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오늘 밤 그녀에게 청혼할 생각이었다.
나의 친구, 나의 전우, 나의 여신 이자벨에게.
그녀가 보여 주는 순수한 미소를 나만의 것으로 만들고 싶었다.
하지만 운명의 그날 밤에 나는 그녀에게 청혼하고 대답을 듣기 전 마족들이 대규모의 군대를 이끌고 왕국의 국경을 침범했고. 나는 봉화를 피우러 떠난 이자벨과 다시는 만나지 못했다.
그녀의 미소를 원천 삼아 정처 없이 마계를 떠도는 지금, 나는 가끔 상념에 잠긴다.
그 때 마족이 진군을 조금 늦춰 대답을 들을 수 있었다 한들, 이자벨은 내 청혼을 받아들였을까?

 

 

 

땅거미가 지고 있었다.
풍성한 오곡들을 거두는 시기가 지나자, 바람은 감쪽같이 숨겨왔던 발톱을 드러내 대지를 위협했다.
파랗게 시린 그믐달을 품은 것은 인간일까, 아니면 차갑게 흐르는 하늘일까?

"항상 같은 자리에서 빛나는 유일한 나의 별. 해 지는 언덕에서 너는 나만의 것이 되어 줄까?"

나는 서서히 떠오르는 달을 보기 위해 천천히 고개를 들며 머리 속에 떠오른 감상을 무심코 밖으로 꺼냈다.
아무도 없다고 착각하고 한 짓이었다. 근처에 누가 있었다면 절대로 하지 않을 짓이었다.

"왜 어울리지도 않는 감상에 젖어 있는 걸까?"

출렁이는 별빛처럼 영롱한 목소리가 내 어깨를 부드럽게 감싸 안았을 때 내가 느꼈을 당혹감이 어느 정도였는지 모를 것이다.
놀란 마음에 벌떡 일어나 허둥지둥 주위를 둘러보니, 저만치 앞에서 이자벨이 장난기 가득한 미소를 머금고 나를 향해 손을 흔들고 있었다.
재수 없게도 별 뜻 없이 흥얼거린 혼잣말을 그녀가 들어버린 모양이었다.
-...세상에서 가장 들키고 싶지 않은 사람에게 들켜버린 꼴이군.
나는 이자벨이 내 쪽으로 다가오는 것을 보고 다시 털썩 자리에 주저앉았다. 모래와 바람의 합창 소리가 들릴세라 엉덩이로 깔아뭉개는 내 곁에 그녀도 자리를 잡았다.

"너 혹시... 금방 내가 한 말 다 들었어?"

그녀가 앉자마자 던진 바보 같은 질문. 이자벨은 잠시 내 쪽에 눈길을 주더니, 나를 반하게 만들었던 예의 그 눈웃음을 지으며 답했다.

"물론 들었지."

"...귀가 너무 잘 들리는 거 아냐?"

"뭐, 엘프의 귀라는 말도 종종 듣는 편이야. 그것보다 여기까지 불러내서 할 이야기라는 게 뭔지 슬슬 대답해 줘도 좋지 않을까?"

"...어?"

이자벨의 질문에 나는 아까와는 다른 의미의 당혹감을 떠올렸다.
내가 이자벨을 불러냈다고? 하지만 그건... 아.
머릿속을 뒤적이던 나는 겨우 오늘 아침에 있었던 일을 떠올릴 수 있었다. 이자벨에게 이 시간에 이곳으로 나와 달라고 부탁했는데 잠시 까먹었던 모양이다. 나 참, 벌써부터 치매인가?

"그야 뭐... 그렇게 재촉할 건 없잖아. 근데 언제부터 와 있었던 거야?"

"한참 전에 왔지. 부를까 했는데 멍하니 생각에 잠겨 있기에 언제까지 그러고 있을지 궁금해서 좀 지켜봤는데. 영 빠져나올 기미가 없나 했는데 갑자기 뜻 모를 소리나 중얼거리고 말야."

"...냅둬."

"왜, 화났어?"

이자벨은 생글생글 웃으면서 내 옆에 주저앉아 내 뺨을 쿡쿡 찔렀다.
바람을 타고 살며시 풍겨오는 바이올렛 향기에 나는 잠시 본연의 목적을 잊을 뻔했다.
나와 맞먹는 검술 실력을 가지고, 내가 모르는 마법을 자유자재로 사용하는 이자벨.
마법석을 캐러 마계로 향하는 광부들의 호위로서 처음 만난 나와 이자벨(+ 그 외 2명)은 그 인연을 쭉 간직한 채 성장하여 현재 왕궁의 청기사단에 함께 소속되어 있다.

"있지. 사람을 불렀으면 용건 정도는 얘기해야 할 것 아냐. 지금 한창 전쟁 중이란 거 잘 알면서. 감상에 젖는 건 좋지만 너무 빠져 있으면 곤란해. 이 시간 이후로 당장 적군이 쳐들어올지도 모르는데 다들 너무 늘어진 거 아닌가 싶어."

