갚을 수 없는 빚은 지지 않는 게 당연하다.

 

 

누군가에게는 평범했을 일상 & 16. 검은 이카루스의 날개

 

 

"언니, 프린세스 후보가 되면 정확히 뭐가 좋은 거야?"

판이 그 질문을 던진 것은 식사를 마치고 차를 마시기 시작한 때였다. '프린세스 후보'라는 단어가 출현함과 동시에 강물처럼 잔잔히 흐르던 공기가 뒤틀리기 시작했다.

공기의 흐름이 변한 것을 눈치 챈 것은 비단 나뿐만이 아니었다. 그 증거로 상석에 앉은 칼 오라버니와 그 맞은편의 바커스는 잔잔한 식탁의 분위기를 한순간에 바꿔버린 판에게 약간 책망하는 시선을 보냈던 것이다.

"뭐가 좋냐니, 말 그대로잖아. 프린세스 후보로써 자신을 갈고 닦으면 나중에 성인이 돼서 왕자님과 결혼할 수 있게 되는 거라구. 설마, 아무리 너라도 프린세스가 뭐가 좋냐고 묻진 않겠지?"

"그러니까! 언니는 지금 왕자님과 약혼한 것도 아니고 그냥 후보 중 한 사람일 뿐이잖아! 죽도록 노력했는데, 프린세스는 다른 사람이 되었습니다- 라는 어처구니없는 결과가 나오기라도 하면 언니는 대체 뭐가 되는 거냐는 거지!"

나의 악의 없는 짓궂은 농담에 발끈한 판은 찻잔을 내팽개치듯 내려놓고 다소 격앙된 어조로 말을 받았다.

이크, 좀 가볍게 놀려줄 생각이었는데 아무래도 진짜 삐져버린 것 같았다. 얘가 제대로 삐지면 달래주기 힘든데... 음, 어떡한다?

"판치느, 그 말은 흘려들을 수 없구나. 좀 자중하도록 해라."

내가 고민하는 것을 알아차리기라도 했는지, 칼 오라버니가 적절한 타이밍에 제동을 걸어주었다. 오라버니가 나서면 아무리 판이라도 고집을 꺾을 수밖에 없다. 아니, 판 뿐 아니라 나와 바커스도 칼 오라버니 앞에서는 순한 양이 될 수밖에 없다고 표현하는 게 더 정확하려나.

"우선 생각하고 나서 말과 행동을 하라고 몇 번이나 말했지? 후보가 별 것 아니라는 것처럼 얘기하는데, 인간계를 대표하는 프린세스 후보로 선택받기 위해 란느가 근 반 년 동안 얼마나 많은 시련을 받았는지 너도 잘 알지 않나? 그런데도 후보가 별로 대단한 게 아니라는 투로 말하는 것은 그냥 넘어갈 수 없다. 란느에게 사과하도록 해."

으음... 정색하고 설교하니 진짜 무섭다. 칼 오라버니의 '목소리를 높이지 않고 분위기를 지배하는 능력'은 아무래도 타고난 것 같다. 뭐, 성에서 근무한다는 이유로 자주 집을 비우시는 부모님을 대신해 프라트 가(家)의 장남으로서 아스틴 집사와 함께 집안의 대소사를 처리하면서, 일하느라 바쁘신 부모님 대신 우리들을 돌봐온 역할을 오랫동안 해 온 경험치도 무시할 수는 없겠지만.

"...그건 나도 알아요, 오빠. 하지만 나도 언니가 걱정돼서 하는 말이라고요. 프린세스 후보에 오르려고 그렇게 고생했는데 그걸 딴 사람이 가로채 버리면 언니는... 언니는...!"

오라버니의 설교에 판은 꼬리를 내리며 변명을 늘어놓았다. 오라버니의 설교에 잔뜩 겁을 먹은 모양이다. 나는 판이 울거나 하는 사태가 오기 전에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의 어깨를 가볍게 감싸 안으며 말했다.

"판, 사과할 필요 없어. 너도 내가 걱정돼서 한 말이라는 걸 알고 있으니까. 열심히 노력해서 꼭 프린세스가 될 테니 걱정하지 마. 잘 생각해 보면 나한테 굉장히 유리한 점이 하나 있다고."

"뭔데?"

"프린스께서는 인간이라고. 그리고 날 제외한 다른 후보들은 인간계 출신이 아니고. 후보들의 능력이 동등하다는 전제 하에서라면 같은 시간, 같은 문화권에서 살아가는 내가 선택될 확률이 좀 더 높다고 생각해. 후보들과 동등한 능력을 갖기 위해선 좀 더 노력할 필요는 있지만... 절대 널 실망시키지 않을 테니 날 믿어 줘. 설마 내가 못 미덥다는 건 아니지?"

"절대 그렇지 않아!"

