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만인이 사모하는 고귀한 몸이 될 것입니다.

 

 

누군가에게는 평범했을 일상 & 18. Princess Maker [完]

 

 

약속된 8년이 지났다.

생명의 위협으로부터 도망쳐 용사에게 맡겨졌던 소녀는 어느 새 성인이 되어 사회로 나가기 위한 첫 걸음을 내딛었다.

그리고...

소녀가 용사의 곁을 떠나고 몇 달 이라는 시간이 흐른 뒤, 용사에게 한 통의 편지가 도착했다.

 

친애하는 어머님.

그동안 잘 지내셨나요?

제가 고향으로 돌아오고 난 지 몇 달이라는 시간이 흘렀습니다.

이곳에 도착하고 나서 떠맡았던 급한 일들을 전부 처리하고, 겨우 여유가 생겨 이렇게 편지를 띄웁니다.

오자마자 폐하를 알현하고 프린세스의 자질을 검토하는 시련을 통과하여, 저는 드디어 내일 왕자님과 식을 올립니다.

제가 의도했던 것과는 다르지만, 어쨌든 저는 멀고 먼 옛날에 꿈꾸었던 희망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모든 것이 어머님의 덕분이겠지요.

어머님과 함께 했던 8년은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소중하고 멋졌습니다.

어려서 병치레를 할 때마다 일을 마다하고 자리를 지켜 주셨던 일...(그 때문에 몇 번이나 월급이 깎였다고 푸념조로 투덜거리시던 기억이 아직도 또렷합니다)

자객이 제 목숨을 위협할 때 앞장서서 물리쳐 주셨던 일...

처음으로 같이 외출했던 일, 큐브 몰래 여자들만의 비밀을 속삭이던 일, 저조차 잊고 있었던 생일을 손수 챙겨 주셨던 일, 행여나 위험에 빠질까 항상 마음속에 두고 보살펴 주셨던 일...

저는 어머님의 가르침으로부터 고난에 맞서는 강함과 사람을 사랑하는 따스함을 배웠습니다.

어머님께 막 맡겨졌을 때의 저에게는 불가능하다며 내심 포기했던 프린세스의 꿈...

그 꿈을 이루게 된 것은 전부 어머님의 애정과 수양딸이 잘 되기를 바랐던 모성애 덕분이었다고 생각해요.

친부모님과 형제들의 묘비를 보던 날, 프린스 아스팔로부터 모든 진실을 들었답니다. 모든 것을.

실연의 고통 속에 울다 지쳐 잠들었던 그 날 밤에 갑자기 고향의 세계로 떨어졌던 이유도...

아사쿠라 켄이치와 결혼하겠다고 말씀드렸을 때 침착한 어조로 의미심장한 말을 들려주셨던 까닭도...

프린스 아스팔이 항상 자신감에 찬 얼굴로 내개 접근했던 연유도... 전부 알게 되었어요.

전부 어머님이 뒤에서 관여해 오셨다는 걸.

저 다음으로... 아니, 저 이상으로 제 인생을 결정할 수 있는 사람을 포섭했다면 왕자의 그 건방진 자신감도 설명이 되지요.

솔직히 그에게서 그 말을 들었을 때는 내가 원하는 인생을 살지도 못 하는 이런 인생 따위, 될 대로 되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사랑한다고 믿었던 사람에게 버림받고, 철석같이 믿었던 분이 이리도 깨끗하게 뒤통수를 칠 줄은 몰랐으니까요.

며칠 동안은 어머님을 매우 원망하기도 했었어요.

하지만 머리를 식히고 냉정히 생각해 보니, 어머님께서 그리 행동하셨던 것도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항상 주체적인 삶을 살라고 가르치던 분께서 왜 손바닥 뒤집듯 관여를 하셨는지.

분명 제가 행복하게 살기를 바라셨기 때문이겠지요? 설령 그것이 제 의사를 무시하는 것이 되더라도.

저도 이 사람과 결혼해 적자를 낳게 되면, 어머님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헤아릴 수 있겠지요.

지금까지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저를 친딸처럼 키워주셔서 감사했습니다.