생각에 잠겨 멍하니 허공을 응시하던 내 귀에 이자벨의 또랑또랑한 목소리가 들렸다.
혼자 중얼거렸던 말이 무슨 뜻이냐고 추궁할 거라는 예상과 달리, 이자벨은 이제 막 떠오른 달을 보며 푸념조로 중얼거리고 있었다.
캐묻지 않은 것은 다행이지만, 왠지 나에게 그만큼 관심이 없다고 말하는 것 같아 조금 씁쓸하다.

"걱정 마, 지금이 비상사태라는 건 나도 잘 알고 있으니까... 그나저나 다들이라니, 또 누가 현실 파악 못 하고 빠져 있는 거야?"

조금 실망스럽긴 하지만 입 내밀고 있어봐야 달라질 건 없으므로 나는 화제를 돌리고자 방금 이자벨이 흘렸던 마지막 대사에 대한 질문을 던졌다. 덕분에 조금 더 시간을 벌 수 있기도 했고.

"그렇다니까!"

마치 그 말을 기다리고 있기라도 했는지, 이자벨은 격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큰 소리를 내선 안 된다는 규칙 때문에 잔뜩 줄인 그녀의 목소리 속에서 나는 환희와도 같은 플러스 감성이 솟아나오는 걸 느꼈다. 아마- 어떤 경유로 알게 된 정보를 누군가에게 말하고 싶어 안달이 났던 모양이다.
이자벨은 나만 알고 있어야 한다며 단단히 주의를 준 후, 매력적인 붉은 입술을 끌어당겨-그 순간 나는 얼굴이 붉어졌다- 내 귀에 마성과도 같은 목소리를 흘려보냈다.

"캘빈이랑 아이린 말야... 둘이 약혼했대."

"...뭐?"

그녀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나는 멍청한 어조로 되물었다. 이자벨이 안됐다는 얼굴로 같은 말을 두 번 더 하고 나서야 나는 겨우 혼란스런 그물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게 정말이야? 혹시 같이 청기사단에 있는 아이린 사이퍼와 캘빈 재스퍼 말이야?"

"그럼 그 애들 말고 또 누가 있는데? 방금 암구호 받을 때 아이린이 살짝 가르쳐 준 거야."

"살짝 알려준 거라면 나한테도 말하지 말아야 하는 거 아냐?"

"어차피 캘빈이 너한테 알려줄 텐데 뭐. 아이린도 너한테만은 알려줘도 좋다고 허락했어. 아무리 그래도 내가 그렇게 생각 없이 남의 연애담을 아무데나 떠벌릴까."

이자벨의 부연 설명을 듣는 동안 난 모닝 스타로 뒤통수를 맞은 듯 한 기분을 느껴야만 했다.
아, 오해할까 봐 말해 두자면 난 딱히 그 둘이 커플이 되었다는데 반감을 가진 건 아니다. 그 두 녀석과 나, 그리고 이자벨은 같은 시기에 기사단에 들어간 동기들이라 나름대로 애정이 있었고 그 둘이 커플이 되었다면 분명 축하할 일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하필이면 오늘 그 짓을 벌일 게 뭐냐고. 내가 불만을 품은 것은 그 때문이었다. 몇 주 동안 머리 싸매고 고생한 게 전부 물거품이 되게 생겼는데 그 누가 제정신일 수 있을까.
나는 이자벨에게 마음을 품고 있었고, 그믐달이 뜨는 바로 오늘 고백할 생각이었던 것이다.

"브라이언, 왜 이렇게 말이 없어? 너 설마... 아이린한테 마음이 있다거나 그런 건 아니겠지?"

아무 말도 하지 않는 내가 답답했는지 이자벨이 초조한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겨우 고개를 돌려 그녀를 쳐다보니, 이자벨이 무서운 손길로 내 어깨를 흔들고 있었다.

"말해두지만 아이린은 이제 임자 있는 몸이야. 행여나 엉뚱한 맘 품었다간 내가 가만두지 않을 거야?"

"무슨 소릴 하는 거야? 말해두지만, 난 아이린한테는 털끝만큼도 관심 없어!"

남의 속도 모르고 엉뚱한 소리를 늘어놓는 이자벨이 서운해 나는 나도 모르게 조금 큰 목소리로 그녀의 말을 끊었다. 이자벨은 잠시 멍하니 나를 바라보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야... 관심 없다니 다행이지만... 그래도 청기사단 유일한 여기사인데 털끝만큼도 관심 없다는 건 좀 그렇지 않아?"

"뭐?"

나는 벙찐 얼굴로 조용히 흐르는 그녀의 맑은 눈동자를 주시했다.
방금 이상한 생각 했다간 가만 안 둔다고 말한 주제에, 털끝만큼도 관심 없다는 게 별로라니. 대체 얘는... 아니, 여자들은 도대체가 무슨 생각을 하며 사는 건지 도통 이해할 수 없었다.

"아이린이 청기사단 유일한 여기사라니, 그럼 넌 청기사단이 아니라 백기사단 출신이라도 된다는 거야?"

"그럴 리가 있겠어. 난 그냥 여자가 아니라 그냥 사람이라고 말하려는 것뿐이야."

"여자라는 조건은 어떤 상황에서든 잘만 이용하면 큰 무기가 될 텐데 굳이 사람이라고 칭하는 이유가 뭐야?"