필요 이상의 큰 목소리로 내 말을 부정한 판은 얼굴에 드리웠던 먹구름을 거두고 태양과도 같은 눈부신 웃음을 보이며 내 품에 포옥 안겨왔다. 그제야 겨우 분위기는 다시 평화로워졌고, 칼 오라버니는 어쩔 수 없다는 시선으로 나와 판을 주시하면서도 더 이상 잔소리는 하지 않았다. 이제 좀 조용히 차를 마실 수 있-

"보면 볼수록 신기하단 말이야. 똑같이 생겼는데 어쩜 둘이 이렇게 다를 수 있지? 도도하지만 능력 출중한 장녀와, 세상 물정 모르고 철딱서니 없는 차녀라... 가끔은 너희 둘이 쌍둥이라는 게 믿기질 않아."

-나 했더니. 예상대로라고 해야 할 지 바커스가 쓸데없는 딴죽을 걸어왔다. 네 이 녀석 바커스! 하루라도 조용히 입 다물고 있으면 어디가 덧나니? 네가 떡밥을 던지면...

"잠깐 기다려. 철딱서니 없는 차녀란 게 날 말하는 거야?"

판이 잽싸게 물잖아.

슬쩍 칼 오라버니께 시선을 던지니, 땅이 꺼질세라 한숨을 내쉰다.

"그럼 여기 철없는 애가 너 말고 또 누가 있는데?"

"이익... 내가 철없는 건 사실일지 모르지만... 그래도 너한테 듣고 싶진 않아, 이 주정뱅이야!"

우와.

나는 내심 감탄했다. 판이 바커스에게 응수하는 건 처음 봤기 때문이다. 언제나 바커스가 일방적으로 판을 놀려먹다 칼 오라버니께 혼나는 레퍼토리였는데.

조금 재미있을지도 모르니 잠깐 구경할까?

"남 듣기 안 좋은 말 하지 마! 내가 어딜 봐서 주정뱅이라는 거야? 난 합법적으로 술을 먹을 수 있는 나이라고!"

"누가 나이 갖고 뭐라고 했어? 술 먹고 취해서 주사부리는 걸 주정뱅이라고 하니까 그대로 들려준 거라고. 내 말 틀려?"

"한참 틀려! 술도 그렇게 많이 마시는 편도 아니고, 뭣보다 난 주사부린 적 없다고!"

"호오오오..."

판의 눈이 실처럼 가늘어졌다. 그녀는 얼굴 가득 장난기 가득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러니까 네 말은... 술에 취해 개집 앞에 앉아 자기 개한테 울면서 인생 상담 따위를 하는 게, 주사부리는 게 아니란 말이지?"

"보, 보고 있었던 거냐?!"

풋!

나는 구경하며 무심코 머금었던 홍차를 뿜을 뻔했다. 무진장 웃기는 얘기를 들었다는 이유로 품위 없는 짓을 할 뻔 하다니, 집에 들어온 지 좀 되었다고 숙녀로서의 자각을 잠시 잃은 모양이다.

그야 어쨌든, 나는 어떻게든 위기를 모면했지만 우리 오라버니는 타이밍이 늦었는지 아무래도 성대하게 뿜은 것 같았다.

오라버니의 등에서 시커먼 아우라가 흘러나오는 기분이 드는데... 이거 위험하다.

"자자, 거기까지. 말싸움 금지."

오라버니가 정말 화를 내면 분위기가 험악해진다. 그걸 누그러뜨릴 수 있는 건 부모님뿐인데, 언제 돌아 오실지도 모르는 분들을 마냥 기다릴 수는 없는 일. 어떻게든 오라버니가 화를 내지 않도록 하며 상황을 어물쩍 넘기는 수밖에 없다.

"뭐라고?"

바커스는 독이 올라 벌겋게 익은 얼굴을 내게 돌렸다. 좋아, 예정대로다.

"말싸움 금지라고 했어. 바커스, 부탁인데 제발 오빠답게 굴어. 그 나이 먹도록 창피하지도 않아? 자각이 없는 것 같아서 말해주겠는데, 나랑 판은 9살이야. 한참 철없을 시기라고. 묻겠는데, 9살짜리한테 진심으로 이기고 싶어? 판한테 철이 있니 없니 할 때가 아냐. 철딱서니 없는 걸로 치자면 너도 만만치 않잖아."

"뭐?! 이게 보자보자하니까 오빠한테 못 하는 말이 없어!"

확실히 열 받은 모양이다. 하지만 나는 겁먹지 않고 일부러 차가운 어조를 가장하여 재차 말한다.

"저기 있지. 나이 먹은 걸로 사람을 누르려는 것부터가 유치하다는 증거야. 나이로 권위를 내세우려는 건 평민밖에 없다고. 근데 우린 평민이 아니잖아. 유서 깊은 후작 가문이라고,

칼 오라버니처럼 오빠로서 존경받고 싶다면, 먼저 존경받을 행동부터 해. 정신적인 성숙함은 물론이고, 외적인 능력도 함께 키우란 뜻이야."

"윽..."

바커스는 입술을 깨물기만 할 뿐, 별다른 반론을 하지 못했다. 그 이유가 내가 손가락으로 가리킨 몇 점이나 되는 트로피를 봤기 때문인지, 아니면 내 수려한 화술 때문인지는 모른다. 아마 둘 다겠지.

나라고 능력 없이 돈이나 빽으로 프린세스 후보 자리를 거머쥔 것은 아니다.