언제나 따뜻하게, 때로는 엄하게 저를 넓은 마음으로 감싸주신 어머님의 사랑을 잊지 않겠습니다.

가족들이 목숨을 희생하여 지켜냈던 저의 생명과, 어머님께서 제게 건네주셨던 진심을, 저는 넓은 5계로 환원하려 합니다.

제게 많은 것을 베풀어주셨던 것처럼, 저도 크나큰 사랑으로 왕자님과 함께 고난을 나누며 살아가겠습니다.

앞으로 다시는 만날 수 없겠지만, 항상 어머님을 기억하며 행복하게 살 터이니 너무 걱정하지 마시고 언제까지나 저를 믿고 지켜봐 주세요.

한 때 어머님의 딸이었던, 란느 마크레디 시 프라트 올림.

추신:

어머님께서 지어 주셨던 이름을 편지에 동봉하여 영원히 봉인합니다.

일본에서 살던 '코이소 카고메'는 사라지고, 몰리뉴 왕국의 26대 국왕을 보좌하는 '프린세스 란느'만이 남았으니까요...

 

 

 

 

수년간 행방불명이었던 프린세스 후보가 홀연히 나타나 몰리뉴 왕국의 제1왕위계승자와 식을 올리는 그 날, 하늘은 맑게 개어 있었다.

하늘도 그들의 결혼을 축하하는 듯, 말갛게 갠 하늘은 구름 한 점 보이지 않아 태양이 쏘아 올리는 축하포를 그대로 머금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알고 있을까. 푸른 하늘 속에 감춰둔 주홍빛 목소리를.

갑자기 등장한 프린세스 후보의 정체에 의구심을 품었던 시선들은 왕실의 의견을 대표하는 노련한 대신의 성명 발표로 단숨에 흩어져 버렸다.

당장에라도 혁명 세력과 혈전을 치러야 할지도 모르는 일촉즉발의 상황에서, 불순분자의 존재는 발견 즉시 제거하라는 프린스의 명령에 따라서.

소수라고는 하지만, 내버려 둔다면 암덩어리처럼 세포를 좀먹고 들어가 언젠가는 생명을 앗아갈지도 모르는 일이다.

언제 전쟁이 터질지 모르는 불안한 상황에서는 아무리 조심해도 지나치지 않다.

그 노력이 결실을 맺은 것일까.

란느는 프린스 아스팔과 함께 금은보화로 치장한 마차에 타고, 몰려든 수천수만의 백성들의 마음에서 우러나온 기쁨의 환성을 한 몸에 받으며 왕국의 거리에서 퍼레이드를 하고 있었다.

뒤에서 있었던 은밀한 명령을, 갓 프린세스의 자리에 오른 소녀와 불안한 일상에 지쳐버린 백성들은 알지 못했다.

이제 막 성인의 자리에 오른 순진한 여자는 기쁨이 넘쳐흐르는 미소 속에서 평온의 감정을 꺼내 거리에 뿌리고 있었고, 백성들은 '새로운 프린세스의 탄생은 왕국에 조화와 안녕을 가져온다'는 오랜 속설을 철석같이 믿으며 팔두마차를 향해 우레와 같은 함성을 보낼 뿐이었다.

"영광 있으라! 프린스 아스팔! 프린세스 란느!"

거리를 뒤덮은 백성들의 행렬은 시간이 흐를수록 굳건해지고, 규모는 더욱 커져만 갔다.

그들이 부르짖는 목소리는 란느의 귀에도 확실히 와 닿았다.

거리에 나와 프린세스를 외치는 백성들의 마음은 진심이라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대규모의 혁명 세력들에게 휘둘리며 앞날을 불안해하고 있던 백성들에게 이 결혼만큼 기쁜 것도 없었다.

거리를 지나는 식(式)휴의 퍼레이드는 쉬지 않고 달리던 자신들의 일상에 한 모금의 오아시스가 되어줄 것이고, 프린세스의 미소는 길이 보이지 않는 안개 속에서 자신들을 이끌어줄 한 줄기 빛이 되어줄 테니까.

백성들의 함성 속에 가득 배인 기대감. 프린세스는 그 기대에 어디까지 부응할 수 있을까?

