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 앞에 두 갈래의 길이 있어요.

울퉁불퉁 험하지만 가까운 길과, 단조롭고 평탄하지만 멀리 돌아가는 길.

자, 당신이라면 어떤 길을 선택하실 건가요?

그리고... 당신이 선택한 길 끝에서 당신을 기다리는 건 무엇일까요?

 

 

누군가에게는 평범했을 일상 & 5. 아스팔

 

 

카고메는 집 근처의 아동 공원으로 무거운 발걸음을 옮겼다.

운 좋게도 오늘은 방과 후 부활동이 없어 자유로운 시간을 보낼 수 있었던 것이다.

시험이 얼마 남지 않은 탓에 그녀는 수험생답게 남는 시간을 오롯이 공부에 투자하곤 했지만 오늘은 기분도 꿀꿀한 탓에 하루만 자신에게 약간의 자유 시간을 주기로 마음먹었다.

수험생이라도 너무 공부만 파면 오히려 역효과가 날 수 있다는 어머니의 지론에 따라 1주일 중 딱 하루를 자유 시간으로 비워둔 데다가 공부라면 7시 이후에 집에 돌아가서 해도 관계없겠지.

카고메는 뭐라고 하는 사람도 없는데 죄책감을 느끼는 듯, 불필요한 자기합리화를 하며 목적지로 향했다.

쉴 만한 곳이라면 어디든 있다. 편안한 내 방, 개천과 접한 강변 광장, 근처에 새로 지어진 이나리 신사, 동네 뒷산, 아무도 찾지 않는 버려진 절, 국가 소유의 아동 공원...

그 하고많은 후보지 중에서 그녀가 건져낸 곳은 아동 공원.

특별한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니다. 그냥 그 당시의 기세라는 것이다. 다른 말로는 '기분에 따라' 혹은 '얼떨결에'라고도 해석할 수 있겠다.

근처에서 공수해 온 붕어빵 하나를 덥석 베어 물면서 그녀는 하릴없이 공원 주변을 둘러보았다.

"때마침 아무도 없네. 조용한데 있고 싶었는데 마침 잘됐다."

햇살은 아주 따뜻하긴 했지만 마을을 감싸는 공기는 메마른 숨결을 내뿜으며 차가운 입자를 뿌리고 있었다.

한창 아이들이 뛰놀 시간임에도 고요한 건 아마 그 탓이리라.

들리는 것이라곤 바람에 삐걱 이는 낡은 그네 소리와 모래가 가볍게 흔들리는 소리, 한쪽 구석에 몰려 퍼덕이는 비둘기의 날갯짓 소리, 비둘기 속에 섞여 중얼거리는 낯선 남자의 목소리...

"...응?"

귓속을 간지럽히는 공원 특유의 음색을 음미하던 카고메는 부자연스런 느낌을 따라 비둘기들이 모여 있는 구석으로 눈길을 돌렸다.

탐스런 금발 위에 아무렇게나 얹힌 고글, 어디 산에라도 올라가야만 할 것 같은 준비된 복장, 비둘기들에게 눈높이를 맞출 작정이기라도 한 건지 최대한 낮춘 자세.

적어도 그 뒤태만 봐서는 마을에 거주하는 자국민은 아닌 듯했다. 세간에는 염색이나 탈색으로 머리색을 바꾸고 지내는 사람들도 많지만, 체격이나 특유의 분위기 등으로 보았을 때 비둘기들에게 에워싸여 있는 저 남자는 외국인이 틀림없으리라.

-뭐, 이 공원은 국가 소유니까 누가 찾아오든 내가 상관할 바는 아니지만.

라고 생각하며 신경을 끄려던 카고메는 하나의 가능성을 떠올리고 다시 그들을 주시하였다가 어느 한 지점으로 고개를 돌렸다.

비둘기들이 모여 있는 근처에 세워진 푯말, 여러 문장이 줄줄이 적혀 있지만 골자는 비둘기에게 먹이 주지 말라는 내용이다.

그러고 보니 저 남자의 손이 묘하게 조금씩 움직이는 것 같다.

카고메는 혼자 작게 고개를 끄덕이고 남자를 향해 조용히 다가갔다. 외국인이라면 팻말에 적힌 문장을 이해하지 못할 가능성이 크고, 애초에 발견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

일단 정말 먹이를 주는 건지 확인이라도 하도록 하자. 말참견을 넣든 모른 척을 하던 그건 일단 저 사람의 행동을 확인한 뒤에 해도 늦지 않으리라.

