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이 사정거리에 있다면 나 역시 적의 사정거리 안에 있는 것이다.

 

 

이상하다.
의욕에 넘쳐 출발한 병사들을 거느리며 적진으로 향하는 샤를의 마음속에서 그를 만류하는 목소리가 들린 것 같았다.
정찰대는 자신들의 임무를 확실히 완수했고, 자신이 이끄는 기사대는 곧 저 앞에 진을 치고 있는 적의 전력과 사기를 꺾어버릴 참이었다.
문제될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전쟁터에서 무인으로서의 자존심이나 손에 피를 묻히는 것은 애초부터 논외.
사전 계획대로 쳐들어가 박살을 내주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어째서 마음 한 구석은 이리도 떨리는 것일까.
곧 맛보게 될 환희를 앞둔 흥분 따위가 아니다.
불안감. 그의 가슴을 살며시 짓누르는 이 떨림의 이름.

"왕자님, 왜 그러십니까? 혹시 불편하신 데라도 있으십니까?"

그의 곁에 딱 붙어 전방을 경계하던 기사 재스퍼는 자신이 모시는 주군의 감정을 간파하고 작은 소리로 물었다.
샤를은 걱정을 담은 눈초리로 자신을 바라보는 가신을 주시하며 아주 잠시 대답을 망설였다.
뭔지는 모르겠지만 뭔가 석연치 않다고 말하는 것은 간단하다.
하지만 이곳은 적진 한가운데로 지금은 언제 어디서 어떤 일이 일어나더라도 전혀 이상하지 않은 일촉즉발의 상황. 섣불리 던진 말 한 마디는 웃어넘기기에는 너무나 큰 파장력을 갖는다.
그것을 떠올린 샤를은 애써 미소를 지으며 살짝 고개를 흔들어 걱정스러워하는 부하를 진정시켰다.
별 것 아닐 것이다. 국왕 즉위까지 미루고 이곳으로 달려온 이래, 내 마음 한 구석에는 항상 불안감이 자리 잡고 있지 않았는가.
한치 앞도 알 수 없는 암흑 속에서 항상 발버둥치고 있지 않은가.
이 떨림 역시 그의 일환일 것이다. 적과의 충돌은 피할 수 없는 일. 불안한 것도 무리는 아니다.
이미 여기까지 온 이상 확실하지도 않은 이유로 병사들을 물릴 수도 없는 일이었다. 샤를은 쓸데없는 생각 따윈 하지 말자며 스스로를 타일렀다.

"정지."

샤를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 것인지, 그의 왼쪽에 선 아르센 장군이 손짓을 통해 병사들을 정지시켰다.
앞에 선 여기사가 마법이 걸린 모노클을 끼고 뭔가를 확인한 뒤 아르센 장군에게 뭔가를 속삭였다. 그녀의 주장이 옳다는 것을 확인한 아르센 장군은 소리를 죽여 샤를에게 명령을 내려줄 것을 요청했다.

"왕자님, 저 아래 적군이 밀집해 있습니다. 어서 선수를 쳐서 적의 사기를 꺾어 단숨에 밀어붙여야 한다고 생각하옵니다. 공격 주문 허가를 내려주십시오."

"이 거리에서 공격 주문을 쏜다면 이쪽의 정확한 위치를 알려 주는 꼴이 되지 않겠소?"

샤를은 약간 난처한 얼굴로 물었다.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 왕자님. 주문을 쓰는 것은 저입니다. 적이 반격할 틈 따윈 주지 않을 것이니 염려 마시옵소서."

질문에 대한 대답은 다른 군인에게서 나왔다.
가죽 투구로 거치적거리는 머리카락을 완벽히 봉인한 에이미는 양쪽 팔에 찬 팔찌를 강조하는 모습을 보이며 자신만만한 얼굴로 전방에 나섰다.

"미스 쿼츠, 전쟁터에서 마법석을 이용해 공격 주문을 마구 사용하다간 목숨을 잃을 수도 있소. 그것은 지난 전쟁의 패인이 되었고, 그 후로 제어 장치를 개발한 덕에 일단 의문사는 막았지만, 그 원인은 지금까지도 명확히 밝히지 못해 마법석을 함부로 사용하지는 못하오. 그걸 알고도 그리 말하는 것이오?"

에이미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돌려 살짝 웃어보였다.

