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메5] Vendetta 프메소설 2012. 7. 21. 22:30

[남자의 시점]

나의 소설 같은 이야기를 한 치의 의심 없이 그대로 믿어 주고, 나와 함께 푸른 병을 찾아 일본의 시내를 돌아다녔던 붉은 눈의 소녀.
그녀의 홍옥 같은 눈동자에 빠져, 나는 자신의 신분을 망각하고 내가 혐오해 마지않던 싸구려 하이틴 로맨스의 남주인공이나 할 법한 생각을 갖기에 이르렀다.
자신이 반한 여자와 결혼하기 위해 모든 권력과 부귀영화를 내려놓았다는 이야기...
눈을 반짝이며 항상 내 이야기를 경청해 주었던 그녀도 나와 같은 방향을 바라보리라 여겼다.
그래서 내 뒤를 밟은 비서가 모든 사실을 알아내 내와 그녀의 사이를 갈라놓고 그녀에게 '충고'했다는 사실을 알고도 희망을 끈을 놓지 않을 수 있었고, 겨우 놈들의 감시를 피해 도달한, 우리가 처음 만났던 공원에서 비를 흠뻑 맞으면서도 오직 나만을 기다리던 그녀를 발견했을 때의 내 얼굴이란!
이 세상 그 누구도 부럽지 않다는 관용구는 이 순간만을 위해 존재한다고 여겼다.
두 번 다시 볼 수 없을 것만 같았던 천상의 미소와 마주했다는 사실에만 정신이 팔린 나는 머잖아 그녀의 입술에서 떨어진 내 고백에 대한 답변이 모든 걸 송두리째 무너뜨릴 거라곤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미안해요. 당신의 고백은 고맙지만 받아들일 수 없어요...
세차게 쏟아지는 소낙비처럼, 나의 가슴을 도려내는 그녀의 잔혹한 대답.
재회하자마자 서로 얼싸안고 나누었던 뜨거운 딥키스의 잔재마저 날려버리는 단호한 거절의 말.
아주 잠시, 나는 꿈을 꾼 것이라 생각했다.
나와 같은 길을 걷고, 같이 손을 잡고, 냉혹하기로 소문난 내 비서의 '충고'에도 굴하지 않고, 별다른 약속도 없이 우리가 처음 만났던 장소에 무작정 나와 하염없이 나만을 기다려 주었던 여인이 내 청혼을 뿌리치리라곤 꿈에도 생각지 않았으므로.
허나 꿈이 아니었다.
나의 고백을 물리치는 그녀의 슬픈 눈은 꿈이 아닌 현실이었다.
세상이 항상 내 뜻대로만 돌아갈 리 없다는 것도, 전혀 예견하지 못했던 고비에 부딪힐 경우 어떻게 헤쳐 나가야 할지 잘 알고 있으면서도, 나는 바보처럼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첫눈에 반했다고 할 수는 없었지만, 나와 그녀는 공원에서 처음 만났을 때부터 서로에게 강한 암시를 받았고, 그 덕에 곧바로 호감을 얻어 빠른 시일 안에 급속도로 가까워질 수 있었다.
비록 만난 횟수는 적었다만, 단 한순간도 서로를 사랑한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거늘... 그러한 내 기대를 배신해 딱 잘라 거절하는 그녀에게 대체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는가.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그녀의 선택을 존중한다는 의사를 보이고 신속히 물러나는 것뿐이었다.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나를 내친 그녀의 얼굴을 이 이상 응시했다간 나도 모르게 이성을 잃어버릴 것만 같았다.
그러나 그녀가 나를 어떻게 대했건 그녀는 내가 처음으로 마음을 내어준 여인. 그녀가 날 밀어냈다고 해서 상처 입히는 짓 따윌 할 수 있을 리 없다.
그렇게 나는 비 속에 감춰진 그녀의 눈물을 눈치 챌 새도 없이 서둘러 그 자리를 뜨고 말았다. 목 놓아 내 이름을 외치는 그녀의 아련한 부르짖음을 등에 업고서.

일본을 뜨는 비행기에 몸을 싣고 나의 조국으로 출발하기를 기다리는 지금, 나는 그녀와 함께 찾아냈던 푸른 병의 오묘한 빛에 시선을 가두고 우울한 상념에 잠겨 있다.
어째서 그녀는 내 고백을 거절했을까.
대화가 안 되면 대화 이외의 방법을 밀어붙이는 비서의 '충고'에도 불구하고 나를 기다렸던 그녀가... 그녀의 선택을 존중하여 돌아섰을 때 내 뒤로 애호했던 그녀가... 대관절 왜 그랬을까?
어째서 그녀는 내 손을 잡지 않았을까...

