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이란 자신을 바꿀 의지가 없는 겁쟁이들이 떠드는 헛소리라 여겨왔다.

인간에게 주어진 운명은 스스로가 선택할 수 있으리라 믿었다.

그 때문에 내 미래를 예견한 점술가 앞에서도 태연할 수 있었다.

바꿀 수 있으리라 믿었던 미래. 수치의 입력에 따라 변한다고 여겼던 미래.

하지만 운명의 실타래는 이미 천천히, 그리고 아주 조용히 시간이란 이름의 실을 자아내고 있었다.

 

 

누군가에게는 평범했을 일상 & 14. 과거의 기억, 현재의 시간, 미래의 선택

 

 

카고메는 약속 장소로 서둘러 달려갔다.

주변을 돌아볼 겨를도 없이, 누군가의 어깨와 부딪혀 불평하는 소리도 들은 체 만 체하며 그녀는 달리고 또 달렸다.

중학생 때부터 체력 단련을 해 온 덕분에 숨이 차거나 옆구리가 결리는 일 없이 생각보다 빨리 그와 약속했던 장소 - 불과 보름 전에 그에게서 청혼을 받았던 해안 광장에 도착할 수 있었다.

켄이치는 아직 모습을 보이지 않았지만 그녀는 신경 쓰지 않았다.

그가 직접 이 곳에서 보자고 연락해온 만큼, 중대한 일이 아니라면 자신을 바람 맞추는 일은 없을 것이다.

아니, 그는 중대한 일이 생기더라도 아무 말 없이 약속을 취소하는 매너 없는 짓은 절대 하지 않았다.

맹장염으로 쓰러져 병원에 실려 가던 때에도 전화를 걸어 약속을 지키지 못해 미안하다는 말을 반복하지 않았는가.

게다가 켄이치는 당장이라고 했다. 딱히 언제까지 보자고 못을 박은 건 아니므로 조금 정도는 기다리는 것이 이치에도 맞을 터였다.

서늘한 겨울바람을 맞는 광장은 황량하기 그지없었지만, 카고메에게는 그 바람조차도 마음을 지피우는 모닥불처럼 따뜻하게 여겨졌다.

-그래, 그는 날 버린 게 아니었어. 소설이나 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얘기를 듣고 혼란스러워서 그랬던 거야.

-사실 그런 얘기를 듣고 그러냐며 단박에 받아들이는 사람이 이상한 거지. 그 말을 믿지 않거나, 꿈과 현실을 구분하지 못 하는 게 아니라면.

며칠 동안 그가 자신을 피해 다녔다는 사실에 마음의 상처를 입었지만, 입장을 바꿔 생각해본다면 이해 못 할 행동도 아니었다.

갑자기 친하게 지내던 사람이 갑자기 '이제 와서 말하는 건데, 난 이 세상 사람이 아니야'라고 말한다면 십중팔구 켄이치와 같은 반응을 보였을 거라는 걸 그녀 자신도 마음속으로 인정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스팔, 당신이 틀렸어. 세상 모든 남자가 다 당신 같을 거라고 생각한 건 당신의 오만이야.

카고메는 어딘가에서 자신을 비웃고 있을 아스팔을 떠올리며 저도 모르게 득의양양한 미소를 지었다.

아스팔에게서 이겼다는 승리감이, 사랑하는 남자로부터 선택 받았다는 안도감이 그녀의 기분을 나을 높이 띄어 올렸다.

기분 좋은 승리감을 만끽하면서도 카고메는 아주 살짝 죄책감을 느꼈다.

켄이치를 사랑한다면서, 사랑하는 사람의 진심도 알아채지 못한 채 그가 마음의 정리를 하는 그 며칠도 기다리지 못하고 혼자 상처받고 운 날들이 너무 바보같이 느껴졌다.

"그가 네 정채를 알고도 널 사랑해 줄 거라 생각하나?"

솔직히 말해 그 말을 들었을 때는 가슴이 철렁했다. 겉으로는 부정하고 있었지만 마음속으로는 그의 말이 옳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고개를 들이밀었다.

"전쟁도 모른 채 보호만 받으며 평화롭게만 살아온 꼬맹이가 세계의 안녕과 조화를 이끌어야 할 여자를 책임질 배포가 있다고 생각하기는 어렵군."

듣기는 싫지만 옳은 말이었다. 전쟁을 겪어 본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은 태도라고 해야 할까, 마음가짐부터가 서로 달랐다. 또한 가진 자라면 모를까, 가지지 못한 자가 짊어질 심적 부담감은 배 이상이 될 터였다.

"넌 나와 함께 가는 게 네게도 가장 유리해. 그러니 내 손을 잡는 게 좋아."

