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즈 : 그럼 아가씨는 '그 분'이 왕자님이셨다는 걸 전혀 모르셨어요?

실프 : 그래, 알고 있었다면 당사자 앞에서 프린세스가 되겠다느니 하는 얘기를 할 리가 없잖아.

우즈 : 그거야... 그럴 지도 모르지만...

실프 : 사실 '그'는 이미 예전에 힌트를 준 적이 있었어. 지금 생각해 보면 왜 그걸 눈치 못 챘는지 몰라.

우즈 : 어, 진짜요? 무슨 힌트요?

실프 : 그건...

 

 


프린세스.
이 단어가 보유하고 있는 기묘한 정의를 알아차리지 못하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아무것도 모르는 리즈 시절, 인류의 몇 할은 이 단어를 자신의 장래희망으로 내세운 경험도 있을 것이다.
신데렐라의 추종자들은 나이를 먹어가면서 차츰 그에게서 등을 돌린다.
아무 생각 없이 내세웠던 어렸을 적의 꿈을, 사람들은 세상을 겪게 되면서 주변 상황과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한계치에 따라 눈높이를 맞춘다.
세상 물정을 몰랐던 소싯적의 꿈을 성인이 될 때까지 키워가는 사람은 드물다.
내가 품었던 꿈을 이룰 수 있도록 세상이 허락할 것인지에 대한 문제에 직면하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인간이라면 이상만을 쫓기보다는, 현실과 타협하여 자신을 굽힐 터였다.
평범한 인간이라면 그렇겠지.
그리고... 인정하기는 싫지만 나 역시 아주 평범한 인간이었다.
무슨 연유로 서두에서 이런 철학적인 주제를 끄집어내는지 의아해 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라기보다 대다수가 그런 의문을 품겠지.
그 다수가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말하는 주제를 조금 바꿔 볼까?

 

"실프, 네 꿈은 뭐니?"

리모주 도기 세트에 갇혀 가볍게 출렁이는 찻물을 따르는 눈동자가 이리저리 흔들리는 것을 바라보는 것도 참 바보 같다는 생각을 할 즈음, 그의 입에서 '그 질문'이 튀어나왔다.

"밑도 끝도 없이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야?"

나는 검붉은 찻물에 우유와 설탕을 넣고 색을 가늠하면서 되물었다.

"아니, 뭐... 별건 아니고. 그냥 궁금해서."