"굉장하군. 나는 일찍이 이 정도 규모의 백성들이 뛰쳐나와 환호하는 모습을 경험해 본 적이 없다. 왕국의 역사에서도 관측된 바 없는 전대미문의 일이지. 역사에 길이 남을 식이 되겠군."

그건 좀 오버 아니냐며 무심코 딴죽을 걸려던 란느는 지금 자신들이 놓여 있는 상황을 깨닫고 최대한 자연스러운 표정을 지어 겨우 위기를 모면했다.

"아직도 꿈만 같아요. 사람들이 환호하는 눈앞의 풍경이 믿어지질 않아. 꿈이라면 정말 깨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란느는 자신의 심정을 솔직히 담은 단어를 골라 그럴싸한 몸짓과 함께 아스팔의 앞에 내놓았다. 그는 환한 미소와 함께 그녀의 손을 어루만지며, 백성들을 경탄에 빠뜨렸던 구성진 목소리로 말했다.

"네 심정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이건 꿈이 아니라 확실한 현실이다. 환호하는 백성들의 소리가 들리지 않나? 우리의 사명은 지금까지 불안에 떨던 백성들에게 희망을 주는 것이니, 어서 나와 손을 흔들도록 하지."

할 말을 마친 아스팔은 그녀를 조심스럽게 이끌었다. 자신들의 군주가 될 자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백성들은 더욱 커다란 함성을 지르며 군주의 눈에 들기 위해 앞 다투어 몰려들었다.

"저들의 모습을 보아라. 나와 너의 미소가 저들에게는 최고의 격려가 되는 셈이니 아낌없이 전해 주도록. 슬픔은 나누면 반이 되지만, 기쁨을 나누면 배가 된다는 말도 있으니."

"조금 부끄럽긴 하지만... 알겠어요!"

란느는 자신과 아스팔의 몸을 지탱하는 마차 위에서 손을 흔들며 백성들의 목소리에 답했다. 종종 아스팔과 시선을 주고받으며 조금씩 흘리는 미소에는 행복이 넘쳐흘렀다.

"아 참, 말하는 걸 잊을 뻔했는데... 조금 있다 퍼레이드가 끝나면 왕성에서 축하연이 열릴 예정이다."

아스팔은 그녀의 귀에 입술을 대고 은밀히 속삭였다.

주변 일대가 함성으로 가득 찬 탓에 조금 크게 얘기해도 아무도 그들의 대화를 엿들을 수 없기는 하지만... 뭐어, 그 자리의 분위기라고 생각해 두자.

"이만한 규모와는 비교도 되지 않지만, 그래도 많은 귀족과 왕족들이 몰려와, 그 뭐라고 하나... 우리를 '귀찮게'할 것이다. 아, 하지만 걱정할 필요는 없어. 준비해 둔 장소가 있으니, 때가 되면 몰래 빠져나갈 거니까."

"흐응... 그래요?"

란느는 장난기 어린 미소를 지으며 눈을 치켜떴다. 스트레스 관리를 잘 못하던 자신의 어린 시절, 밖으로 나돌았던 잠깐의 일탈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카리스마 넘치는 완벽한 겉모습과는 달리, 이 남자 역시 개구쟁이 기질이 있는 것 같았다.

"우와, 아름답다..."

왕자의 손에 이끌려 비밀의 화원을 찾은 란느는 주홍색으로 물든 일대를 바라보며 감탄의 신음을 흘렸다.

거리의 행진이 끝난 후.

두 사람은 처음 아스팔이 예고했던 대로, 성에서 준비한 성대한 피로연이 열리는 홀에 몰려드는 무리 속에 자연스럽게 섞여들었다.

각지에서 몰려든 귀족들과 시련 중 얼핏 이름만 들었던 왕족들이 새로운 프린세스를 둘러싸고 판에 박힌 듯 한 축하 말을 건넸다.

마차 안에서 백성들에게 미소와 함께 손을 흔들던 것과는 달리, 귀족들에게 둘러싸여 인형처럼 생글생글 웃으며 같은 대답을 수십 번 반복하는 것이 상당한 중노동이라는 것을 깨달은 란느는 접대를 우습게 본 자신의 멍청함을 탓하며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긴 한숨을 쉬었다.

