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과 인연은 반드시 일치하지는 않는다.

 

 

누군가에게는 평범했을 일상 & 6. Missing You

 

 

"방금 뭐라고 하셨죠...?"

영원과도 같은 침묵이 흐른 뒤, 카고메는 갈라진 목소리를 겨우 쥐어짜내 입 밖으로 끄집어냈다.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 바들바들 떠는 그녀와는 대조적으로 폭탄 발언을 던진 남자는 장난기 가득한 미소를 지으며 능청스런 어조로 답했다.

"이런... 잘 못 들었나? 아니면 듣고도 모르는 척 하는 건가? 다시 말하지만 난 네가 누군지 아주 잘 알고 있어. 몰리뉴 왕국의 프린세스..."

"그만, 그만하세요! 못 들어서 물어본 거 아니라고요!"

남자의 말이 끝나기 전에 카고메는 고개를 흔들며 버럭 소리를 질렀다,

-역시... 잘못 들은 것이 아니었어...

한 순간이라도, 이것은 꿈이라거나 아무 생각 없이 있다가 잘못 들은 것이 틀림없을 거라는데 일말의 희망을 걸었던 그녀의 바람을 산산조각내준 것이다.

2년 만에 되찾고, 6년 동안 다시 감춰 둔 기억이 다시 세상의 빛을 갈망하고 있다-

가족과, 연인과, 친구들과, 자신의 진로만을 고민하던 고등학생 소녀로서는 이러한 돌발 상황을 의연하게 받아들일 경험치가 턱없이 부족했다.

"대체... 당신은 누구죠? 누군데 남의 비밀을..."

그저 이상한 외국인일 거라 생각했던 그녀의 추측은 틀렸다. 그녀가 가진 비밀은 남의 뒤를 캐기 좋아하는 할일 없고 오지랖 넓은 인간이 알아낼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던 것이다.

지구에서 단 세 명-카고메 본인과 그녀의 가족 밖에 모르는 비밀을 낯선 남자가 정확하게 알고 있다는 점으로 미루어 볼 때, 이 남자가 거짓말을 하고 있을 가능성 따윈 전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

그리고 '프린세스 후보'라는 간단한 단어가 아닌, 그녀의 출신 가문까지 정확하게 말했다는 걸로 미루어 보아 어중이떠중이가 아닌 것도 확실했다.

아마 어느 정도 중요한 위치에 올라 있는 인물. 아니, 어쩌면...

겨우 거기까지 생각이 다다른 카고메는 그제야 남자의 정체에 의구심을 가졌고, 그와 동시에 또 1가지 생각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제 아무리 이상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평범하고 정상적으로 이 세계를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자판기를 사용할 줄 모른다고 발길질을 하거나 자연스럽게 비둘기와 대화하지는 않는다는 것을.

"이제야 내가 누군지 궁금한가? 표정을 보아하니 대충 감을 잡은 것 같지만... 정식으로 다시 내 소개를 하도록 하지. 아스팔 멜키세덱 보나파르트 알폰소 드 몰리뉴. 네가 태어났던 몰리뉴 왕국의 제1왕위계승자이자 본래대로라면 선택받은 프린세스 후보의 정혼자가 되어 함께 나라를 다스릴 몸이었지. 혁명 세력이 여기저기 쓸데없이 방해하고 다니지 않았다면 말이야... 어이, 괜찮나?"

카고메는 자신의 예상이 맞아떨어지는 소리를 들으며 털썩 주저앉아버렸다. 괜찮냐며 팔을 잡아 일으키려는 아스팔에게서 풍기는 미묘한 향기에 카고메는 정신줄을 놓아버릴 것만 같은 아찔함을 느꼈다.

"...충격이 컸나 보군. 메이스 씨가 그 점에 대해서 전혀 얘기해 주지 않은 모양이지?"

아스팔이 다시 말을 걸어온 것은 카고메가 다시 눈을 뜨고 난 다음이었다.

딱딱한 벤치 위에서 고통을 호소하는 등의 불만을 무시하며 힘겹게 몸을 일으킨 카고메는 반쯤 초점이 나간 눈으로 힘없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석양으로 물든 모래가 자신을 비웃듯 바람을 타고 다리를 간질이는 것을 멍하니 응시하던 그녀는 겨우 입을 열었다.

"누군가요, 그 메이스라는 사람은..."

"모르고 있었나?"

아스팔은 되레 놀랐다는 표정을 지으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레나 메이스. 지금 그대를 키워 주는 용사의 본명이지. 아, 지금은 코이소 스미레라는 이름으로 살고 있었던가?"