이유 없이 찻숟가락을 빙글빙글 돌리며 이유를 설명하는 그.
그래, 아마 다들 눈치 챘을 것이다.
현재 내 앞에 앉아 갑자기 남의 꿈을 묻는 이 사람은 일전에 곤경에 처한 나를 구해 준 그 남자였다.
대체 무슨 용기가  났는지 나는 그에게 감사 표시로 차를 한 잔 대접하겠다고 말을 꺼냈고, 그는 나의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여 잛은 다도화를 즐겼다.
의외로 공통된 관심사도 많고, 얘기도 잘 통한다는 걸 깨닫고 이후에도 종종 만나곤 했는데.
오늘은 벚꽃 축제일.
축제 이름에 걸맞게 마을 곳곳에는 일렬로 늘어선 벚나무가 바람의 마술에 휘둘려 온 세상을 복숭아빛으로 물들이고 있다.
벚꽃 축제는 단순히 꽃놀이만을 위해 열리는 축제가 아니다. 가장 아름다운 - 말하자면, 미스 왕국을 뽑는 빅 이벤트가 열리는 날이기도 하다.
참가 자격을 갖춘 여성들에게는 자신의 미모를 왕국 전체에 뽐낼 수 있는 좋은 기회였고, 남자들에게는 자신의 배우자나 며느릿감을 점찍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만약 이 축제에서 결혼 적령기의 여성이 우승, 혹은 입상한다면 돈 한 푼 들이지 않고 자신의 가치를 왕국 전체에 알릴 수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
그렇기 때문에 어느 정도 자신의 외모에 자신이 있다 싶은 여자들은 앞 다투어 벚꽃 축제에 참가하는 것이 거의 관례로 굳어져 있는데-
나라고 해서 예외는 아니었다.
아니, 애초에 나는 '벚꽃 축제에서 우승해 왕자님의 눈에 띄어 단 번에 결혼에 골인!'이라는 목적 때문에 이 대회에 참가하게 됐는데...
분명 처음에는 그런 마음이었건만 한 해, 두 해... 어쩐지 요 몇 년 간 줄곧 우승해 왔기 때문에, 이제는 왕자님의 눈에 띄기 위해서라기보다는 그냥 연중행사라는 느낌이 강하지만.
여담으로 밝히자면 이번 벚꽃 축제의 우승도 내가 차지했다.
...아니, 자랑하려는 게 아니라.
요 몇 년간 축제의 우승 자리는 내 것이었고, 오늘이라고 해서 예외는 아니었다 그거지.
-다크호스로 떠오른 아시리안 다린 양과 근소한 차이로 간신히 우승을 차지했다는 사실은 저어기 마음 한 구석으로 치워두도록 하자.
그거야 어쨌든.
올해도 당당히 우승을 차지하고 무대에서 내려온 내게 축제를 죽 지켜보았다며, 우승을 축하하는 의미에서 한 턱 쏘겠다는 그의 말에 늘 만나던 카페에 자리를 잡았고, 먼저 만나자고 한 주제에 말없이 차만 들이키던 중 뜬금없이 꿈이 뭐냐는 질문을 받았던 것이다.
내가 말하긴 뭣하지만 그 역시 꽤 별종인 모양이다.
응? 왜 이름을 부르지 않느냐고?
이유는 간단해. 그는 내게 자기 이름을 알려주지 않았거든.
처음 약속을 잡았던 그 날, 그는 나의 이름만 날름 들어놓고 사정이 있다는 핑계로 자신의 이름을 가르쳐 주지 않았다.
처음에는 뭐 이런 사람이 있나 싶었지만, 몇 번이나 얼굴을 마주하면서 나는 그 사실을 별로 신경 쓰지 않게 되었다.
그의 이름 따윈 아무래도 좋다고 생각해서가 아니다. 특유의 유머 감각과 같이 있으면 시간이 흐르는 줄 모를 만큼 그에게 빠져들기 때문이었다.
솔직히 이름 하나 알려주는 게 무슨 대순가 싶기도 하지만, 뭐 사람마다 각자의 사정이란 게 있는 거니까.
혹시 알아? 부모님의 이름 짓는 센스가 너무나도 괴악해서 남들한테도 얘기하지 못 할 만큼 우스운 이름이라도 받은 건지.
나 역시 내가 요정계 출신이란 것을 어느 누구에게도 밝히지 않았으니, 피장파장인 셈이다.
-하지만... 말해도 될까? 질문에 대한 대답을?
철모르던 순수한 시절, 나는 만나는 사람마다 붙들고 프린세스가 될 거라며 호언장담했지만, 주변 사람들의 반응은... 표현은 좀 달랐지만 반응은 대체적으로 같았다.
어린애가 해 보는 소리라며 꼭 프린세스가 되라고 건성으로 맞장구치는가 하면, 쓸데없는데 힘 빼지 말고 현실을 보라며 10살밖에 안 된 꼬맹이의 꿈을 정중하게 깨부수기도 하고.
지금에 와서는 아무한테나 내 속내를 드러내는 멍청한 짓은 섣불리 저지르지는 않지만... 성인식을 몇 달 앞두고 이렇게 노골적인 질문을 받으리라곤 전혀 상상하지 못했던 것이다.
비밀이라고 할까, 아니면 대충 얼버무릴까 고심하던 나의 적갈색 시선이 물끄러미 나를 응시하는 그의 싱글거리는 얼굴과 딱 마주쳤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왠지 거짓말을 할 마음이 나지 않는다.

"말해줘도 상관은 없지만... 절대 웃지 않겠다고 약속한다면 말할게."

"걱정하지 마. 네가 무슨 대답을 하더라도, 남의 소중한 꿈을 비웃는 짓은 절대로 하지 않을게. 정말이야."

웃는 얼굴과 대조되는 진지한 대답.
나는 그의 말을 믿고, 얼 그레이를 한 모금 머금는 그에게 오랫동안 마음속에 간직했던 내 '꿈'을 입에 담았다.
푸우우우우웁.
그와 동시에, 그가 내뿜은 홍차는 테이블마저도 뛰어넘었다.
황급히 고개를 숙인 덕에 꼴사나운 상황에 놓이는 것만은 면할 수 있었지만... 아니,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야! 안 웃는다고 했잖아!"

그는 눈을 부라리는 나를 달래기 위해 손을 내저었다.

"아, 아냐! 비웃는 게 아니라... 그렇지, 예상과는 다르다고 할까... 아니, 어떤 의미에선 예상대로라고 할까... 너무 거창하다고 할까, 어렸을 적에나 품을 법한 얘기를 너무 진지하게 한다고 할까..."

칭찬인지 욕인지 모를 변명을 늘어놓는다.
-혹시 자기 자신도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는 것 아냐?

"뭐야, 내가 나이 값을 못 한다는 뜻이야?"

"그렇지 않다니까! 그러니까 내 말은... 꿈을 크게 가지는 건 좋은 일이라고..."

