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을 빠져나온 우리들은 곧바로 제일 가까운 라벤더의 집으로 모였다.
청천벽력과도 같았던 통보 속에서 살아남을 궁리를 하기 위해서이다.
대체 또 무슨 이야기를 하는 건지 홀로 다른 방으로 불려간 캐널을 제외하고, 우리들은 머리를 맞대고 여러 가지 의견을 나누었다.
아무래도 나뿐만이 아니라 실비아와 라벤더도, 프로젝트가 무사히 진행되었다면 누가 프린세스가 되었을지는 이미 예상하고 있었던 것 같다.
아마 모두 같은 생각을 떠올리고 있을 터. 프린세스가 되는 것은 캐널이고, 나머지는 들러리가 되어 그녀를 축복해야만 했을 거라고.
결국 프로젝트는 엎어지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 셋의 상황이 달라지는 건 아니다. 알아서 각자 살 길을 찾아야만 한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으니까.
친구들과 대화를 나누면서, 나는 1년 전부터 막연하게 구상하고 있던 또 다른 꿈을 사알짝 떠올렸다.
성령계에서 넘어온 실비아, 천계에서 내려온 캐널, 요정계에서 건너온 라벤더.
그리고... 평범하디 평범한 고아로 방랑예술가에게 거두어져 프린세스 후보로 발을 들인 나, 다렐르 헤이스.
이 4명을 모티브로 해서 성장 소설이라도 써 보는 건 어떨까?

- 다렐르 헤이스의 비밀 일기장에서

 

캐널은 완전히 미련을 버린 듯, 제일 먼저 후보였던 증표를 집정관에게 반납했다.
속을 알 수 없는 그녀의 무표정 속에서 이제야 끝났다는 해방감이 살짝 머물렀던 것을 눈치 챈 이는 아무도 없었다. 8년 동안 어깨를 짓눌렀던 의무라는 짐덩이를 펜던트와 함께 벗어던진 것도.

"과연 오리프 양은 똑똑하구만. 자신의 주제를 잘 알고 있군그래. 드래곤에게서 손쉽게 친서를 받아냈던 게 겉멋만은 아니었던 모양이로군."

필요하다면 힘으로 밀어붙이는 짓도 서슴지 않을 요량이었지만, 대화로 해결할 수 있다면 굳이 강요할 필요는 없다.
대신은 알아서 왕실의 뜻대로 움직여 주는 캐널을 칭찬하고, 나머지 소녀들에게 시선을 던졌다.
그 시선의 속뜻을 알아차린 소녀들은 더 이상 지체할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
패배감을 삼키며 캐널의 뒤를 따르는 것. 그 외의 선택지는 있을 수 없다.

"그동안 퀘스트를 해결하느라 수고 많았네. 폐하를 대신하여 감사를 표하는 바이네."

한 명도 빠짐없이 명령에 따르는 것(실비아는 증표와 함께 벌채소의 관리자에게서 받아낸 소명서도 내던지듯 함께 제출했다)을 빈틈없이 확인한 대신이 딱 봐도 겉치레라는 걸 간파할 수 있을 정도로 성의 없이 말했다.
약속한 사례에 대해선 충분한 논의를 거쳐 추후에 다시 연락하겠다는 언질을 끝으로 자리에서 일어난 그가 갑자기 생각났다는 투로 선심 쓰는 것처럼 마지막 말을 덧붙였다.

"마지막까지 충실히 명령에 따르느라 고생했을 그대들을 위해 작은 선물을 마련하지. 마차를 준비해 줄 터이니 편히 귀가하도록."

"마음은 감사합니다만 괜찮으시다면 거절하고 싶습니다."

대신의 말이 떨어짐과 동시에 친구들의 얼굴에 떠오른 색을 재빨리 잡아낸 라벤더가 거부 의사를 밝혔다.

"현실을 받아들이고 순응하기 위해서는 저희도 나름대로 마음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합니다. 겨울바람이 쌀쌀하긴 하나, 오히려 그 편이 보잘 것 없는 평민의 분수를 파악하는데 더욱 도움이 될 거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부디 대신님의 넓으신 아량만 받을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프린세스 후보 강제 사퇴라는 선언을 들었을 때와는 사뭇 다른 어조.
분노와 긴장의 노예가 되어 불합리한 어명과 조우했던 좀 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당당한 태도.
용감무쌍하게 대신의 제안을 거절하는 라벤더에게 의외라는 눈빛이 쏟아졌다.
아까는 얼어붙어서 말 한 마디도 제대로 꺼내지 못했던 그녀가 어째서 갑자기 태도가 돌변한 것일까?
무슨 꿍꿍이인지 탐색하는 듯한 대신의 눈초리가 한동안 라벤더에게 머물렀지만, 의심의 빛은 이내 자취를 감췄다. 아마 트집을 잡을 건덕지를 찾아낼 수 없었기 때문이리라.

