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대의 약점을 파고드는 것도 훌륭한 전술이다.

 

 

누군가에게는 평범했을 일상 & 13. 가슴이 시리어도 웃어야 한다

 

 

카고메는 켄이치가 앉았던 자리를 망연히 바라보았다.

겨우 몸을 추슬러 학교에 간 다음 날, 그녀가 처음 마주한 것은 수심에 가득 찬 그의 얼굴이었다.

눈가에 내려앉은 다크서클 속에서 그가 겪었을 마음고생을 들여다 본 카고메는 가슴이 찢어지는 듯 한 충격을 받았다.

"저기, 켄이치..."

카고메는 몇 번이고 심호흡을 한 뒤에야 겨우 그의 이름을 부를 수 있었다. 불과 며칠 전만 하더라도 거리낌없이 불렀던 이름이, 지금은 손을 뻗어도 닿지 않는 곳에 뜬 것 같았다.

가냘픈 목소리에 켄이치는 그녀 쪽을 돌아보았고, 카고메는 그의 눈동자 속에서 갈피를 잡지 못하는 마음을 읽었다.

일단 부르기는 했으나 딱히 말을 이어나갈 용건은 준비하지 못했다. 켄이치는 적당한 말을 찾아 잠시 침묵한 그녀에게서 황급히 얼굴을 돌리고 자리를 떴다. 그의 얼굴을 잔뜩 가린 먹구름 속에는 말을 거는 것조차 용납하지 않겠다는 기세가 서려 있었다.

"여, 미치루. 이렇게 일찍 등교를 하다니, 어제 저녁에 뭐 이상한 거라도 먹은 거야?"

"뭐?"

코바야카와 미치루는 서슴없이 말을 거는 켄이치의 태도에 약간 당황했다. 남몰래 좋아하는 소꿉친구가 다른 여학생과 사귀고, 그걸로 모자라서 약혼했다고(심지어 고교생 주제에!) 자랑스럽게 알려 주고, 며칠 지나지 않아 약혼녀의 부름을 무시하고 그에 대한 방편으로 자신에게 말을 거는 것을 어떤 뜻으로 받아들여야 할 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둘이 싸우기라도 했나? 절교하자고 한 것 때문에?

"...시, 시험 기간에 학생이 일찍 오는 건 당연한 거 아냐? 거기다 오늘은 내가 제일 싫어하는 영어랑 공민이 함께 들어 있다고. 도저히 집에선 맘 편히 있을 수가 없었다. 왜?"

코바야카와는 머리를 굴려 어떻게든 질문의 의도에 맞는 무난한 대답을 끌어냈다. 그녀는 태연을 가장한 미소-본디 연기를 못 하는 탓에 옆에서 볼 때 상당히 부자연스러웠다-를 지으며, 잔뜩 굳은 얼굴로 교실 밖으로 사라지는 코이소 카고메의 뒷모습을 쫓아 의혹에 찬 시선을 던졌다.

"그것보다... 둘이 싸운 것 같은데. 이유가 뭐야? 설마 내가 쟤한테 거리를 두자고 한 것 때문이야?"

코바야카와는 시험에 나올 부분을 가르쳐 주겠다는 켄이치의 제안을 거절하고 작은 소리로 진짜 알고 싶은 질문을 입에 올렸다. 몇몇 동급생들의 호기어린 시선이 뒤통수를 콕콕 쑤셔왔지만 그녀는 애써 그것을 무시했다. 맘 가아선 한 소리 해 주고 싶었지만 그랬다간 이야기의 맥이 끊길 터였다.

켄이치는 재미있을 만큼 동요하는 모습을 보였다. 잠시 침묵하던 그가 작은 소리로 말했다.

"...그렇게 티가 나나?"

"그걸 말이라고 해? 둘 다 얼굴색도 표정도 말이 아니고, 너 쟤가 부르는 것도 무시했잖아. 꽤 크게 싸운 것 같은데, 만약 그게 나한테도 어느 정도 책임이 있는 거라면... 아무래도 내 입장이란 게 좀..."

코바야카와는 소꿉친구의 안색을 살피며 자신이 생각하는 것과 다른 의견을 내놓았다.

