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즈 : 아가씨는 '그 분'이 왕자님이었다는 걸 전혀 몰랐다고 하셨죠? 그럼 어떻게 왕자님의 정체를 알게 된 거죠?

실프 : 음... 인생은 놀라움의 연속이라고 하면 대답이 될까?

우즈 : 그게 무슨 말이에요?

실프 : 이제 더 이상 놀랄 일은 없을 거라 생각하고 있었거든. 그러던 차에 별안간 그 일이 일어났어.

 

 


진주를 갈아 만든 새하얀 분가루.
장미를 짓이겨 가두고, 그 고혹적인 향취만을 빼내 담아낸 은은한 크리스마스로즈 향수.
온갖 색으로 물들인 화장 도구에서 저마다의 개성을 뽐내는 매트, 프라이머, 기타 등등.
나는 나의 몸치장을 위해 분주히 움직이는 시녀들의 꼭두각시가 되어, 거울을 통해 실시간으로 아름답게 변하는 내 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화장, 머리 손질, 드레스 코드와 그에 어울리는 액세서리 세팅 등.
치장이 끝날 때마다 스타일이 어떤지 묻는 시녀들에게 당사자로서의 감상을 피력하며 세세한 비평과 주문을 하길 몇 차례.
머리를 한데 모아 위로 묶어 올린 뒤, 나의 머리칼에 맞춘 것이 틀림없을 라일락 색 리본을 달아 마무리를 한 시녀장이 뒤로 몇 발자국 움직여 살짝 몸을 뒤로 빼 만족스런 얼굴로 잠시 동안 자신의 '작품'을 감상했다.
어느 곳 하나 나무랄 데 없을 만큼 훌륭해 보였는지 거울 너머로 어슴푸레하게 퍼지는 미소를 나는 놓치지 않았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공을 들인 자신이 아닌 모시는 주인의 의사.
시녀장은 순식간에 만족스런 미소를 지우고 극히 사무적인 어조로 나의 의사를 물어왔다.

"마님, 모든 치장이 끝났습니다. 어떠신가요?"

나는 거울이라는 마법을 통해 시녀들이 한껏 꾸민 나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거울 속에 뿌옇게 비치는 라벤더 빛 머리카락, 적갈색 눈동자, 브러시로 말아 올린 풍성한 속눈썹...
나는 거울 속에 비친 익숙지 않은 여인의 출현에 놀란 눈을 연거푸 깜박였다.
깊게 파인 순하고 매끈한 촉감의 흰색 튜닉으로 몸매를 고정하고, 로즈 핑크로 물들인 수수한 디자인의 시스 드레스.
어깨를 그대로 드러낸 과감한 스타일로 가슴 부분을 눈처럼 흰 프릴로 장식하고, 가운데를 드레스와 같은 색으로 꾸민 뒤 금테를 둘러 붉은 색을 특히 강조한 가넷 브로치를 달아 완성시킨 패션.
아름다움을 기준으로 심사한다면 별 망설임 없이 만점을 줄 수 있을 만큼 훌륭한 작품이었다. 다만...
상인 아버지를 두어 다른 평민들에 비해 부유하게 자랐다고는 해도, 특별히 시중드는 하녀도 없이 모든 걸 스스로 관리했던 나 자신으로서는 거울 속 여인이 나라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 낯설음에 밀려 아름다움에 대한 흡족함보다는 껄끄러움이 앞섰던 것이다.

"마님, 혹시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이 있으십니까?"

아무 말 없이 거울만 뚫어져라 응시하는 나의 모습이 마음에 걸렸는지, 시녀장이 다시 말을 걸었다.
하긴, 그들로서는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겠지. 저택의 안주인인 나의 대답 여부에 따라 그들의 처우가 결정될 테니까.

"아니, 그 반대야. 더할 나위 없이 마음에 들어. 역시 맨디의 솜씨는 알아 줘야 해. 실력이 너무 뛰어나서 웬 모르는 여인네가 앉아 있나 싶었다니까."

