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르니아가 소개장을 받아 궁녀로 입궁한 뒤, 별다른 일 없이 몇 달이 훌쩍 지나갔다.

또다시 찾아온 마을을 싱그럽게 비추는 햇살의 따뜻함 속에, 꼭 필요하지만 그리 달갑지만은 않은 존재가 불쑥 끼어들었다.

그 존재는 신이 내려 준 은혜 중 하나에 은밀히 파고들어 서서히 백성들의 생활에 조금씩 손을 뻗어내렸다.

적정 이상의 온도와 습도라 불리는 이것은, 본색을 드러낼 때쯤에는 불쾌 지수라는 또다른 이름으로 불리며 각종 사건사고를 뒤에서 조종할 터.

예를 들어 누군가의 식욕을 빼앗는다든가...

허나 그것은 아직 소문에 불과할 뿐. 지금 걱정할 일은 아니다.

어쨌든 매년 꾸준히 찾아오는 단골손님을 맞이하기에는 아직 이른, 봄도 아니고 여름도 아닌 애매한 계절에 세르니아는 거의 사람 키많나 빨래 바구니 안에 세탁물을 하나하나 개켜넣고 있었다.

마음 같아선 되는대로 쑤셔넣고 한 번에 빨래터로 가져가고 싶었지만, 하루에 처리해야 할 빨래의 양을 생각해 보면 결코 효율적이라고는 할 수 없었고, 수십 명이 하루에도 문턱이 닳도록 들락거리는 왕궁에서 그런 짓을 했다가 누군가의 눈에 띄기라도 했다간 치러야 할 대가가 너무나도 크다.

그럴 바에야 차라리 조금 귀찮더라도 하나하나 직접 정리하여 마음이라도 편해지는 것이 좀 더 나을 것이라는 걸, 세르니아는 몇 달동안 쌓아올린 경험을 통해 깨달았던 것이다.

그래도 재수가 없어 깐깐한 집정관이나 시녀장에게 걸릴 경우 열에 서너 번 정도는 잔소리를 듣는다는 슬픈 현실은 잠시 무시하도록 하자.

넣을 수 있는 만큼 충분히 세탁물을 개어 넣은 세르니아는 작은 기합을 내지름과 동시에 빨래 바구니를 밀기 시작했다. 이만한 양을 들어올리려면 상당한 완력이 필요하겠지만, 다행히도 바구니 아래에는 작은 바퀴가 달려 있어 약간 힘을 주는 것만으로 여자 혼자서도 충분히 관리할 수 있었다.

오전 중에 할당된 일을 얼른 끝내야 오후의 티 타임을 맘 편히 즐길 수 있다는 사실을 거듭 상기하며, 때마침 나타난 모퉁이에 부딪히지 않기 위해 세르니아가 바구니 손잡이를 움켜 쥔 손에 살짝 힘을 실은 순간-

우당탕탕탕!!

힘을 실어 달려오는 누군가와 부딪혀 바구니가 엎어지는 - 나아가 세르니아가 하나하나 정성을 들였던 손길이 무자비하게 짓밟히는 소리가 고요한 왕실 대리석을 타고 유들유들 퍼져나갔다.

 

"죄송합니다!"

 

자신의 고생이 물거품이 되었다는 현실을 저만치 밀어버린 세르니아는 얼굴 가득 띄운 먹구름을 쫓아낼 새도 없이 바구니를 넘어뜨린 사람을 향해 장난감 인형처럼 꾸벅꾸벅 고개를 숙였다.

입궁한 지 몇 달 되지도 않은 시녀가 성에서 맘놓고 불평을 털 수 있는 상대란 존재하지 않는 것이나 마찬가지였으며, 이는 누가 잘못했든간에 무조건 그녀가 먼저 용서를 구해야 한다는 사실을 의미했다.

세르니아가 그 사실을 통감했던 것은 몇 년 전...

귀족의 저택에서 하녀로 일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무렵, 먼지가 내려앉은 바닥을 걸레로훔치고 있을 때 조심성 없이 뛰어든 귀족의 영식이 물이 든 양동이를 넘어뜨렸고-

엎어진 양동이에서 흘러넘친 물 몇 방울이 영식의 상의에 튀었다는 걸 알아차린 유모가 때렸던 따귀의 매운 맛은 잊을래야 잊을 수 없었던 대사건이었다.

그 때는 잠시 물이 튄 정도였지만... 지금은 달랐다.