기품과 매력을 연마하는 것은 물론, 상대를 휘어잡기 위한 카리스마와 언령 스킬 및 프린세스로서 갖추어야 할 지력과 성품, 그리고 사회생활을 하는데 필수 요소인 적당한 연기 스킬을 습득하기 위해 얼마나 노력해 왔는지.

그 노력은 결실을 맺었고, 그 결과 바커스 같은 다혈질이지만 의외로 뒤끝이 소심한 사람쯤은 화술만으로도 대충 요리할 수 있는 경지에 이르렀다.

추가하자면 내가 손으로 가리킨 트로피들은 칼 오라버니가 무투회에 참가해서 얻어온 우승 트로피들이다. 금을 입힌 트로피에 '칼리프 라데츠키 시 프라트'란 글씨가 박혀 있는 것이 그 증거.

"작작 좀 해라, 다들. 도대체가 차 한 잔을 마음 놓고 마실 수가 없구나!"

바커스가 무언가 불만을 토하기 위해 입을 열려는 찰나, 칼 오라버니가 호통을 쳤다. 내가 나선 보람도 없이 결국 화를 내고 마는 건가 싶었는데 오라버니는 감정을 터뜨리는 대신 바커스에게 시선을 돌려 설교조로 말을 꺼냈다.

"바카리스, 형으로서 충고하겠는데 동생을 상대로 욱해서 덤벼드는 성질머리 좀 고쳐라. 술도 좀 줄이고."

끼어들어 항의하려는 바커스를 한 손을 들어 제지하며 칼 오라버니는 말을 이었다.

"네가 한 잔을 마시던 두 잔을 마시던 그건 전혀 문제가 안 돼. 문제는 네 주량을 넘기면서까지 과음하는 거야. 막 성인이 되어 들뜬 건 이해하겠지만 조절할 줄도 알아야지. 란느가 하는 말도 틀린 건 없으니 좀 새겨듣고. 동생들 보기 부끄럽지도 않나?"

"형은 란느만 너무 편애하는 거 아닙니까? 조그마한 게 자꾸 남의 속을 긁는 말만 한다고요."

"그럼 란느가 그런 말을 하지 못하도록 네가 더 성장하면 되는 게 아닌가. 뭐, 네가 성장하는 동안 란느가 가만히 있진 않겠지만.

그리고 오해할까 봐 말해두지만 난 란느만 편애하는 게 아냐. 난 그저 란느가 너보다 더 똑똑하고 가능성 있어 보이고 가문에 커다란 명예를 안겨줄 수 있을 거라 생각해서 특별히 더 아끼고 신경 쓰고 존중하는 것뿐이지."

"그게 편애잖습니까!"

오라버니의 변명을 가장한 공격에 절규하듯 소리치는 바커스.

-음, 실은 나도 편애라고 생각해, 바커... 아니, 바카리스 오빠.

속으로만 그에게 동의의 의견을 던지며 팔을 들어 올리는 판과 함께 하이파이브 한 번.

예상외의 전개가 되어버렸지만 결국 결과는 늘 겪던 대로. 판과 칼 오라버니는 언제나 내 편을 들고, 오라버니가 나서면 부모님 말고는 아무도 맞서지 못하니까.

이게 바로 바커스가 늘 패하는 원인이었다. 아니, 애초에 나이 차이 나는 동생에게 말싸움으로 이기려 드는 것부터가 상당히 글러먹었다고 생각하지만.

우리 가족의 일상은 항상 이런 식이었다.

부모님의 부재 속에서, 항상 티격태격하는 판과 바커스를 칼 오라버니가 중재하고 나는 그저 한가롭게 그 광경을 관람하는 것.

다른 가문들과는 사는 방식이 쪼오금 다른 듯 한 기분도 들지만, 나는 이대로도 충분히 행복하다.

자주 집을 비우시면서도, 어쩌다 시간이 나면 항상 우리 얘기를 들어주시려 노력하는 부모님.

일찍 철이 들어 부모님 대신 우리들을 돌봐 주는, 그래서 누구보다도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칼 오라버니.

욱하는 성질 속에 숨겨진 여린 마음 때문에 오빠 대접을 받지 못하면서도 절대 폭력을 쓰거나 필요 이상으로 화를 내지 않는(맘대로 애칭을 지어 불러도 뭐라 하지 않으니) 바카리스 오라버니.

항상 내 뒤를 졸졸 쫓아다니며 나를 흉내 내고, 나를 위해서라면 뭐든 할 테니 맡겨만 달라고 큰소리치는 쌍둥이 동생 판치느.

항상 사랑해 주고, 내게 커다란 기대를 걸고 있는 가족을 위해 반드시 프린세스가 되도록 하자.

부끄러워서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혼자 간직한 다짐을 다시 상기하며, 나는 반쯤 남은 찻물을 단번에 들이켰다.

 

 

 

 

"왜 나한테 이곳을 보여준 거죠?"

카고메는 갈라진 목소리를 쥐어짜내 질문을 던졌다. 그 속에는 어떤 감정도 실려 있지 않았다.