나는 고개를 저으며 그녀를 안심시켰다.
모시는 여주인으로부터 칭찬을 들은 시녀장의 얼굴에 살짝 홍조가 내려앉음과 동시에, 누군가가 노크도 없이 벌컥 문을 열고 들어왔다.

"준비는 다 됐나?"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얼마 전 막대한 지참금을 넘기고 나를 취한 남편이었다.

"예, 주인님. 마님의 치장은 전부 끝났습니다. 어떠세요? 정말 아름다우시죠?"

마치 100점 받은 시험지를 자랑하듯 시녀장은 내가 뭐라고 대답하기도 전에 먼저 선수를 쳤다.
남편은 잠시 눈동자를 위아래로 굴려 나를 재 보고는 이렇다 할 말도 없이 바로 용건을 꺼냈다.

"더할 나위 없군. 준비가 끝났다면 그만 일어나지."

"그렇군요."

몸치장을 받는 동안 인형마냥 가만히 앉아 있던 나는 반색을 표하며 재빨리 의자에서 일어났다.
예쁘다느니 아름답다느니 하는 상투적인 칭찬은 없었지만, 뭐 상관없다. 그런 걸 바랄만큼 나는 세상 물정 모르는 아가씨는 아니니까.
감정이 끼어들 여지없이 처음부터 끝까지 오로지 재력과 이해타산만으로 이루어진 결혼.
그 중심축이 된 것은 나와 지금의 남편이었다.
얘기하자면 한없이 길어지니 가볍게 요약하자면, '정략결혼'이라는 녀석이다.
평민 사이에 무슨 정략결혼이냐고 비웃지 말길.
세상을 살아가는데 있어 권력만큼이나 중요한 것이 바로 돈.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평범한 평민들에게는 해당되지 않겠지만, 평민일지라도 어느 정도 야심이 있으면서 돈을 쌓아 두고 사는 사람들에게 있어 자식이란 한 밑천 잡을 수 있는 중요한 재산.
돈 많은 사람이 자식을 가난한 귀족과 결혼시킨다거나, 같은 직종에 종사하면서 집안 형편이 비슷한 사람들끼리 이해타산을 전제로 사돈을 맺는 일은 왕왕 있는 일이지 않은가.
그냥 그것뿐인, 전혀 특별할 것 없는 결혼 생활.
남편의 특징을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고루한 사람이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전형적인 남성상이라고나 할까.
그나마 다행인 것은 내 아버지의 재력과 그의 재력이 엇비슷한 수준이라 어느 정도 서로를 존중하고 있기에, 특별한 문제없이 원만한 부부관계를 유지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심심하다면 심심할 수도 있는 관계지만, 차이가 극심한 집안에 시집갔다가 앞에선 무시당하고 뒤에서 징징거리는 가정보다는 훨씬 나을 테지.
나는 고개를 들어 대부호의 안주인으로서의 위상이 제대로 세워졌는지를 마지막으로 체크하고 바로 남편의 뒤를 좇았다.
예정했던 시간에 맞추어 마차 한 대가 저택 앞에 기다리고 있었다.
얼굴 가득 연륜이 묻어나는 늙은 마부(남편 말로는 자신이 어렸을 때부터 집안을 위해 일해 왔다고 한다)가 열어주는 마차에 올라 안자리에 기댔다.
마차는 저택을 빠져나가 백성들의 애환이 그대로 묻어나는 거리를 달리기 시작했다.
아아, 그러고 보니 어디로 가는지 따로 설명을 하지 않은 것 같군.
나와 남편이 향하는 곳은 폐하께서 거처하시는 성이었다.
매년 열리는 신년 축제를 위해 백성들에게 개방하는 그 성 말이다.
특별한 지위를 가진 것이 아닌 일개 평민에게 폐하께서 친히 성으로 초대하신 이유는 무엇일까.
마차가 가도를 달리는 동안 남편에게 물어 본 바로는, 재정이 어려웠던 왕가에 거금을 융자해 준 대가로 왕실에서 주최하는 무도회에 초대를 받았다는 것 같다.
그러고 보니, 결혼 전 만났던 유일한 외간 남자가 지나가는 식으로 흘렸던 토막 정보가 있었지.
서로의 꿈에 대해 이야기하다 왕실에서 열리는 축제들에 대해 언급하게 되었는데, 그 때 재정 사정이 좋지 않으면서도 1년에 몇 번씩이나 화려한 축제를 여는 것이 못내 마음에 걸린다고.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남편이 가진 재력에 대해 다시 한 번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버지도 나름 재력을 보유하고 계셨지만, 이런 생활을 계속 유지하려면 이따금 내가 알바를 하든가 해서 집안 경제에 보탬을 주었어야 했는데(특히 아버지께서 하시던 사업이 잘 안 되어 1년에 100~200G밖에 벌어오지 못하셨을 때는 더더욱).
나에게 지참금이라고 가져온 돈과 선물도 그렇고, 어렵다는 국가 재정을 일으켜 세울 정도의 돈을 융자해 주다니.
정확한 액수는 알 수 없지만, 스케일로 미루어 보아 상당한 양일 텐데, 그만한 거금을 빌려 주고서도 금방 메울 수 있다니. 내 남편이지만, 이 남자는 대체 돈을 얼마나 쌓아두고 사는 걸까.
아무래도 남편이 말했던, 자신이 400 여 년 전 왕국의 경제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던 대상인 크라이스의 후손이었으며 그를 뛰어넘는 상인이 될 것이라는 남편의 야망은 아무래도 빈말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