누가 부딪혔는지는 몰라도, 혹여나 바구니에 긁혀 의복의 올이 나가거나 피부에 생채기라도 났다간 어렵게 들어간 왕궁에서 쫓겨나는 정도로는 끝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제발 부딪힌 사람이 관대한 분이길 빌며 그녀가 고개를 들자-

바닥에 주저앉은 채로 곤란하다는 듯 머리를 긁적이는 금발 사내가 눈에 들어왔다.

수수해 보이지만 값비싼 비단으로 만든 단색 예복, 허리에 늘어뜨린 호신용 단검, 그리고... 세르니아와 눈을 마주친 사내에게 단단히 박혀 있는 한 쌍의 비취.

-이 눈동자는...

문득 예법 교실에서 귀에 딱지가 앚도록 들었던 보트라 사범의 이야기가 세르니아의 뇌리를 스쳐지나갔다.

 

"저어, 혹시..."

 

가슴 속에서 피어난 의문을 막 입에 담으려는 찰나, 별안간 뒷머리를 벅벅 긁던 사내의 표정이 단박에 흐려졌다.

비취색 눈동자를 세르니아게게 고정하여 자신의 검지손가락을 입술에 대어보인 뒤, 그녀가 뭐라 반응하기도 전에 등을 보이며 자신이 넘어뜨린 바구니 속으로 뛰어드는 게 아닌가!

한 순간 사내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하고 벙쪄 있던 세르니아의 귀에 다른 사람들의 기척이 엉겨붙었다.

머리가 '누군가 오고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인 순간, 세르니아의 몸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가장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성인 남자가 들어가 있는 빨래 바구니를 어떻게든 일으켜 세우고, 시녀장이 봤다간 기겁할 만한 짓 - 흩어진 세탁물을 손에 잡히는 대로 바구니 안에 아무렇게나 집어던지는 만행을 저질렀던 것이다.

무슨 일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는 이해할 수 없었지만, 이 남성이 미혼 여자 앞에서 추태를 부리면서까지 몸을 숨기는 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을 터였다.

그렇다면 그를 도울지 내칠지는 그녀의 기분 문제.

그리하여 세르니아는 자신의 마음이 내키는 대로 남자를 돕기 위해 최대한 서둘러 세탁물을 바구니로 던져넣어 가능한 한 남자가 눈에 띄지 않도록 한 것인데...

아직도 바닥에는 흉한 모양을 뽐내는 세탁물들이 잔뜩 널부러져 있었다. 다시 그 중 하나를 집어든 순간, 그녀의 손 앞에 짙은 그림자가 깔려 검은 선율을 자아냈다.

드디어 올 게 왔구나.

조용히 심호흡한 뒤, 세르니아는 자신이 지을 수 있는 최상의 가면을 얼굴에 덧씌우고 고개를 들었다.

평온해 보이는 얼굴과는 반대로 심장은 당장에라도 튀어나올 것처럼 방망이질을 치고 있었지만, 절대 들켜서는 안 된다며 몇 번이고 자신을 타일렀다.

 

"무슨 일이신가요?"

 

세르니아가 물었다. 자신은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천진난만한 얼굴로.

몰리뉴 왕국의 독특한 메이드복으로 몸을 감싼 여자의 질문이 떨어지자, 가죽 갑옷으로 가볍게 무장한 두 병사가 한순간 서로의 얼굴을 마주보았다.

 

"혹시 조금 전에 누군가 여길 지나가지 않으셨나?"

 

연륜이 있어 보이는 병사가 말을 걸었다.

 

", . 방금 여기 모퉁이에서 딱 부딪혀서..."

 

아주 잠시 못 봤다고 거짓말을 할까도 생각했지만 이내 마음을 고쳐먹고, 세르니아는 그녀의 뒤쪽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질문하는 모양새로 보아 두 병사는 이 남자를 쫓아 달려왔을 것임이 틀림없다.

그렇다면 높은 확률로 이 곳을 지나가는 것을 보았을 것인데, 거기에 대고 못 봤다는 눈에 보이는 거짓말을 늘어놓아봤자 바로 간파당할 게 뻔할 터.

그래서 세르니아는 가벼운 손짓으로 뒷방향을 가리키며 이렇게 말했다.

"저쪽으로 돌아가셨어요. 뭔가 굉장히 급해 보이는 얼굴이시던..."

 

"쫓아라!"