솔직한 심정으로는 둘이서만 한 얘기를 갖고 켄꼬맹이에게 일러바친 걸로도 모자라 들들 볶기까지 한(그 부분에 대한 언급은 없었지만 틀림없었다) 카고메에 대한 험담을 퍼붓고 싶었다. 물론 그랬다가는 자기마저 켄꼬맹이와 싸울 것 같았으므로-아무리 싸웠더라도 약혼녀에 대한 험담을 참아줄 남자는 그다지 많지 않으리라-, 코바야카와는 바다와 같은 자비심(본인 기준)으로 그 부분을 자제한 것이다.

두 사람이 싸웠다는 소식은 코바야카와가 작게나마 기뻐할 수 있는 구실을 만들어 주었으므로, 그 정도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켄이치는 이마를 억누르며 무겁게 고개를 저었다. 싸운 이유를 일일이 말할 생각도 없었고, 설사 말한다 한들 그 누가 믿어줄 수 있을까. 당사자에게서 얘기를 들은 자신조차도 믿을 수 없는 판국에.

켄이치는 그녀가 그런 거짓말을 한 의도가 무엇인지, 대체 누구에게서 확인을 받아야 좋을지를 알고 싶었다.

"어... 이건 굉장히 사적인 부분이라 말해줄 순 없지만... 네가 그녀한테 한 말 때문은 아냐. 그러니까 그 때문에 네가 자책하거나 책임감을 느낄 필요는 없어..."

"그래..."

코바야카와는 아주 나직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녀는 안도감이 헤집고 지나간 얼굴을 재빨리 지우고, 소꿉친구를 걱정하는 표정을 떠올리며 켄이치의 팔을 가볍게 두들겼다.

"뭐, 그렇다면 나야 안심이지.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난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행동했으면 좋겠다. 순간의 감정에 휘둘려서 중대한 결정을 섣불리 내리지 않았으면 해. 그리고 굳이 말할 필요도 없다고 생각하지만... 난 언제나 네 편이란 걸 잊지 마, 켄이치."

"그래... 그렇게 말해줘서 고마워."

켄이치가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코바야카와가 중간에 던져 준 말이 그의 가슴 속에 들어가 생채기를 냈다. 결정은 신중하게...

켄이치는 시험이 끝나는대로, 당장 카고메의 어머니를 찾아뵈어야겠다고 다짐했다. 그 분이라면 확실하게 알려줄 수 있으리라. 자신이 갈등하고 있는 문제의 명쾌한 해답을.

별다른 소식 없이 시계바늘은 무심히 쳇바퀴를 돌며 자신의 의무에 충실했다.

카고메는 목걸이용으로 쓰이는 체인에 매달려 소박한 빛을 떨구는 작은 반지에 초점을 맞췄다.

진실을 고백하기 직전, 그가 약혼의 증표로 끼워준 반지. 차마 끼고 다닐 엄두가 나지 않아 따로 보관하며 울적한 마음을 달래고자 가끔 꺼내보는 것이 전부였다.

켄이치와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얼굴을 마주하지 못했다. 혹여라도 마주칠세라 피해 다닌 탓이다.

반쯤 정신을 놓은 상태에서 시험을 치르고, 성적표를 받고, 종업식을 맞았다.

강하게 잡아끄는 힘에 하릴없이 이끌려 움직이던 그녀는 집에 도착하자마자 방에 틀어박혔다. 미리 잡아두었던 스케줄도 내팽개친 채 그녀는 자유 시간 대부분을 자신의 방 안에서 흘려보냈다.

불과 며칠 사이에 태도가 급변한 카고메 때문에 가장 큰 피해를 본 자는 그 집의 집사였다.

여러 가지 주제로 말을 걸어도 듣는 둥 마는 둥, 식사도 하는 둥 마는 둥 하는 태도에 큐브는 걱정을 넘어서 답답함마저 느끼고 있었다.

아가씨는 저런 사람이 아니었는데. 고민이나 걱정거리가 있어도 저런 식으로 무기력하게 대처하는 모습은 일찍이 본 적이 없었다.