"어디든 간에 항상 예외가 있지 않습니까. 저는 그 예외라는 행운을 거머쥐었다고 감히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지금 이대로 싸워도 지지는 않겠지만 희생은 피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니 부디 저희를 한 번 믿어주시길 간청 드리는 바입니다."

에이미는 무인의 예를 갖춰 살짝 고개를 숙였다. 샤를은 잠시 그녀를 응시하다 곧 고개를 끄덕였다.
그도 알고 있다. 이대로 돌격하든 공격주문을 한 발 먹이고 돌격하든 결국 위치는 노출될 수밖에 없다.

"좋소. 장군과 그대를 믿을 터이니 부디 날 실망시키는 일은 없길 바라오."

"감사합니다."

에이미는 자신들의 주장을 받아들여준 샤를에게 감사를 표하며 결연한 표정을 짓고 앞으로 돌아섰다.
눈을 감고 천천히 숨을 고른다.
정신을 집중하며 눈에 보이지 않는 뭔가를 감싸 안듯 손을 내밀자 양 팔에 달라붙은 팔찌의 보석-마법석이 불리는 전쟁이 된 요물-이 빛나기 시작했다.
허무의 색을 품은 심연의 빛을 따라 그녀는 조용히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그녀의 마법 실력을 제대로 확인한 적 없는 동료들이 반쯤 미심쩍은 시선을 보내왔지만 에이미는 아랑곳하지 않고 주문을 외운 뒤 '힘 있는 말'을 내뱉었다!

"...진짜였어...?"

누군가 무심코 흘린 멍청한 질문에 답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에이미의 손에서 해방된 붉은 염구는 혀를 날름거리며 주인이 명령한 목표를 향해 울부짖었다.
거리는 약간 멀지만 주문을 방해하는 장애물은 아무것도 없다. 적들이 모여 있는 곳이 여기보다 약간 낮은 곳이라는 것도 플러스 요인이 된다.
응급 치료 주문 외의 마법에는 까막눈이나 다름없는 샤를이었지만 그 정도는 쉽게 파악할 수 있었다.
공격 주문이 대지에 부딪혀 커다란 울음소리를 내기 직전, 샤를은 재빨리 검을 빼들고 출격 타이밍을 엿보는 병사들에게 큼직하고 짤막한 명령을 내렸다.

"전진하라!"

 

샤를이 진두지휘하는 기사대는 우레와 같은 함성을 내지르며 달려 나가 살아 움직이는 모든 것을 베어냈다.
에이미가 보낸 붉은 염구는 목표를 정확히 때렸고, 그 덕에 한 층 더 사기가 오른 군은 득의양양한 얼굴로 그 일대를 휘저어 놓았다.
샤를은 흥분에 차올라 우는 말을 진정시키며 놀라 우왕좌왕하는 적의 무리를 향해 인정사정없이 공격을 퍼부었다.
그러나 눈앞의 적은 차례차례 쓰러지고 있건만, 어째서인지 샤를의 마음속의 떨림은 멈추지 않았다.
에이미가 주문을 영창할 때 잠시 꼬리를 내렸던 떨림은 더 많은 세력을 끌고 그의 마음을 두들겼다.
아무래도 그냥 두어서는 안 되겠다며 아르센 장군에게 주의 명령을 내리기 위해 주위를 살피던 샤를은 별안간 강한 충격을 받고 땅으로 곤두박질쳤다!
와아아아아아아아!!!
태세를 정비하기도 전에, 고막을 찢는 고함소리와 함께 백여 개에 달하는 불꽃 화살이 인간들을 향해 퍼부어졌다.
겨우 몸을 일으킨 샤를의 눈에 제일 먼저 들어온 것은, 자신이 늘 타고 다니던, 불길에 타올라 미쳐 날뛰었던 백마의 잘려나간 머리.
서둘러 뒤로 물러난 샤를은 입술을 깨물면서도 검을 휘둘러 자신에게 날아오는 불꽃 화살을 대충 떨어내며 목청껏 외쳤다.

"적의 함정이다! 전 대원은 태세를 정비하고 적의 공격에 신속히 대처하라!"

 

아까까지만 해도 고요했던 그 곳은 이미 피비린내나는 살육의 현장으로 바뀌어 있었다. 좀 전의 주문으로 적의 사기와 전력을 어느 정도 꺾어놓았을 거라는 기대에 부풀어 신나게 날뛰던 인간 병사들은 반쯤 공황에 빠져 허둥대다 하나 둘 마군의 공격을 받고 쓰러지기 시작했다.

