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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아이에요... 부디 저라고 생각하고, 이 아이가 인간으로서 살아갈 수 있도록 길러주세요...'
10년 동안 찾아 헤맸던 이자벨이 내게 부탁하며 안겨 준 여자아이, 브리짓.
이자벨을 쏙 빼닮은 브리짓은 숲을 헤매느라 전혀 신경 쓸 겨를이 없었던 내 거친 얼굴을 보고도 울음을 터뜨리는 일 없이 방긋방긋 웃으며 내 손에 매달려 있다.
그 작고 여리여리한 얼굴로 제 엄마와 똑같은 미소를 흉내 내는 브리짓을 보며 나는 생각을 굳혔다.
이 아이를 나의 친딸로서 소중히 키우겠다고...
-1434년 12월 14일, 서즌 피시의 독백에서
"다녀오겠습니다!"
오늘도 딸아이의 밝고 활기찬 목소리가 현관을 열고 달려 나갔다.
이자벨이 인간으로 키워 달라며 신신당부했던 딸 브리짓은 1년 전 성인이 되어 자신만의 꿈을 찾아 날개를 펼쳤다.
여기까지만 보면 아무 문제없어 보이지만...
유감스럽게도 브리짓이 택한 길 때문에, 나와 브리짓은 지난 1년 동안 몇 번이고 크고 작은 언쟁을 치렀다.
왜냐고? 딸이 점쟁이가 되어버리고 말았으니까.
신이 정해 주시는 운명을 엿보고 사람들에게 고하는, 하필이면 빈말로라도 좋다곤 할 수 없는 그런 직업을 고르다니.
언젠가 이에 대해 툭 터놓고 대화하자는 명분으로 브리짓을 앉혀 놓고 내 생각을 이야기했더니, 한참을 가만히 듣고 있던 딸이 나더러 너무 고리타분하고 시대에 뒤떨어지는 사고방식을 고수하려 드는 게 아니냐는 일침을 날리지 뭔가!
걱정되어 하는 아버지의 설교를 그저 잔소리정도로밖에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 브리짓이 야속하기만 하다.
뭐어, 다른 건 몰라도 마법에 대해서만큼은 이상하리만치 강경한 태도를 취하고 있단 사실은 나도 인정하고 있고, 마법 덕분에 국가의 경제가 여러 면에서 발전하고 있으니 마법에 대한 연구가 활성화되는 것이나 마도사들이 늘어나는 것에도 일단 찬성하고 있지만...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내 딸 브리짓만큼은 마법에 너무 깊숙이 관여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아마 브리짓이 마법을 공부하는 자라면 누구나 염원하는 왕궁마법사 자리를 꿰찼다고 해도 내 반응은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았으리라.
그럼 만약 브리짓이 나처럼 검의 길을 걷겠다 선언하였으면 어떻게 했겠냐고?
마법보다는 낫겠지만 그 역시도 별로 탐탁지 않아했을 것이다. 위험하니까.
욕심 부린다 말하지 말길. 남의 일이라면 뭔 진로를 택하든 그 사람 자유고, 쉬운 길을 놔두고 굳이 어려운 길을 가겠다면 큰 결정을 내렸다며 격려해 줄 수도 있지만...
그 어려운 결정을 하는 게 내 자식이라면 어떤 부모가 웃으며 단박에 허락해 줄 수 있을까.
게다가 왕궁마법사 같은 높은 자리도 아니고, 점쟁이처럼 누구 하나 알아주지도 않는 고독한 직업이라면 더더욱 수락하기 어려운 것이 당연하지 않은가.
그렇다고 내가 브리짓에게 누가 봐도 무리다 싶은 직업을 가지라고 강요하는 것도 아니다.
그저 평범하게... 괜찮은 남자를 만나 사랑받는 신부가 되길 기대한 것뿐인데...
걱정했던 마족의 피를 치료하고, 평범한 인간 여자로서 당당한 행복을 찾아, 평범한 남자의 옆이라는 자기 자리를 차지해 내 곁을 떠나는 그런 정경을 바랐을 뿐이었다.
딸이 직접 고른 사람과의 결혼을 축하하며, 고이 기른 딸을 떠나보내는 씁쓸함을 감추고 평범하면서도 소중한 행복을 얻은 딸을 축복해 주고 싶었다.
언제쯤 손자 얼굴을 볼 수 있을까를 고대하며 둘이 잘 살기를 바라는 것이 그렇게 커다란 욕심이었을까?