나는 진심을 담아 물었다. 뭐 특별히 나쁘거나 비꼬는 뜻으로 물어본 건 아니었다. 여자는 보호받아야 할 존재니까, 그 부분을 잘 살린다면 좀 더 편하고 안전하게 살 수 있지 않겠느냐는 생각에서였다.
그런데 이자벨에게는 그렇게 들리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래. 그렇게 생각하고 있단 말이지? 하여간 남자들은 다 똑같아."

이자벨은 입을 샐쭉 내밀며 콧방귀를 뀌었다.

"난 그게 싫어. 똑같은 백성인데 왜 누구는 보호받고 왜 누구는 대우받지 못하는 거지? 신분의 차이라면 어쩔 수 없지만, 성별의 차이로 차별받는 건 정말 싫어. 납득도 안 되고. 나도 한 사람 몫을 제대로 할 수 있으니까 너무 여자 대하듯 감싸고돌지 말아 줬으면 좋겠어. 그냥 동료 대하듯 해 달라는 말이야."

"그럼... 넌 여자로서의 삶을 살고 싶다는 생각은 없는 거야? 아이를 키우면서 남편 보호를 받으며 소박하게 살 생각은 없는 거냐고?"

나는 따졌다. 말이 조금 세게 나갔다는 점은 인정한다. 순간 감정이 울컥 솟았던 것이다. 하지만 왜 감정이 치밀어 올랐는지는 모르겠다.
허나 분명한 건 난 이자벨의 의견에 찬성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녀가 무슨 말을 하든 동조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녀가 뭐라 주장하든, 그녀는 여자고 보호받을 권리와 의무가 있었다. 그리고... 가능하면 그 역할을 내가 일임했으면 하는 작은 소망도 있었다는 것은... 부정하지는 않겠다.

"목소리 낮춰! 왜 소리를 지르는 건데? 물론 나라고 그런 걸 바라지 않는 건 아니야. 하지만 적어도 지금은 그럴 생각 없어. 난 왕국을 위해 목숨을 걸고 전장에 나선 군인이고, 지금 난 여자가 아닌 기사로서 왕국을 위협하는 마족을 몰아내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아.
 누구랑 사귀니 뭐니 하는 건 다른 사람은 몰라도 지금의 나한텐 사치야."

"사치가 아니야."

나는 조용히 말했다. 뜨겁게 치밀어 오른 감정은 어느새 식어 딱딱한 덩어리가 되어 내 마음을 무겁게 짓눌렀다.
이자벨이 자신을 여자로 보지 말라고 한 시점에서 나는 오늘 밤 계획했던 고백을 미룰까 고심했다.
전혀 생각지도 않던 문제를 들이밀며 얼른 결정하라고 다그쳐 봐야 곤란할 뿐이라는 건 숙맥인 나라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결국 나는 마음을 굳혔다.
인생의 사이클과도 같은 작은 행복은 결코 사치가 아니라는 걸 가르쳐 주기 위해서라도.
그리고... 이자벨이 던졌던 말 중에서 단어 하나에 다시 현실을 직시할 수 있었다. 지금은 전쟁 중이라는 걸.
나는 귀신에라도 홀린 듯 이자벨의 손을 덥석 움켜잡았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그녀는 거부하지 않았다.

"...이자벨. 이제 너를 불러낸 용건을 말해야겠어."

나는 목청을 가다듬고 쿵쾅거리는 심장 소리를 피해 목소리를 낮추고 조용히 말했다. 저만치 허공을 응시한 채로.

"너 자신을 여자로 보지 말라는 건 고문이나 다름없는 일이야. 넌 유월의 풀밭보다 싱그럽고, 모든 생명을 아우르는 태양보다도 눈부신 존재야. 다른 사람들은 널 보고도 멀쩡했을지 모르지만 난 그렇지 않았어."

나는 그녀의 손을 움켜잡은 손에 서서히 힘을 주었다. 살짝 표정이 굳어진 채 침묵한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는 이자벨을 주시하며 나는 몇 주 동안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며 결정한 말을 입에 담았다.

"너와 처음 행동을 같이하던 때부터 난 널 좋아했어. 첫 눈에 반하는 게 이런 거구나. 세상에 인연이 있다는 게 바로 이런 거구나 하는 걸 느꼈지.
 너의 목소리, 얼굴, 표정, 때때로 달라지는 기분... 너의 모든 걸 사랑해. 이 세상 전부가 네게 등을 돌려도 나만은 언제나 네 편이 되어 줄 거고. 세상이 끝나는 날까지 이 한 목숨 다해 널 사랑할 거야. 내 곁에... 영원히 있어 주겠어?"

더듬더듬 내뱉은 고백이 끝남과 동시에 나와 이자벨 사이에는 잠시 불편한 침묵이 감돌았다.
그녀는 살짝 팔을 비틀어 내게 잡혔던 손을 빼냈고, 뚫어져라 쳐다보는 내 시선을 피해 딴 쪽으로 얼굴을 돌렸다.
나는 그저 가만히 그녀의 얼굴을 주시하고 있었을 뿐이지만, 이자벨에게는 내가 마치 대답을 재촉하는 듯 한 인상을 받았을지도 모른다.
묵묵히 이자벨이 입을 열기를 기다린 지 수 분이 지나고, 그녀는 내 질문에 대해 대답하기 위해 고운 입술을 들어-
휘이익!
그 순간 나와 이자벨의 사이를 뚫은 불화살 하나가 기분 나쁜 신음을 흘리며 지면에 뿌리를 박았다.