"어떻게 된 거야?! 왜 저 자식들이 갑자기 튀어나오는 거야?!"

"나한테 묻는다고 알 리가 없잖아!"

"정신사나우니까 닥쳐 쪼오오오옴!!!!!!"

누가 누구한테 따지는 건지 모를 욕설이 곳곳에서 튀어나왔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방금까지만 해도 인간 병사의 칼에 찔려 픽픽 쓰러지던 적 역시 무슨 약을 먹었는지 갑자기 그들을 공격하기 시작한다.
그 덕에 병사들의 공황은 극에 달했다.
적이 반격할 것이라는 건 어느 정도 예상했었다. 하지만 적의 함정에 완벽히 걸려들었다는 점과, 쓰러뜨렸다 생각했던 놈들이 벌떡 일어나 도리어 자신들을 공격한다는 현재의 상황이 병사들을 벼랑으로 몰고 있었던 것이다.
정말로 좋지 않다.
에이미는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검으로 갑자기 튀어나온 마군 하나와 대치하며 그런 생각을 떠올렸다.
자신이 영창한 익스플로전, 그것은 목표했던 곳을 제대로 강타했다. 그것은 먼 곳의 상황을 바로 확인할 수 있는 마법이 걸린 모노클로 아르센 장군과 확인까지 했다.
공격을 퍼붓기 전까지 이곳에 있던 적들의 반응 역시...
-아.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에이미는 얼굴을 찡그리며 이를 악물었다. 적들이 어떤 함정을 팠는지, 자신들은 거기에 어떻게 걸려들었는지 알아차린 것이다.

"싸움 중에 한 눈을 팔면 안 되지!"

순간의 동요로 살짝 반응이 늦은 틈을 타 검을 맞대고 있던 마족이 냉소를 흘리며 달겨들었다.
웃기는 소리 말라고 쏘아붙이고 싶은 것을 애써 참으며 에이미는 마치 침대에 눕듯 땅에 엎어지면서 마족의 다리를 걸었다. 설마 이 상황에서 뒤로 넘어질 것이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는지 그녀의 꼼수에 걸려 휘청거리는 마족의 가슴을 날카로운 도신이 꿰뚫는다.

"죽어라 인간!!"

한 숨 돌릴 틈도 없이 다른 방향에서 튀어나온 마족이 에이미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적에게 꽂아 넣은 검을 빼낼 시간은 없었다. 그런 여유로운 짓을 했다가 단번에 인생 종친다. 에이미는 한숨을 내쉬며 방금 자신이 쓰러뜨렸던 마족의 검을 주워들어 방어에 나섰다.

"우리 땅에 쳐들어온 인간 따위는 다 죽여버릴테다!"

느닷없이 그녀를 공격한 마족은 한 맺힌 목소리로 부르짖으며 사정없이 검을 휘두른다.
헛소리를 지껄이는 그 얼굴에 대고 뭐라고 한 마디 해 주고 싶은 마음이 없지는 않았지만, 에이미는 따지는 대신 낮게 주문 영창을 시도했다.
감정에 앞서 무작정 휘두르는 검은 명중률이 떨어지는 법. 전장에서 제 감정 하나 조절하지 못 하는 적은 그저 먹잇감일 뿐.
에이미는 잠시 주위를 둘러본 후 망설임을 확신으로 바꾸어 주문을 외쳤다.

"플레어 레인!!"

주문과 동시에 수많은 불꽃들이 대지에서 솟아나 살아 있는 모든 것을 농락한다.
눈앞의 적 뿐 아니라 근처에 포진한 모든 생물에게 달겨드는 불꽃을 피해, 에이미는 시체에 박힌 검을 빼들고 자신이 모시는 주군을 찾아 달려 나갔다.

