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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누군가를 만나면 왜 내가 힘든 걸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느냐고 불평하는 녀석들이 꼭 있다.
안 알아주기는 개뿔, 지가 말을 안 하는데 그걸 어떻게 알아?
-1443년 12월 24일, 에이미의 일기장에서
"그래, 고민이 있다고?"
워볼프는 맞은 편 자리를 가리키며 상대의 용건을 확인했다.
평소 관록으로 무장되어 있던 그의 얼굴은, 지금은 깊은 고뇌의 색으로 빽빽이 칠해져 있었다.
왕의 신임을 받아 군 내 최고의 지위에 오르게 된 것까지는 좋았다.
자신을 선택해 준 수장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몸 사리지 않고 공을 세우는 것도 좋았다.
소싯적부터 수련한 덕에 몸을 쓰는 일에는 충분히 단련이 되어 있었다. 무술 사범으로서의 교양과 역량을 높이기 위해 교양이론과 군사학을 같이 배워 왔기에 머리를 쓰는 일에도 어느 정도는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전투도 군사 회의도 없을 때 상담할 것이 있다며 수시로 그를 찾아오는 부하들은 대체 어떻게 다루어야만 좋을지.
격투나 검술, 군사학 지식을 다루는 것이라면 무술 사범으로서의 경험을 살려 충분히 이끌어줄 수 있었다.
그러나 사람의 마음을 다루는 것은 단순히 지식을 전달하는 것과는 다르다. 정답도 정도(正道)도 없기 때문에 각별한 주의가 필요하다.
이제까지의 자신의 인생을 훈련과 싸움에 투자해 온 그로서는 다른 건 몰라도 도무지 이것만큼은 숙지할 수 없었다.
부하들이 상담하는 문제라고는 군 생활이 힘들다느니 사는 게 허무하다느니 애인이나 가족과 떨어져 지내는 게 괴롭다느니 하는, 전세와는 전혀 관계없는 개인적인 고민거리들뿐이었다. 물론 이게 쌓이고 곪는다면 전세에 악영향을 줄 수는 있겠지만.
워볼프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대체 왜 나한테 그딴 걸 묻는 거냐'고 외치고 싶은 마음 속 깊숙한 불만을 꼭꼭 숨기며 차분히 그들의 고충을 들어주는 것뿐이었다.
그들은 번지수를 잘못 짚은 거다. 워볼프는 이 방면에는 전혀 소질이 없었던 것이다.
애초에 그에게 사람의 마음을 잘 헤아리고 설득할 수 있는 힘이 있었다면... 자신이 마음에 두고 있는 여성 - 무용 사범이 론발드 백작과 약혼하는 걸 알고도 그저 바라보고만 있지는 않았을 터.
차라리 마법 사범에게 요리를 시키는 편이 나을 것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워볼프는 눈앞의 상담자에게 집중하기 위해 두 손을 모으고 상체를 약간 숙였다.
과거의 상념 따윌 끄집어내봤자 상담 요청이 취소되는 것은 아니다.
어차피 시덥잖은 개인 문제일 테니 잽싸게 들어주고 잽싸게 내보내는 편이 좋을 것이다.
마음의 준비를 마치고 상대와 눈을 맞춘 워볼프는 '나는 네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고 있다'는 표정을 지으며 품고 있는 고민이 무엇이냐며 입을 열 것을 재촉했다.
사건의 발단은 아주 조금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샤를 왕자의 부름을 받고 부대로 복귀한 지 약 3주가 지났지만, 에이미의 마음속에 낀 먹구름은 좀체 자리를 내줄 줄 몰랐다.
명령받은 대로만 움직이는 군대에 있으면 몸은 고되도 정신은 편하겠거니 했던 에이미의 일말의 기대는 단순한 기우로 끝나버렸다.
들러붙은 고민거리는 고된 군생활로도 떨쳐낼 수 없었고, 검을 겨누어야 할 방향은 짙은 안개 속에 숨어 에이미에게 동요와 혼란만을 안겨줄 뿐이었다.
최소한 동료들에게는 피해를 줘서는 안 된다며 마음을 다잡아 보지만, 그다지 바뀌는 것은 없었다.
어느 쪽으로든 서둘러 결정을 내려야만 했다. 이 상태 그대로 전투에 끌려나가봤자 아군의 발목만 잡을 뿐이다.
내려야만 하지만... 대체 어떻게? 어디로?
"야, 뭐 못 먹을 거라도 먹었냐? 표정이 왜 그래?"
잔뜩 풀이 죽은 에이미의 얼굴을 보고 호기라 여겼는지, 동료 하나가 허물없이 다가와 그녀의 어깨에 팔을 두르며 끈적함이 묻어나는 어조로 말을 걸었다.
