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가씨의 방이 비었다.
14년간 방을 차지했던 주인은 돌아올 수 없는 길을 떠났다.
이 글을 쓰는 나 역시 머잖아 쿼츠 가를 떠나 유랑 길에 오를 예정이다.
정착지는 달랐지만 한 시도 내 피가 흐르는 지맥을 잊은 적은 없었다.
가면을 쓰고 행복을 위장했던 광대들이 제자리를 찾는 데는 생각보다 많은 시간을 요할 것이다.
본인의 무지를 깨닫는 데는 더욱 많은 시간이 걸릴지도 모르고, 아니면 평생을 걸어야 할지도 모른다.
궁금하다.
이 저택의 주인은 전자일까, 후자일까.
어느 쪽을 선택할까?

1448년 8월 18일, 큐브의 집사 일지에서

 

 


적의 수장을 눈앞에서 놓쳐버린 푸른 새가 분노로 파르르 몸을 떨었다.
샤를의 눈동자는 자신의 명령에 따르기는커녕 대놓고 반기를 든 부하를 죽여 버릴 듯 노려보고 있었다.
만약 시선만으로 사람을 죽일 수 있었다면 에이미의 심장은 진즉에 뚫려 바람구멍이 났을 것이다.
샤를은 입술을 깨문 이에 힘을 주어 미쳐 날뛰는 살의를 억눌렀다. 비릿한 내음이 입 안 가득 퍼지는 양을 맛보며, 그는 검을 쥔 손에 힘을 실어 그녀에게 다가갔다,
자신이 벌인 죄의 무게를 알고는 있는 걸까?
얼굴색은 창백했지만 에이미의 얼굴은 무감정의 페르소나로 덮여 있다. 존재하는 듯 존재하지 않는 듯 가만히 서서 샤를이 다가오는 것을 멍하니 응시하고만 있었다.
짜악.
분노가 담긴 오른손이 그녀의 뺨을 매섭게 올려붙였다. 순간적으로 구둣발이 튀어나가려던 것에 신경 쓰느라 정작 손이 앞서는 것을 막지 못한 것이다.
샤를은 입을 다물고 올려붙인 뺨을 감싸 쥔 에이미를 바라보았다. 무슨 생각으로 그런 짓을 했는지 어깨를 쥐고 흔들고, 어떤 방법을 써서라도 자백을 받아내고 싶었다.
그러나 그와는 별도로 뒷일도 생각해야만 했다. 이 녀석을 어떻게 처리해야 하지?
즉결 처분을 내릴 셈이라면 깊이 생각할 필요가 없다. 부하들이 보는 앞에서 몇 가지 묻고 명령을 내리면 그만이다.
하지만 목숨을 부지해 줄 생각이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그 딴 거 알 게 뭐냐.
샤를의 마음속에서 누군가가 속삭였다.
그는 지금 굉장히 화가 나 있었다. 말을 하려 입을 열었다가는 더 이상 자신을 제어하지 못하고 분노에 몸을 맡겨 날뛰고 싶을 만큼.
하지만 화가 난다고 생각 없이 행동하는 것은 미천한 자들이나 하는 짓.
생각해야만 한다. 철저히 국법에 따라 심판할지, 눈앞에 선 부하의 배경과 정혼자에 대한 배려를 고려한 재량으로 다스릴지.

"왕자님!"

얼마나 시간이 흐른 건지, 샤를이 들어왔던 입구를 따라 들어온 몇몇 부하들이 다급한 어조로 그의 호칭을 입에 올렸다.
거짓말 같이, 다른 부하들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샤를의 마음속에서 자취를 감췄던 이성이 번뜩 고개를 들이밀었다.

"무사하셔서 다행입니다!"

왕자의 얼굴을 보고 안심이 되었는지, 달려 온 부하들이 황급히 무릎을 꿇고 가신의 예를 갖췄다.

"...전투는 어떻게 됐나?"

에이미에게서 시선을 뗄 구실을 만든 것에 감사하며, 샤를은  자신을 찾아온 부하들에게 경과를 물었다.
서너 명의 병사들은 잠시 자기들끼리 눈길을 주고받았고, 이내 가장 선임격인 병사가 한 걸음 나서 그의 질문에 답했다.

"보고 드립니다. 치열한 전투를 벌이던 중, 돌연 적들이 후퇴하였습니다!"

"...후퇴했다고?"

샤를이 미심쩍다는 듯 되물었다.

"이해하기 어려우실 거라는 건 알고 있습니다! 그래도 사실입니다. 전투를 벌이던 중 어느 시점을 기산하여 마왕을 포함한 적들이 등을 보여 뒤로 물러났습니다. 물론 적의 뒤를 쫓아야 했습니다만..."