"그대들의 의견이 그렇다면 할 수 없지. 조심해서 돌아가도록 하게."

드디어 대신의 입에서 귀가해도 좋다는 말이 떨어졌다.
그의 직위에 걸맞는 예를 갖춰 고개를 숙인 뒤, 소녀들이 치맛자락을 휘날리며 밖으로 나가 방문을 닫으려 할 때.
내일 도시락 반찬은 무엇으로 할 것인지를 묻는 것처럼 허물없는 목소리가 다시 그들의 발목을 붙들고 늘어졌다.

"캐널 오리프 양은 잠깐 남아서 별도의 상담을 하도록. 나머지는 정말 가도 좋아."

 

동양의 먼 나라에서 어렵게 들여온, 보통 평민들은 평생 구경하기도 힘들 붉은 카펫.
한 때는 천하를 호령했을지라도, 이제는 죽어 가죽만 남긴 맹수들의 왕.
푸른 비단을 입힌 가죽 소파와 같은 색 비단을 두른 탁자, 그리고 의자.
슬럼가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던 다렐르와 실비아는 부러움을 가득 안고 라벤더의 방 안을 둘러보았다.
집안 환경의 차이를 놓고 투덜거릴 만큼 어리지는 않지만, 그렇다 해도 원하는 물건은 무엇이든 가질 수 있는 친구가 전혀 부럽지 않다면 거짓말일 테지.
자신을 충실히 보필하는 집사 우즈가 직접 시중들겠다는 것도 마다한 채, 라벤더는 직접 다과와 차 세트를 들고 와 자신의 방에 초대된 두 손님에게 차와 다과를 권했다.
아무도 대화를 엇들을 수 없도록 방문을 꼭 닫는 것도 잊지 않았다.

"......"

세 명의 소녀는 각자의 앞에 높인 홍차와 밀푀유를 들어 입가로 가져갔다.
겉으로 보기에는 여유롭고 유유자적한 풍경이었지만, 조금만 자세히 들여다본다면 금방이라도 이 한가한 분위기를 깨뜨릴 수 있는 보이지 않는 소용돌이가 휘몰아치는 중이라는 걸 알아챌 수 있을 터.
과연 누가 먼저 이야기를 꺼낼 것인지, 왕궁 안에서 그랬던 것처럼 또 다른 눈치 게임이 시작되는 건가 하는 생각이 피어오를 무렵-

"동양의 구전에 토사구팽이란 말이 있어. 지금 우리가 처한 상황을 가장 적절하게 설명할 수 있는 단어 같은데. 아니다, 멀쩡히 잘 살아 있으니까 좀 다를려나?"

자기 몫을 깨끗이 비운 방의 주인이 맞은편에 앉은 친구들을 둘러보며 불온한 침묵을 깨뜨렸다.

"그게 무슨 뜻인데?"

실비아가 물었다.
단어의 뜻을 설명해 준 라벤더는 몸을 살짝 뒤로 젖혔다.

"그래, 네 말이 맞다. 프린세스 후보인지 뭔지 하는 감투 하나 씌어놓고 별별 핑계를 대며 온갖 잡일부터 위험한 일까지 다 시켜놓고서, 이제 끝날 때가 되니까 야박하게 버리는 게 진짜 딱이네."

리모주 도기로 만든 찻잔을 만지작거리던 다렐르가 분노로 눈을 번뜩였다.

"드래곤한테 친서를 갖다 주고 오라질 않나, 귀중한 병사들을 위험한 곳에 보낼 순 없으니 우리더러 대신 마계를 정찰하고 오라질 않나, 늪에 사는 괴물을 퇴치하라질 않나, 잠적하고 숨어 있는 화가를 찾아 내리질 않나, 아, 그래. 황금 잉어를 보고 싶으니까 낚아 오라던 퀘스트도도 있었지!"

"그치만 드래곤한테 친서를 주라던 퀘스트는 캐널이 단독으로 받은 임무였는데. 게다가 늪의 괴물을 퇴치하는 것도 캐널이 주문 날리는 동안 우린 멀리서 구경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지금까지 떠넘겼던 퀘스트 목록들을 하나하나 손으로 꼽아보는 다렐르의 곁에서 실비아가 미안하다는 듯 끼어들었다.

"그건 일단 제쳐두고!"

