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넷과 백화점을 돌아다녀 그러모은 전리품이 가득한 방.
휴일날 친구를 만나러 갈 때면 으레 들게 되는 명품 가방.
계절마다 바뀌는 향수.
부자 친구의 파티나 다도회에 참석할 때마다 하나씩 늘어가는 드레스, 구두, 액세서리, 기타 등등 기타 등등.
이따금 집에 초대한 친구들이 보여주는 부러움이 가득 어린 선망의 시선.
학업 우수, 외모 준수, 집은 부자에 상냥하기까지 한 나.
(본인 입으로 칭찬하기는 뭣하지만)나는 소위 사람들이 흔히들 말하는 엄친딸이자 학교에서도 알아주는 유명한 미소녀였다.

2006년 10월 10일, 고토 히메코의 일기장에서

 

 


"다녀왔습니다!"

내 얼굴을 덮었던 무거운 페르소나를 가방과 함께 시원하게 벗어던진 나는 적막함마저 흐르는 거실을 둘러보고 집에 아무도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버지야 회사 운영이 바빠서 요새 통 얼굴을 볼 수 없었으니 그렇다 치고, 큐브까지 보이지 않다니. 밖에 장이라도 보러 갔나?
바닥에 내팽개친 가방을 주워들어 방 침대에 대충 던져두고, 과일 주스를 흔들어 원샷하며 다시 거실로 나온 나는 한 구석을 차지한 전화기의 자동응답기 재생 버튼을 눌렀다.
핸드폰이 있는데 왜 굳이 집 전화를 써야 하느냐고 가끔 아버지께 불평하곤 했었는데... 결국 나의 철없는 땡깡이었음을 깨닫게 된 계가기 바로 그 핸드폰이 될 줄이야.
체리시 라이치에서 새로 선보인 스마트폰을 자랑할 겸 학교에 들고 갔다가, 틈만 나면 화장실 같이 가자고 말 거는 모 동급생이 망가뜨려 버렸던 것이다.
망가뜨렸다고 해 봐야 산산조각이 난 건 아니고, 화분에 줄 물을 실수로(본인 말로는) 내 최신 폰에 떨군 것이지만.
솔직히 한 마디쯤 하고 싶었지만 얼굴이 빨개져 장난감 강아지마냥 꾸벅꾸벅 사과하는 모습을 보니 왠지 내가 괴롭히는 것 같았고, 물만 좀 먹었다 뿐이지 영영 제 구실을 못 하게 된 것도 아니고, 교내의 아이돌이라는 내 대외용 이미지 유지에도 신경 써야 한다는데 생각이 미쳐 결국 나는 생긋 웃으며 괜찮다고 말해주는 수밖에 없었다.
이미 지난 일을 불평해 봐야 소용없는 일이고, AS 센터에서 1주일 정도 수리해야 한다고 했으니, 나는 불편함을 감수하면서 친구들과의 연락수단으로 집전화를 사용할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아니 잠깐. 다시 생각해 보니까 은근 열 받네. 마음껏 문자할 수도 없고 통화도 제약을 받잖아.
애초에 핸드폰을 산 이유가 큐브나 아버지에게 내 친구 관계를 미주알고주알 알리고 싶지 않았기 때문인데.
전화가 울리면 항상 제일 먼저 달려와 받아 버리는 큐브 때문에 친구 관계를 이러쿵저러쿵 알려주는 셈인 데다, 전화기를 오래 붙들고 있으면 시선으로 무언의 압력을 주기까지 해서 내가 뭐 나쁜 짓이라도 하는 것 같은 죄책감이 들었거든.
이제 겨우 오오토모 선배와 막 친해지기 시작했는데 핸드폰을 고칠 때까지는 쉬이 작업을 걸기 어렵게 되었으니... 역시 히로코에게 한 소리 할 걸 그랬나?
나는 투덜거리면서도 혹시 우리 집으로 전화한 친구나 그 이가 있지 않을까 싶어 기계음이 연주하는 나른한 선율에 귀를 쫑긋 세웠다.