 


[여자의 시점]

눈을 감으면 떠오르는 그의 불그스름한 금발. 수줍게 얼굴을 붉히던 그의 순박한 미소.
그의 비취색 눈을 보고 있노라면 수도 없이 되뇌었던 나의 목적의식을 놓쳐버릴 것만 같았다.
복수만을 꿈꾸며 앞으로 나아가던 주인공이 예사로운 사람과 사랑에 빠져 보복의 굴레를 스스로 끊어내고 그 사람과 함께 평범하게 살아간다는 이야기...
이 시대의 로맨티스트를 뽑는다면 강력한 우승후보로 떠오를 게 틀림없는 그 사람과 함께라면, 부모님의 복수 같은 건 전부 잊어버리고 평범하게 살 수 있을 줄 알았다.
아니, 실제로 서너 번 그를 만나면서 그와 함께 하마사키 시를 돌아다니며 '의미 있는 것'을 찾아다니는 동안에는 난 보복에 대해선 거의 잊어버리고 있었다.
그렇다. 만약 그가 아사쿠라나 쿠로다 같은 동급생처럼 지극히 평범한 남자였다면, 나도 복수심 같은 마이너스 감정은 털어버리고 그가 바라보는 태양을 함께 쫓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의 순박한 미소도 나의 열망을 꺼뜨리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는 사실을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냉혹한 눈초리를 선글라스 속에 감추고 등장한 검은 양복의 사나이.
거절하면 대화 이외의 방법을 사용하겠다며, 더 이상 그를 찾지 말라 '충고'하던 그의 비서.
비서의 등장으로 나는 겨우 깨달을 수 있었다.
사랑이라는 덧없는 기류에 휘둘려 6년 전에 맹세했던 나 자신과의 약속을 저버리고, 나아가선 나 자신을 부정하려 하고 있었다는 걸.
더 이상 그를 만나면 안 되었다.
비서 따위가 무서워서가 아니다.
이 이상 그를 만났다간, 진짜로 스스로에게 걸었던 맹세를 거스르고 운명을 피해 도망치고 말 것 같았기 때문이다.
나 자신과의 약속을 어겨 그 대가를 치르는 것은 두렵지 않았지만, 나라는 존재와 엮였다는 이유로 아무 잘못 없이 평범하게 살아온 그를 소용돌이 속에 밀어 넣을 순 없었다.
그래서 나는 비서의 '충고'를 발판으로 삼아, 그와의 만남은 한낱 한 여름 밤의 꿈에 불과했다고 스스로를 채찍질하며, 그를 만나기 전으로 돌아가 여느 때와 다름없이 수련에 힘쓰는 나날을 보내고 있었지만...
아무래도 운명의 여신은 나의 결심을 한 번 더 시험해 볼 작정이었나 보다.
금방이라도 무너져 내릴 것처럼 우거지상을 한 밤하늘.
달조차 구름 속에 숨어 어두워진 길을 지나 귀가하던 나는 뭔가에 홀리기라도 한 듯 공원을 향해 걸음을 옮겼고-
멍하니 벤치에 앉아 몇 시간이고 하염없이 시간을 죽였다.
이유는 몰랐다. 그저... 그저 아무 생각 없이 오랫동안 주저앉아 있고 싶을 뿐이었다.
검은 베일 속에 파묻혀 얼굴을 잔뜩 찌푸렸던 하늘이 기어이 울음을 터뜨리고 나서야 겨우 정신을 차리고 자리에서 일어난 나는... 보고 말았다.
다신 만나지 않으리라 여겼던, 그의 숨을 헐떡이는 모습.
천천히 나를 향해 다가오는 그의 모습을 바라보는 나...