마차가 가도를 빠져나가 화려하게 장식된 성에 도착할 때까지 우리는 단 한 마디의 말도 나누지 않았다.
나는 그저 길가에 핀 꽃과 지나가는 백성들이 선이 되어 지나가는 창밖의 풍경을 응시할 뿐이었고, 남편은 상류계층과의 만남 시 필요한 예법과 화술 등을 총 망라한 두꺼운 책을 들여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창밖의 풍경에 질려 내가 고개를 돌림과 동시에 남편이 책을 덮었고, 신기하게도 그 타이밍에 마차가 멈춰 섰다.
마부가 문지기에게 우리의 신분과 방문 목적을 설명하고 다시 달리길 수 분, 다시 마차가 멈추고 마부가 문을 열어주자 비로소 길고도 짧은 여행을 끝낼 수 있었다.
마차에 내려서 옷매무새를 바로하고, 우리 부부는 마중 나온 시종을 따라 성의 안쪽으로 향했다.
약속 시간보다 빨리 도착할 수 있도록 손을 썼음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도착한 곳에는 온갖 화려한 보석들과 드레스로 치장한 레이디들과 그녀들을 에스코트하는 신사들로 가득 차 있었다.
그들은 우리 부부에게-정확히는 나에게- 잠시 시선을 주었을 뿐, 이내 고개를 돌려 다시 저희들만의 세계로 빠져들었다.

"졸부 주제에 운 좋게 폐하의 눈에 띄어 초대 받은 주제에 건방 떨기는. 쯧쯧."

빈자리를 찾아 헤매는 와중에 누군가 빈정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굳이 목소리를 낮추려 들지 않는 걸로 봐선 대놓고 들으라는 거겠지.
하지만 조금 잘 나가는 상인의 딸로서 4년 연속 벚꽃 축제에서 우승한 경력을 가진 나에게 고작 이 정도의 조소는 그저 질투에 눈 먼 어린애가 되는 대로 지껄이는 헛소리로밖에 들리지 않는다.
평민 출신으로서 왕실에서 주최하는 행사에 우승할 때마다 신분을 들먹이며 야유하던 레이디들의 시기어린 눈초리를 견뎌온 나다. 그것에 비한다면 저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옆에서 나를 에스코트하는 남편도 오랫동안 사람을 상대하며 키워 온 면역력 때문인지, 조소하는 귀족의 말에 대꾸는커녕 고개조차 돌리지 않는다. 마치 그러한 말들이 전혀 들리지 않는다는 듯이.
...아무래도 저렇게 대놓고 조소하는 것을 보면 우리가 왕실 주최 연회에 초대받은 진짜 이유는 모르는 것 같았다.
하기사, 내가 당사자라도 관리를 잘못해서 재무에 큰 문제가 닥쳐 평민 출신 대부호에게 돈을 빌렸다는 얘기 따윈 입이 찢어져도 말 못하겠지.
아마 우리를 초대한 것에 대해선 귀족과 평민 간의 화합이라느니, 왕실 주최 축제 우승자에게 주는 특권이라느니 하는 적당한 이유를 갖다 붙였을 것이다.
-그런 건 아무래도 좋으니 빨리 끝났으면 좋겠어.
겨우 빈자리를 발견하고 냉큼 의자를 끌어다 앉으며 나는 솔직한 속내를 비쳤다.
남편이 마실 것을 가지러 간 사이, 나는 시녀들이 정성들여 손질한 풍성한 라벤더 빛 머리칼을 어루만졌다. 남들이 눈치 채지 못할 만큼 티를 내지 않기 위해 웃는 페르소나를 연기하는 것은 생각보다 무척 고된 일이었다.