 

어지간히 급했던 건지, 말을 끝맺을 시간조차 주지 않고 연륜 있어 보이는 병사가 명령을 내렸다. 그와 약간의 사이를 두고 뒤에 서 있던 보다 젊은 병사의 시선이 흘깃 세탁물이 널부러진 바구니에 머물렀으나...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는 것보다 상사의 명령에 복종하는 것을 우선한 것이리라. 다행히도 젊은 병사는 의견 전달을 위해 입을 여는 대신 상사의 명령을 쫓아 함께 모퉁이를 돌아 사라졌다.

 

"휴우..."

 

그들의 모습이 사라지고, 돌아올 기척이 없으리라는 확신이 들자마자 그녀의 입에서 작은 한숨이 터져나왔다.

 

"...이제 나오셔도 괜찮습니다."

 

어쩌다 이런 소동에 휘말리게 됐는지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을 제시할 틈도 없이, 세르니아는 아무렇게나 우겨넣었던 빨래 더미를 끄집어내며 조용히 말을 걸었다.

세르니아가 작게 속삭이자, 바구니 속에 잔뜩 몸을 웅크리고 있던 금발의 형체가 조금씩 꾸물거렸다. 그의 덩치가 큰 탓에 꽉 끼는 바구니 속에서 빠져나오는데는 약간의 시간이 걸렸고, 차라리 다시 바구니를 쓰러뜨리는 게 나을지 그녀가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을 무렵, 쑥 하고 금발 형체가 튀어나왔다.

 

"겨우 따돌린 것 같네."

 

주위에 그녀 이외의 기척이 없는 것을 확인한 남자가 안도에 찬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끌어들여서 미안. 하지만 덕분에 살았어."

 

바구니 테두리를 잡은 손에 힘을 주어 단번에 밖으로 빠져나온 사내가 사과와 감사를 동시헤 표했다.

 

"감사를 들을 만한 일도 아닙니다."

 

세르니아는 사내가 다시 흐트러뜨린 빨래감을 향해 손을 뻗으며 대꾸했다.

 

"괜찮으면 나도 도와줄까? 나 때문에 먼지투성이가 됐는데 그냥 가긴 좀 미안하네."

 

일부러 고개를 숙인 세르니아의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한 고비를 넘기자 진심으로 마음을 놓은 듯 태평한 목소리가 그녀의 마음을 붙잡았다.

병사들을 피해 달아나던 사람치곤 드물게 여유로운 모습이다.

 

"말씀은 감사합니다만... 여긴 제가 정리할 테니 너무 심려치 마십시오."

 

한순간 그가 내밀어준 친절에 기대 볼까 하는 유혹에 빠질 뻔 했으나, 세르니아는 가슴 속 깊은 곳에 남은 이성을 휘둘러 감미로운 유혹을 떨쳐 냈다. 유혹에 기대는 건 쉬울지 몰라도, 추후 치러야 할 대가가 너무 컸으니까.

철없던 시절이었다면 앞뒤 잴 것 없이 마음이 시키는 대로 행동했을 테지만 지금은 다르다. 어릴 적 품었던 환상에 눈이 멀어 자충수를 둘 만큼 그녀는 바보가 아니었다. 하지만...

 

"왜 그러시나요?"

 

아무리 기다려도 세르니아를 훑어보는 시선은 떨어지지 않았고, 온종일 세탁물을 주워드는 시늉만 하고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으므로, 그녀는 반쯤 포기하는 심정으로 다시 사내에게 말을 걸었다.

고개를 들었을 때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사내의 흰 피부와 어깨에 닿기에는 좀 모자란 금발, 그리고 비취 색 눈동자.

세르니아는 그 눈동자를 본 적이 있었다.

합법적으로 성에 출입하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제일 먼저 들르게 되는 제1현관홀에서. 그리고 지금까지 왕위에 올라 몰리뉴 왕국을 통치했던 조상들의 초상화가 보관된 방에서도.

1200년대에 잠시 왕국을 다스렸던 갈색 눈동자의 여왕을 제외한 몰리뉴 왕국의 모든 군주의 초상화는 비취색 눈동자를 가진 남성의 모습이었고, 그것은 현관홀에 걸려 있는 현 국왕의 초상화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리고... 세르니아를 내려다보는 이 남자 역시 그와 똑같은 비취색 눈동자를 갖고 있었고, 덧붙이자면 그 얼굴은 현 국왕의 모습을 그대로 젊게 만든 듯한 형상을 하고 있었다.

이만큼이나 정보가 모였다면, 감이나 느낌을 조금이라도 가지고 있다면 이 남자의 정체를 알아채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닐 터.