"...어라...?"

메시지를 듣던 나는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잔뜩 화가 나서 호통 치는 목소리. 걸걸한 독백 속에 간간이 섞이는 불쾌한 육두문자.
주어가 누군지 명확히 나오지는 않았지만 독백의 객체가 누군지 짐작하는 건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뭐야, 이거...
내 성질을 대변하는 짧은 문장. 첫 번째 메시지의 수수께끼를 짐작할 새도 없이 나는 어느 새 2번째 메시지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

같은 심경을 몇 번이고 느끼면서 총 5개의 메시지를 청취한 나는 넘어가지 않는 쓴 맛을 느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정도의 차이는 있었지만 말하고자 하는 내용은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그치만...
문제는 1개도 아닌 무려 5개의 메시지에서 왜 같은 내용을 떠들고 있었느냐는 것이다.
아버지도 큐브도 내게는 별 말 없었는데... 혹시 내가 모르는 문제라도 생긴 거 아니야?
덜컹.
생각을 떠올리기 무섭게, 현관문이 예고도 없이 앙칼진 울음소리를 토해냈다. 괜히 잘못한 것도 없는데, 나는 도둑이 제 발 저린다는 격언을 간접적으로 체험해야만 했다.

"어, 아가씨... 언제 오셨어요?"

양손 가득 식료품 봉투를 안은 큐브가 아는 체를 했다.
...아무래도 좋지만, 뭔가 의표를 찔린 듯 한 표정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뒤이어 들어오신 아버지는 허를 찔린 표정을 짓는 큐브와는 반대로 무표정.

"방금. 부활동이 생각보다 일찍 끝났거든... 아버지도 오늘은 일찍 오셨네요."

"...그래."

아버지는 웅얼거리는 듯 한 숨소리로 대답을 대신하시고 집안으로 들어오셨다.
거실이 아닌 서재로 향하는 아버지의 품에서 이질적인 것을 발견한 나는 나도 모르게 다시 아버지께 말을 걸고 있었다.

"그런데요 아버지. 혹시 제게 온 편지는 없었나요?"

나의 시선이 명백하게 당신의 품을 향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챘는지, 아버지는 한순간 시선을 자신이 품 안 가득 안고 있는 우편물로 향한다.

"...아니, 네 것은 없었다. 누구 편지 받을 사람이라도 있는 거냐?"

"예에, 뭐. 메일이나 문자는 매일 주고받는 거니까, 가끔은 친구들끼리 옛날식으로 편지를 받아볼까 하고 며칠 전에 얘기했었거든요."

침도 안 바르고 거짓말을 늘어놓는 나.
-내가 생각해도 좀 궁색하긴 하지만....
예상과는 달리 아버지는 잠시 나를 바라볼 뿐, 별다른 말씀은 없으셨다.
잠시 아버지를 바라보던 나는 문득 묘한 것을 눈치 챘다. 아버지는 내가 아니라 내 뒤의 전화기를 바라보고 계셨던 것이다...

"...먼저 올라가마."

불쑥 한 마디를 던지신 아버지는 내가 뭐라 대답하기도 전에 서둘러 서재로 올라가 버리셨다.
여느 때와 다른 아버지의 반응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지 고민하고 있을 무렵, 사온 식료품을 식탁에 내려놓은 큐브는 어색한 미소를 띠며 내게 말을 걸었다.

"아가씨, 배고프시죠? 오늘 저녁은 크림 스튜예요. 준비가 다 되면 부를 테니까 쉬고 계세요."

"그래, 고마워. 근데 나 하나 물어보고 싶은 게 있는데."

"뭔데요?"

내 시선을 피하기 위함인지, 부엌일이 바쁜 건지 큐브는 식료품을 꺼내 정돈하며 내 질문을 받았다.

"아까 아빠가 들고 있던 봉투가 한 가득이던데 그게 다 뭐지?"

"글쎄요... 저도 잘 모르겠는데요. 고지서라든가 공문서라든가 뭐 그런 거겠죠."