볼을 타고 흘러내린 눈물은 자리를 찾지 못하고 맥없이 대지를 적셨다.

"네가 지금 어디에 서 있는지, 그 자리에 다다르기까지 어떤 과정을 거쳐 왔는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아스팔은 심각한 표정을 지어 겉에 드러나려는 생각을 감추며 무거운 어조로 말했다.

카고메는 그의 대답에는 신경 쓰지 않고 오랜 시간동안 잊고 살았던, 함께 피를 나눠 가졌던 가족과의 추억을 떠올리게 해 준 무덤과 묘비를 향해 여러 감정이 담긴 복잡한 시선을 던졌다.

친부모의 묘지를 보여주겠다는 유혹에 이끌려 아스팔을 따라나선 것이 조금 전.

널찍한 공간에 덩그러니 방치된 묘지와 묘비는 세월의 화살을 고스란히 받고 있었다.

디딤대를 축으로 묘비를 잠식하는 이끼들, 잡초들이 우거져 원형조차 의심스러운 무덤.

카고메는 프라트 가문의 유일한 생존자로서 밀려들어오는 기억과 죄책감에 사로잡혔다.

약 9년 전 보냈던 행복한 일상의 추억과 자신을 보듬어 주던 형제들의 모습이 주마등처럼 그녀의 머릿속을 파고들었던 것이다. 시간상으로는 몇 초에 불과했겠지만 경험했던 것을 직접 떠올린 당사자로서는 기억을 다시 체험하는 간접적인 기분을 느꼈으리라.

그리고 기억을 떠올린 직후, 죄책감에 사로잡힌 그녀는 그 무게를 조금이라도 덜어내고자 왜 자신에게 이곳을 보여준 것이냐며 따졌던 것. 아스팔이 어떤 대답을 하던 그것은 전혀 상관없었다.

아스팔도 그녀의 심정을 알고 있는지, 그녀의 행동에 별다른 이의를 제기하지 않고 자신의 본래 목적을 다시 꺼냈다.

"마지막으로 묻도록 하지. 그래도 네 대답이 한결같다면 나도 더 이상 네게 강요하지 않겠다. 몰리뉴 왕국의 이름과 명예를 걸고 더 이상 네게 폐를 끼치지 않겠다고 약속하마."

-만날 때마다 속을 뒤집고 행복을 짓밟을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같은 대답을 하면 손을 떼겠다고?

'손을 떼려면 적어도 3주 전에 뗐어야 할 거 아냐!'라고 소리치고 싶은 욕망을 배출하는 대신 카고메는 약한 손놀림으로 묘비를 좀먹은 이끼를 쓸어내며 딴청을 피웠다.

소리치며 따질 기운은 없지만 그래도 궁금했던 것은 물어봐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이곳까지 스스로 따라 온 의미가 없다.

"그 전에 질문... 묘비에 새겨진 이름은 다섯인데 왜 무덤은 2개밖에 없죠?"

"아까 네 친부모님의 묘지를 보여주겠다고 말하지 않았었나?"

"...그건 나도 알아요. 여기가 내 부모님이 묻힌 곳이라는 건. 난 내 형제들의 이름이 묘비에는 있는데 무덤은 왜 보이지 않는지를 물은 거라고요."

아스팔은 그녀의 쏘아보는 시선을 피해 살짝 고개를 틀었다. 짙은 구름을 덮은 달빛이 그의 심각한 얼굴을 비추며 소리 없이 눈물을 떨구었다.

"네 부모님 외에 가족의 시체는 찾지 못했다. 기록상으로는 그들은 '사망'이 아닌 '행방불명'이라 보아야 하겠지만... 전쟁의 혼란 속에서 실종된 데다 시간이 많이 흘렀으니 이미 사망했다고 보는 편이 옳겠지."

그의 대답에 카고메는 화들짝 놀라 묘비를 쓰다듬던 손길을 멈췄다. 거짓말이길 바라며 올려다본 아스팔의 눈은 진실이라는 굳건한 방패의 힘을 받아 한 치의 흔들림 없이 반짝이고 있었다.

"그럴 리가 없어... 그럴 리가 없다고!"

카고메는 묘비에 달려들어 이끼가 뒤덮인 부분을 맨손으로 미친 듯이 휘적였다. 거친 손길로 달라붙은 이끼를 뜯어내고, 기록을 담기 위해 어둠에 녹아든 석류빛 눈동자를 들이댄 카고메는 재차 충격을 받고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글씨가 박혀 움푹 파일 것이라 여겼던 그 곳은 텅 비어 있었던 것이다.

맨 위에 새겨진 그녀의 친부모의 이름 옆에는 태어난 날짜와 사망한 날짜가 같이 붙어 있다. 하지만 그 밑의- 그녀의 두 오라비와 여동생의 이름에는 태어난 날짜만이 있을 뿐.

"...왜죠...? 왜... 왜 시체조차도 못 찾는 거냐고요... 왜?!"

말라붙은 물안개가 다시 피어오른다.