"곧 시작할 모양이오, 부인."

언제 돌아왔는지, 남편이 툭 하고 한 마디를 던졌고, 나는 의아해하며 앞을 보았다.
왕국에서 가장 유명한 음악 사범인 미스터 미첼을 포함, 그 밖에 내로라하는 음악가들이 연회장에 들어서서 각자 위치로 향하고 있었다.
음악가들이 등장하는 걸로 봐서, 이제 곧 왕궁의 주인이 등장할 모양이었다.
음악가들이 제자리를 찾아 태도를 갖추자, 야도치 집정관이 한 발 먼저 모습을 드러내 점잖고 엄숙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안녕하십니까, 신사 숙녀 여러분. 저는 야도치 집정관입니다. 이제 곧 국왕 폐하와 왕비 마마, 왕자 전하께서 입장하실 테니, 모두 예를 갖추어 두 분을 맞아 주시기 바랍니다."

왕자라는 말에 일부 레이디들 사이에서 약간의 소란스러움이 일었다.
국왕 폐하께서는 왕실에서 주최하는 3대 축제 - 수확제, 신년 축제, 벚꽃 축제 - 에 항상 직접 참관하셨기 때문에 그 근엄한 용안은 낯이 익었지만, 왕자님은 수련이라는 명목 하에 성인이 되는 그 날까지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는 소문이 파다했는데.
오늘, 여기서 그 왕자님을 볼 수 있다니, 레이디들이 체면을 잃고 요란을 떠는 것도 무리는 아닐 터.
이렇게 얘기하는 나 역시 달콤 쌉싸름한 초콜릿을 입에 넣는 것처럼, 오만가지 감정이 교차하던 중이었다.
멀고 먼 옛날, 내가 인간이 되기 전.
요정 여왕님을 조른 끝에 어렵게 허락을 받은 프린세스의 꿈.
현재의 남편과 결혼한 시점에서 이미 꿈은 물거품이 되어 사라졌지만, 그 꿈을 꾸었다는 것 자체는 아직 잊지 않고 있다.
어린 시절의 그리움 중 하나로서 간직하고 있는 소중하고도 아련한 추억의 주인공과 진배없는 왕자님이 이제 곧 눈앞에 등장하신다는데, 어찌 초연히 기다릴 수 있을소냐.
하지만 (나를 포함한) 레이디들의 작은 난리법석은 집정관이 발산하는 특유의 카리스마도 대부분 잠재워졌다.
그리고 다음 순간.
국왕 폐하와 왕비 마마, 그리고 왕자 전하께서 완전 무장한 몇몇 호위병들과 함께 그 자리에 등장했다.
아쉽게도 왕자님께서는 폐하의 그늘에 가려 얼굴을 알아볼 수는 없었지만, 이 자리에 친히 등장하신 이상 언젠가 폐하께서 직접 소개하실 터. 조바심은 나지만 그 때까지는 기다릴 수밖에 없다.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여러분. 줄리어스 국왕 폐하와 에스메랄다 왕비 마마, 그리고... 안소니 왕자 전하이십니다!"