몇 시간이고 같은 자리에 매달려 있는 고통을 견디지 못한 그녀의 얼굴 근육들이 소리 없는 아우성을 내지를 무렵, 아스팔은 평소와 다름없는 포커페이스의 가면을 덮어쓴 얼굴을 하고 하객들의 시선이 잠시 왕과 왕비에게 쏠린 틈을 타 재빨리 그녀의 손을 잡아끌었다.

연회석을 빠져나온 그들은 인기척 없는 베란다에 발을 디뎠고, 아스팔의 조용한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린 란느는 크림색의 벽면을 주홍빛으로 물들이며 오만한 미소를 띠는 노을에 압도당해, 진부하지만 익숙한 찬사를 내뱉은 것이다.

"...성 안에 이렇게 아름다운 장소가 있는 줄은 몰랐는데요."

축하연 내내 뒤집어쓰고 있었던 가면을 벗어던지고 겨우 본연의 미소를 떠올리는 란느의 어깨를 가볍게 감싸 안으며 아스팔은 차분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럴 수밖에. 여긴 사람들이 잘 드나들지 않는 장소거든. 내가 제일 좋아하는 곳이기도 하고. 여기에 서서 항상 백성들의 삶을 지켜보곤 했다오. 이제 반려자가 생겼으니, 내일부터는 당신과 함께 그들을 지켜보게 되겠군."

"저기, 아스팔."

"왜 그러지?"

"나... 아직 실감이 안 나요."

란느는 부드럽지만 단호한 손길로 자신을 감싸 안은 그의 손을 뿌리치며 조용히 말했다.

"폐하께 인사를 올리고, 프린세스의 자격을 확인하기 위한 시련을 통과했던 일들도 마찬가지지만... 그 일들도 벌써 과거가 되어 버리고... 이제부터 프린세스로서 이 곳에서 살게 되다니... 믿기지가 않아요. 마치... 마치 당신을 따라 이 성에 처음 도착했던 날 느꼈던 그 감정이 아직..."

그의 시선을 외면한 채 천천히 기분을 털어놓던 란느는 별안간 시선이 맨땅으로 쏠리는 것을 느끼고 짧은 비명을 질렀다. 옆에 서 있던 남편이 예고 없이 그녀의 등을 떠다밀었던 것이다.

콰당탕!

딱딱한 대리석 바닥과 그녀의 얼굴이 정면으로 충돌하는 소리가 들렸다.

"이봐요, 갑자기 이게 무슨 짓이에요?!"

"가만있어."

란느는 사과는커녕 어쩐지 적반하장으로 나오는 그를 향해 분노의 등짝 스매싱을 날리기 위해 손을 치켜들려는 순간, 공기를 찢는 윙윙거리는 소음이 두 사람을 덮쳤다!

"...?"

란느는 바닥을 짚고 상체를 일으켜 바람의 파열음이 잠시 머물다 떠나버린 공간 - 방금까지 자신이 서 있던 자리에 시선을 맞추었다.

철심으로 단단하게 고정되어 있던 난간의 일부가 반쯤 잘려나가 있었다. 반찬용 두부를 손질한 것처럼, 심 하나하나가 아주 깨끗하게 절단되어 있었다.

아마... 아스팔이 밀어 넘어뜨리지 않았다면 잘려나가 뒹구는 것은 난간이 아닌 자신의 몸이었으리라.

"아셰트 제노와즈..."

절로 흐르는 식은땀을 달랠 새도 없이, 란느는 아스팔이 싸늘한 목소리로 자신이 학교에 다니던 시절에 사사건건 대립했던 동급생의 이름을 부르는 것을 듣고 깜짝 놀랐다.

-제노와즈...라니? 설마 내가 알고 있는 그...?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어째서인지 그녀가 떠올랐던 것이다.

겨우 몸을 추스르고 아스팔의 시선을 쫓은 란느는 순간 자신이 꿈을 꾸는 것은 아닌지 의심이 들었다.

탐스러운 허니 블론드, 활짝 핀 아름다운 자태로 곤충들을 희롱하는 붉디붉은 장미, 잔잔하게 넘실거리는 푸른 호수빛 눈동자.