카고메는 주저앉은 채로 얼굴만을 돌려 잡아먹을 듯 한 눈빛으로 아스팔을 노려보았다. 그는 작게 한 번 한숨을 내쉬고 그녀에게 다가와 몸을 굽혀 눈높이를 맞추고 말했다.

"묘와 묘비를 보고 옛날 기억을 좀 떠올린 것 모양인데-무슨 기억인지는 모르겠지만-, 네가 모르는 뒷이야기를 좀 들려주도록 하지."

아스팔은 주변에 아무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필요 이상으로 목소리를 낮추어 말했다.

"다른 프린세스 후보들이 전부 살해당하고 너 하나만 남은 시점에서, 프라트 경과 그의 두 자제들이 아바마마께 알현을 요청했다고 한다. 너를 안전하게 보호하면서 무사히 프린세스가 될 수 있는 방책이 있다면서 왕국을 설득했지."

꿀꺽.

자신이 전혀 몰랐던 이야기가 싸여 있던 베일을 걷고 밖으로 나오려 하고 있다. 카고메는 긴장을 풀기 위해 목을 움직여 고여 있던 침을 삼켰다. 아스팔은 그녀의 행동에는 신경 쓰지 않고 말을 이었다.

"차원이동을 통해 널 다른 세계로 보내는 아이디어는 프라트 부인께서 제시하셨다. 그리고 프라트 내외와 두 자제들은 널 다른 차원으로 보내는 의식을 치르는 동안 조금이라도 시간을 벌기 위해 혁명세력과 맞서 싸우기로 결정했지. 이해가 안 가는 모양인데-"

아스팔은 카고메의 표정을 보고 몇 마디 보충 설명을 덧붙였다.

"지금이야 차원을 연결하는 게이트를 여는 마법이 개발되어 원할 때마다 간단히 오고갈 수 있지만, 그 당시에는 특정 시간대에 의식을 통해서만 이동할 수 있었어. 방법도 까다롭고 시간도 걸리는데다 일방통행이었으니... 여러모로 불편했다.

그래서 그 의식을 치르는 동안 혁명 세력의 발을 묶어 두는 것이 선결 과제였던 거지. 널 보호하기 위해 가족들이 전부 그 임무에 매달린 셈이다. 물론 프린세스 후보에게는... 망각의 잠에 빠지게 하여, 의식을 치를 장소에 몰래 데려다 놓는 걸 포함해서 어떤 언질도 주지 않았으니 알 턱이 없었겠지."

"그럼... 막내동생은요? 그 앤 검도 마법도 쓸 줄 몰랐던 걸로 기억하는데..."

"그래. 하지만 반드시 싸우는 것만이 적의 발을 묶을 수 있는 것은 아니야... 생각해 봐. 판치느 영애가 가졌던 최고의 무기를."

아스팔은 더더욱 목소리를 줄이는 대신 천천히 카고메에게로 다가왔다. 서로의 얼굴이 맞닿을 만큼 가까워지자, 아스팔은 그녀의 귀에 대고 그 해답을 알려주었다.

"쌍둥이는 여러 면에서 매우 편리하지. 서로의 인격을 바꿔도 입만 다물면 겉으로 봐서는 전혀 알 수 없으니까. 나이가 어릴수록 더욱 구별하기도 힘들고.

그녀는 혁명 세력의 주의를 돌리는 역할을 했다. 그 당시의 차원 이동은 모든 시간이 무(無)로 돌아가는 때, 0시에만 가능했기에 그 때까지의 미끼 역할을 담당했다고 한다. 하지만 재수 없게도(이 부분에서 아스팔은 쓰디쓴 웃음을 지었다), 적의 전력이 너무 막강해서 그들 모두가 목숨을 잃었지...

게다가 그들의 노력도 허무하게 혁명 세력은 진짜 프린세스 후보가 아직 건재하다는 것을 알아채고, 네가 숨어 있는 성으로 쳐들어왔다. 하지만 운 좋게 마침 시간이 되어 그들의 공격을 받기 전에 네가 도망칠 수 있었던 거야."

"...당신... 어떻게 그런 짓을...!"

멍하니 주저앉아있던 카고메는 끓어오르는 적의의 기세를 타고 아스팔에게 달려들었다. 그의 뺨을 갈길 요량으로 팔을 치켜들었지만, 아스팔은 여유롭게 그 팔을 잡았다.

"이크, 열 받았다는 건 잘 알겠지만 오해하면 곤란한데. 명예를 위해 한 마디 하자면 난 그 때 아.무.것.도. 하지 않았어. 그저 그 당시 내가 봤던 것과 폐하께 들은 것을 지금 네게 전달한 것뿐이야.

그리고 처음에 말했잖아? 그들 스스로 계책을 만들어 왕국을 설득했다고. 목숨을 잃을지도 모르는 작전에 참가하는데 스스로 동의했단 말이다. 그러니 원망할 상대가 틀린 것 아닌가?"

카고메는 맥없이 고개를 떨궜다. 머리로는 이해할 수 있다. 이해할 수는 있지만...

머리로 이해하는 것과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별개의 문제였던 것이다.

"왜 그렇게까지... 나를..."