"...?"

사태를 이해하지 못하고 서로 얼굴을 바라보는 나와 이자벨.
사태는 정확히 파악할 수 없었지만, 나는(그리고 아마 그녀도) 본능적으로 위험을 느꼈다.
등을 타고 흐르는 한 줄기 땀은 긴장으로 범벅이 되었고, 불꽃을 날리며 모래 속에서 사그러든 화살을 제치고 당장에라도 뭔가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어서 피해!"

넋을 놓은 것도 잠시, 이자벨은 날카로운 어조로 쏘아붙이며 내 팔을 거칠게 잡아당겼다.
금방까지 우리 둘 사이를 흐르던 당혹스런 긴장감은 사라져 버린 지 오래였다. 
그녀가 내 팔을 자기 쪽으로 끌어당김과 동시에, 내가 있던 곳에 다시 몇 개나 되는 불꽃 화살이 자리를 차지했다.

"...젠장!"

무심코 하늘을 올려다본 나는 무심코 욕지거리를 했다. 하늘을 뒤덮은-이라고 하면 과장이고, 3~40여발 정도 되는 화살들이 사방팔방으로 날려지고 있었던 것이다. 덕분에 정신은 차렸지만 말이다.

"...브라이언, 넌 어서 가서 봉화를 올리고 다른 사람들한테 이 사실을 알려! 난 그동안 어떻게든 해서 적군들의 발을 묶어볼 테니까!"

"제정신이야? 혼자선 무리라고!"

"하여튼간에!"

이자벨은 서둘러 주문을 외웠다. 그녀는 마력을 굳혀 만든 방패를 휘둘러 우리 쪽으로 달려드는 화살들을 후려치며 재촉하는 시선을 보냈다.

"뭐해? 어서 가라니까!"

나는 책망하는 이자벨의 목소리를 듣고 결심을 굳혔다. 하늘을 뒤덮은 화살들은 조금씩이지만 그 수가 늘고 있었고, 희미하지만 기력이 충만한 포효 소리도 들려오고 있었다. 상황이 이런데 굳이 봉화를 피우지 않아도 적이 진군하고 있다는 것은 누구라도 알 수 있을 것이다.
봉화를 피우러 후퇴한다면 아마 살 수 있는 확률이 좀 더 높아질 것이다. 하지만, 이곳에서 어물거리고 있다간 높은 확률로 목숨을 잃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이 순간,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답은 이미 나온 것이나 다름없다.

"이자벨, 봉화를 피우는 작업은 네가 하도록 해. 적의 발을 묶는 건 내가 할 테니까. 어차피 넌 마법도 쓸 줄 아니까 불도 쉽게 피울 수 있을 거 아냐?"

나는 이자벨이 만든 방패를 빼앗으며 비장한 어조로 말했다.

"무슨 소릴 하는 거야? 검밖에 다룰 줄 모르면서 무슨 수로 저들을 막겠다고? 저 소리 안 들려? 한 둘이 아니란 말야. 그거 이리 내고 빨리 가. 지금 너랑 실랑이 할 시간 없어!!"

"걱정하지 말래도!!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고. 여기서 주절주절 설명할 시간은 없으니까, 한 번만 말할게. 날 믿어!"

나는 태연한 얼굴로 이자벨의 시선을 받아넘기며 씨익 하고 미소를 지었다.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는 건 물론 거짓말이다. 적이 (함성 소리로 보아)작정하고 기습해 온 마당에 그들을 유인할 안전하고 좋은 방책이란 게 그렇게 형편 좋게 떠오를 리가 없다.
이자벨도 아마 의심은 하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급박한 상황에서 납득할 수 있게 설명해 달라고 요구할 리는 없었다. 그녀는 그렇게 아둔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래, 알았어. 네가 그렇게까지 얘기한다면 널 믿을게. 대신, 무조건 목숨을 소중히 하고 절대 무모한 짓은 하지 마. 알겠어?"

예상대로 그녀는 한 발 물러섰다. 제 할 말을 마친 이자벨은 당황, 걱정, 미안함 등이 섞인 얼굴로 잠시 날 주시하고는 이내 고개를 돌려 다른 동료들이 있는 곳으로 달려 나갔다.
점점 작아지는 이자벨의 등을 시선으로 훑으며 나는 반쯤 자포자기 한 심정을 안고 자세를 고쳤다.
폼생폼사라 비웃지 말길. 세상에 어떤 미친 놈이 여자를 미끼로 남겨두고 혼자 편안히 후퇴할 수 있을까. 그것도 사랑하는 여자를 홀로 남겨두고.

"저 빌어먹을 녀석들 때문에 심혈을 기울인 고백이 엉망이 되어버렸구만..."