"고지서 나오려면 아직 멀었고, 나왔다 하더라도 그건 늘 네게 넘겨주시지 않았어? 이맘때는 우편물 받을 것도 별로 없잖아. 근데 그 많은 게 다 아빠 거라니, 이상하지 않아?"

"그런 걸 저한테 물어보셔도 제가 알 리 없다고는 생각지 않으세요? 주인님께서는 사업을 하시니까 알게 모르게 받으시는 게 많을지도 모르죠."

"그래..."

그런 건 보통 받는 주소를 회사로 설정하지 않느냐고 따지려던 나는 큐브의 말에 납득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뭐, 여기서 계속 큐브를 다그쳐 봐야 나오는 게 없다는 건 확실히 알았다.
왜 나한텐 입을 다물려는 건지는 모르겠지만(내게 말해봤자 별 소용이 없기 때문이라는 가장 슬픈 가능성은 굳이 생각하지 않기로 하자), 나 역시 말해주지 않는 걸 구태여 억지로 캐는 취미는 없으니 그냥 입 다물고 일상을 즐기도록 하자.
나는 큐브에게 저녁을 기대하겠다는 격려의 말을 남기고, 낮에 에미리가 귀띔해준 최신 신상 정보를 검색하기 위해 내 방으로 돌아왔다.
오늘 있었던 이 자그마한 일이 나중에 웃으면서 추억할 수 있는 작고 작은 이야기가 되기를 바랐지만...
며칠 지나지 않아 내 바람은 제대로 빗나갔고, 막연히 고개를 들었던 불안감은 곧 현실이 되어 닥치고 말았다.

"아가씨, 아가씨. 얼른 눈 뜨세요. 시간이 없어요."

여느 때와 같은 평범한 일상을 보내고, 내일을 위해 잠들었던 나는 누군가 어깨를 뒤흔드는 통에 억지로 상체를 일으킬 수밖에 없었다.

"뭐, 뭐야 큐브... 내 방에 들어올 땐 무조건 노크하랬잖아..."

나는 문답무용으로 남의 방에 쳐들어온 것으로도 모자라 거칠게 내 어깨를 흔드는 큐브에게 짜증을 냈다.

"지금 그런 소리 하실 때가 아니라고요...! 불평은 나중에 하시고, 옷 갈아입으시고 조용히 따라오세요."

"무슨 일인데 이 난리야?"

나는 터져 나오는 하품을 굳이 막으려 들지 않았다. 아직 잠이 덜 깬 탓도 있었지만, 갑자기 사람을 흔들어 깨우는 큐브에 대한 최소한의 반항이기도 했다.
일단 들러붙은 잠을 조금이라도 쫓아낼까 싶어 눈을 부비면서도 나는 침대에서 내려오지 않았다. 대체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최소한의 사정 설명은 하라는 명령의 의사를 표현하는 것이다.
대답에 따라선 욕을 한 바가지 퍼부어 준 다음 다시 따뜻한 침대로 누울 각오도...

"...빚쟁이들이요."

순식간에 의식이 각성했다.

"...방금 뭐라고 했어?"

나는 순식간에 침대를 박차고 일어나 큐브에게 질문을 던지며 서둘러 밖으로 나가라는 제스처를 취했다.
내 질문이 몰라서 물은 것이 아님을 알아차렸는지 큐브는 실례했다며 방 밖으로 나갔고, 닫힌 문을 경계 삼아 내게 간단히 사정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아버지가 공금을 횡령하고 있었다는 것.
지금까지는 어떻게든 장부를 조작해 감사를 피해 왔지만 내부 고발로 인해 수사 기관에서 정식 수사 절차를 밟고 있다는 것.
내일이면 압수/수색 영장과 함께 조사관들이 들이닥칠 것이고, 아버지 자신은 아마 구속 수사를 받게 될 것이라는 것.
뿐만 아니라 횡령으로 회사 자본이 기울기 시작하자 이를 막기 위해 상당한 채무를 졌다는 것 같다. 횡령 건과는 별도로 그 사람들에게도 사기죄로 고소되었다고...