사실 그가 먹이를 주든 단순히 구경하는 것뿐이든 그녀하고는 상관없는 일이었지만, 어렸을 적부터 만인에게 친절히 대하라는 교육 방침에 따라 남의 일에 끼어들기 좋아하는 그녀의 성격으로 그냥 지나치는 것은 무리였다.

발소리가 들리지 않도록 주의하며 다가간 그 앞에는-

"흐음, 할아버지가 인간들에게 쫓겨 황급히 도망쳤다고? 그거 큰일이었겠네."

"헤에, 동생이 알을 낳아서 곧 새끼들이 태어나는구나. 축하한다고 전해줘. 잘됐네."

"잠깐잠깐, 땅바닥에 있는 거 아무거나 주워 먹으면 배탈난다구. 아까도 말했잖아."

"..................."

-왠지 이 사람, 비둘기들한테 섞여서 혼잣말 하고 있고... 혼잣말 하는 거 치곤 묘하게 비둘기들에게 말 거는 것처럼 보이는 건... 기분 탓이야. 절대로 기분탓이야!

일단 남자의 손에 먹이 봉지 같은 것이 보이지 않는 것을 확인한 카고메는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나는 지금 아무것도 못 봤다. 저 남자는 그저 비둘기들을 구경하는 것뿐이다. 날씨도 추운데 공원에서 노닥거리는 건 현명한 일이 아니다. 자, 집에 가서 공부나 하자.

누구에게랄 것도 없이 마음속으로 조용히 중얼거리면서 최대한 소리 안 나게 몸을 비틀었을 때-

갑자기 십 수 마리의 비둘기들이 힘차게 울면서 날갯죽지를 펴고 새파란 하늘 위로 날아올랐고...

카고메는 훗날 자신의 인생 중 일생일대의 변화라고 부를 행위를 저질러버리고 말았다.

그냥 그대로 달음박질쳐 집으로 돌아갔다면 장래가 바뀌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녀는 비둘기들이 떠나는 소리에 움찔하면서 그만 뒤를 돌아보고 말았던 것이다.

조용히 넘실거리는 바다를 그대로 굳힌 듯한 청명한 눈동자.

뒤를 돌아보자마자 마주친 그 눈동자는 어쩐지 낯이 익었다. 생각은 안 나지만.

하지만 자리를 털며 일어난 남자는 그렇지 않았는지, 얼굴 가득 함박미소를 지으며 양 팔을 벌린 채로 그녀에게 천천히 다가왔다.

"여, 또 만났네. 이름도 모르고 얼굴도 생소한 사람을 두 번이나 만난다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서로 인연이 있다고밖에 설명되지 않을 것 같은데, 네 생각은 어때?"

초면에 알아먹지 못할 말을 지껄이면서 말을 놓는 자 = 버릇없는 사람.

머릿속에서 순식간에 공식을 완성한 카고메는 달갑지 않은 시선으로 쏘아붙였다.

"이봐요. 처음 만난 사람한테 이상한 얘기하는 것도 모자라 반말 짓거리라니. 처음 만나는 사람을 어떻게 대하는지 배우지도 못했나요?"

카고메의 행동이 예상 밖이었는지, 고글을 쓴 외국인 남자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멀뚱멀뚱 그녀를 쳐다보다 깨달은 바가 있는지 손뼉을 치며 말했다.

"아, 난 또 뭔가 했네. 반말하는 게 기분 나쁜가 봐? 사람을 어떻게 대하면 되는지는 확실히 배웠지만, 경어를 쓸 상대는 굉장히 한정적이라고 들었는데. 아니면 이쪽 풍습이 거기랑 다른 건가?"

...............

괜히 참견했다는 생각의 그녀의 얼굴에 살포시 떠올랐다.

대체 내가 뭔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모르는 사람한테 괜히 말을 걸어서 스스로 사고를 치는 것인가.

돌아가자. 이번에야말로 무슨 말을 듣든, 무슨 일이 일어나든 신경 끄고 집에나 가버리자.

순식간에 사고를 마친 카고메는 어색한 웃음을 지어 보이면서, 입을 열어 억지로라도 말을 끊을 구실을 찾았다.

"아니... 뭐 됐어요. 반말한다고 잡아가는 것도 아닌데. 어쨌든 바빠서 전 이만..."

상황과 대사. 어쩐지 낯설지 않다는 것을 어렴풋이 느꼈다. 혹시 이전에도 내가 같은 말을 한 적이 있었던가?

"어이어이, 무슨 뜻이야. 처음 만난 사람이라니. 요전에도 한번 만난 적 있잖아?"

초초한 듯 한 눈빛과 빠른 박자로 흐르는 목소리에서 무언가를 느끼기라도 했는지 남자가 카고메의 손목을 덥석 잡으며 말했다.