물론 원인은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사귀던 사람이 다녀간 뒤로 저리 변한 것으로 미루어볼 때 그녀가 상심한 것은 필시 그 약혼자와 싸웠거나 뭐 그런 종류의 이유 때문이리라.

하지만 단순한 사랑싸움 때문이라고 치부하기에는 뭔가 석연치 않았다.

말로 정확히 꼬집어 표현할 수는 없지만, 무언가가 걸렸다. 본질적인 문제는 가치관의 차이에 따른 두 사람 간의 의견충돌이 틀림없을 터. 하지만 그 가설은 큐브가 주인으로 모시는 옛 용사가 이따금 딱딱한 얼굴로 딸을 주시하는 것이나, 카고메가 반쯤 넋이 나간 채로 행동하는 것에 대해서는 설명하지 몰했다.

큐브는 며칠 새 집 안을 지배하는 불온한 공기를 통해 이 집에서 자신의 위치가 어느 정도인지 통감했다. 큐브가 모시는 아가씨는 그를 믿지 않고, 딸이 변한 것에 대해 필시 무언가를 알고 있을 터인 주인도 그에게 정보를 말해주지 않는다.

사정이 있을 것이라고 머리로는 이해하고 있지만 섭섭한 감정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고민을 혼자 끌어안고만 있는 자와, 알고는 있지만 방관한 채 적극적으로 해결하려 들지 않는 자 사이에서 큐브는 오늘도 홀로 속을 태웠다.

큐브가 속을 태운다는 사실은 꿈에도 모른 채, 카고메는 오늘도 멍하니 침대에 기대 있었다.

슬픔에 빠져 눈물을 흘리거나 기다리다 지쳐 앞뒤 생각 없이 행동하는 짓은 하지 않았다. 그저 공허의 숲에 빠져 보이지 않는 하늘을 올려다 볼 뿐.

별다른 연락도 대답도 없는 켄이치를 기다리면서도 카고메는 가슴 한 구석에서 현실이 서서히 고개를 들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부정하면 할수록 그것은 더욱 크게 다가와 그녀의 어깨를 흔들었다.

그 현실은 때때로 프린스 아스팔의 모습을 하고, 그의 목소리를 흉내 내어 말했다. 아스팔의 주장은 각본을 맞추기라도 한 것처럼,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완벽히 들어맞았다. 그 무서운 사실은 그녀의 희망을 잘게 쪼개 가루로 만들어 집어던졌다.

이 음울한 현실에서 벗어날 방법은 오직 하나. 정신이 지배하는 세계로 도망치는 것뿐이었다. 상처를 입고 실마리가 없는 지독한 수수께끼 앞에 던져진 사람들을 홀리는 세계.

해가 떴는지 졌는지도 모를 까마득한 시간 속에서 카고메는 베개를 끌어안고 외로이 떠 있는 작은 섬에 풍덩 하고 몸을 던졌다.

잠은 더 이상 오지 않았지만 그녀는 눈을 꼭 감은 채 몸을 웅크렸다. 뭔가를 하는 것도, 생각하는 것도 귀찮았다. 그저 날짜가 지나길 바라며 사랑한다 속삭이던 남자의 목소리를 듣고 싶었다.

부르르르르...

별안간 책상에 아무렇게 내팽개친 휴대폰이 떨리는 소리가 들렸다. 아주 잠시, 그녀는 덧없는 소망이 빚어낸 환청이라 여기며 인상을 쓰고-

그 다음 순간, 그녀는 누군가 밀쳐내기라도 하듯 구르며 침대에서 뛰어내렸다. 딱딱하게 일어난 바닥의 역습에 아파할 새도 없이 책상 위의 물건을 집어던지며 두어 번의 외마디 울음과 함께 입을 다물어버린 휴대폰을 찾았다.

"........"

떨리는 손으로 휴대폰을 움켜잡은 카고메는 터질 듯이 날뛰는 심장을 진정시키며 받은 메시지를 열었다.

카고메의 반쯤 빛을 잃은 탁한 눈동자가 휴대폰 속에서 춤을 추는, 채 10음절도 되지 않는 짧은 문장을 몇 번이고 훑어 내린다.

그가 보낸 메시지는 일말의 군더더기도 없이 굵고 간결했다.

-지금 해안 광장에 나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