제법 아픈 곳을 찌르는 실비아의 발언을 가로막고 더욱 더 목소리를 높이는 다렐르.

"무튼 요지는 우리 모두 각자 가진 능력을 십분 발휘해서 왕실에서 어떤 퀘스트를 내든 열심히 달려왔단 거라고. 근데 필요할 땐 실컷 부려먹다가 이제 와서 내팽개치다니! 세상에 이런 경우가 어딨어?!"

"우리가 화를 내는 건 정황 상 당연하다고 생각하지만... 그래봤자 바뀌는 건 없을 거야. 어명이라는 말 한 마디면 모든 게 설명이 되는 걸. 거기다 대고 우리가 뭘 할 수 있겠어?"

다렐르의 기세에 억눌려 잠시 입을 다물었던 라벤더가 다시 입을 열었다.

"니들도 봤지? 대신님이 우릴 쏘아보던 그 눈빛. 진짜 무섭더라. 우즈가 가져온 공문을 처음 봤을 땐 진짜 빡쳐서 어떻게든 항의할 생각이었는데, 얼굴들을 보니까 한 마디도 못 하겠더라. 그게 권력의 힘이라는 걸까?"

"아마 맞을 걸. 정말 너무 억울해서 눈에 아무것도 안 뵐 줄 알았는데, 막상 마주하게 되니까 '여기서 말 잘못했다간 끌려가는 정도론 안 끝나겠다'는 생각이 제일 먼저 들더라. 생존 본능도 아니고, 참."

"그럼 이젠 우린 어떡하지? 이제 와서 항의할 수도 없다면... 그냥 넋 놓고 손가락이나 빨아야 하는 거야?"

실비아가 걱정스런 어조로 의견을 구했다.
라벤더는 어쩔 수 없다는 의사를 담아 무겁게 고개를 흔들었다.

"선택의 여지가 없잖아. 냉정하게 볼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이제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해. 안주거리 삼아 윗사람들을 씹을 순 있겠지만, 그것도 때와 장소를 가려야 할 테고. 그냥 좋게 생각하자. 어차피 4명 모두가 프린세스가 될 순 없는 거였으니까. 그냥 최종 간택에서 떨어졌다 생각하고 알아서 살 길을 찾는 수밖에."

라벤더의 지극히 현실적인 발언이 끝나자마자, 다렐르의 이유 있는 분노가 다시 고개를 들었다.

"그건 당연히 알고 있어. 근데 내가 참을 수 없는 건 우릴 도구 취급했다는 거야! 만약 8년 전에 약조했던 대로 우리 중에서 프린세스가 나왔다면 차라리 수긍할 수 있었겠지. 근데 우릴 자기들 좋을 대로 휘두르다가 버린다는 게 열 받는 거라고! 라벤더 넌 프린세스가 되고 싶어서 인간계에 온 거니까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싶어하는지는 누구보다도 잘 알 것 아냐?"

"알면 뭐해?! 그래봤자 아무것도 변하질 않는데! 열 받으면 어떡할 건데? 원통하다고 읍소라도 할래? 그럼 뭐가 달라져? 불복종인지 반역인지 하여튼 적당한 죄목 하나 붙여서 감옥에 처넣는 게 고작이라고!"

라벤더가 소리를 빽 질렀다.
위세에 겁먹고 잠시 주춤한 틈을 타, 라벤더는 체면 차린답시고 품 안에 쑤셔 넣었던 항변들을 토해냈다.

"나도 분하고 답답해. 그건 우리 모두 마찬가지일 거야. 그치만... 그치만 말했다시피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어. 끽해야 옥살이하는 게 전부인데... 그게 대체 무슨 소용이 있니..."

고함을 지르던 라벤더가 별안간 울음을 터뜨렸다.
어떡하지? 다렐르는 가면 속에 난감한 빛을 떠올렸다.
울려서 미안하다고 해야 할까? 아니면 동지끼리 같이 붙들고 울며 신세 한탄이나 해야 할까? 아니면...

"저기... 내가 분위기 파악 못 하는 건진 모르겠는데... 그래도 말하는 게 나을 것 같아."

다렐르에게 말문이 막힌 뒤로 줄곧 입을 다물고 있던 실비아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자신의 고민을 덜어 주는 실비아를 향해 다렐르는 한 짐 덜었다는 표정으로, 라벤더는 눈물이 매달린 풍성한 속눈썹을 들어 그녀에게 눈길을 주었다.

"심정적으로는 다렐르의 말이 맞다고 생각해. 현실적으로는 라벤더의 말이 맞고. 근데 우리 모두 너무 흥분해서 한 가지 사실을 잊은 것 같아. 아마 너희도 대강 짐작은 하고 있겠지만..."

