게 잠겨 있던 문이 스르르 입을 벌렸다.
안쪽에서 나온 자는 방금까지 세르니아가 입에 담았던 이름의 주인.
무지갯빛 분말을 뿌린 잠자리와 비스무리한 날개를 움직여 이동하는, 어쩌다 감수성이 풍부한 인간과 마주칠 때는 있어도 평소에는 절대 인간 앞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신비한 종족.
요정이다.
"아가씨? 연락도 없이 여긴 웬일이세요?"
자신이 모시던 아가씨를 알아보자마자 경계심이 어렸던 표정은 단박에 자취를 감춘다. 세르니아의 주변을 맴돌며 반가움을 표시하던 우즈의 시선이 문득 그녀의 뒤로 고정되었고, 그와 동시에 뭔가를 뚫어져라 쳐다보는 눈초리를 느낄 수 있었다.
"우즈, 인사해. 파드마 플록스라고 성에서 나랑 같은 방을 쓰는 친구야. 파드마, 이쪽은 우즈라고 해. 어제 말했었던 나 혼자 인간계에 보내기엔 불안하다고 여왕님께서 같이 보내 주신 친구야."
"어, 응..."
완전히 한 방 먹었다는 얼굴로 더듬더듬 대답하는 파드마. 세르의 말을 믿는 것과는 별개로, 책에서만 보던 요정을 직접 눈으로 확인하게 됐으니 놀라는 것도 무리는 아니리라.
하지만 우즈의 입장에선 그저 요정을 신기해하는 인간1 정도의 인상밖에 없을 터. 그런 세르의 생각을 증명이라도 하듯 우즈는 쪼르르 날아와 파드마를 향해 자세를 갖춰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처음 뵙겠습니다. 저는 세르니아 아가씨를 보좌하기 위해 인간계에 머무는 요정 우즈라고 합니다. 세르니아 아가씨는 친구를 별로 만들지 않는 성격이니, 앞으로도 모쪼록 아가씨와 좋은 관계를 유지해 주십시오..."
칭찬인지 욕일지 모를 말을 덧붙이는 우즈에게 한 소리 던질까 생각한 것도 잠시, 찾아온 용건이 좀 더 중요하다 판단한 세르니아는 우즈를 지나쳐 반쯤 열린 문을 밀치고 집안으로 들어섰다.
"아버지께선 안에 계셔?"
"예, 서재에 계세요. 요새 무슨 사람이 부셨는지 식사 때 외에는 통 내려오질 않으시고... 같은 손님이 몇 번이나 찾아오시곤 하더라고요."
파드마가 잘 따라오고 있는지를 확인하면서 우즈는 겨우 하소연할 상대를 찾아 안심했다는 듯 그간의 불만을 쏟아놓으려 했다.
"듣자하니 주인님께서 젊으셨을 적 모셨던 분인 거 같은데, 하여간 그 분만 왔다 하면 주인님 기분이 매우 나빠지셔서..."
"우즈."
세르는 우즈의 말을 자르고 중간에 끼어들었다.
"뭔가 쌓인 게 많다는 건 알겠는데, 지금은 손님이 있으니 좀 참아줬으면 해. 그나저나 자물쇠는 왜 바꾼 거니?"
"그냥... 주인님께서 명령하셨거든요. 별일도 없었는데 그런 명령을 내리셔서 저도 이상타 싶었죠."
이야기를 방해받았다는 불쾌감이 머문 것은 아주 잠시였을 뿐이다. 우즈는 바로 그녀의 질문에 답했다.
"그러니? 이유는 말 안 하고?"
세르의 질문에 우즈는 말없이 고개를 흔들 뿐.
-아버지께서 그러실 분이 아닌데... 대체 무슨 바람이 분 거람?
고지식하고 융통성 없기로 유명한 분이 단순한 변덕으로 허투루 돈을 쓰실 리는 없지만... 아무 말도 듣지 못한 집사에게 물어봐야 소용없는 일이다. 여기서는 일단...
"아버지가 계시다니까 잠깐 인사드린 다음 요정의 꿀을 찾으러 가자. 어때?"
세르니아는 고개를 돌려 파드마에게 의견을 구했다.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는 그녀의 옆에서 우즈가 눈살을 찌푸리며 묻는다.
"연락도 없이 갑자기 오셨다 했더니, 요정의 꿀을 찾으러 가신다구요?"
"어, 그게 좀 필요해서. 이유는 나중에 말할게."
우즈는 여전히 불만스러워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하기야 그 심정은 이해가 간다.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주인은 별말도 없이 자기만의 세계에 틀어박혀있지, 연락도 없이 몇 달 만에 찾아온 아가씨는 말도 없이 손님을 데려온 걸로도 모자라 다짜고짜 요정의 꿀을 찾으러 가야겠다는 말이나 꺼내고 있었으니 혼자 소외된다는 기분이 들기도 할 테지.
