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프 : 아버지께 그 정도로 언성을 높였던 적은 아마 그 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을 거야.

우즈 : 그 땐 정말 무서웠어요... 하지만 어쩔 수 없었던 거잖아요. 아가씨의 인생이 걸린 문제였으니까요.

실프 : 하지만 결국 바뀌는 건 없었어. 그렇지? 난 결국 아버지의 말씀을 따를 수밖에 없었으니까.

 

 

"아버지... 방금 뭐라고 하셨어요?"

나의 목소리가 덜덜 떨렸다.
부디 내가 잘못 들었길 바라며, 나는 억지 미소를 지으며 재차 물었다.

"듣지 못했느냐? 지참금이라고 말했다. 네 혼수 지참금 말이다!"

"혼수 지참금이라니요! 지금 저더러 결혼이라도 하란 말씀이세요?"

잘못 들은 것이 아니라는 것만은 확실하다.
한 옥타브 오르는 아버지의 목소리에 맞춰 덩달아 내 목소리도 몇 단계의 계단을 한꺼번에 뛰어올랐다.

"밑도 끝도 없이 결혼이라니, 말도 안 돼요! 전 아직 결혼할 생각 같은 건 없단 말이에요!"

쾅!
나의 말이 끝나자마자 아버지는 주먹으로 벽을 내리치셨다.
분노로 부들부들 떨리는 얼굴은 마치 잘 익은 사과처럼 새빨갛게 독이 올라 있었다.

"실프 살바토르! 네 멋대로 구는 것은 용서치 않겠다! 아직 결혼할 생각이 없다니, 그럼 평생을 혼자 살기라도 하겠단 말이냐?!"

아버지께서 호통을 치셨다.

"평생 혼자 살 생각은 아니지만... 기본적으로 결혼은 적령기의 남녀의 의사를 하나로 모아 충분한 시간을 두고 천천히 진행해야 하는 거잖아요!"

아버지의 호통 소리에 한순간 기가 죽었지만, 여기서 가만히 물러났다간 자칫 얼굴도 모르는 남자에게 내 인생을 송두리째 내어 주어야만 사태가 벌어질지도 모른다.
아무리 아버지라 하더라도 이런 일방적이고 불공정한 결정에 따를 생각은 전혀 없었기 때문에, 나 역시 목에 핏대를 세워가며 아버지께 대들었다.
있는 힘껏 소리를 지르는 탓에 목이 아팠지만 지금의 난 그 아픔조차 전혀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아버지께서는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고 오히려 눈을 치켜들었다.

"당사자의 의사를 존중해야 한다? 그럼 지금 네가 따로 만나는 남자라도 있다는 말이냐?"

"......"

이번에야말로 나는 입을 닫을 수밖에 없었다.
따로 만나는 남자라면 있다.
그렇지만 둘이 사귀는 사이냐고 한다면... 아마 둘 다 고개를 저을 것이다. 그와 나는 그런 사이가 아니었으니까.
남녀 간의 친구사이라는 건 나도 말도 안 되는 헛소리라고 생각하는 바이지만... 모든 인간관계가 친구 혹은 연인으로만 규정되는 것은 아니잖은가.
그럼 대체 무슨 사이냐고 묻는다면... 딱히 대답할 말이 없기도 하다.
애초에 난 그 사람이 누군지도 모르는걸.

"입을 다문 걸 보니 없는 게로구나. 따로 마음에 둔 사람이 없다면 군말 말고 따르도록 하거라. 이만큼이나 키워 줬으니, 너도 생각이란 게 있다면 부모에게 받은 은혜를 갚아야 하지 않겠느냐."

내가 입을 다물거나 말거나, 아버지께서는 사뭇 당연하다는 투로 무심히 말씀하셨다.
아니, 내가 입을 다물고 있는 지금이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하시는지도 모르지.
당사자가 멘탈 붕괴 상태에 빠져 있는 동안 멋대로 이야기를 진행시키면 별다른 방해를 받지 않고도 목표를 이룰 수 있을 테니까.

"제가 아버지께서 정한 상대와 결혼하는 것과 키워진 은혜를 갚는 것이 대체 무슨 관계가... 아."