스멀스멀 차오르는 공포심을 조금이라도 죽여볼 요량으로, 나는 짐짓 큰 소리로 중얼대며 혀를 다셨다.
이따금 방패를 휘둘러 내 쪽으로 혀를 날름거리는 그것들을 떨쳐내며 나는 조금씩 이자벨이 사라진 방향의 반대편으로 발을 옮겼다.
심혈을 기울였던 고백은 엉망이 되었다. 대답조차 제대로 듣지 못했다. 오늘 일은 그냥 덮어버리고 후일을 기약하는 것이 더 나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니... 무사히 살아남도록 하자.
누군가를 열렬히 사랑한다 해도 죽어버리면 모든 것이 끝이다. 꿈을 이루고 싶다는 열망은 살아남는 것을 전제로 품을 수 있는 것이니까.
훗날 이자벨에게 다시 고백을 하든 차이든, 결국 살아남아야만 겪을 수 있는 일이 아닌가.
나는 그렇게 마음을 다잡으며 곧 들이닥칠 적의 군단과 마주하기 위해 대지에 우뚝 섰다.
이 때의 나는 1가지, 작지만 중요한 사실 하나를 간과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

 

"브라이언, 이제 그만 포기하자."

할 말이 있다며 나를 불러낸 캘빈은 근심에 찬 얼굴을 보이며 심각한 어조로 운을 떼었다.
사건의 발단은 약 1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마법석을 사이에 두고 마계와 끊임없이 충돌하면서도 주장을 굽히지 않던 왕국은 결국 마왕의 분노를 사 전쟁이라는 비극에 직면하여 나라 안팎과 백성들을 혼란에 빠뜨렸다.
마법석이라는 요물에 홀려 마족의 영토를 밤낮으로 휘저어 놓던 인간의 행위에 대해 침묵으로 일관하던 마왕은 마음을 바꿔 마침내 행동을 개시하여 인간계에 1차 토벌대를 보냈다.
처음에는 대등하게 싸우는 듯 했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인간의 군대는 조금씩 밀리기 시작했고 마군은 더욱 기세등등하여 인간의 군대를 압박했다.
그 과정에서 많은 생명이 피를 흘려야만 했다.
인간계의 군대는 조금씩 후퇴하며 기습은커녕 방어하기에 급급했고, 참전했던 사람들 사이에는 뜬소문들이 돌았다. 머지않아 마족들이 지금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의 군대를 몰고 자신들을 쓸어버릴 거라고...
물론 왕국에서는 근거 없는 소문이라며 강하게 부정하며 군인들의 사기를 북돋으려 했다.
위기는 곧 기회라 했던가.
왕국에서는 자세한 내막을 모르는 이들에게 마족이 먼저 전쟁을 일으켰으며 영토를 지키기 위해 반드시 전쟁에서 이겨야 한다는 식으로, 거짓말은 아니지만 중요한 사실을 빼고 오해를 유도하는 방식으로 백성들을 선도하였다.
그러나 왕국의 주장을 진심으로 믿는 이는 그리 많지 않았다.
왕국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불경한 소문은 눈덩이처럼 불었고, 개중에는 인간이 먼저 전쟁의 빌미를 제공했으며 오스왈드 대신을 중심으로 한 세력이 전쟁을 부추겼다는 소문도 있었다.
어쨌든 마족이 곧 대규모의 침공을 할 것이라는 예언(?)이 공공연하게 나돌았고, 사람들은 왕국이 무너지는 것이 아니냐며 불안과 두려움에 떨었다.
그리고 애석하게도 그 예언은 맞아떨어졌다.
그믐달이 떴던 4월의 마지막 주, 마왕은 손수 군대를 이끌고 인간계의 국경을 침범했다.
마도사들은 채굴한 마법석의 힘을 제대로 끌어내지도 못한 채 의문의 죽음을 맞았고, 마법석의 힘만 믿던 병사들은 완전히 의표를 찔려 제대로 싸우지도 못하고 죽임을 당했다.
인간의 침입에 대응하던 것과는 수준이 다른 병력이었다.
마군들은 자신의 앞을 가로막는 것이 무엇이든 간에 냉혹하게 그것을 내쳤고 왕국의 국경을 향해 거침없이 나아갔다.
이렇게 말하는 나 역시, 먼저 마군들을 발견했다는 이유로, 우리 쪽 군대가 태세를 정비하고 전투에 임하기까지 약간의 시간이라도 벌어볼 요량으로 겁 없이 그들에게 접근했었는데... 그 때는 정말 죽는 줄 알았다.
나뿐만이 아니었다.
피어오른 봉화와 하늘을 수놓던 불꽃 화살들을 보고 병사들이 집결하여 마족에 대항했지만... 냉정하게 말해 마왕이 1차로 보냈던 토벌대에게조차 밀렸던 군대가 정말 작정하고 나선 2차 부대에게 상대가 될 리 없었다.
추풍낙월이라는 단어를 실제로 체험하길 다반사, 압도적인 힘에 굴복해 성이 무너지는 것도 시간문제일 뿐이라 여기며 모두가 포기하고 있을 때-
한 명의 용사가 수렁에 빠진 왕국을 건져내는 기적이 벌어졌다.
왕국을 구한 구세주의 이름은 이자벨... 그녀는 나와 함께, 몇몇의 전우들과 모험을 함께 한 친구였다.
그녀는 놀라울 만큼 재빠른 기지와 전투 실력으로 마왕과 1:1 결투를 벌였고, 혀를 내두를 만한 교섭술을 통해 마군을 물러가도록 마왕을 설득했다고 한다.
'~라고 한다'고 한 다리 건너 설명하는 이유는 다름이 아니다.
그 날 헤어진 이후, 나는 두 번 다시 이자벨과 만나지 못했던 것이다.
마군의 2차 진격대가 국경으로 진군할 당시 나와 그녀는 함께였다.
본인이 미끼가 되겠다는 걸 겨우 달래 봉화를 피우러 보내고 내가 스스로 미끼가 되길 자처하였건만, 큰 소리쳤던 게 무색할 만큼 몇 명 베어 보지도 못한 채 나는 보기 좋게 부상병으로 밀려나는 처지가 되었고, 기력을 회복했을 때는 이미 마군이 물러난 뒤였다.
봉화를 피우러 사라지던 뒷모습이 내가 봤던 이자벨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돌아오지 않았다.
물론 그녀가 죽었을 거라는 생각은 하지도 않았다. 나는 이자벨을 찾는데 힘을 보태달라는 상소문을 국왕에게 올렸고-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그 당시 나 이외에도 많은 사람들이 같은 요청을 했다고 한다-, 국왕은 수많은 상소와 백성들의 염원을 존중하여 그녀를 구출하기 위해 대규모의 수색대를 조직하여 마계로 보냈다.
그러나... 인간이란 얼마나 간사한 존재인가.
종전 당시, 백성들은 적으로부터 나라를 지켜낸 영웅을 성녀라 칭송했다.
하지만 많은 시간이 흐르자 사람들은... 아니, 세상은 그녀를 잊었다.
의욕을 갖고 나섰던 수색대도 기약 없는 여행에 지쳐 하나 둘 떨어져 나갔고, 왕국에서는 그녀를 죽을 것으로 공표하고 수색으로부터 완전히 손을 떼고 말았다. 그리고 모든 수색대는 작업을 끝내고 서둘러 철수해 버렸다.
물론 나는 포기할 생각이 없었다. 그녀는 살아 있는 거라고, 만약 죽은 거라면 그 증거를 찾기 전까지 돌아가지 않겠노라고, 바랜 기억 속의 이자벨의 미소를 떠올리며 그렇게 다짐했다.
하지만 지금 내 곁에 있는 캘빈은 그렇지 않은 모양이었다.
심각한 어조로 그렇게 말한 뒤, 캘빈은 다시 입을 열어 내가 말을 꺼내기 전에 자신의 주장을 펼쳤다.