섭섭해 하는 그 심정을 모르는 건 아니지만, 유감스럽게도 세르는 우즈의 토라진 기분을 달래주는 것보다는 얼른 아버지께 인사를 드리고 요정의 꿀을 찾는 데만 정신이 팔려있었다. 미안해, 우즈.
나중에 제대로 얘기를 들어줘야겠다고 다짐한 세르니아는 파드마를 데리고 익숙한 떡갈나무 계단을 지나 2층으로 올라갔다.
딸랑.
다소 살풍경한 복도를 지나 가장 구석진 데 매달린 종을 쥐고 가볍게 울려 방문자가 있음을 알리고 기다리길 잠시.
들어오라는 주인의 허락이 떨어짐을 확인한 세르는 파드마에게 살짝 고개를 끄덕여 보이곤 조심스레 문고리를 돌려 안쪽 세계로 먼저 발을 들여놓았다.
문을 염과 동시에 잔뜩 고여 있던 자욱한 서재 특유의 냄새가 두 출입자의 주위를 감돌다 덧없이 사그러들었다. 작은 나이프부터 귀하다는 미스릴 검까지 온갖 검이 장식되어있는 작은 무기고(물론 누가 훔쳐가는 일이 없도록 자물쇠가 달려 있다)와 갑옷들이 가득 메운 벽면을 지나 서재 구석에 외로이 떠 있는 책상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 나갔다.
"아버지, 그동안 무탈하셨는지요?"
세르는 책상에 앉아 머리를 괴고 있는 초로의 사내에게 고개를 숙이며 무난한 문안 인사를 건넸다. 잠시 사이를 두고, 사내는 시야를 가리는 손을 거두어 목소리의 주인을 확인하기 위해 고개를 들었다.
"...세르니아..."
수심에 잠겨 있던 거친 표정이 단박에 누그러졌다. 별다른 반응은 없었지만 아버지와 8년이란 시간을 함께 보냈던 세르는 무뚝뚝한 표정 속에서 기뻐하는 속내를 쉽게 읽을 수 있었다.
"보고 싶었어요, 아버지!"
세르는 자신의 아버지 - 린 마티에르의 경계심이 풀린 걸 확인하자마자 그에게 와락 안겼다.
그저 조금 떨어져 있었을 뿐인데, 몇 달 만에 본 린 마티에르는 10년은 훌쩍 늙어버린 것처럼 보였다. 고뇌가 가득한 그 얼굴을 보고 있자니 가슴 속 깊은 곳에서 연민과 안타까움이 가득 솟아나, 소개하려 데려온 친구가 옆에 있다는 걸 잠시 잊고, 숙녀로서 체통을 지켜야겠다는 - 수년간 배웠던 예절 사범의 가르침을 저만치 밀어버린 채 아버지에게 안겨버렸던 것이다.
갑작스런 딸의 돌격에 얼굴을 놀라움의 빛으로 물들이면서도 린 마티에르는 왼손을 들어 딸의 머리를 서투른 손길로 어루만졌다 몰리뉴 왕국의 최고라 칭송받는 보트라 노인이 운영하는 예절 교실에 다니기 시작하면서부터 일체의 신체 접촉을 끊어버렸던 딸이 갑자기 집에 찾아와 와락 안겨들다니, 왕궁시녀 생활이 생각보다 힘들었던 걸까.
착하고 고분고분한 딸이 힘든 생활을 한다면 아비로서 어떡해야 할지 고민에 빠지려던 찰나 제 3의 기척이 시선 안에 들어왔다.
"세르니아, 저 사람은 누구지?"
마티에르는 품에 얼굴을 묻은 딸을 살짝 밀어내며 물었다. 그제야 파드마의 존재를 떠올린 세르는 황급히 린 마티에르에게서 떨어져 나왔다.
"참 그렇지. 아버지, 제가 데려온 친구예요. 성에서 일하게 되면서 알게 됐는데 같은 방을 쓰게 되면서 친해졌어요."
세르는 파드마를 어떤 경위로 만나 친해지게 됐는지를 자세하게 말했다. 하지만 린 마티에르의 표정은 마치 메두사를 보고 돌로 굳어버린 기사처럼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돌처럼 굳어버린 얼굴 속에서 움직이는 것은 한 쌍의 적갈색 눈동자 뿐. 그 시선의 끝은 세르니아가 데려온 친구 - 파드마 플록스를 향해 있다.
"이름이 뭐지?"
한 손을 들어 딸의 말을 자른 마티에르가 갈라진 목소리로 물었다.
"아... 내 정신 좀 봐. 소개한다면서 이름도 얘길 안 했네요. 파드마 플록스라고 해요, 아버지. 파드마, 우리 아버지셔. 지금은 은퇴하셨지만 왕년엔 몰리뉴 왕국에서 이름 좀 날리셨던 기사였지."