 

"...태자 전하."

 

세르니아는 제1왕위계승자의 칭호를 입에 담았다.

소설이나 연극에선 신분을 감추고 마을에 나온 왕자가 평민 소녀와 사랑에 빠지고, 왕자와 사랑에 빠진 소녀는 그가 정식으로 청혼하기 전까진 감히 그 정체를 의심조차 하지 않는다는 이야기가 곧잘 쓰이던데. 허구는 어디까지나 허구라는 것일까.

세르니아의 눈 앞에 선 '왕자'가 정체를 들켜 눈살을 찌푸리는 양상을 보자니 신기하다는 감상이 절로 고개를 쳐드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어떻게 안 거지?"

 

왕자가 물었다. 찌푸렸던 눈살은 어느 새 흥미로워하는 티가 역력한 표정에 가려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뒤였다.

 

"전하의 눈동자, 갖추고 계신 의복, 칼자루 끝에 새겨진 문장, 이유는 모르겠지만 병사를 피해 달아나는 상황... 그리고 병사의 질문 속에 섞인 존대법도 있었지요."

 

잠시 망설인 끝에 세르니아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그러냐며 짧게 동의하는 왕자의 얼굴에는 또다른 감정이 떠올라 있었다.

단순한 흥미가 아닌, 관심의 빛. 그 빛에 용기를 얻은 세르니아는 좀 더 용기를 내 보기로 마음먹었다.

 

"외람된 말씀입니다만 감히 질문을 올려도 괜찮겠습니까, 전하?"

 

"그래, 뭔데?"

 

"전하의 행동에서 저는 병사들과 마주하고 싶어하지 않으신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만약 제 예상이 밪다면, 병사들이 다시 여기로 돌아올 수 있단 점을 감안할 때 이 곳에 계속 머무르시는 건 그다지 현명한 처사가 아니라고 생각됩니다만..."

 

"확실히 그렇군... 나중에 네가 거짓말을 했다고 누가 추궁이라도 한다면 도움받은 입장에선 기분이 좀 그렇겠네."

 

"아뇨, 별로 그런 건..."

 

세르니아는 말끝을 흐렸다. 솔직히 그 부분은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남몰래 숨긴 본심을 고백하자면 '왕자'를 계속 붙들고 담소라도 나누고 싶은 심정이다. 까놓고 말해 어렸을 적부터 계속 동경해 왔던 왕자와 우연이라고는 해도 단둘이 만나 이야기를 주고받는다는 상황이란 게 어디 그렇게 쉽게 찾아오는 기회던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말을 꺼낸 것은 왕자의 체면을 살려주기 위해서였다.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병사들을 피해 달아나고 있었다면 그럴 만한 사정이 있었을 터. 그 사정을 존중하여 공범이 되어줬는데 여기서 자신과 대화를 나누다가 되돌아온 병사들에게 걸리기라도 하면 왕자의 위신이 말이 아닐 것이다.

이 때문에 그의 체통을 세워주고자 자신의 욕망을 누르면서까지 충언을 던졌던 것이나, 아무래도 왕자는 세르니아의 말에 담긴 진의를 조금 다르게 받아들인 듯했다.

 

"전 단지 전하께서 체면이 상할 것을 우려해서..."

 

이 판국에 남이야 어찌 됐든 자기 몸만 사리려는 여자로 비쳐지는 건 딱 질색이다. 억울하다는 감정을 죽이기 위해 고개를 숙이고 작은 목소리로 사실을 얘기하자 그가 풋 하고 작은 웃음을 터뜨렸다.

 

"과연 들었던 대로야. 아니, 들었던 것보다 훨씬 더 재미있는 여자네."

 

세르니아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들었던 대로라니, 일개 시녀의 이야기를 왕자에게 시시콜콜 전해 줄 존재가 이 성에 있었던가? 설령 전해준다 하더라도, 왕자가 그 이야기를 일일이 기억한단 말인가?

아까와는 역전된 상황에서, 왕자가 다시 장난기 가득한 미소를 지었다. 마치 장난에 성공했다는 어린애 같은 눈망울을 똑바로 보고 있자니 말의 진의를 물어볼 마음조차 깨끗이 사라질 것만 같았다.

아무 말 없이 그저 멍한 표정으로 왕자를 바라보던 그녀는 왕자의 입에서 새어나온 다음 대사에 완전히 얼어붙고 말았다.

 

"세르니아 마티에르 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