키가 훤칠한 남자와 함께 서서 분노로 일그러진 얼굴을 이쪽으로 향한 소녀는 란느가 기억하는 그 아셰트 제노와즈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어째서 저 애가 여기 있는 거지? 아니면 이 상황 자체가 꿈인가? 대체 어디서부터?

어디서부터 딴죽을 걸어야 할 지 갈피를 잡지 못한 채 혼란스러워하는 그녀의 팔을 붙드며, 아스팔은 두 불청객을 향해 분노의 기색을 숨기지 않았다.

"아셰트 제노와즈... 그리고 집사까지, 어째서 이런 무례한 짓을 하는 거지?"

아셰트 제노와즈라는 이름을 가졌던 여자는 느릿한 몸짓과 함께 한 걸음 한 걸음 앞으로 다가왔다.

자신의 반려자를 지키듯 팔을 내밀어 앞을 가로막는 왕자를 향해 그녀는 배신감으로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정말 저 계집을 부인으로 삼으신 겁니까. 제가 아니라 저 계집을...!"

란느는 혼란스러운 정신을 가다듬고 겨우 몸을 일으켜, 영문 모를 헛소리를 지껄이는 제노와즈의 뒤에 서서 말없이 냉소를 머금은 남자에게 시선을 던졌다.

어디서 많이 봤던 얼굴이다 싶었다. 아스팔이 집사라는 말을 던지고 나서야 저 남자가 누군지 알 수 있었다. 제노와즈가 병약했을 시절, 그녀를 물심양면으로 돌봐주던 집사였다.

하지만 뭔가가 걸렸다. 저 남자는 분명 제노와즈의 하수인일 터인데, 어째서 저 쪽이 주인 같다는 기분이 드는 거지?

"...네겐 미안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건 내가 내린 결단이다. 넌 확실히 내게 친절했지만, 어딘가 위화감이 느껴졌다. 그게 정확히 뭔지 설명은 못 하겠지만... 그냥 감이라고 해 두지. 네게는 말한 적이 없는 것 같은데, 내 감은 꽤 잘 맞는 편이라서 말이다."

란느가 잠시 혼자만의 생각에 빠진 틈을 타, 아스팔은 제노와즈를 향해 신랄한 대답을 던지고 있었다.

란느는 가자미눈으로 아스팔을 째려보았다. 한 가지는 확실하다. 왜 저 애가 여기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스팔은 제노와즈와 만난 적이 있었다. 그것도 한 번 이상, 그리고 아마 친구 이상으로.

"그래서 날 버리고 저 계집을 취했단 말인가요? 당신에게 관심도 없던 저런 하등한 계집을?!"

"닥쳐라."

아스팔의 얼굴에 남아 있던 온기의 미립자가 싹 사라졌다.

집사에게 잠시 정신을 빼앗겼던 란느는 뒤에서 자신의 손을 잡아끄는 아스팔에게서 분노의 그림자를 느끼고 살짝 몸을 떨었다.

협박하거나 힐난하는 그의 얼굴을 본 적은 있었지만, 이토록 분노에 찬 모습은 처음이었던 것이다.

"이 여자는 네깟 년이 함부로 지껄일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다. 나 자신이 아닌 다른 무언가를 바라고 내게 접근한 너 따위가 함부로 대할 여자가 아니란 말이다!"

"감히 날 배신하다니... 그러고도 무사하실 거라 생각하시나요?"

"멍청한 질문이로군. 난 네게 아무런 약조도 한 적이 없다. 네가 자의적으로 해석함으로써 스스로 속은 것 뿐."

"믿을 수 없어... 대체 어디가... 내 어디가 저런 계집보다 못하다고 이런 수모를...!"

제노와즈는 굴욕감에 얼굴을 붉게 물들이며 울부짖었다. 란느가 그 냉정하고 도도하던 아셰트의 일그러진 일면을 보고 놀라는 동안, 아스팔은 곧 무슨 일을 내겠구나 싶어 무심코 태세를 갖추었다.

"적당히 해 둬라, 아셰트. 그 이상은 보기 흉하다."