쏟아내지 못한 말은 응어리가 되어 가슴을 후벼 팠다. 아스팔은 잠시 인상을 쓰더니 그녀의 팔을 떨쳐내고 양 어깨를 움켜잡아 거칠게 끌어당기고 광기서린 어조로 말했다.

"왜 그렇게까지 널 보호하려 했느냐고? 그건 네가 하나 남은 프린세스 후보였기 때문이다. 대를 이을 아들들까지 희생시켜가면서 널 보호하려 한 이유가 달리 있을 것 같나? 가문의 명예를 지키는 일은 대를 잇는 것만큼이나 중요한 일이다. 네가 프린세스가 된다면 프라트 가문은 엄청난 부와 명예를 차지할 수 있다. 프라트 경은 외동아들이 아니었으니 찾아보면 피가 섞인 친지도 나올 것이고 그들이 그 혜택을 받을 수 있겠지.

그리고, 가족으로서 너를 사랑하는 마음도 없지는 않았겠지. 널 프린세스에 앉히는 것이야말로 널 살릴 수 있는 지름길이기도 했으니. 그렇지 않고서야 그렇게 쉽게 자기들의 목숨을 내놓았을 리가 없을 테니까. 그 점에 있어서는 경의를 표하는 바이다. 선뜻 목숨을 내놓은 네 가족들에게도, 아무 연고도 없는 널 맡아 키워주신 메이스 용사님에게도 말이지."

말을 마친 아스팔은 손힘을 풀어 그녀를 놓아주고 의기양양한 얼굴로 카고메의 표정을 살폈다. 은근슬쩍 흘린 폭탄 발언에 그녀가 놀라기를 바랐던 것이지만, 아스팔의 예상과는 달리 카고메는 오히려 해탈의 경지에 이른 것 같은-달리 말하자면 세상 다 산- 얼굴로 이따금 깜박거리는 그의 푸른 눈동자를 응시할 뿐이었다.

"...오늘 밤, 나를 이 세계로 밀어넣은 건 어머니가 한 짓이로군요."

잠시 동안의 침묵 후 카고메는 안정된 어조로 차분히 입을 열었다. 자신의 예상이 빗나가 어리둥절해하는 얼굴을 향해 카고메는 쓴웃음을 지었다.

"어떻게 알았냐는 얼굴이네... 솔직히 이상하다고 생각했어요. 그 분은 언제나 주체가 되어 자기 인생을 개척하라고 가르치시던 분인데, 처음 약혼 소식을 밝혔을 때 뭔가를 지나치게 캐묻는 것 같았거든요. 처음엔 내가 학생이라 걱정이 되셔서 그런가보다 했는데 조금 생각해 보니 캐묻는 핀트가 묘하게 어긋난 느낌이 들었어요.

또 켄이치가 어머니께 진실을 물으러 왔을 때... 누가 진실을 알려준 건지, 그 누군가는 뭣 때문에 진실을 알려 준 건지 묻지도 않고 그저 순순히 인정하신 것도 의심스러웠어요. 결정적인 건 내가 그에게 차여서 울고 있을 때 아무것도 묻지 않으시고 다독여주셨다는 것과, 그러면서 뭔가를 읊조렸다는 것. 그 땐 기분탓인가 보다 하고 넘겨버렸지만...

처음엔 당신이나 다른 누군가가 날 이 세계로 끌고 와 처박아 뒀을 거라 생각하기도 했지만, 그것보다는 마법을 쓸 줄 알고, 나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칠 수 있으며, 내 행동과 감정 상태를 실시간으로 체크할 수 있는 누군가 - 한 집에 사는 가족이 날 여기로 보냈다고 생각하는 게 훨씬 현실적이지 않나요?"

카고메는 자신의 추리를 모두 쏟아 부은 뒤 조용히 한숨을 쉬었다. 아직 추리 단계이지만 저 잘난 왕자의 표정을 보아하니 제대로 적중한 것 같았다. 허를 찔린 건 자신도 마찬가지였지만 어쨌든 간에 저 사람에게도 한 방 먹인 셈이다.

"걱정한다는 이유로, 사랑한다는 구실로 당사자의 의견이나 의사는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자기들 멋대로 남의 인생을 결정하다니... 이거 웃어야 하는 건가?"

카고메는 기가 막힌다는 가면을 쓰고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분노도 슬픔도 아닌 꾸릿꾸릿한 감정이 거칠게 일렁이며 그녀의 가슴을 적셨다.

아스팔을 만날 때마다 품었던 의문도 지금이라면 그 답을 알 것 같았다.

-왜 프린스 아스팔은 자신의 손을 잡지 않는 날 만나면서도 여유를 잃지 않았는가?

근거 없는 자신감은 아니었다. 그는 확신하고 있었던 것이다. 다른 차원에서 평범하게 살고 있는 프린세스 후보를 데려갈 수 있을 거라고 확신하고 있었기에 여유를 잃지 않고 모든 상황에 냉정하게 대처할 수 있었던 것이다.