나는 겨우 아버지께서 하시려는 말씀에 담긴 의도를 깨달았다.
8년간 가족으로서 같이 지냈었는데, 어째서 지금까지 깨닫지 못했는지 신기할 따름이다.
아버지가 가장 중히 여기는 것이 무엇인지, 가치관이며 사고방식이 어떤 것인지.
그렇다.
아버지께서 가장 중요한 것은... 돈이었다. 자신의 하나뿐인 딸마저 밑천으로 팔아넘길 만큼.
아버지의 냉혹했던 그 가면도 내 앞에서는 얼음이 녹듯 스르르 풀어졌기에, 딸에게만은 예외일 거라 생각했었는데... 그것은 나만의 착각이었던 것 같다.
지금까지 내가 갖고 싶은 건 무엇이든 사주고, 비싼 공부와 여자로서 거듭 태어나게끔 만들어준 꾸밈 비를 아낌없이 제공해 주셨던 것이, 딸에게 사랑을 베풀어 주신 게 아니라 가장 큰 장사 밑천에 투자한 것뿐이라고 생각하니 어쩐지 서글퍼졌다.
만에 하나 내가 당신의 친딸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된다면 어찌 될까?
친딸이라 여기는 여자마저도 팔아넘길 물건이라고 생각하는 마당에, 실은 내가 요정계에서 살던 보잘것없는 요정일 뿐, 자신과 피 한 방울 안 섞인 남이라는 걸 알게 된다면?
여지껏 엄한 데 돈을 쏟아 부었다며 길길이 날뛰는 게 아닐까?

"이건 말도 안 돼요! 아가씨 인생인데 왜 아가씨의 생각은 전혀 들어보려고도 하지 않으시는 거죠? 얼굴도 모르는 사람과 덜컥 결혼이라니, 세상에 그런 법이 어디 있어요?"

말문이 막혀 멍청히 서 있는 나는 평소 같았으면 절대 앞에 나서는 일이 없는 우즈가 나를 변호하기 위해 아버지께 대들고 있는 것도, 아버지와 정면으로 부딪혀 바닥에 떨어졌던 그를 안아 올렸던 내 손이 어느새 텅 비어 있는 것도 꺠닫지 못했다.

"쥐방울만한 집사는 끼어들지 마라. 이건 나와 내 딸의 문제야!"

아버지께서는 눈알을 부라리며 호통을 치셨다.
하아... 그래도 딸이라고는 말씀해 주시는군요, 아버지.
우즈는 입을 열어 몇 마디를 더 하려다가 뒤에서 끌어당기는 내 손짓에 밀려나고 말았다.
도와줘서 고마워, 우즈. 하지만 넌 더 이상 끼어들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아.
나는 마음속으로 우즈에게 감사를 표하며 고개를 들었다. 이 이상 아버지의 화를 돋웠다가 한 대 치기라도 하면 우즈에게 면목이 서지 않으니까.

"좋아요. 아버지 마음대로 하세요. 자식마저도 돈줄로 보일 정도로 그렇게 돈이 좋으시면 평생 옆에 돈이나 끼고 사시라고요! 장사 밑천에 불과한 전 그만 빠져드릴 테니까!"

"아가씨...?!"

아무래도 나는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열이 받은 모양이었다.
평소라면 무시를 했으면 했지, 아무리 싫어하는 사람에게조차 핏대를 세워본 적 없었던 내가 아버지께 언성을 높이는 걸로도 모자라 막말까지 퍼부어 버리다니.
뒷 일 따윈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자식을 자신의 부속품 정도로밖에 여기지 않는 사람을 여태껏 아버지라 믿고 따랐다니... 난 바보였어.
한 방울 두 방울, 매섭게 쏟아지는 뜨거운 소낙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깜짝 놀란 우즈가 허를 찔린 얼굴로 애타게 나를 부르는 것도, 난데없이 막말을 듣고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라 벌건 얼굴이 새하얗게 변해버린 아버지의 꿈틀거리는 얼굴에도 신경쓰지 않고, 엉망이 된 얼굴을 추스를 틈도 없이 그렇게 무대에서 퇴장해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