병사는 샤를의 눈치를 살피며 말을 이었다.

"명령을 내려 주셔야 할 왕자님께서 안 계신데다가 대신 선두를 지휘할 장군들이 상처를 입었기 때문에 쫓지 못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만약 적의 함정일 경우 오히려 의표를 찔릴 가능성도 있었기에 자리를 지키는 것이 현명하다고 판단했습니다."

샤를은 겉으로 드러나는 실망감을 애써 눌렀다. 마음에 드는 설명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최악의 보고는 아니지 않은가.
게다가 지금은 이미 지난 일을 가지고 왈가왈부할 시간이 없다. 먼저 반기를 든 저 여기사를 처리해야만 했다.

"그녀를 끌고 와라."

샤를은 보고를 마친 병사에게 턱짓으로 바짝 얼어 있는 에이미를 가리켜 새로운 명령을 하달했다.
잠깐의 지연(遲延)은 샤를의 이성을 신기하리만치 빠르게 원래 자리로 돌려놓았고, 가장 합리적인 결정을 내릴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예... 알겠습니다."

겨우 얼굴색을 거두고, 병사는 하명을 받들겠다는 의사를 표했다.
대체 그 잠깐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기에, 주군이 저리 화가 난 것일까?
에이미에게 다가가 팔을 단단히 붙드는 모양새를 지켜보는 병사들의 눈동자는 호기심으로 번들거렸다.

 

 


마을에는 호기심어린 집착과 소문을 즐기려는 가증스런 시선이 가득했다.
빨랫감을 가득 안고 우물가를 찾은 아낙들, 한 걸음 물러서 뒷짐 지고 전쟁을 관망하는 노인들, 국가의 안녕을 위해 열정을 퍼붓는 훈련생들, 하루 일과를 마치고 술집에 삼삼오오 모여든 가장들...
나이도 관심사도 제각각인 그들이 모여 입에 올리는 주제는 기묘하게도 완벽하게 일치하고 있었다.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영웅 중 하나로 칭송했던 인물, 하지만 몇몇 병사들에게 이끌려 온 지금에 와서는 목을 쳐야 할 죄인에 불과했다.
에이미가 처음 마을의 땅을 밟았을 당시에 전해진 소식은 사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소문은 소문을 낳는다고, 사람들의 입을 타고 옮겨진 스캔들은 점차 와전되어, 명령 불복종에 따른 불명예제대에서 급기야 샤를 왕자의 암살을 기도한 테러리스트로 불어나 있었다.
자식 교육을 어떻게 시켰느냐는 의무성 힐난에서부터, 전시에 처벌이 너무 가벼운 것 아니냐는 항의성 불만들이 여름의 메마른 기운을 타고 브라이언의 어깨에 내려앉았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
브라이언은 마법의 문장을 중얼거리며 당장에라도 머리를 감싸 쥐고 주저앉고 싶은 충동을 억눌렀다.
비밀이 새어나간 뒤부터 줄곧 예상했던 일이다.
아니... 그 아이를 받아들였을 때부터, 이자벨을 증오하기 시작하면서부터, 짐작했던 일이 아닌가.
그 시기가 조금 일찍 찾아온 것뿐이다. 대수로운 일이 아니었다.
마을 사람들의 혀를 차는 목소리, 경멸의 색이 담긴 눈짓 등을 아무렇지 않은 듯 받아내며, 브라이언은 막 도착한 왕자의 전언을 받들기 위해 조심스레 손을 뻗어 편지를 봉인한 휘장을 뜯었다.
수려하게 춤추는 정갈한 글씨체 속에는 저 멀리 분노를 치우고 냉정하고 다소 관대하게 해석한 상황 설명과 함께, 부드럽지만 단호한 추방령이 동봉되어 있었다.
전시라는 점을 감안하면 믿을 수 없을 만큼 가벼운 처벌이 틀림없다.
국법을 중시했다면 그 자리에서 즉결 처분을 내렸을 터. 그러나 처벌이 이리 가볍다는 것은...
전장에 나가 있는 이 젊은 왕위계승자는 법률이나 국민의 감정보다는, 그의 정혼자가 중히 여기는 우정과 하극상을 벌인 부하의 집안 배경을 중시하여 처벌을 결정한 모양이었다.
하긴, 샤를로서는 에이미의 의중을 알 리 업으니 이해 못할 것도 아니다만.
브라이언은 몇 번이고 샤를의 편지를 정독했다.
이윽고, 마음의 준비를 마쳤는지 부스스 자리에서 일어나는 그의 표정에는 아무 감정도 실려 있지 않다.
만족스러워 하는 것도, 불만스러워 하는 것도 아니다.
딱히 감정을 숨기는 자의 것이 아니었다. 굳이 말하자면, 그저... 어떤 감정을 세워야 할 지 본인도 갈피를 잡지 못하는 것 같다고 할까.
자신의 가면을 매만질 틈도 주지 않은 채 그는 불명예제대 후 말없이 며칠 째 방에 틀어박힌 수양딸의 방문을 조용히 두드렸다.
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순간 잠든 건가 싶었지만 그것과는 미묘하게 느낌이 달랐다.
조심스레 힘으로 밀어 보니, 별다른 반항도 없이 경첩이 빠져 삐거덕 하고 울음을 토해낸다.
방에는 아무도 없었다. 가지런히 정리된 것을 보니 잠시 나간 것도 아닐 터.
아니, 마을에 와전된 소문이 쫙 퍼진 지금 밖에 나가는 것은 돌을 던져 달라고 부추기는 것이나 매한가지였다.
해가 중천에 떠 있는 지금 출타한 것이라면, 말이지.
브라이언은 깨끗이 닦인 무기와 방어구가 자리 잡은 탁자를 지나, 에이미가 공부를 위해 소녀시절 애용하던 책상에 멈춰 섰다.
몇 달 간 자리를 비워 뽀얀 눈이 내려앉아야 마땅하거늘, 살짝 살갗을 맞댄 부위에서는 까칠한 먼지 대신 부들부들한 나뭇결의 차가운 감이 스멀스멀 피부를 타고 오른다,
브라이언의 손은 책상의 가장자리를 지나 양피지들이 한데 뭉쳐 두터운 무리를 이룬 곳에 이르렀다.
잉크로 더럽혀진 것, 잔뜩 구겨진 것, 찢어진 것을 헤치고 겨우 멀쩡한 양피지를 주워 올린 그는 살짝 떨리기 시작하는 손을 진정시켜 둘둘 말린 그것을 거칠게 도려냈다.