험악해지려던 분위기는, 뒷짐 지고 방관하고만 있던 집사가 앞으로 나서며 제노와즈를 질책함으로써 겨우 가라앉았다.

어째서 집사 쪽이 기세등등하여 주인을 질타하는 것일까.

완전히 허를 찔려 말을 잃은 두 사람을 무시한 채, 집사는 제노와즈에게 싸늘한 시선을 던졌다.

"그만둘 수 없습니다, 알포트 님... 이래선... 나의 존재 의미가..."

"착각하지 마라. 넌 저 계집에게 졌다. 즉, 실패작이란 소리다. 실패작 따위에게 존재 의미 같은 게 있을 리가 없지 않느냐."

"안 돼... 안 돼요... 제발 절 버리지 마세요..."

제노와즈의 얼굴을 타고 굵은 눈물이 아롱지며 떨어져 내렸다. 그는 신기한 것을 발견한 어린아이의 짓궂은 호기심을 담은 눈으로 그녀를 곁눈질했다.

"호오, 실패작 주제에 눈물을 흘릴 줄도 아는군. 신기하구만. 그런 기능을 장착했던 기억은 없는데... 아니면 이것도 저 계집에게 옮은 건가?"

-아무래도 좋지만 너네들, 당사자를 공기 취급하지 않으면 얘기도 진행 못 시키는 거냐.

이것저것 따지고 싶은 욕구를 억누르면서 란느는 제노와즈를 질타하는 남자에 대한 두 가지 가설을 떠올렸다.

하나, 잘 생긴 얼굴이야 어쨌든 성격은 못됐다. 아마 프린스 아스팔보다 훨씬 더.

둘, 그리고 아마 이 남자가 혁명 세력의 진정한 흑막...

알포트라 불린 저 집사 녀석이 이 세계에 뿌리를 둔 혁명 세력의 배후인물이고, 주인 행세를 했던 제노와즈는 그저 저 놈의 사주를 받고 행동했던 것뿐이라고 생각하면 모든 일의 아귀가 맞는다.

전학생이라는 평범한 신분으로 프린세스 후보에게 접근해 싸움을 걸던 일, (대화 내용으로 미루어보아)왕자의 선택을 받아 프린세스의 자리에 오르려 했던 일 모두.

보스가 항상 마지막에 정체를 드러내야 한다는 법칙 따위는 없다.

아무렇지 않은 시민으로 자신을 포장하여 프린세스 후보 앞에 나타나 그녀를 감시하고, 프린세스 간택 권한을 가진 왕자에게 접근해 자신의 하수인을 안주인의 자리에 들어앉히려는 계략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된 거였군."

란느는 두 사람을 노려보며 입을 열었다.

"너... 다 알고 있었던 거냐?"

란느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는 얼굴로 묻는 아스팔의 얼굴에 대고 말없이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이런 것도 눈치 채지 못했냐고 따질까 하는 생각이 잠시 들었지만, 그냥 내려놓기로 했다.

높은 신분을 갖고 있다면 주변에 파리가 꼬이는 일은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었을 테고, 무엇보다 아스팔은 란느와 제노와즈가 서로 아는 사이였다는 사실을 몰랐을 것이다.

게다가 다 알고 있다는 뉘앙스로 말한 란느도 실은 저 둘이 여기 나타나서 대화를 진행시키기 전까진 전혀 몰랐으니, 그것도 몰랐냐며 누군가를 질타할 위치가 아니었다.

물론 이건 비밀.

사실 눈곱만큼도 눈치 못 챘다고 말해버리면 조금 유쾌한 반응을 볼 수도 있겠지만, 그랬다간 프린세스로서의 카리스마는 물론이고, 양쪽 체면이 왕창 뭉개질 것이다.

이런 경우는 어쩐지 다 알고 있었다는 것처럼 허풍을 떨어주는 것이 서로를 위한 길이 틀림없으리라. 덧붙여, 아스팔이 자신을 바라보는 눈빛에 아주 조금 존경심이 깃들었다는 사실도 한몫했지만.

"다 알고 있다니 이야기가 빠르겠군."