켄이치가 그녀를 피해 다녔던 며칠간은 정말 그렇게 생각했다. 8년 동안 다른 세계에서 살아왔다고는 해도, 그녀의 정체성은 아스팔 왕자와 같은 곳에 뿌리내리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켄이치는 날 선택할 거고, 그 손을 잡아서 날 이끌어 줄 테지. 그럼 난 영원히 당신과 안녕하는 거야.

그렇다. 소년은 소녀를 선택할 것이다.

그리고 소녀는 사랑을 비웃던 이(異)세계의 왕자에게 엿을 먹이고, 사랑하는 사람과 자신이 살아온 세상에서 계속 행복하게 살아갈 것이다.

"...먼저 와 있었구나."

핑크빛 환상에 잠겨 상상의 호수에서 홀로 헤엄치던 카고메는 뒤에서 들려온 음울한 목소리에 소스라치게 놀랐다.

"켄이치... 놀랐잖아. 방금... 온 거야?"

"응."

카고메는 자신의 생각을 들키지 않으려 애쓰며 표정을 가다듬었다. 자신을 선택할 거라고, 반쯤 자신을 타이르는 듯 한 투로 몇 번이고 자신의 마음을 다독이면서.

하지만 그는 - 눈앞에 선 그녀의 약혼자는 그녀가 있다는 것만 확인한 후로 시선을 돌려버렸다.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황량한 광장에 이유 없이 눈길을 보내며 생각에 잠긴 듯 아무 말 없이 서 있을 뿐이었다.

언제쯤 말을 걸어야 할까. 말을 건다면 대체 무슨 주제를 꺼내야 좋을까.

영원과도 같은 침묵의 시간이 흐르고-하지만 실제로는 고작 몇 분만이 흘렀을 뿐이었다-, 켄이치는 말없이 등을 돌려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따라오라는 손짓은 없었지만 그녀는 약간의 사이를 두고 그의 뒤를 따르기 시작했다.

그녀의 마음으로 살며시 새어드는 시커먼 먹구름의 존재를 깨닫지 못한 채.

"보름 전에... 여기서 너에게 청혼을 했었지."

별안간 켄이치가 그녀에게 말을 꺼낸 것은 광장을 세 바퀴쯤 돌고 난 뒤의 일이었다. 그는 여전히 그녀에게 눈길도 주지 않았지만 카고메는 켄이치가 겨우 침묵을 깨고 말을 걸어준 것에만 집중한 탓에 그의 어조가 미묘하게 차가워진 것을 눈치 채지 못했다.

"그 때 네가 그 자리에서 바로 허락했을 때, 난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았어. 네가 정말 내 여자가 되는구나. 난 이제 한 여자를 책임질 만큼 성숙한 어른이 되었구나- 하고."

그는 잠시 심호흡을 하는 듯 말을 멈추었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리고 미치루에게 그 얘기를 했다는 걸 네게 알렸다가 서로 싸웠지. 난 다른 의미로 미치루도 소중하게 생각했어. 다른 사람은 몰라도 미치루에게만은 얘기해야 한다고 생각했지. 태어나서부터 지금까지 함께 자라온 소꿉친구니까.

네가 사카키바라에게 털어놓은 것도 그녀를 진짜 친구라고 생각해서인 것처럼, 나도 미치루를 그렇게 생각하고 털어놓았지. 그래서 네가 화를 냈던 것을 이해하지 못했고. 왜 날 이해하지 못하는지 야속하기도 했어. 그러다 네가 몸져누웠을 땐 내가 너무 내 생각만 했구나 하고 죄책감도 가졌지."

말을 마친 켄이치는 갑자기 몸을 돌려 카고메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이제야 켄이치의 시선을 정면으로 볼 수 있게 된 카고메는 기대에 부푼 눈빛으로 미소를 지으려다가 흠칫했다.

그의 얼굴에는 이제까지 그와 함께 하면서 카고메가 지금껏 보지 못했던 가장 무서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무표정.

아무 감정도 묻어 있지 않은 천연의 무표정 속에서 하얗게 날이 선 멜로디를 들은 것만 같았다.

"저기 켄이치. 내 말 좀 들어 봐. 난 그저..."

무언가 잘못되고 있다-

말이 오고 가지 않더라도 분위기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카고메는 상황을 바로잡고자 어색한 어조로 말을 꺼냈으나, 켄이치는 손을 들어 그녀의 말을 막아버렸다.

"이름 함부로 부르지 마. 그리고 내 얘긴 아직 안 끝났으니 조용히 듣기나 해. 난 내가 이기적이란 생각을 하게 됐고, 그래서 좀 더 네 입장에 서서 널 챙겨줘야겠다고 생각했어. 그런데 넌 대체 나에게 뭘 해줬지? 넌 이 세상 사람이 아니라고, 자기도 모르는 새에 프린세스 후보가 되어 성인이 되면 동화 속 왕자님과 결혼해야 한다고, 그게 진실이라고 알려 줬지?