"대체 어디서 그런 정보를... 아니, 굳이 대답하지 않아도 돼요..."

반사적으로 따지려던 카고메는 서둘러 뒷말을 삼켰다.

본인이 누구인지, 어디 사는지, 생활 패턴 및 반경이 어떻게 되는지도 다 알아보고 찾아오는 남자다.

자신을 키워주시는 어머니 역시 예전에는 왕국을 구한 용사였다고 하니 일국의 왕자라면 신상 정보를 뽑아내는 정도는 그리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

어릴 적 동경하던 진짜 왕자님이 바로 눈앞에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감당하기 어려웠으므로 카고메는 중요도가 낮은 정보는 슬쩍 흘려버리기로 했다.

"그러니까... 당신은 예전에 내가 살던 나라의 왕자님이고, 그렇기 때문에 프린세스 후보인 나와 전직 용사였던 내 어머니를 알고 있다는 것까진 알겠어요. 그런데 대체 우릴 찾아서 뭘 할 생각이시죠?"

"정확히 말하자면 '우리'가 아니라 '너'를 찾은 거다. 그 분에게는 이제 그 어떤 것도 요구하지 않겠다고 아바마마께서 약조하셨다고 들었으니., 용사님께는 널 맡아 키워주신 것만으로도 충분히 감사하고 있다."

"아, 그러셔요... 그럼 질문을 바꾸겠는데, 날 찾아서 대체 뭘 하실 건가요?"

시간이 흐르면서 카고메는 점차 머리가 냉정해지는 것을 느꼈다.

자신이 프린세스 후보라는 것을 알게 된 날, 이 상황은 이미 예전에 예상하지 않았던가.

자신이 프린세스가 될지도 모르는 몸이고, 가토라는 자객도 그것을 알고 자신을 해치러 찾아왔다. 그렇다면 왕자라는 사람이 자신을 찾아오는 것도 전혀 있을 수 없는 일은 아니었다.

어차피 한 번은 겪어야만 하는 상황. 그리고 아주 먼 옛날에는 왕자님을 동경하던 자신이 있었다.

그러한 사실을 깨달으면서 비로소 당당해질 수 있었고, 태도가 당당해지니 입에서는 실수 없이 요점을 정리한 대사를 꺼낼 수 있었다.

카고메는 단시간 내에 냉정을 되찾은 자신에게 다소 놀라면서도 그러한 티는 겉으로 보이지 않으려 애쓰며 아스팔에게 대답을 재촉했다.

"널 찾아서 뭘 할 거냐니... 그거야 뻔한 것 아닌가? 나는 장차 나라를 이끌어야 할 몸이고 넌 프린세스 후보로 지목된 최후의 생존자다. 본래대로라면 충분한 협의와 시험을 통해 걸러내야 하겠지만, 지금은 나라 안팎으로 혼란스러울 뿐 아니라 다른 프린세스 후보들은 전부 세상을 등졌으니 소거법을 통해 너 하나만 남은 것이다. 본디 후보를 선정할 때도 엄격한 심사를 거친 전례가 있으니 일단 지금은 그걸 믿어보는 수밖에. 둘의 조합이 뭔지 모르지는 않을 텐데?"

아스팔의 대답을 들은 카고메는 기가 막힌다기보다는 화가 날 뻔했다. 말은 번드르르하게 하고 있지만 결국 요약하자면 하나 남은 프린세스 후보를 본래 세상으로 데려가려 찾아왔다는 것 아닌가.

자신의 감정이나 의견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없었다. 철저한 이해관계에서 산출된 논리에 카고메는 선거철마다 같은 상황을 연출하는 정치인들을 떠올렸다.

"하,.. 결국 나라를 안정시키기 위한 도구로서 프린세스 후보를 찾았다는 말이군요. 본인이나 상대의 마음 따윈 안중에도 없고요. 한 번뿐인 인생에서 평생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기도 쉽지 않은데 상대에게 너무 무책임한 거 아닌가요? ...뭐가 우스운 거죠?"

말이 끝나기 무섭게 웃음을 터뜨리는 아스팔을 향해 카고메는 얼굴을 찌푸리며 앙칼진 어조로 되물었다. 아스팔은 한바탕 웃은 뒤, 어이가 없어 멍하니 자신을 응시하는 카고메를 향해 정색한 채로 입을 열었다.

"일단 면전에 대고 웃은 건 사과하도록 하지. 하지만 프린세스 후보의 생각이 너무 어려서 말이야. 아직 순수한 건지 세상 물정을 모르는 건지 현실을 도피하려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갑자기 궁금해진 건데, 혹시 좋아하는 사람이라도 있나?"