놈은 눈물을 떨구는 제노와즈에게 보내던 역겨운 눈길을 치우고, 두 사람을 향해 연극조로 고개를 끄덕였다.

"정식으로 내 소개를 하도록 하지. 내 이름은 알포트, 각 세계의 주동자들을 이끌고 혁명을 일으킨 천계의 수징이다. 너희들에게는 모든 일의 원흉이라고 설명하는 편이 이해가 빠를까?"

"네 녀석이 혁명을 일으킨 주모자란 말이지?"

"아아, 착각하지 마. 내가 주모자인 건 사실이지만 난 딱히 녀석들에게 적극적인 명령을 내린 적은 없어. 기회는 제공해 줬지만 딱히 범의를 유발시키진 않았다고.

변혁의 바람은 내가 손을 대기 전에도 이미 모두의 마음 속에서 자리 잡고 있었다. 난 그저 그 바람을 바깥으로 꺼내준 것뿐이야. 천계야말로 모든 것을 통솔하기에 어울리는 자리니까."

"그딴 변명이 통할 것 같으냐?! 말해두지만 이곳은 왕궁이다. 적지에 스스로 발을 들이다니, 배짱이 두둑한 거냐? 아니면 한 치 앞도 못 보는 눈뜬 장님인 거냐?"

"이것 봐, 또 착각하고 있잖아. 이보시오, 아스팔 왕자. 내가 언제 이곳에서 선전포고를 했던가?"

알포트는 휙휙 손을 내저으며 아스팔의 분노를 받아넘겼다.

"웃기지 마라. 그럼 네가 사는 동네에서는 느닷없이 남을 죽일 생각으로 공격하는 걸 선전포고라고 말 안 하나?"

"오늘은 그저 인사차 들른 것뿐이다. 갑자기 공격한 건 내가 아니라가 조절할 틈도 없이 아셰트가 멋대로 한 짓이니까.

그냥 보내지 않겠다고 말하고 싶어하는 얼굴인데... 지금 여기서 싸우게 되면 누가 더 손해를 입을까? 설마 내가 아무런 조치도 없이 적진에 무모하게 돌진할 다혈질로 보이나? 아스팔 왕자, 댁도 그렇게 꽉 막힌 인간은 아니지 않은가?"

"네 놈..."

아스팔은 평소의 냉정한 태도를 전부 벗어버린 듯, 분노로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알포트는 냉혹한 미소를 지으며 뒤로 물러섰다.

"잘 지내시오, 아스팔 왕자. 부디 그 계집과 잠깐 동안의 안식이라도 편히 즐기도록. 당신이 친히 내 중요한 계획을 손수 부숴주었으니, 이쪽은 이쪽대로 또 다른 수단을 취하도록 하지. 보아하니 새로운 프린세스를 세운 것 같은데, 결국 쓸데없는 일이란 걸 알게 될 것이다."

"쓸데없는지 아닌지는 두고 봐야 알 거다. 아무리 좋은 말로 포장한다한들, 네놈들은 그저 한낱 테러리스트일 뿐이다. 그런 무뢰배들에게 순순히 질 생각은 없다!"

"그렇게 나오셔야지. 움직이지 못 하는 꽃을 꺾는 건 재미가 없어. 있는 힘껏 저항하다 힘에 굴복하여 무릎 꿇는 꼴을 보는 편이 훨씬 재미있지."

"당장 꺼져!"

"분부대로. 오늘은 이만 실례하도록 하지. 이쪽도 덕분에 바빠지고 말았으니까."

알포트는 끝까지 깔보는 눈빛을 지우지 않은 채, 황급히 자신에게 달라붙는 제노와즈와 함께 사라져 버렸다.

"젠장... 생각지도 못한 방해꾼이 끼어들다니...!"

그들의 모습이 사라지자마자 아스팔은 넘치는 분노를 주체하지 못하고 반쯤 망가진 난간에 몇 번이고 주먹을 날렸다.

"그만해요! 둘 다 가버린 마당에 화내봤자 별 수 없잖아요. 내 앞에선 항상 냉정하더니, 지금은 왜 이렇게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는 거죠?"