나는 당혹감이 어린 그의 비취색 눈동자를 통해 투영된, 그와 같은 표정을 짓는 내 얼굴을 확인할 수 있었다.
허나... 같은 감정을 공유하는 두 얼굴 속에 담긴 서로의 생각은 분명 달랐다.
완벽하게 허를 찔린 그의 얼굴에는 재회의 기쁨이 엿보였으나, 나는... 그저 의표를 찔린 채 어찌할 바를 모르고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가만히 서 있을 뿐.
흔들려선 안 된다고 스스로를 힐난하는 마음과는 달리, 어느 새 나의 눈에는 뜨겁고도 어렴풋한 안개가 스며들었고...
그저 멍청히 서 있는 나를 향해 천천히 다가와, 나를 강하게 끌어안는 그의 부드러운 손길에 그대로 몸을 맡겨 입술을 허락했다.
농밀하게 얽어 오는 그의 거칠고 따뜻한 혀를, 나는 거부할 수 없었다.
아니... 거부하지 않았다고 표현하는 게 더욱 진실에 가까울 터.
왜냐하면... 한 순간 이대로 시간이 멈춰버렸으면 좋겠다고 빌었던 기도가 무색하게, 딥키스가 끝나고 자기만의 프린세스가 되어 평생을 함께 해 달라는 고백을 기어코 물리치고 말았으니까.
-미안해요. 당신의 고백은 고맙지만 받아들일 수 없어요...
떨어지지 않는 입을 겨우 열어 잔혹한 거절의 대답을 내놓은 나.
정신줄 놓고 무턱대고 고개를 끄덕이는 짓을 저지르지 않은 건 칭찬할 만하지만... 그가 키스를 시도했을 때 바로 밀어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의 눈초리에 아까와는 다른 의미의 당혹감이 어렸다.
하긴 그렇겠지. 나도 자신을 좋아할 거라 여겼을 테고... 게다가 그건 사실이었다.
첫 눈에 반했다 하기엔 좀 모자랐지만 처음 만났을 때부터 그와 나는 서로 강하게 끌렸고, 그 때문에 만난 횟수는 한 손에 꼽을 정도였으면서도 서로를 사랑한다고 확신할 수 있었다.
그런데 프린세스가 되어 달라는 고백을 냅다 걷어찼으니 그로서는 배신당했다며 화를 내도 나로선 반박할 수 없는 셈이었다.
하지만 내게는 하지 않으면 안 될 일이 있다. 언제 끝날지... 아니, 끝날 수나 있을지조차 기약할 수 없는 일.
많은 시간을 필요로 할 뿐만 아니라 목숨마저 걸어야 하는 위험한 일.
당연한 얘기지만 양쪽을 같이 취할 순 없는 노릇.
그에게 사실대로 얘기하고 모든 걸 마무리 지을 때까지 기다려 달라는 건 말도 안 되는 생각. 사람이 염치가 있어야지, 아무리 나라도 그런 짓은 못 한다.
어찌됐든 결국 둘 중 하나는 포기할 수밖에 없는 상황. 그래서 나는... 그를 포기했다.
고백을 거절할 때까지도 뿌리칠 수 없었던 달콤한 유혹을 겨우 밀어내고 그에게 이별을 고했다.
왜 거절하느냐고 따지지 않을까 싶었던 우려와는 달리 그는 깨끗이 물러났다.
충격을 받았어도 그는 여전히 사랑하는 사람을 배려할 줄 아는 예의바른 신사였다.
아주 잠깐, 나의 슬픈 눈을 응시하던 그는 별안간 등을 돌려 거의 뛰다시피 하여 그 자리를 떠났다.
그는 알고 있을까? 소낙비 속에 감춰진 나의 눈물을. 그의 등 뒤에서, 그의 이름을 비소하던 나의 목소리를...