무슨 바람이 들어서 내게 그런 얘기를 했는지는 모르겠어. 하지만 분명한 건 넌 지금까지 나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그런 식으로 속여 왔다는 거야. 네 어머니를 찾아가 여쭈었더니 전부 사실이라고 인정하시더군. 네가 진실이랍시고 알려줬던 건. 내 사랑을 시험하려 한 유치한 농담일 거라고... 널 끝까지 믿으려 했지만 그건 내 착각일 뿐이었어."

"잠깐만, 난 다른 사람들을 속인 적 없고, 속이고 싶지도 않았어. 난 8년을 이곳에서 살았고, 가족이며 친구며 사랑하는 사람들이 전부 살고 있는 곳은 내 고향이나 마찬가지..."

"제 2의 고향이겠지. 넌 이곳에서 태어나지도 않았고, 이 세상 사람도 아니라면서!"

감정이 폭발한 것인지, 별안간 그가 빽 고함을 내질렀다.

"툭하면 전쟁이 터지는 불안한 세계에서 태어나서 프린세스 후보가 되어 장차 왕자비가 될 몸이셨던 분을 미처 알아보지 못해서 참 송구스럽구나! 애초에 다른 세계에서 온 인간이라고? 네가 인간이란 건 대체 어떻게 확신할까? 차라리 외계인이었다고 말하는 게 나았지. 솔직히 까놓고 말해서 네가 인간인지 다른 종족인지 어떻게 알며, 내가 여태껏 괴물이랑 사귀었는지 어떻게 확신하냐고.

사람들은 속인 적 없다고 했지? 당연히 그럴 수밖에. 아무도 네게 이 세상 사람이냐는 질문을 한 얼빠진 녀석은 없었을 테니까! 네가 나서서 말하지 않았던 것도 머리로는 이해할 수 있어. 다른 세계에서 왔다니, 미친 사람 취급 받기 십상일 테니 당연히 말 안 했겠지!

하지만 최소한 나한테만은 얘기했어야 하는 거 아니야? 그래, 친구였을 땐 못 미더워서 그랬다고 쳐. 하지만 나랑 사귀기 시작했던 때라도 얘기했어야 하는 거 아냐? 도저히 말하고 싶지 않았다면 끝까지 아무도 모르게 잘 속이던가!"

"켄이치, 정말. 정말 미안해!"

카고메가 구슬 같은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그에게 매달렸다.

"네가 한 말이 전부 맞아. 내가 너였어도 배신감에 펄펄 뛰었을 거야... 하지만 정말 다른 방법이 없었어. 내가 계속 가만히 있었어도 그 사람이 어떻게든 손을 썼을 테니까...!"

"그럼 나까진 끌어들이지 말았어야지! 죽이 되던 밥이 되던 너희 둘끼리 알아서 해결했어야 하는 거 아냐? 일은 너희 둘이 벌려놓고, 왜 뒤치다꺼리는 내가 떠맡아야 하는 거지? 네가 다른 세계 사람이라는 건 백 번 양보해서 그냥 넘어간다고 치자. 아니, 백 번 양보해도 넘어갈 순 없겠지만, 일단 넘어간다고 가정하자. 그건 우선 제쳐두고, 내가 제일 용서할 수 없는 건 다른 사람이 아닌 날 속였다는 거야."

폭발하여 날아간 감정들이 시뻘건 비수가 되어 마음속을 뜨겁게 파고들었다. 숨을 고르기 위해 잠시 말을 멈추었던 켄이치는 냉담한 어조로 덧붙였다.

"사랑의 기본은 서로에 대한 신뢰라고 봐. 그 신뢰의 바탕이 되는 건 순수한 정직함이고. 난 우리 둘 사이가 두터운 신뢰로 이어지길 바랬어. 하지만 그건 네 태도 때문에, 그리고 네 태생 때문에 이루어질 수 없게 되었구나. 내가 아무리 게임이나 판타지를 좋아한다고는 해도, 난 꿈과 현실은 제대로 구분하고 있어. 그리고 난... 평범한 게 제일이라고 생각해."

그는 마지막 말까지 마친 후, 쥐고 있던 커플링을 거칠게 뽑아 땅 위에 내던졌다.

작고 둥근 물체는 힘없이 굴러 카고메의 발 앞에 덩그러니 멈추어 버렸다.

"...없던 일로 하자, 모두. 처음부터 끝까지 전부 다. 그 반지는 팔든지 버리든지 네 마음대로 해. 옛 연인에 대한 예의로 네가 밝혔던 사실은 아무에게도 말 안 할 테니 안심하고. 하기사, 말해봤자 멀쩡한 녀석이라면 믿어주지도 않겠지만. 그리고..."

켄이치는 순간 이 말을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잠시 고민하는 듯했지만, 이내 마음을 굳힌 듯 무겁게 입을 열었다.

"...두 번 다시 안 보게 됐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