"나도 이자벨에 대해선 안타깝게 생각해. 살아 있다면 반드시 찾아야만 한다고도 생각해. 하지만 그 동안 마계를 돌아다녔지만 헛수고만 해 왔어. 이제 조금만 지나면 10년이야. 그녀를 찾으러 나선지 10년이 된다고. 까놓고 말해서... 이 정도면 할 만큼 한 거 아니냐?"

"...그래서 그만 포기하자고? 아직 살아 있는 사람을, 찾을 길이 없으니까 포기하자는 거야?"

"이젠 이자벨이 살았는지 죽었는지도 모르겠어. 확실한 정보라도 있다면 모를까, 이건 그냥 풀잎 더미 속에서 바늘 찾는 격이잖아. 목숨을 걸고 이만큼이나 찾아다녔는데도 아무 소득이 없다면 이제 그만 포기하는 게..."

"이자벨은 살아 있어!"

나는 고함을 질렀다.

"이자벨은 살아 있다고. 그녀는 죽지 않았어! 죽었단 증거가 없는데 어떻게 그냥 포기하겠다는 말을 해?!"

"죽었단 증거가 없다는 이유로 살아 있다고 믿고 싶은 심정은 이해하지만 그걸 나한테까지 강요하지 마!! 나라고 편한 줄 알아? 나는 뭐 매정해서 전우를 나 몰라라 하는 것처럼 보이냐? 나도 그 애가 측은해. 군인으로서 최고에 필적하는 공을 세웠는데 정작 본인은 그 명예를 누리지도 못하고, 예전에는 항상 여자라고 차별받기만 했지.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다른 사람들 인생을 희생해야 할 이유는 없다고!!"

캘빈은 분통을 터뜨리며 가슴을 쳤다. 내가 잠시 움찔한 사이에 캘빈은 목에 건 작은 펜던트를 꺼내 내게 들이밀며 거세게 몰아붙였다.