이자벨이 원하는 대로 인간으로서의 삶을 찾았을 진 모르지만, 브리짓이 좋은 사람을 만나 결혼하여 자식을 낳는 평범한 행복을 누리기까진 아직도 갈 길이 멀다.
이자벨이 이 상황을 본다면 과연 어떤 반응을 보일까...
"큐브."
상념에 젖어 있던 나는 종을 울려 충직한 집사를 불러들였다.
"브리짓이 나름대로 찾아낸 자신의 꿈에 대해 자네의 생각이 듣고 싶네."
약간의 시간을 두고 올라온 큐브에게 나는 의자를 권하고 근 1년 동안 고민했던 브리짓에 대한 문제를 꺼내 그의 의견을 구했다.
내가 생각하는 가장 이상적인 방향은 브리짓이 지금이라도 점쟁이를 관두고 청소, 세탁, 요리 등을 배워 좋은 남자에게 시집가는 것(상대를 찾기 힘들다면 내가 아끼는 부하를 소개시켜 줄 수도 있는데)이지만... 몇 번이고 딸과 치른 언쟁을 통해 나는 그것이 무리라는 사실을 겨우 인정하기에 이르렀다.
심지어는... 자식 이기는 부모는 없다느니 시간이 약이라느니 하는 옛 성인들의 말씀처럼, 이따금 딸이 고른 직업을 인정하고 격려해 줘도 괜찮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그래서 나보다는 마법에 대해 더 잘 알고 있고, 편견도 적은 큐브에게 자문을 구해 보려는 것이다.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딸이 고집을 꺾지 않으니... 내가 포기하고 받아들이는 수밖에.
잠시 난감한 빛을 떠올리던 큐브는 이내 정색하고 '저의 하잘것없는 의견이라도 좋으시다면...'이라고 운을 띄웠다.
"주인님께서도 아시다시피 브리짓 아가씨는 매주 일요일마다 성실히 교회에 나가고 있습니다. 주변에서도 신앙심이 깊다고 이야기하는 걸 주인님께서도 들으셨겠죠? 교회에 자주 나가는데다 달마다 성수를 구입하고 있어, 아가씨 몸속에 흐르는 마족의 피는 전혀 힘을 쓰지 못한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마성이 전혀 맥을 추지 못하는 이 상황에서 마법은 전혀 걱정하실 일이 아니라고 감히 말씀드립니다."
흐음...
만약 백과사전에 충직한 집사의 표본이 필요하다면 난 주저 없이 큐브를 모델로 삼으라고 추천했을 것이다.
그는 내가 은연중에 걱정하고 있던 부분을 정확히 지적하여 그것이 단순한 기우라고 딱 잘라 말해준 것이다.
그가 인간이었다면 발언의 진실성을 좀 더 의심했겠지만, 다행히도 큐브는 마족이므로 그런 염려는 하지 않아도 좋다. 약속을 어기거나 거짓말을 하는 건 그들에게 있어 금기나 마찬가지이므로.
"게다가 좋은 점도 있지 않습니까."
큐브가 말을 이었다.
"브리짓 아가씨는 계속 이 집에 있어줄 테고, 아가씨가 선택한 직업 역시 주인님의 성에 차지 않을지는 몰라도 일단 남에게 폐를 끼치는 직종이 아니니까요. 게다가 풍문에 따르면 아가씨의 점은 굉장히 용하다더군요."
"뭐, 그런 말이야 가끔씩 들려오긴 한다만..."
나는 생각에 잠긴 척 고개를 끄덕이며 살그머니 팔짱을 꼈다.
"그렇습니다. 아가씨는 이미 자신의 분야에서 나름대로 입지를 갖추고 조금씩 지명도를 올리고 있잖습니까. 그러니 그 부분을 이야기하면서 이젠 아가씨가 선택한 길을 인정하겠다고 말씀하시면 될 것 같은데요."
"과연, 그렇다면... 아니, 잠깐만! 대체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지? 그건 마치 내가 브리짓의 고집을 꺾는 걸 포기하고 못 이기는 척 수긍하겠단 것처럼 들리잖나?"
내가 항의하자 그제야 큐브는 노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깜짝 놀랐다는 듯 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당연히 그렇게 하고 싶어 하시는 것 같아서 그리 말씀드렸던 겁니다만... 아니었나요?"
"그걸 말이라고 하나! 내가 그렇게까지 해서 브리짓의 비위를 맞춰야 할 이유가 어딨다고 그러지? 물론 자네의 안건은 꽤 괜찮다곤 생각하지만..."