▶아버님께.

직접 얼굴을 뵙고 말씀드리지 못하고, 이런 편지로 작별인사를 대신하는 것을 용서해 주시기 바랍니다.
아버님께서 지금까지 저를 곁에 두고 키워주신 것은 진심으로 감사하고 있습니다.
인간으로 살면서 쌓아 온 많은 추억들은 편지에 전부 담을 수 없을 만큼 가슴 속에 가득 차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인간이라는 존재를 더 이상 믿을 수 없습니다.
아무 죄도 없는 이들을 배척하고, 모습이 조금 다르다고 박해하는 인간.
이기적인 욕망을 위해 다른 이의 영토를 침범하고 사욕을 채우는 인간.
자신의 분풀이를 위해 관련 없는 자를 복수에 거리낌 없이 이용하는... 인간.
물론 모든 인간들이 똑같은 가치관을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은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상황이 온다면 대부분의 인간은 기꺼이 자신의 욕심을 위해 남을 이용하려 들 테지 말입니다.
이용당하는 쪽이 어떤 생각을 하는지는 고려하지 않은 채...
제일 가까운 사이라 여겼던 아버님조차 저에게 품고 있었던 감정을 알게 된 일은... 무척 유감스럽게 생각합니다.
그 때문에 지금까지 옳다고 믿어 왔던 가치관을 완전히 뒤집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내 것이니 누리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겨 왔던 모든 것들은, 전부 누군가의 피와 살을 짓밟고 빼앗은 것에 불과했습니다.
인간의 본성은 악하며 인간의 요구조건을 들어주는 것 외에는 어떤 방법을 취하더라도 그 본성을 돌릴 수 없다는 증거가 되겠지요...
그래서 저는 이 곳을 떠날 생각입니다.
지금까지 키워주셔서 감사했습니다.
언제까지나 몸 건강히 지내시길.

아버님의 수양딸로부터◀


그는 양피지를 읽었다. 두 번, 세 번, 반복해서 같은 구절을 눈으로 훑어 내렸다.
브라이언이 전달하려 했던 얘기를, 에이미는 미리 알아채고 모습을 감춰 준 것이다.
마음 속 작은 악마는 심술궂은 목소리로 이제 만족하느냐고 묻는다.
대답할 수 없다.
14년 전부터 지금까지 1가지 목표만을 가슴에 품고 전력 질주했는데, 이제는 단 한 번도 생각한 적 없었던 문제에 봉착한 것이다.
이 다음엔 어떻게 해야 하지?
브라이언이 던진 질문에는 아무도 대답하지 않는다.
대답은커녕, 이제껏 줄곧 미뤄 오기만 했던 질문에 대답하라고 그의 등을 떠밀며 압박을 가한다.

목표를 이룬 나는... 행복한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