"아이린 기억나? 모른다고는 안 하겠지. 아이린이랑 약혼한 날, 마군의 2차 진격이 있었어. 이자벨 덕분에 전쟁은 끝났고, 우린 모두 이자벨을 찾는데 자원했지. 물론 아이린은 몇 년 전에 먼저 돌아갔지만. 지금 어떻게 사는 줄은 알아?
 못난 남편 때문에 독수공방하며 혼자 아이 키우며 살고 있어. 내가 버젓이 살아 있는데, 과부마냥 아이한테 아빠 얼굴을 보여주지도 못해... 아이가 아플 때도 난 옆에 있어주지 못했고, 아이는 아빠가 어딨냐고 묻는데 어떻게 해 줄 수도 없고.
 그런데도 난 기약 없는 여행에 계속 동참해야 하는 거냐? 이 정도면 할 만큼 했잖아. 이자벨을 찾아야 한다는 마음은 알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언제까지고 내 가정을 내팽개칠 수는 없다고... 대체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 하냐..."

"...미안하다. 이자벨만 생각하느라 혼자 있을 아이린을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나는 진심을 담아 사과했다.
거짓말 같게도, 나는 캘빈이 아이린의 이름을 들먹일 때까지 그녀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지 않고 있었다. 그저 이자벨만... 그녀만을 떠올리고 있었던 것이다.
왜 다른 사람들에게는 각자 나름대로의 사정이 있다는 간단한 이치를 지금까지 깨닫지 못했을까. 무슨 근거로 모든 사람들이 나처럼 이자벨을 되찾으려는 의지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을까.
내가 생각해도 참 한심한 얘기였다.

"어서 아이린한테 가 봐라. 내가 명령하는 것 같아 기분이 좀 이상하지만... 어쨌든 지금이라도 가서 못 다한 남편 노릇, 아빠 노릇 열심히 하며 잘 살아야지."

"...너는? 너는 안 가냐?"

캘빈의 물음에 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말했잖아. 난 이자벨을 찾을 때까지 포기하지 않는다고."

"...언젠가 문득 든 생각인데, 이자벨이 설령 살아 있다고 해도... 너라면 자신을 찾아 나설 거라는 걸 알 법도 한데, 지금까지 나타나지 않는다는 건... 말로 설명은 잘 못 하겠지만, 이자벨이 정말 그걸 바랄 것 같아?"

"...모르겠다. 여자 마음을 내가 어찌 아냐. 그냥 반쯤은 자기만족이라고 생각해.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내가 버티지 못할 것 같아서 말이다. 네가 아이린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돌아가고 싶어 하는 것처럼, 나도 이자벨을 되찾고 싶은 것뿐이야."

그것은 사실이었다. 나라고 해서 10년 내내 한결같은 생각으로 버틴 것은 아니었다.
손에서 내려놓고 싶은 때도 있었고, 그녀는 이미 죽었는데 헛수고 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회의가 든 것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렇지만, 비관적인 생각이 들 때마다 떠오르는 이자벨의 미소. 그것이 나를 지금까지 버티게 해 준 원천이자 활력이었다.
물론 이건 내 얘기일 뿐, 다른 사람들과는 관계없는 얘기였다. 그들에게는 살아 숨 쉬는 소중한 이들이 있었고, 그들은 이자벨보다는 그 쪽에 더 신경을 썼다. 그렇다고 해서 그것을 비난하거나 내 생각에 맞춰 달라고 강요할 수는 없는 것이다. 입장을 바꾼다면 나 역시 그들과 똑같이 생각하고 행동할 테니까...
그리하여 캘빈은 결국 나를 설득하는 걸 포기하고 혼자 귀향길에 올랐다. 머잖아 가족의 얼굴을 볼 수 있겠지.
나는 오늘도 이자벨을 찾아 홀로 마계를 떠돌고 있다.
언제까지나... 목표를 이룰 때까지 기약 없는 이 여행을 계속할 것이다.
지금처럼 그녀의 얼굴이 보이는 환상에 사로잡히더라도 굴하지 않고, 나는 이자벨을 찾아...

"...어?"

스스로 마음을 달래던 나는 묘한 위화감에 위를 올려다보았다.
여느 때처럼 떠돌던 중, 목이 말라 찾은 샘에서 허겁지겁 물을 들이켜고 있을 때였다.
물속에 비친 이자벨의 엷은 미소를 환상이라 치부하며 고개를 든 순간, 복수의 기척을 알아챈 나는 그 쪽으로 시선을 올렸고...
나는 그대로 얼어붙고 말았다.
10년 동안 내가 찾아 헤맸고, 다른 사람들은 포기했던 이자벨의 미소.
절벽 위에 우뚝 선 이자벨이 초연한 미소를 나에게 보내고 있었다.


==========


"...주인님, 주인님."

익숙한 목소리와 함께 어깨를 흔드는 부드러운 손놀림에 나는 살며시 눈을 떴다.
8년간 나와 내 딸을 충실히 섬겨 온 마족 큐브의 노란 눈과 함께 곱게 포장된 종이뭉치가 눈에 들어왔다.

"주인님, 안에 들어가서 주무십시오. 여름이라고는 해도 종일 비가 내려 밤에는 쌀쌀합니다. 아가씨에게도 항상 몸관리를 잘 해야 한다고 설교하지 않으셨습니까."

큐브의 잔소리를 가볍게 무시하면서 나는 낮은 신음소리와 함께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내가 깜박 잠이 들었나 보군... 그래, 무슨 일이지?"