정확히 언제인지는 모르겠지만 자신의 양어머니를 만났을 것이다. 그리고 그 지랄 맞을 화술로 어떻게든 설득을 시켰을 것이고, 게이트를 여는 방법을 가르치고 협력을 약속받았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모든 것이 맞아 떨어진다. 자신을 고향으로 밀어 넣은 이유도, 켄이치를 상대로 순순히 진실을 인정한 이유도, 자기 인생을 스스로 살라던 가치관을 손바닥 뒤집듯 바꾼 이유도, 저 왕자가 저렇게 확신에 찬 행동을 보여줬던 이유도, 전부. 아마 끝까지 자신을 설득하지 못한다면 어머니를 움직여 설득하려 들 테지.

"어머니는 대체 언제 만난 거죠?"

카고메는 짐짓 꾸민 듯 한 투로 질문을 던졌다. 아스팔은 허를 찔린 표정을 거두고 정색한 얼굴로 대답했다.

"거기까지 알고 있다면 스스로 예측할 수도 있을 텐데? 너와 처음 만났을 때다."

"자기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다고 폭주하는 사람마냥 사람들 앞에서 자판기를 때려 부수던 날 말인가요?"

"아니, 너한테 처음 정체를 밝히고 난 다음날. 그 왜, 내가 비둘기랑 대화하던 때 말이야."

-역시... 이 정도 도발은 택도 없구나.

조금 열 받았으면 좋겠다 싶어서 지른 도발이었건만 아스팔은 미동도 하지 않는다. 그 정도 도발에 넘어올 상대가 아니라는 건 수 차례의 만남으로 이미 실증되었지만.

"그럼 어머니는 내가 켄이치와 결혼하는 것에 대해 설교를 늘어놓으실 때 이미 당신의 설득에 넘어간 상태고, 약혼이 깨질 거란 것도 이미 알고 계셨겠군요?"

"그런 셈이지."

"그래요... 그렇다면 그 분도 내 가족처럼 내가 프린세스가 되길 바라신다고 봐야 하겠군요. 그렇지 않고서야 당신한테 게이트 여는 법을 배워 날 고향으로 보내버릴 리가 없지 않겠어요..."

"무슨 뜻이지?"

"별 뜻 없어요. 그냥 현실을 깨닫는 것 뿐."

카고메는 고개를 돌리며 주저앉았던 다리를 펴고 일어났다. 알 건 다 알았으니 이제 돌아가는 일만 남았을 터...

아니, 아직 아스팔이 하겠다던 질문을 듣지 못했다. 여기까지 온 마당에, 무슨 말을 할 지 대충 상상이 가지만.

"아까 하려던 질문은 뭐죠? 뭔지 알 것 같지만 일단 물어보는 게 예의일 것 같아서."

"아아, 그것 말인데. 정식으로 얘기하려니까... 어떤 식으로 얘기하는 게 좋을지 나도 잘 모르겠다. 제대로 말하는 건... 이 나도 처음이라서."

"호오."

카고메는 얼굴 근육을 움직여 의외라는 표정을 떠올렸다. 화술의 달인이라 생각했던 이 남자가 우물쭈물하는 모습이라니, 전혀 생각 못 한 부분이었다.

"그렇게 신기하게 볼 건 없어. 말하는 건 자신 있다. 지금은 그저 단어를 선택하는데 조금 애를 먹을 뿐이다."

잠시 머뭇거리던 아스팔은 이내 마음을 굳힌 듯, 정색한 얼굴로 말을 꺼냈다.

"너도 알다시피, 난 프린세스 후보를 찾는 일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자객의 손에서 살아남은 단 1명의 프린세스 후보를. 그건 내게 있어서도 세계에 있어서도 매우 중요한 일이었으니까.

그 프린세스 후보는 바로 찾을 수 있었어. 사람을 매료시키는 힘, 넘치는 기품,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카리스마, 백성을 이끌 지식... 프린세스 후보가 너라는 건 보자마자 바로 확신했어. 그 날, 안전을 위해 사라졌던 넌 다른 세계에서 프린세스에 걸맞은 멋진 여자로 성장해 있었다."

아스팔은 성큼성큼 다가와 그녀의 앞에 섰다. 한 손을 들어 그녀의 얼굴을 살짝 쓰다듬으며 아스팔은 감미료를 뿌린 달콤한 목소리로 말했다.

"계속 널 찾고 있었어. 넌 나의 부인이 될 자격이 있는 자. 세계의 조화와 안녕을 관장하는 인간계의 프린세스에 어울리는 자다."

"......,"

"진심을 담아 요청하건대, 나와 함께 이 세계에서 살아 줬으면 한다. 그리고 나의 반려자가 되어 같이 왕국을 이끌어주길 바란다. 받아들일 수 있겠나?"

카고메는 눈을 내리깔고 그의 시선을 회피했다.

싫다며 거절했던 남자가 프러포즈를 했다. 좋든 싫든 다시 한 번 결정을 내려야만 한다.

아스팔은 어떤 결과도 삼가 받아들이겠다는 뜻을 품은 눈동자로 그녀를 보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이야기를 하기 전에도 비슷한 말을 했었지.

예전 같았다면 단칼에 거절했을 것이다. 여태껏 그랬던 것처럼. 하지만 지금은 무작정 거절하지 못했다.