-전혀 그렇게는 안 들렸는데.
순간 몇 마디 따져 볼까 싶었지만 그만두기로 했다.
10살짜리 꼬맹이가 하는 소리도 아니고, 곧 성인식을 치를 숙녀가 꿈이 프린세스네 어쩌네 하는 건 내가 생각해 봐도 너무 현실 감각이 없어 보이니까.
무심코 웃고 싶어지는 것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그러는 너는 무슨 꿈을 가지고 있니?"

화제도 돌릴 겸, 나는 그에게로 화살을 돌렸다. 이 정도 질문은 해도 문제없으리라.
내 비밀을 말해 줬으면 그의 비밀도 알 권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혹시라도 이름을 물어 봤을 때처럼 사정이 있네 어쩌네 하면, 이번에는 절대 가만 두지 않으리라.

"꿈이라..."

그는 반쯤 남은 차를 티스푼으로 휘휘 저으며 입을 열었다.

"무얼 하고 싶은지보다, 그 때까지 살아남을 궁리부터 해야 하지 않을까? 일단 살아 있어야 뭐를 하던 할 수 있을 테니까."

별안간 감정의 미립자를 걷어 낸 그가 심각한 어조로 말했다.
순식간에 바뀐 분위기를 따라가지 못한 나는 어떻게 반응해야 할 지 모르겠다는 얼굴로 스푼을 흔드는 그의 손가락을 하릴없이 바라볼 뿐이었다.
이거... 농담인가? 지금 웃어야 하는 거야?
그는 나의 시선 속에 담긴 의중을 알아챘는지 살짝 쓴 맛이 나는 웃음을 흘렸다.

"그렇게 이상한 얼굴로 볼 필요 없어. 그냥 농담한 거야. 재미는 없었지만."

그는 스푼을 내려놓고 양 어깨를 살짝 들썩여 보였다.

"난 그냥 평범하게 사는 게 제일이라고 생각해. 평범하게 자라서 좋아하는 사람과 가정을 꾸리고, 둘을 닮은 2세와 함께 사는... 뭐 그런 거 말이지. 이런 말도 있잖아? 평범한 삶이야말로 가장 큰 축복이라고."

우와아.
나는 내심 감탄했다.
그가 말한 내용은 정론이었다. 너무나도 완벽해 반론조차도 할 수 없을 만큼, 고지식한 정론.
하지만 범인(凡人)들은 보통 이런 생각들은 잘 안 하지 않나...?
그냥 이 사람이 특이한 거라고 한다면 설명이 되겠지만.

"분명 네 말은 정론이라고 생각하지만...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는 거 아니야?"

내가 물었다.
그는 에메랄드를 녹여낸 청량한 눈동자를 내게 고정시켰다.

"...네가 축제에서 우승하는 거 봤어. 심사위원들의 정신이 제대로 박혔다는 것만은 확실히 알겠더라. 내가 심사위원이었더라도 당연히 널 뽑았을 거야. 아니, 너랑 아는 사이여서가 아니라."

그는 휙휙 손을 내저었다.

"왕국 최고의 미인을 선출해 그 아름다움을 기리고픈 마음은 이해할 수 있어. 본디 인간이란 보다 아름다운 것을 추구하게 되어 있으니까. 그렇지만..."

그는 말끝을 흐렸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갑자기 주제를 바꾸는가 싶더니 이해하기 어려운 심정을 토해내는 그의 말을 얌전히 들어주는 것뿐이었다.

"능력의 한도를 넘어서면서까지 추구하는 건 옳지 않다고 보는데 말이지..."

아무래도 그는 나에게 들려주기보다는 자기 자신을 상대로 이야기하고 있는 것 같았다.

"한도를 넘는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 잘 모르겠어. 이 나라 최고의 권력을 가진... 가령 이 나라의 왕이라면 하고 싶은 건 전부 할 수 있지 않아? 뭔가에 제약을 받는다거나 그럴 일은 평생 없을 것 같은데."

내가 중간에 끼어들자 그는 퍼뜩 정신을 차린 듯 고개를 흔들었다.

"아, 뭐. 확실히 그렇지... 다만... 요 근래 항간에서 왕실의 재정이 어렵다는 소문이 종종 들려오고 있거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화려한 축제를 열어서 미스 왕국을 뽑는 것이 대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어서 말이야."

그는 이 이야기를 끝으로, 완전히 식어버린 차를 입가로 가져가는 것으로 입을 닫았다.
나 역시 딱히 뭐라고 해 줄 말이 떠오르지 않아, 찻물로 입술을 축이며 심각해진 그의 눈치를 살피는 것으로 그와의 티타임을 마무리했다.

그러나.
그와 나눴던 이 짧은 이야기가... 조만간 닥칠 나의 미래와 무서우리만치 들어맞는 조각이 되어 맞물리게 될 것이라는 것을, 이 당시의 나는 알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