내가 흘린 피 냄새, 나의 원수가 흘린 피 냄새가 한데 어우러져 하늘을 찌른다.
양 손에 깊게 배어 스며든 비릿한 생의 기운은 나를 완전히 좀먹어, 이제는 그게 나의 것인지 아닌지조차 가늠할 수 없게 되어버렸다.
하기사 그 피가 내 것이든 아니든 무슨 상관이랴.
중요한 건 이 내 손으로 나의 적들을 섬멸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것.
그래, 복수라는 녀석이다.
마지막 프린세스 후보를 처단하러 온 자객과의 조우를 통해 나는 잃어버렸던 과거의 기억을 되찾았고, 이를 계기로 나는 악마에게 혼을 팔아 모든 것을 앗아 간 원수들에게 복수하기 위해 6년이라는 인고의 시간을 견뎌 마침내 내 손으로 직접 놈들을 처형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마음 같아선 기억을 수복한 시점에서 바로 복수에 뛰어들고 싶었으나, 2가지 이유로 6년 동안이나 숨을 죽이고 살아가야만 했다.
하나, 복수의 칼을 갈기엔 그 당시의 난 너무나도 어렸다. 100미터 전력질주를 하는 것만으로도 지쳐 숨을 헐떡이던 나로선 우리 가족을 학살한 무자비한 악마들을 상대하기엔 너무 약했다.
둘, 과거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대신으로 내 보호자께서 내거신 조건 - 고등학교를 졸업하는 것. 졸업 후에는 내가 무얼 하든 말리지 않으시겠다며, 그 때까지는 얌전히 학교에 다니면서 나 자신을 다스리는 법을 배우라고 신신 당부하셨던 것이다.
어쩌면 그 분께선 6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이라면 타오르는 복수심을 죽일 수 있으리라 생각하셨는지도 모르지만...
애석하게도 그 분의 예측은 빗나갔다.
이젠 얼굴도 잘 기억나지 않는 내 친부모를 죽인 원수를 고작 6년의 시간으로 다스릴 수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아침에 무사히 눈을 뜰 때마다 차오르는, 나만이 살아남은데 대해 맛보는 죄책감.
그 감정이 덧없이 흐르는 세월로 씻어 내리기에는 너무나도 거칠고 견고했던 것도 한몫했고.
6년 동안 내면에서 복수의 칼을 갈던 나는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나의 진짜 고향으로 돌아가 자신들을 혁명 세력이라 부르는 적의 무리들을 차례차례 토벌해 나갔다.
검을 휘두르고, 상처를 입고, 피를 뒤집어쓰고, 상대가 누구건 간에 내 앞길을 가로막는 놈들은 한 순간의 망설임도 없이 처단했다.
그리고 어느 새 나는 사람들의 입에서 페퍼민트 렘이라는 진짜 이름 대신 다른 호칭으로 오르내리기 시작했다.
용사라고 부르는 사람들도 있었다. 악마에게 혼을 판 여자라고 수근대는 무리도 있었다.
하지만 그 중에서 내가 가장 마음에 들어 한 호칭은 따로 있었다.
피로 물든 살육자.
지금의 나에게 딱 어울리는, 자칫 헤이해질 수 있는 마음을 다잡도록 만드는 7음절의 칭호.
소문을 들은 왕국에서는 친히 나를 불러들여 병사들을 이끄는 장군이 되어 달라고 청탁했으나 나는 거절했다.
내가 혁명 세력들을 토벌하는 건 개인의 복수 때문이지, 왕국에 대한 충성심 때문이 아니었으니.
권력이라는 달콤한 열매를 굳이 마다하자마자 내게 던져진 이해할 수 없다는 시선.
날 때부터 권력을 쥐고 살아온 그들로선 복수에 눈이 멀어 모든 걸 내려놓은 사람을 이해할 수 없을 테지.
일단 지위를 받게 되면 누군가에게 종속되어 꼭두각시놀음에 끌려나가 주인의 눈에 들 때까지 언제까지고 춤을 추어야만 할 터.
혁명 세력들을 물리치는데 있어 왕실이 내리는 지위란 오히려 내게 족쇄만 될 뿐이었다.
...그만하자. 이대로 과거에 젖어 있어봤자 변하는 건 아무것도 없어.
나는 고개를 흔들어 잠시 상념에 젖어 풀어졌던 긴장의 끈을 다시 조이고 피범벅이 되어 널브러진 원수들의 산을 넘어, 일전에 나를 노리다 왼쪽 귀를 잃고 도망쳤던 자객과의 마지막 결전을 위해 변경의 산림에서도 특히 숲이 우거져 사람들의 발길이 닿지 않은 후미진 곳으로 향했다.
혁명 세력들의 수장들에 대한 정보를 얻기 위해선 단연코 그 자의 목이 필요했기 때문에. 설령 아무것도 모른다 해도 살려둘 생각은 없었지만.
서서히 다가갈수록 짙은 녹음 속에 엷게 배어 나오는 서늘한 살기. 이는 놈이 가까이 있다는 확실한 증거.
나는 무심코 피가 묻지 않은 손가락을 들어 입술을 어루만졌다. 언제부턴가 저도 모르게 들어버린 몹쓸 버릇이 또 튀어나와 버린 것이다.
나는 꿀꺽 침을 삼키고는 허리춤의 검을 향해 잽싸게 손을 뻗었다. 칼자루에 닿은 손을 단단히 쥐고 검을 끌어냄과 동시에-
한 공간 가득 배여 있던 살기가 한데 뭉쳐 나를 향해 달려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