"무슨 짓이에요! 당장 놓지 못해요? 대체 날 언제 봤다고 이렇게 무례하게 구는 거죠?"

"날짜는 기억 안 나지만... 커다란 고철덩어리 앞에서 봤던 건 기억하지. 죽어라고 내 말을 안 듣던 녀석을 단박에 얌전하게 만들었잖아?"

"대체 그게 무슨... 아, 설마 그 때 그?"

남자에게서 튀어나온 단어 하나가 사라져가던 카고메의 기억의 파편 한 조각을 붙잡았다.

그제야 그녀는 자신의 손을 붙잡은 눈앞의 무례한 남자가 약 보름 전에 만났던, 공중도덕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신경 쓰지 않던 민폐남이라는 것을 겨우 떠올릴 수 있었다.

엉겁결에 떠올린 기억을 축으로 '버르장머리 없던 무식한 사람'이라는 뒷말을 내뱉기 전에 삼킬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행운이었다.

"이제 기억이 났구나? 그 때 고맙단 인사도 제대로 못해서 마음에 걸렸는데 잘 됐네. 그 때 일에 대한 보답으로 차라도 한 잔 대접할까 하는데 괜찮겠지? 아, 미리 말해두겠지만 너한테 거부권은 없으니까 잘 판단하도록 해."

순수한 푸른 미소 속을 겉도는 이기심.

경우에 따라서라면 그 이기심에 넘어가버리는 사람도 꽤 있을지도 모르겠다.

"흐음... 거부권이 없다면 할 수 없죠. 대신이라고 하긴 뭣하지만 언제 어디서 대접하겠다는 말은 없었으니까 장소랑 시간은 제가 정하도록 할게요. 날짜는 12월 35일 28시, 장소는 바다 속 저 깊은 심해어류의 마을로 하도록 하죠. 이의 있어요? 없으면 그 때 보죠."

어떻게 빠져나갈까- 하고 고민하던 카고메는 이내 좋은 방법을 떠올리고는 상대가 말할 틈을 주지 않고 단숨에 퍼부었다.

상대의 말꼬리를 발판삼아 트집 잡기.

아셰트와의 잦은 마찰을 통해 깨우친 카고메만의 말싸움에서 이기는 전략이었다.

포인트는 박자의 조절, 상대가 끼어들 여지를 주지 않는 것이 관건.

수려한 외모 속에 깃든 거부하기 힘든 카리스마. 남자에게서 흘러나오는 그 힘이 왠지 모르게 그녀의 경계심을 끌어냈던 것이다.

요소는 3개.

바람둥이들이 전형적으로 사용하는 작업멘트의 냄새가 짙었다는 게 첫 번째.

남친도 있는 여학생이 생판 모르는 남자와 차를 마신다는 것이 왠지 마음에 걸린다는 게 두 번째.

어쩐지 싫어, 라는 것이 세 번째.

"그럼 이제 볼일 끝났죠?"

멍한 얼굴을 한 상대에게 함박웃음을 지어 보인 카고메는 가볍게 손목을 흔들어 그의 손을 떨쳐냈다.

이젠 정말 앞으로 엮일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며 등을 돌리는 그녀의 뒤에서 쿡쿡거리는 기분 나쁜 웃음소리가 들렸다.

"이런 식으로 거절당할 거라곤 생각도 못했는데, 정말 넌 대단해. 한방 먹었군 그래. 그럼 차는 관두고 단도직입적으로 목적을 얘기하도록 하지. 나랑 거래할 생각 없나?"

뒤돌아서서 한 걸음 크게 내딛으려던 카고메는 다시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이상한 사람이랑 자꾸 엮인다며 곤란해 하던 표정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대신 짜증이 가득 담긴 찌푸려진 표정이 성큼 들어서 있었다.

"글쎄, 거래라는 건 철저한 기브 앤 테이크에 기초한 행위라고 알고 있는데, 이제 막 만난데다가 서로에 대해 전혀 모르는 사람들끼리 거래할 거리가 있을 거란 생각은 안 드는데요?"

그녀의 목에서 흘러나오는 쌀쌀한 선율에 맞서기라도 하듯, 남자의 능청스러운 뜨뜻미지근한 대답이 그녀의 발을 얼어붙게 만들었다.

"넌 나를 전혀 모른다고 했지만... 난 네가 누구며 어디 출신인지를 아주 잘 알고 있지. 몰리뉴 왕국, 시 프라트 가문의 장녀. 란느 마크레디 시 프라트 프린세스 후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