"하지만 매번 아가씨와 같은 이유로 말다툼을 반복하는 것도 그닥 보기 좋은 일은 아니잖습니까. 부녀관계를 위협하는 쓸데없는 소모전일 뿐이죠. 그러니까 부디 이번엔 아버지로서 자식의 꿈을 인정하는 넓은 도량을 보여주는 게 괜찮을 거라고 생각합니다만."
큐브가 싱글싱글 웃으며 나긋하게 자신의 주장을 밀고 나갔다. 하여간 말은 잘 해요. 몇 백 년 동안 하릴없이 시간만 죽인 건 아니라는 건가.
"뭐, 자네가 그리 추천한다면 그 방법대로 하는 것도 괜찮을 것 같긴 하군..."
별로 내키지는 않지만 꼭 그렇게 해야겠다면 그리 해 줘도 상관없겠단 식으로 말끝을 흐리는 나.
큐브 앞에서 시인할 순 없지만... 그의 말대로 매번 같은 문제를 놓고 브리짓과 언쟁을 치르는 건 참 피곤할 뿐더러, 말싸움을 벌일 때마다 브리짓이 날 바라보는 눈빛-아빠도 이젠 늙으셨어, 라는-을 참을 수 없었으니.
"하지만 어떻게 다가가는 게 좋을지 모르겠군. 브리짓이 돌아왔을 때 다짜고짜 붙들고 널 인정해 주마, 이럴 수도 없는 노릇이고... 자연스럽게 얘길 꺼낼 타이밍을 만들 순 없나?"
"그럼 이건 어떨까요? 아가씨가 오늘의 장사를 접을 무렵 찾아가서 주인님께서 무슨 말을 꺼낼지 브리짓 아가씨가 맞춰보도록 유도하는 겁니다. 점술하곤 별개 아가씨는 눈치가 빠르니까 그런 움직임을 보이면, 굳이 주인님께서 길게 말씀하지 않으셔도 알아서 눈치 챌 테니까요."
또다시 큐브가 내놓은 제안은 내 마음에 쏙 들었고, 나는 고개를 끄덕여 그 안을 받아들이겠다는 의사를 보였다. 그가 어쩐지 무진장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엄지를 척 올리는 양상이 마음에 좀 걸렸지만... 뭐 어떠랴.
나는 딸아이가 장사를 접을 무렵 찾아가서 놀래켜 주기 위해 겉옷을 챙겨들고 밖으로 나섰다. 시간이 될 때까지 지인들이라도 만나면서 오랜만에 회포라도 풀어 볼까?
이크, 너무 느긋하게 있었던 것 같다.
전쟁이 길어지면서 날이 갈수록 문지기 일이 고달파진다며 푸념을 늘어놓는 후배들을 위로해 주다 보니 시간가는 줄 몰랐던 것이다.
온종일 흐릴 거라던 날씨는 정오가 지날 무렵 완전히 개어 따사로운 열기를 뿜어댔으나 그 위세가 영원할 리는 없었다.
해가 뉘엿뉘엿 지기 시작할 무렵 술집을 나선 나는 테츠로부터 주워들은 정보를 통해 브리짓이 있다는 곳으로 달려 나갔다.
광장이나 시장, 거리, 번화가 등 장사하기 좋은 곳을 다 놔두고 하필이면 다크타운이람.
점술을 인정해 주는 거랑 별개로 설교를 좀 해야겠다며 다크타운의 문턱을 넘었을 대, 아직 손님을 상대로 점을 보는 딸의 진지한 얼굴이 보였다.
늦지 않게 도착한 건 좋았지만, 해가 곧 저무는데도 영업이라니... 저 요상한 후드를 뒤집어 쓴 자식은 대체 뭐하는 놈이기에, 하루의 일과를 마감할 시간에 내 딸을 찾아간 거람? 좀 일찍 찾아가면 어디가 덧나나.
행여나 브리짓에게 들킬세라 모퉁이에 숨어 구시렁거리는 나.
기다리는 동안 해가 완전히 저물어 어두워졌고, 아직도 안 끝났나 싶어 몇 발자국 앞으로 나온 나는, 언제 온 건지 아까 딸에게 점을 보던, 그 머리부터 발끝까지 후드를 뒤집어쓴 사람과 부딪히고 말았다.
"미안합니다."