실비아의 두 푸른 호수가 소녀들에게 한 걸음 다가섰다.

"만약에 프로젝트를 무사히 마쳤다면 최후의 승자는... 적어도 여기 있는 우린 아니라고 봐. 아마 캐널이 틀림없었을 거야. 우리가 억울해하는 건 당연하지만, 사실 제일 분통 터지는 건 캐널일 거라고 생각해. 우린 뭐... 화는 나지만, 그래도 라벤더 말대로 떨어졌다고 생각하면 그만이지만, 그 애는... 1등이었던 만큼 절대 쉽게 포기할 순 없었을 거야. 근데 니들도 알다시피 캐널은 가장 먼저 펜던트를 내놓았어. 대체 왜 그랬을까?"

"아...!"

다렐르와 라벤더가 동시에 탄성을 질렀다.
실비아가 내놓은 의견은 당사자라면 당연히 떠올릴 수 있는 의문이었다. 어째서 바로 그 의문을 떠올리지 않았는지 이해할 수 없을 만큼.
뭐, 너무 열이 뻗쳐서 거기까진 생각이 도달하지 못했을 거라는 게 가장 타당한 답이겠지만.

"...듣고 보니까 그러네. 우리 중에 제일 강하게 반발할 사람이 있다면... 그건 캐널이잖아. 하지만 되레 본인은 제일 먼저 명령에 복종했고... 어, 잠깐만. 그럼 혹시 캐널은..."

하나하나 손가락으로 꼽아가며 상황을 되짚던 라벤더는 문득 어떤 가능성 하나를 떠올리곤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캐널이 뭐?"

실비아가 물었다.

"어? 아, 아냐. 아무것도. 뭐가 하나 생각나긴 했는데... 아무래도 내가 착각한 것 같아. 그럴 리가 없거든."

라벤더는 손사래를 치며 자신의 의견을 부정했다.
그래... 그건 그냥 착각일 뿐이다. 분명 가능성은 있는 이야기지만, 설마 정말 그럴려고...
만약 캐널이 정말로 이 사실을 미리 짐작하고 있었다면 뭔가 대책을 강구하려 했겠지. 그냥 모르는 척 시침 뚝 떼고,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여행을 계속했을 리가 없다. 1등을 유지하는 노력을 기울이지도 않았을 거고.

"...뭐, 이 이야기는 이제 그만하자. 말해봤다 달라지는 것도 없고, 열만 받을 뿐이니까. 언젠간 분명 이런 일도 웃으면서 추억할 수 있는 날이 분명 오게 될 거야. 이렇게 모이기도 오랜만인데, 그냥 다른 얘기를 좀 하는 건 어떨까?"

"예를 들면?"

"으음, 가령... 각자 무슨 직업을 갖고 싶은지라든가. 이제 우리도 18세니까 나름대로의 인생을 찾아야만 하잖아?"

"라벤더 넌 뭐가 되고 싶은데?"

"난... 열심히 공부해서 박사 학위를 따 볼까 해. 여행하면서 수없이 느낀 거지만... 뭐가 되고 싶든 간에, 평민은 공부를 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방도가 없겠더라고."

라벤더가 쓴웃음을 지으며 말을 마쳤다.

"역시 넌 자기 주관이 뚜렷해. 난... 아직 구체적인 계획 같은 건 전혀 없지만... 가수가 되는 건 어떨까 하고 예전에 생각해 본 적이 있었어. 니들도 알지? 폐하께서 엄청 쫓아다니셨던 가수 엘레나. 그 언니처럼 되고 싶다고 종종 생각을... 아, 그냥 생각만 좀 해본 거니까 웃진 마!"

꿈꾸는 어조로 어린 시절 동경의 상대에 대해 이야기하던 실비아가 별안간 손을 휘휘 내저었다.

"뭐래니, 얘는. 아무도 뭐라 안 했는데 혼자 찔려선... 난 괜찮은 꿈이라고 생각하는데. 너 전에 수확제에서도 노래 불러서 박수 받았던 적도 있잖아. 다렐르 넌 뭐 하고 싶은 거 있어?"

다렐르는 갑자기 자신의 차례가 찾아왔음을 알리는 두 친구들의 시선을 깨닫고 당혹의 빛을 띄웠다.
언제부터였는지 캐널이 항상 1위 자리를 굳건히 지키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 다렐르 역시 실비아/라벤더와 마찬가지로 프린세스로 간택 받지 못할 때를 '대비'해 다른 꿈을 품어본 적은 있었다.
그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