"잠깐만, 아빠는 대표이사라구? 채무는 둘째 치고, 자기 돈을 자기 맘대로 쓰는 게 뭐가 나쁘단 거야?"

"알아듣게 설명할 시간은 없으니 간단히 얘기하자면, 주인님의 회사는 현재 법인으로 보호받고 있다는 겁니다. 옷 다 갈아입으셨으면 빨리 나오세요!"

왠지 헷갈릴 설명으로 내 질문을 대신하고 큐브는 이렇다 할 말도 없이 문을 벌컥 열고 내 손을 잡아끌었다.

"기다려...! 물건 챙겨야 한단 말이야!"

"...그럴 시간 없다."

불만에 차 허우적거리는 나를 진정시킨 것은 큐브가 아니라 어느 새 내 방으로 올라 온 아버지의 일갈이었다.
맘대로 옷장을 열어 내 옷을 한 움큼 집어든 아버지는 큐브에게 눈짓을 했고, 큐브는 작게 고개를 끄덕이고 내 손을 잡아 끌...려다 멈칫했다.

"...주인님. 이미 늦은 것 같습니다."

"...그렇군."

큐브의 뜻 모를 소리에 아버지도 동조하고...
무슨 뜻이냐고 물으려던 나는 세차게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겨우 우리가 놓인 현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아아, 그래. 그랬던 것이다.
내가 지금까지 당연하다고 생각하며 누려 왔던 풍족한 생활. 그것은 본디 내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문이 부서져라 두들기는 소리와 함께 거친 고성이 바람을 타고 우리가 서 있는 공간에까지 침투한다.
당장이라도 문을 부수고 올라올 것만 같은 무지막지함에 나는 생전 처음으로 공포를 느꼈다.
누가 일러 준 것은 아니지만, 잡히면 죽을 거라는 공포심이 내 어깨를 짓누른다.
순간 강한 손힘이 내 어깨에 내려앉는 걸 느끼고 뒤를 돌아보니, 아버지가 내 어깨를 쥐고 계셨다.
어떻게든 도망쳐야 하지 않느냐고 물으려던 나는 무심한 듯 한 그 눈동자 속에서 서투르게 괜찮을 거라고 위로하는 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내 착각일 수도 있지만.
그런데 대체 큐브 얘는 아까부터 뭘 중얼거리고 있는 거지?
지금 궁시렁거리는 게 지금 상황을 빠져나가는데 어떻게 도움이 되느냐고 물으려던 나는 갑자기 방 안을 감싸는 따뜻한 빛을 보고 그만 입을 다물고 말았다.

"이게 대체 뭐..."

당연히 머리에 떠오르는 의문을 채 입에 담기도 전에, 아버지와 큐브는 문답무용으로 내 팔을 하나씩 붙들고 빛 앞에 섰다.
콰당탕탕!!
안과 밖을 가로막던 최종 방어막이 항복 선언을 함과 동시에 여러 구둣발 소리가 집 안으로 들이닥친다.
-가만, 이거... 왠지 전에도 겪었던 일 같은데... 기분 탓인가...?
알 수 없는 기시감에 혼란스러워 하는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아버지와 큐브는 빛이 문의 형상으로 변하는 것을 애타게 바라보고 있었다.
분노에 찬 채권자들이 내 방 쪽으로 향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직후, 아버지가 다급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지금이야!"

그 외침이 도화선이 되어, 아버지와 큐브는 내 팔을 한층 더 단단히 붙들고 빛 속으로 뛰어들었고-
난 똑똑히 볼 수 있었다.
우리가 빛 속으로 뛰어듦과 동시에 내 방문이 나가떨어지고 분노에 영혼을 판 빚쟁이들이 한껏 얼굴을 일그러뜨리고 불나방마냥 빛 속으로 뛰어 드는 우리를 경악에 찬 시선으로 바라보는 광경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