이를 악문 그의 주먹에서 흘러내리는 굵은 피에 질겁한 란느는 아스팔을 진정시키기 위해 그의 손을 잡고 어깨를 토닥였다.

"안 그래도 내가 프린세스로서 잘 할 수 있을지, 저 사람들과 대등하게 싸울 수 있을지 자신이 없는데, 당신까지 이런 모습을 보이면 난 어떡하라고요. 길도 안 보이고 방향도 찾을 수 없어, 안 그래도 무서워 죽겠는데...!"

아스팔은 자신에게 매달리는 반려자에게 잠시 눈길을 두곤, 마지못해 손을 내리며 긴 한숨을 쉬었다.

"미안... 신경쓰게 했군. 너무 걱정할 필요 없다. 수단은 이쪽에도 있으니까..."

"...정말인가요?"

아스팔은 가자미눈을 하고 묻는 란느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풋 하고 실없는 웃음을 흘렸다.

"정말이다. 의표를 찔려 잠시 자신을 잃었던 것뿐이니 너무 그렇게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나 역시 제1왕위계승자로서 살아온 몸. 사건에 대해 발생할 수 있는 모든 가능성은 항상 염두에 두고 생각하고 있다.

그리고 난 그대라면 분명히 잘 해낼 수 있을 거라 믿고 있으니, 긴장을 풀고 마음을 편히 먹어라. 불안할지도 모르지만 나도 있고, 무엇보다도 그대는 그 옛날 이 왕국을 구했던 용사의 손에 키워진 프린세스가 아닌가."

"그건 그렇지만..."

란느는 굳건한 의지로 갑옷을 두른 아스팔을 바라보았다.

문득 지금 여기서 걱정해 보았자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는다는 것이 떠올랐다.

좋든 싫든 자신은 결국 이 남자를 선택하고, 그와 함께 고향의 세계로 건너 왔다.

먼 옛날 혁명 세력에 의해 친 가족을 잃었고, 겨우 도망쳐 온 세계에서 자객과 조우했으며, 겨우 마음을 추슬러 잘 살아 보려는 지금 혁명 세력의 수장이 침투해 그들의 보금자리를 들쑤시고 있다.

예전에는 힘이 없어 당하고만 살았다. 하지만 지금은 자신을 지킬 수 있는 힘이 있고, 왕국을 좋은 방향으로 이끌어 나가려는 남자가 반려자로서 자신의 곁에 서 있다.

그런데 이제 와서 방향이 보이지 않는다고 겁먹고만 있는다면... 그것은 과거를 되풀이하겠다는 포기로밖에 비춰지지 않는다.

"너도 잘 알고 있을 거다. 이제 어리광부릴 나이는 한참 지났다는 걸. 그대는 성인이고, 이 나라의 새로운 프린세스이며, 이제부터는 우리 두 사람이 협력하여 왕국을 지탱해나가야만 한다. 아까 우리에게 손을 흔들던 백성들의 기대감을 그대는 읽지 못했나?"

"그건 나도 알고 있어요. 어떻게 그걸 모를 수 있겠어요..."

란느는 한숨과 함께 불안한 기색을 지우고 아스팔처럼 결연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이제는 스스로 나서서 자신을 지켜야만 한다.

그리고, 열심히 노력하여 영원히 평화로운 왕국을 세우도록 하자.

자신뿐만 아니라 자신의 손아귀에 쥐어진 왕국과 백성들을 보호하고, 나아가 5계의 조화와 안녕에 힘써야 하는 막중한 임무가 주어진 것이다.

중대한 의무가 지워진 자신에게 걱정할 여지 따위는 없다. 이제 와서 포기해버린다면 이제껏 키워준 자신의 어머니가 비웃을지도 모르니까. 열심히 잘 살겠다고 편지에도 쓰지 않았던가?

"내가 항상 곁에 있을 터이니, 너무 걱정하지 마시오. 나를 봐서 반드시 할 수 있을 거라 믿어 주시오. 나의 프린세스여."

아스팔은 손을 내밀어 란느에게 내밀었다. 란느는 그 손을 잡으며 거의 속삭이는 듯 한 작은 어조로 대답했다.

"...네, 믿겠습니다. 나의 왕자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