"아가씨에게서 편지가 왔습니다. 아가씨 소식은 제일 먼저 알려달라고 하셨지요?"

은은한 미소와 함께 큐브는 이제 막 잠에서 깬 내게 기사단의 문장이 찍힌 종이를 조심스레 건네주었다.

"...그렇군."

나는 건성으로 대답하며 큐브가 건네 준 편지를 집어 들었다.
살짝 고개를 숙이며 서재를 나서는 큐브를 눈으로 쫓으며 나는 모노클을 끼고 딸이 큼직하고 반듯하게 써 내린 활자들을 쫓아 편지를 훑어 내렸다.


▶사랑하는 아버지께.

그동안 별고 없으셨는지요.
아버지의 품을 떠나 전쟁터에 온 지도 벌써 3개월이 지났습니다.
아버지의 걱정과는 달리 저는 이곳에서 잘 지내고 있습니다.
성수의 힘에 깃든 신의 은총을 받아 별다른 부상도 입지 않고 탄탄대로를 걷는 셈입니다.
이곳에서의 일상은 늘 똑같답니다.
밤낮을 가리지 않는 전투, 하루에도 수십 명씩 발생하는 전사자와 부상자, 숨 쉴 틈 없이 벌어지는 전투 사이에 이따금 주어지는 폭풍 전의 고요와도 같은 적막함, 단말마의 비명소리 등...
익숙해지기까지 많은 고생을 했지만, 막상 익숙해지고 나니 덤덤해지는 제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역시 인간의 적응력이란 굉장하다고 생각지 않으십니까?
이따금 현실에 적응하지 못하고 탈영하는 무리들도 있습니다만... 그런 의지 약한 잉여들과 절 동급으로 생각하지 않으실 줄 믿습니다.
요 근래 전투가 없는 때, 저는 기초 훈련과는 별도로 리제 양과 성과를 두고 선의의 경쟁을 하고 있습니다.
저희의 작은 경쟁이 군 전체의 기강과 자세를 바로 세우는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됐으면 한답니다.
그리고 얼마 전 노더리 가의 영양께서 왕자님과 약혼하였다는 소식을 접하고 정말 제 일처럼 기뻐했습니다.
이따금 왕자님께서 뭔가를 자세히 들여다보곤 하셨는데 그게 크리스티나 양의 초상화였던 셈입니다.
왕자님께서는 승산이 있다고, 마족을 이 땅에서 완전히 몰아낸 후 그녀와 정식으로 결혼하겠다고 살짝 귀띔하셨답니다.
하루 빨리 그 날이 오길 빌며, 저는 꿈을 실현하기 위해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응원해 주십시오.

아빠의 공주, 에이미로부터◀


딸의 편지를 세 번 정독한 나는 한숨을 쉬며 편지들을 책상 한 끝으로 치워 버렸다.
한 달에 한번 날아드는 딸의 편지. 이번이 세 번째였다.
항상 정갈한 필체로 일상을 담아 나에게 보고한다.
그 일상은 지금의 현상을 가리키기도 했고, 아니면 주변 인물의 소식을 가리키기도 했다.
어느 쪽 소식을 보내오든 간에, 아직 내가 읽고 싶은 소식에는 도달하지 않은 듯싶다.
조급해하지 말자. 느긋하게 기다리자며 나는 최대한 상체를 뒤로 젖혔다.
눈을 감으면 떠오르는 그 얼굴. 갖고 싶어 발버둥 쳤으나 끝끝내 나를 뿌리치고 사라져버린 그 얼굴.
어쩌다 일이 이리 되어버린 것일까.
품속에 소중히 간직해 왔던, 목숨과도 견줄 수 없는 귀중한 보배가 찢겨져 달빛을 흐른다.
대체 왜 어둠 속에 나를 두고 혼자 떠나버린 것이냐.
너를 이리 사랑하는 나를 배신하고 그에게로 가버린 이유가 무엇이냐.
목구멍까지 차오른 말들은 분노에 힘을 잃은 나의 가슴 속에서 길을 찾아 방황한다.
갈가리 찢겨져 내 손에 내려앉은 애처로운 보배를 희롱하며 나는 애꿎은 내 머리칼을 쥐어뜯었다.
10년 간 찾아 헤매었던 나의 여신.
5년을 동고동락해 온 나의 전우, 나의 사랑 이자벨.
마왕이 직접 지휘하는 부대의 기습을 몇 시간 앞둔 운명의 날, 이자벨은 내 손을 떠나 먼 곳으로 훌쩍 날아가 버렸다.
그로부터 10년, 다시 너를 만났을 때 내 마음이 어땠는지 너는 알까?
용기를 내어 다시 내민 내 손을, 너는 매몰차게 뿌리쳤지. 뿐만 아니라 네 아이라며 너를 쏘고 빼닮은 여자아이를 내게 맡겼어.
그 아이의 아비가 누구인지는 구태여 입 밖에 내지 않더라도 알 수 있다.
아무것도 모르는 채 고요히 잠든 핏덩이를 내게 남기고 넌 또다시 내 곁을 떠났다.
몇 번이고 나를 기롱하는 너에게 대체 어떡해야 내 기분을 느낄 수 있게 한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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