"안녕하세요 아버님. 저는 파드마 플록스라고 합니다. 세르니아에게는 항상 큰 도움을 받고 있어요."
파드마는 기사에 대한 예우를 갖춰 조심스레 고개를 숙였다.
마티에르는 공허한 눈동자로 파드마의 위아래를 주시했다. 딱딱하게 굳었던 표정이 자취를 감춘 대신, 그의 얼굴에는 얼음 송곳니에 견줄 수 있을 만큼 날 선 차가운 빛이 어렸다.
"아버지...?"
파드마를 향한 마티에르의 시선을 느꼈는지, 잠깐의 불편한 침묵 끝에 세르니아가 주춤주춤 말을 걸었다.
"...그래. 성에서 일하기 고달플 텐데 마음을 터놓을 수 있는 친구가 곁에 있다니 잘됐구나."
마티에르는 갓 뿜어 올린 잿빛 숨결을 한껏 들이마신 것처럼 툭툭 끊어지는 목소리를 겨우 짜내 딸의 말에 답했다.
"세르니아, 모처럼 집에 왔는데 미안하지만 친구를 데리고 그만 네 방으로 가는 게 어떠냐? 머릿속이 너무 복잡해서 잠시 혼자 있고 싶구나."
마티에르는 한 손을 들어 머리에 얹으며 지친 어조로 운을 띄웠다. 부탁의 형태를 취하곤 있어도 말 속에 숨은 참뜻은 명령이나 다름없었다. 혼자 있고 싶다는 말 자체는 사실이었지만.
"아, 예... 알겠어요, 아버지."
세르는 의심스러운 기색을 떠올리면서도 순순히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고, 파드마와 함께 고개를 숙인 뒤 물러나겠다는 인사를 남기고 두 숙녀는 마티에르의 서재를 뒤로 하였다.
-아버지... 왜 그러시지?
세르는 석연찮은 먹구름을 드리운 얼굴 그대로 서재를 나와 조용히 문을 닫았다.
아주 잠깐 시선을 들어 바라본 마티에르의 얼굴은 램프가 만들어낸 빛과 그림자의 조합으로 어수룩이 그늘져 있어 그 의중을 짐작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어쩐지 린 마티에르의 내리깐 눈동자 속에서 깊이를 알 수 없는 어둑한 은빛 줄기가 한순간 반짝였던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결국 아무 얘기도 드리지 못했네."
세르가 중얼거렸다.
석연찮은 분위기 속에서 서재를 나와 자신의 방으로 들어간 뒤였다.
"음... 아무래도 아버님께서 기분이 안 좋으셨던 거 같은데... 설마 내가 와서 그런 건가? 말도 없이 불쑥 찾아와서..."
파드마가 자신 없다는 투로 한 가지 가능성을 밝혔다.
"그건 아닐 거야. 기사들이 고지식하다곤 하지만, 우리 아버지는 그렇게 꽉 막힌 분은 아니셔. 만약 멋대로 친구를 데려와서 화가 나신 거라면 네가 아니라 나한테 호통을 치셨겠지."
"하지만 날 보시는 눈길이 굉장히 무서웠는데..."
"기분 탓이야."
세르는 단호히 말을 잘랐다. 솔직히 말해 세르 자신도 어렴풋이 그런 느낌이 들긴 했다. 들기는 했지만... 굳이 긍정하여 파드마의 불안감을 부채질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
"그것보다 요정의 꿀 말인데..."
세르는 파드마가 자신의 아버지에 대해 (여러가지 의미로) 깊이 생각하는 걸 막기 위해 억지로 화제를 돌렸다. 파드마는 요정의 꿀에 묘한 환상이랄지 동경심을 품고 있는 것 같았으므로 잠시나마 성을 나온 본래 목적을 상기시키면 무시하지는 못하리란 계산에서였다.
"맞아.., 그게 있었지."
예상대로 파드마는 쉬이 관심을 돌렸다. 그녀가 엉뚱한 의심을 품는 걸 막기 위해, 세르는 이제껏 꼭꼭 숨겨왔던 비밀을 터뜨렸다.
"지금 요정의 꿀을 구하러 갈 거야. 요정계로 가서."
'프메소설' 카테고리의 다른 글
[프메4] 뫼비우스의 띠 <後> (0) | 2012.07.21 |
---|---|
[프메4] 뫼비우스의 띠 <前> (0) | 2012.07.21 |
[프메3] Reverie - 3. 나는 너를 알고 있다 (0) | 2012.07.21 |
[프메5] 누군가에게는 평범했을 일상 - 18. Princess Maker (0) | 2012.07.21 |
[프메5] 누군가에게는 평범했을 일상 - 17. 덧없는 인연 (0) | 2012.07.21 |
RECENT COM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