 

샤를은 자신의 앞을 막아선 적을 상대로 상당히 고전하고 있었다.
들개처럼 쏘다니며 어영부영 살아가는 법을 익힌 어중이떠중이와는 차원이 다른 적.
아무래도 눈앞의 마족 역시 마군을 지휘하는 입장에 선 녀석인 모양이다. 아마 샤를이 대장이라는 것을 멀리서도 간파하고 친히 상대를 맡은 것이겠지.
샤를은 자신만만한 얼굴로 검을 휘두르는 마족을 증오가 담긴 시선으로 마주하면서 놈의 주위를 끌기 위해 말을 걸었다.
마족 따위와 말을 섞고 싶지는 않았지만, 조용히 칼질만 하다 느닷없이 마법 세례를 받는 것은 사양이다.
샤를은 약간의 치료 주문 외에는 마법을 전혀 쓰지 못하지만, 눈앞의 실력자는 적어도 일정 수준 이상의 마법을 구사할 수 있을 터. 묵묵히 검을 맞대는 것은 상대에게 유리해질 뿐이었기에, 샤를은 자존심을 굽히기로 했다.

"네 놈이 우릴 함정에 빠뜨린 거냐?"

샤를은 바득바득 이를 갈며 따졌다. 샤를의 말에 마족은 코웃음을 흘리며 대꾸했다.

"그렇다. 그런 전형적인 함정에 그토록 쉽게 걸려들 거라는 생각은 못했지만 말이야. 경험이 부족하다는 소문이 사실이었군 그래, 인간 왕자. 아니, 샤를이라는 이름으로 불러야 하나?"

"...네 놈은 반드시 이 손으로 죽여주겠다!"

샤를은 짐짓 열 받은 척하며 얼굴을 시뻘겋게 물들였다. 자신이 화를 낸다고 생각하게 만들어 방심시킬 요량이었다.
그러나 샤를과 검을 대는 마족의 몸가짐에는 전혀 빈틈이 생기지 않았다. 마족은 더욱 검을 끌어당기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연기는 그만 둬라, 인간 왕자. 그런 걸 구분 못 할 만큼 어리석진 않다. 너 같은 애송이와는 달리 난 지난 전쟁에서도 전장을 누비며 수많은 인간 놈들의 목을 베어낸 경험자란 말이다."

마족은 여유롭게 검을 휘두르며 뒷말을 덧붙였다.

"참, 내 소개가 아직이었군. 이 몸이 바로 마계의 군을 통솔하는 장군 가랜드다. 만나자마자 아쉽지만 다신 볼 일이 없을 것 같군 그래."

샤를은 어쩐지 뻐기는 듯 한 말투에서 뭔가 감을 잡고 입 꼬리를 살짝 올렸다, 이 긍지 높고 자의식 충만한 만만찮은 적의 빈틈을 찾아낸 것이다.

"네 놈이 마장군 가랜드였나? 다이쿤이나 하다못해 마계 왕자라도 나오길 기대했는데, 실망이군."

샤를의 말에 가랜드의 눈이 매섭게 빛났다. 아무래도 높은 자존심을 제대로 건드린 모양이었다.

"두 번은 없다. 다시는 내 앞에서 그 따위 도발은 하지 마라, 인간 왕자. 네 대신 칼을 맞아 줄 부하도 거의 없는 마당에, 목숨이 아깝지 않은가 보지?"

이번에는 샤를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는 순간적으로 아르센 장군의 시체로 눈을 돌리고 말았다.
말에서 굴러 떨어진 샤를이 겨우 일어나 부하들에게 경고하는 순간, 선두에서 달려온 가랜드는 샤를의 사각에서 공격했고 샤를 대신 아르센 장군이 그 공격을 받았다. 충신의 죽음이라는 값비싼 대가를 치른 덕분에 샤를은 검을 잡고 전투에 임할 수 있게 되었지만...

"하나 가르쳐 주지, 인간 왕자. 싸움에서 한눈을 파는 놈은 반드시 죽게 되어 있다는 것을!"

가랜드는 기쁜 어조로 호통을 치켜 혼신의 힘을 담아 검을 휘둘렀다.
첫 번째 공격은 겨우 막았다. 하지만 두 번째 공격에서 샤를은 대세를 무너뜨렸고, 세 번째 공격은 몸을 굴려 겨우 피하는 듯 했으나...!

"크윽...!"

상체를 타고 흐르는 격통에 샤를은 저도 모르게 신음을 흘렸다.

"이런, 이번 건 제대로 못 피한 모양이군."