카고메는 대답하지 않았다. 아스팔은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재차 말했다.

"뭐, 지금 그런 문제는 아무래도 좋아. 어쨌든... 비교적 자유로운 평민이나 하급 귀족이라면 모를까, 왕족이나 상급 귀족은 자유연애 따위를 떠들기에는 짊어진 명예와 책임이 막중하다. 결혼 상대를 스스로 고를 수 있을 만큼 무른 집단이 아니야. 이쪽 세상에서 너무 오래 살다보니 현실 감각이 떨어졌나본데 슬슬 정신을 차리는 게 좋을 거다. 우리는 자신의 감정보다 나라의 안위와 가문의 보존을 우선시해야만 해. 피차 그것을 알고 있는 이해관계로 얽혀 있는 이상, 무책임한 것도 아닐 뿐더러 합리적이기도 하지. 문제는 없는 거 아닌가?"

아스팔의 논리를 들으면서 카고메는 자신을 책망했다. 아무리 철모르는 어린 시절이라 하더라도, 이런 사람과 결혼하는 것을 동경하고 있었다니. 본인의 무덤을 파는 행위라는 것도 모르고, 신데렐라를 꿈꾸고 있었다니. 할 수만 있다면 과거의 자신을 찾아가서 패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러시군요. 솔직한 대답 잘 들었어요."

카고메는 가능한 한 냉랭한 어조를 가장하며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스팔의 논리에는 동조할 수 없었지만 덕분에 질질 끄는 일 없이 마음을 정할 수 있었다. 그런 점에 있어선 이 사람에게 감사해야겠지.

"난 원래 세계로 귀환할 생각도 없고 왕자님과 잘해볼 생각 따윈 더더욱 없어요. 나라가 혼란스러운 건 안됐지만, 그건 나라의 안위를 걱정해야 하는 왕자님께서 알아서 해야 할 문제죠. 난 이 세계에서 잘 살고 있었고 앞으로도 그럴 거예요. 그러니까 서로 더 얼굴 붉힐 일 없이 여기서 갈라지는 게 합리적이지 않겠어요?"

"잠깐, 혹시 갑자기 많은 일이 벌어져서 당혹스러운 거라면-"

"아뇨. 생각할 시간 따윈 필요 없어요. 아직 말씀을 안 드렸는데, 전 이미 사정이나 제 위치는 아주 잘 알고 있어요. 6년 전에 어머니께서 사실을 알려주셨으니까. 왕자님께서 말씀하신 논리도 머리로는 이해가 가지만 수긍은 못 하겠네요. 전 그런 식으로는 가르침을 받지 않았거든요. 생각이 바뀔 리도 없을 테니 시간 낭비 그만하고 갈 길 가시죠. 만나서 반가웠어요!"

아스팔의 태도가 혹시 변하지는 않을지를 경계하며 카고메는 살며시 몸을 뻈다. 하지만 아스팔은 그저 가만히 서 있을 뿐, 그녀를 잡으려 들지 않았다.

이제 정말 가버려야겠다고 마음먹고 고개를 돌리는 순간, 아스팔이 나직한 목소리로 그녀의 발을 붙들었다.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을 외면한다면 혹독한 대가를 치르게 되겠지. 지금 당장은 이해하지 못하겠지만 시간이 흐르게 되면 알게 될 거야, 프린세스 후보."

카고메는 고개를 돌렸다. 어쩜 저렇게 얄미운 말만 골라서 할 수 있을까.

차라리 첫 눈에 반했다고 거짓말이라도 한다면 조금은 더 흔들렸을지도 모르는데.

묘한 자신감이라고 할까, 이 여유로움의 근원은 무엇일까. 나라가 혼란스럽고 본인이 필요하다고 말하면서도 서두르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마치 그녀가 어떻게 행동할지 이미 알고 있는 사람처럼.

뭐, 그런 것은 아무래도 좋다. 저쪽이 무슨 생각을 하던 넘어가지만 않으면 그만일 터.

하지만 얼마 전 점술가에게서 들었던 점괘와 똑같은 말을 지껄이는 것에는 화가 치밀어 올랐다. 아무리 믿지 않는다고 해도 불길한 소리를 반복해서 듣는 기분은 썩 좋지 않다.

아스팔의 바다빛 눈동자를 정면으로 쏘아보며 카고메는 당당하게 말했다.

"그렇다면 나에게 주어진 그 운명이라는 걸 바꿔버리도록 하죠. 지금부터 당장. 물론 혼자서는 힘들지도 모르겠지만 괜찮아요. 나한텐 나만을 바라보고 사랑해 주는 연인이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