집정관의 소개와 함께 우레와 같은 박수 소리가 터져 나와 드넓은 연회장을 가득 메웠다.
그들을 따라 정신없이 박수를 치면서도 나는 한 때 나의 삶의 전부였던 왕자님을 찾기 위해 이리저리 시선을 굴리고 있었다.
왕비님의 은은한 미소를 발판 삼아 직접 축사를 낭독하는 국왕 폐하의 연설을 듣는 둥 마는 둥 흘려 넘기며 언제 왕자님께서 앞으로 나오실까, 그것만이 내 관심의 전부였다.

"아 참, 오늘 연회를 연 이유를 깜박할 뻔했군. 다름이 아니라..."

연설을 마치셨는지 축사 낭독에 쓰셨던 최고급 양피지를 물리시던 폐하의 손이 한 순간 멈추었다가, 드디어 내가 바라마지 않았던 사실을 발표하시기에 이르렀다.
나는 무심코 몸을 앞으로 세우고 폐하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이 때문에 연회에 참석한다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그만큼 내 신경은 먼발치에서나마 왕자님을 볼 수 있다는 사실 하나에만 쏠려 있었던 것이다.

"오늘은 짐의 하나 뿐인 아들, 안소니 왕자가 마침내 성인이 되는 경사스런 날이다. 이 연회는 그것을 축하하기 위한 자리로서, 왕국의 지탱에 크고 작은 원조를 해 준 그대들의 공을 높이 사 제일 먼저 선포함을 알아주기 바란다."

폐하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뒤로 물러나 있었던 왕자님께서 천천히 그 모습을 드러냈다.
장내가 떠나갈 듯 한 우렁찬 박수 소리가 다시 한 번 터져 나왔고, 연회장에 모인 백성들은 장차 왕의 뒤를 이어 자신들을 다스릴 제1왕위계승자를 향해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

모두가 고개를 숙인 가운데, 단 한 사람만이 감히 고개를 빳빳이 들고 그 귀한 존안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어깨까지 내려오는 진한 금발.
5월의 푸른 광채를 내뿜는 에메랄드 빛 눈동자 한 쌍.
라일락 퍼플 색 모자와 이를 장식하는 금색 깃털. 모자의 중앙에는 눈동자 색과 같은 에메랄드를 가공한 보석 부적.
모자와 같은 색으로 맞춘 벨벳 망토와 순결한 유니콘을 본뜬 눈부시도록 새하얀, 왕실의 문장이 새겨진 정장.
나는 반쯤 입을 벌린 채 멍하니 왕자님의 얼굴을 주시할 뿐이었다.
옷차림은 전혀 달랐지만, 예복을 걸친 사람 자체는 다르지 않았다.
뭔가의 꿈이거나, 내 눈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면... 왕자님은...
내가 결혼하기 전 가끔씩 만났던 외간 남자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떨리다 못해 극심하게 후들거리기 시작하는 다리 때문에 나는 당장이라도 뭉그러질 것만 같았다.
그가 보여주는 초연한 미소 하나하나가 날카로운 비수가 되어 내 가슴을 차갑게 도려냈다.
-이건... 꿈이야? 왜 저 사람이... 왕자님을 소개하는 자리에 서 있는 거지?
나의 마음 속 외침에 대답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나의 남편조차도, 극심한 심경의 변화를 겪어 갈대처럼 흔들거리는 아내의 형상에는 아랑곳없이 지극히 사무적인 미소를 띠며 뚫어져라 앞을 응시할 뿐이었다.
탁.
나는 결국 몸을 지탱하지 못하고, 뒤에 기대어 두었던 의자에 손을 짚어, 겨우 힘없이 주저앉는 추태를 보이는 것만은 면했다.
그 과정이 조금 시끄러웠는지, 몇몇 힐난하는 눈초리가 따라와 내 등을 쿡쿡 쑤셨다.
그리고... 그들의 시선을 좇은 그의 시선이 나에게 닿았고, 나는 나도 모르게 그만 그의 에메랄드 빛 눈동자를 정면으로 마주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