여느 때처럼 거절하자니, 자신을 위해 희생한 가족들이 마음에 걸렸다. 그저 전쟁의 혼란에 휩쓸려 목숨을 잃었을 것이라 생각했던 가족들이, 실은 자신을 살리기 위해 목숨을 버린 것이다. 그런 일이 있는 줄 몰랐고, 내가 원한 것이 아니었다는 변명은 통하지 않는다.

결혼을 사랑하는 사람과 해야 한다는 지론도 옛날에 깨진지 오래. 일련의 사건들을 통해 카고메는 그녀의 가치관을 바꿔버릴 만큼 냉정한 현실을 경험한 터였다.

게다가 자신을 친자식처럼 키워준 용사도 자신이 프린세스가 되길 원하고 있다. 아스팔에게 어떻게 설득당했는지는 몰라도, 그 내면에는 그녀가 잘 살기를 바라는 모성애가 들어있으리라. 당사자의 의견을 확인했는지, 동의를 얻었는지의 여부는 차치하더라도.

그렇다고 승낙하자니 그것도 내키지는 않는다. 보란 듯이 자신을 갖고 논 남자의 프러포즈를 그냥 승낙하다니, 삼류 막장 드라마에도 안 나올 전개다.

"...내가 좌우명으로 삼는 말이 몇 가지 있는데요. 제일 우선시하는 게 뭔지 알아요?"

카고메는 오랜 시간동안 고민하다 결국 결정을 내렸는지, 천천히 고개를 들며 말을 꺼냈다.

"내가 알 턱이 없지. 그게 뭔데?"

"갚을 수 없는 빚은 지지 않는 게 당연하다."

그녀는 바로 대답했다. 아스팔의 눈을 똑바로 응시하며 차분히 말을 잇는다.

"상환 능력도 없으면서 빚지는 사람은 최악이에요. 그런 사람들을 너무 많이 봐서, 난 절대 그렇게 되지 말자고 생각했죠. 그래서 용사님이 날 거두어주셨을 때 그 분이 기뻐할 만한 삶을 살자고 다짐했었고, 그 분은 내가 자주적인 삶을 살길 바라셔서 난 사랑하는 사람과 살겠다는 목표를 세운 거예요.

그런데... 사랑이라 생각했던 관계는 깨졌고, 그 분은 내가 프린세스가 되길 원하시죠. 낳아주신 부모님도 형제들도 그러기를 바라고 희생까지 했고, 나도 가족들을 위해 반드시 프린세스가 되겠다고 다짐까지 했었고요. 난... 난 그 사람들에게 받은 게 너무 많아서... 그들이 원하는 걸 내칠 수가 없어요..."

카고메는 살짝 고개를 숙여 떨어질지도 모르는 눈물을 감췄다. 떨리는 감정을 다잡기 위해 마음을 다잡기 위해 입술을 깨물었다.

"...받아들이겠어요. 까짓 거, 하자고요. 하지만 착각하진 말아요. 내가 승낙하는 이유는 내 자신과의 약속이자 내 인생을 망가뜨린 근원인 혁명 세력과 뭐시기라는 자객에게 복수하기 위해서니까. 알았어요?"

"무슨 말을 하는지 알겠다. 생각했던 것보다 현실을 잘 아는 것 같아 다행이군. 또 사랑타령 따위가 나오면 어떡하나 살짝 걱정했었거든."

"사랑이란 것도 결국은 경험치를 쌓아서 끌어내는 감정이니까, 노력한다면 서로 좋아할 수도 있겠죠. 누구누구들 덕분에 그게 덧없는 거라는 건 충분히 잘 알았다고요."

카고메는 콧방귀를 뀌며 등을 돌렸다. 아스팔은 돌아서는 그녀의 어깨를 잡아 돌린 뒤 거칠게 끌어당기고 갑자기 입을 맞추었다.

"갑자기 무슨 짓을 하시는 거예요, 당신은?!"

"명색이 프러포즈인데, 맹세의 키스 정도는 해두는 편이 낫지 않나 싶어서. 정식으로 식을 올리게 되면 또 하게 되겠지만. 그 때도 잘 부탁한다."

"......"

솔직한 건지 눈치가 없는 건지 알 수가 없다. 어이가 없어 멍하니 아스팔을 주시하면서 카고메는 뇌리를 스치고 지나간 불길한 예감에 살짝 몸을 떨었다.

이 남자에게는 도저히 이길 수가 없다. 반쯤은 기세에 맡기고 승낙해버렸는데, 역시 잘못된 선택을 한 건지도 모른다.

카고메의 내면의 갈등을 알 리 없는 아스팔은 그녀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새하얀 미소와 함께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승낙해준 이상, 나의 반려자이자 한 국가의 프린세스로서 나라의 안정과 혁명 세력을 토벌을 위해 함께 노력하자. 물론, 널 존중하고 부부로서의 의무를 다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

아스팔은 잠시 뜸을 들이다 굳게 결심한 얼굴로 마지막 한 마디를 덧붙였다.

"평생 남부럽지 않은 삶을 살 수 있도록 해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