쥐를 가지고 노는 고양이 같은 눈빛을 흘리며 가랜드는 쩝쩝 입맛을 다셨다. 도발 좀 했다고 스스로 자세를 무너뜨리다니, 이런 애송이를 떠받드는 인간 놈들도 어지간히 고생하겠구나 싶었다.
샤를은 검을 지팡이 삼아 몸을 일으키면서 분노가 담긴 시선으로 가랜드를 쏘아보았다. 시선만으로 죽일 수 있다면 진작 죽이고도 남았을 정도로 표독스런 눈빛이었다.
적의 수장을 해치우기 위해 가랜드가 검을 치켜듦과 동시에 샤를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뒤로 물러섰다. 그를 따라 가랜드가 몸을 움직이자마자 소녀의 낭랑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다그 헌트!"

목소리의 움직임에 따라 대지에서 튀어나온 거대한 송곳이 가랜드를 덮쳤다!
하지만 그 역시 폼으로 장군직에 머무는 건 아니다. 당황하는 기색 없이 옆으로 물러나면서 디스펠 주문을 외어 뒤에서 공격해온 소녀 - 에이미의 흙으로 빚어낸 송곳을 단숨에 무너뜨렸다.

"바람이여! 내 의지에 따라 복종할 것을 명한다!"

에이미는 주저 않고 다음 주문을 외었다. 그녀가 노리는 것은 바로 이 순간이었다.
스스로를 장군이라 칭하는 실력자를 주문 하나로 쓰러뜨릴 거란 기대는 애초에 하지도 않았다. 그저, 그저 적의 눈을 순간이라도 속여 샤를을 빼내기 위함이었다.
에이미의 명령을 받은 바람은 가랜드가 무너뜨린 흙먼지를 싣고 그의 시야를 가렸다. 몇 초간의 눈속임밖에 되지 않겠지만 그 정도로도 충분하다. 그녀의 목적은 가랜드를 쓰러뜨리는 게 아니었으니까.
그리고 에이미가 보낸 바람은 한 가지 이점을 더 갖고 있었다. 바람은... 불과 상성이 좋다.
에이미는 서둘러 달려와 샤를을 일으키는 재스퍼를 향해 얼른 가라는 눈짓을 보내며 서둘러 다음 주문을 외웠다. 혼란의 도가니 속에서 겨우 살아남은 몇 안 되는 동료들이 재스퍼를 돕는 것이 보였다.

"그냥 보낼 성 싶으냐!"

가랜드의 호통을 신호로, 그녀의 불꽃 폭풍에 밀려 주춤했던 마족의 무리들이 다시 이빨을 드러냈고-

"익스플로전!"

전투 초반, 에이미가 적의 기선을 제압하고자 사용했던 대폭발이 다시 대지를 집어삼켰다.
다른 점이라면 아까는 적이 준비한 미끼에 쓸데없이 퍼부은 꼴이지만, 이번에는 제대로 마군에게 명중했다는 것일까.
가랜드는 재빨리 뒤로 물러서며 급히 만들어낸 마력의 방패로 자신을 지키고자 했다.
하지만 타이밍이 어긋난 탓에, 폭발로 인한 풍압이 그의 가슴을 강타했고, 그의 어깨를 두른 망토에는 폭발로 모여든 불덩이가 달라붙어 불이 붙었다.
그리고... 선두에서 달려들던 가랜드의 부하들은 태반이 날려가, 같은 편과 얽히고 설켜 여기저기 구르고 있었다.

"인간 여자 주제에 제법 싸움을 할 줄 아는 모양이군. 여자를 다시 볼 필요가 있겠어."

불이 붙은 망토를 내팽개친 가랜드는 상대를 깔보던 미소를 지우고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그는... 에이미가 주문을 던지는 순간, 그녀의 팔찌에 잠든 마법석이 빛나고 있던 것을 목격한 것이다.

"동료들도 있었는데 폭발 마법이라니, 너무한 것 아닌가?"

"그 동료들 태반을 당신 부하들이 죽여줘서 말입니다. 덕분에 거리낄 게 없었습니다."

에이미는 거친 숨을 몰아쉬면서도 장소에 어울리지 않는 미소를 지으며 태연히 대꾸했다.
물론 거짓말이었다. 적의 함정에 빠져 어이없이 목숨을 내놓고 만 녀석들이라 해도 일단은 동료. 시체라 해도 같이 날려버리는 것은 꺼림칙한 일이다.
하지만 자신의 주군이 위험에 처했는데 시체를 거두어야 한다며 손 놓고 보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
자신이 외운 익스플로전, 불덩이가 모여들어 대폭발을 일으키는 주문이지만 무식하게 아무데서나 빵빵 터지는 것은 아니다. 방향성이 있는 주문이라 술자의 뒤는 안전한 것이다.
아까의 폭발로 샤를은 무사히 도망쳤을 것이다. 중간에 다른 매복이 없을 경우에 말이지만.