누가 실수했는지 모를 땐 먼저 사과를 해야겠지. 나는 거의 반사적으로 고개를 숙였고-
후드를 뒤집어 쓴 놈은 아무 반응도 없이 그대로 나를 지나쳐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뭐야, 저 자식?"
나는 잠시 놈이 사라진 방향을 향해 눈알을 부라렸다.
같이 사과는 못할망정, 최소한 뭐라고 대꾸는 좀 해야 하는 거 아닌가? 부모가 누군지 기회가 된다면 꼭 한번 보고 싶군 그래.
혀를 끌끌 차면서 나는 다시 고개를 돌려 브리짓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좀 전의 그 놈이 마지막 손님이었는지, 브리짓은 잡다한 마법 도구들을 챙기느라 여념이 없었다.
어떻게 말을 걸어볼까 고심하던 나는 갑자기 약간의 장난기가 발동해 딸아이가 고개를 들고 알아볼 때까지 가만히 앞에 서 있어보기로 했다.
"......"
나를 손님으로 착각하고 오늘 영업 끝났다며 거절의 말을 입에 담던 브리짓이 얼굴을 들어 올려 내 존재를 확인하고 깜짝 놀랄 때까지, 나는 딸아이의 앞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아버지...?!"
나를 알아본 브리짓이 여기까지 어쩐 일이냐며 일어서자, 나는 큐브가 언질을 준 대로 바다와도 같은 자애로운 미소를 지으며 퀴즈를 내기 위해 줄곧 다물고 있던 입을 열었다.
한편.
가랜드 장군은 인간 점술가에게서 벗어나 짙은 어둠이 깔린 다크타운을 지나 낡은 오두막으로 돌아가기 위해 방향을 틀다가 - 모퉁이에 숨어 있던 한 남자와 어깨를 부딪혔다..
그는 사르르 흔들리는 후드를 바로잡고, 미안하다고 사과의 말을 건네는 남자를 무시하고 그대로 지나쳐 어둠 속에 몸을 숨긴다
뒤에서 뭐 저런 게 다 있느냐고 혀를 끌끌 차는 그 얼굴과 목소리는 낯이 익었다. 마법석을 둘러싸고 인간들과 치열한 각축전을 벌일 때, 선두에서 서로를 죽일 각오로 맞붙어 싸운 자이니까.
인간계에서 이자벨 님이 유일하게 믿을 수 있는 친구라고... 그래서 기꺼이 자신의 딸을 맡긴 남자.
대외적으로는 아까 가랜드가 말을 걸었던 여자의 친아버지로 알려져 있을 터인, 첫사랑에 눈이 멀어 피 한 방울 안 섞인 소녀를 친딸로 받아들여 키워 준 남자, 서즌 피시.
그 남자가 틀림없었다.
저 남자와 다시 만나게 될 거라곤 예상치 못했기에, 가랜드 장군은 그가 말을 붙여도 아무 대꾸 없이 사라질 수밖에 없었다.
그는 다이쿤 님의 직계 비속이 잘 지내는지 근황을 살펴보라는 명령을 받들었을 뿐이고, 어린 시절의 기억들이 완벽하게 봉인된 이자벨 님의 따님과는 달리 서즌 피시는 어렴풋하게라도 가랜드의 목소리를 알아들을 일말의 불안감이 남아 있었으니까...
뭐, 계산 외의 요소가 하나 튀어나오긴 했으나 어쨌든 임무는 별 무리 없이 완수할 수 있었다.
마계로 돌아가 자신이 섬기는 군주에게 가랜드가 본 그대로 보고하는 단계가 아직 남아 있긴 하지만 말이다.
가랜드는 한 손을 뻗어 후드가 제대로 덮여 있는지 다시 한 번 확인한 뒤 다크타운 끝자락에 덩그러니 서 있는, 진작에 쓰러지지 않은 게 용할 정도로 낡고 허름한 오두막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이름도 모르는 마왕님의 따님이 내려 준 흥미로운 점괘를 떠올리자, 가랜드는 저도 모르게 웃음이 새어나오는 걸 참을 수 없었다.
현재 흘러가는 사회 정세와 자신의 정체를 고려하면 그녀의 점괘는 틀린 구석이 없었다. 아니, 어떤 의미에선 정확하게 들어맞는다고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문득 가랜드는 궁금해졌다. 감정을 전혀 드러내지 않는 자신의 군주는 별개로 하고, 이 이야기를 듣는다면 인간의 몸으로 마왕비의 자리까지 오른 그 분은 과연 어떤 얼굴을 하실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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