"자신을 미끼로 삼고 동료를 도망치게 한다... 훌륭한 마음가짐이군. 오래 살긴 글렀지만. 그러고 보니 그 때 그 남자도 그랬지... 여자랑 옥신각신 하는 것 같다만 결국 본인이 앞을 막아섰지."

가랜드의 중얼거림에 에이미는 눈살을 찌푸렸다. 뭔가 마음에 걸렸다.
하지만 지금 당장 확인할 수는 없었다. 그녀의 궁금증을 해결해줄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은 마계가 아닌 인간계에 있으니 말이다.
그렇다곤 해도, '이용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든 철저히 이용한다. 그것이 전쟁과 정치의 기본이다'라고 배운 그녀는 기회가 될지도 모르는 상황을 그냥 흘려보낼 수 없었다.

"아무래도 그 남자... 그 사람, 내 아버지 같은데 말입니다?"

정신이 들고 보니 문득 그렇게 떠들고 있었다.
사실 여부는 모른다. 가능성 없는 얘기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사실이라고 밀어붙일 근거도 없었다. 그래도... 이용할 수 있는 거리라면 이용해야만 한다.

"호오... 부녀가 사이좋게 전쟁 참가라... 흔한 집안은 아닌 것 같군..."

그러나 그녀의 노력도 부질없이 가랜드는 전혀 개의치 않고 한 걸음 한 걸음 그녀에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가랜드가 다가올 때마다 에이미는 천천히 뒤로 물러서며 속으로 욕지거리를 했다.
빌어먹을, 주문을 외우고 있다. 더구나 자신이 들어본 적 없는 리듬이었다. 어떡하지?
-도망쳐야 하나? 저기 마군이 깔려 있는데?
-그럼 낮서 싸워? 상대가 무슨 공격을 할지도 모르는데?
여러 생각이 동시에 튀어나와 에이미를 괴롭혔다.
하지만 1가지는 확실했다. 에이미는 그것을 느끼고 공포를 느꼈다.
나는, 여기서, 죽는다.
저 놈들에게 장난감 취급받다 죽든, 그냥 단칼에 죽든, 어쨌든 죽을 것이다.
시간에 맞출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몇 번이고 마법석의 힘을 빌려선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에이미는 마법석에 정신을 집중하며 다시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마치 뭔가에 홀리기라도 한 듯.
그랜드가 '힘 있는 말'을 내뱉으려 동작을 취하는 순간, 에이미는 마법석이 다시 빛나는 것을 알아차렸다.
숨이 차오르는 걸로 봐서 그녀가 마법석을 사용할 수 있는 한도는 이미 지났을 터. 제어 장치가 발동해 마법석이 빛나지는 않을 거라 여겼는데...
그 순간.
마법석은 나를 어디로 데려가려 하고 있다.
근거는 없지만 어쩐지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애슘스타!"

"빛이여!"

두 개의 다른 목소리가 완벽히 겹치고, 두 주문이 내뿜은 빛이 커다란 구체로 변해 서로를 집어삼켰다.
태양이 들지 않는 마계에서 이만한 크기의 빛은 흔치 않은 것. 멍하니 그것을 바라보던 가랜드는 빛의 구체가 사라지자 사로잡으려던 인간 여자 역시 같이 사라져버렸음을 알아챘다.

"...도망가버렸구만."

가랜드는 씁쓸한 어조로 중얼거렸다. 하지만 입가와 눈에는 어쩐지 재미있어하는 듯한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

"장군님! 지금이라도 쫓아가야지 말입니다?"

"소용없는 짓이야. 어느 쪽으로 도망쳤는지도 모르잖나."

가랜드는 자신의 곁으로 달려와 쫑알거리는 부하에게 대충 생각나는 변명을 갖다붙이며, 무의미하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이건... 아무래도 조사를 좀 해야 할 듯싶다.
가랜드의 그러한 모습을 옆에서 가만히 지켜보던 마족은 가자미눈을 한 채 조용히 충고했다.

"장군님, 로리콘은 심각한 주책이라고 생각됩니다. 그것도 별 볼일 없는 인간 계집을..."

"닥쳐!"

가랜드는 무심코 부하의 뒤통수를 후려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