"임시 제대까지 했던 녀석이 쌓였을 리는 없고, 뭐 말 못할 은밀한 고민이라도 있는 거야? 이 오빠가 해결해 줄 테니까 괜찮으면 한번 말해... 으억!"
빠아악!
둔탁한 비명을 울리며 날아간 칼집에 봉인된 검이 저속한 농담을 날리던 동료의 인중을 정확히 맞추고 금속음을 뿌리며 땅에 달라붙었다.
그 기특한 짓을 한 것은 에이미도, 강 건너 불구경하듯 방관하던 다른 기사들도 아니었다.
"아무리 썩어도 동지는 동지니까 일단 충고는 해 둘게. 지금은 걔 건들지 않는 게 네 신상에 이로워."
동료의 얼굴에 검을 던진 장본인 - 리제 톨버즈가 불쌍한 동물을 보는 시선을 던지며 말했다.
"아우우... 대화로 하라고, 대화로!"
졸지에 얻어맞은 녀석이 통증을 움켜잡으며 항의했다. 리제는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면서 척 하고 손가락을 세웠다.
"대화하고 있잖아. 말 대신 물건 던지기로 말야. 내가 나서지 않았다면 좀 있다 에이미가 '말 대신 공격주문'이라는 대화를 시도했을 걸. 혹시 그 쪽이 좋은 거야?"
"시, 시끄러워! 난 그냥 동료가 기운이 없기에 걱정해 주고 있는 거란 말이다!"
"말투는 전혀 그렇게 안 들렸는데. 좋은 말로 할 때 떨어지는 게 좋다니까?"
"그러니까 난 그러려던 게..."
그의 항변은 끝가지 계속되지 않았다.
별안간 불어 닥친 강풍의 주문은 주변의 공기와 함께 에이미에게 무분별하게 손을 댔던 기사의 변명을 집어삼키고, 그의 몸뚱이를 저 구석으로 날려버렸다.
끄응 하는 신음을 흘리며 겨우 몸을 일으킨 병사는 당장에라도 입을 놀리고 싶어 뻐끔뻐끔 입술을 달싹이는 리제를 향해 손가락을 내세웠다.
"...다 좋은데 '거 봐'라는 말만은 하지 마."
"정 원한다면."
못내 아쉬운 표정을 떠올리면서도 리제는 순순히 그의 요청에 동의해 주었다.
"너희들 이제 좀 적당히 할 수 없나?"
험악한 분위기가 흐르는 좁은 공간 속에서 갑자기 찬바람이 씽하니 불더니 아무 예고도 없이 악에 받치는 불만이 터져 나왔다.
대체 언제 들어온 건지 막사 안에 모여 있던 기사들이 움찔 하고 몸을 떠는 것을 시선 끝에 담으면서, 그들을 관리하는 재스퍼 근위대장이 이제는 지긋지긋하다는 가면을 덮어쓰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성큼성큼 다가왔던 것이다.
"톨버즈, 다운젠트. 마지막으로 말해두겠는데 둘이 계속 투닥거릴 거라면 차라리 나가서 주먹다짐을 하던 칼부림을 하던 해서 확실히 앙금을 씻어내고 전투에 임하는데 차질이 없도록 해. 한 번만 더 둘이 못 잡아먹어서 안달 난 꼴 보여줬다가 내가 친히 때려눕혀줄 테니까. 참고로 난 여자는 때리지 않는 주의지만, 전지(戰地)에서는 아군이냐 적이냐로만 상대를 구분하니까 그 부분은 잘 부탁해. 그리고 너!"
두 부하가 약간 기가 죽은 틈을 파고들어 마음껏 퍼부은 뒤, 재스퍼는 멍 때리고 있던 얼굴에서 시선만을 들어 자신을 올려다보는 생기가 죽은 다갈색 눈동자 앞에 당당히 서서-
철썩.
문답무용으로 뺨을 올려붙였다.
메마른 바람소리가 바짝 달라붙는다. 비릿한 피냄새가 송글송글 맺히며 시큼야릇한 뒷맛을 남기고 서서히 망그러진다.
생각 외로 실림 힘에 밀려 에이미는 비틀거리면서도 팔을 뻗어 쓰러지는 것만은 겨우 면했다.
"사지에서 지금 뭐하는 짓이냐. 여기는 전장이다. 민간인들이 웃고 떠드는 마을이 아니란 말이다. 알겠나?!"
"...죄송합니다...!"
"죄송하면 군 생활 끝나나?!"
시퍼런 날이 서린 냉기가 비수로 바뀌어 그녀에게 달겨들었다.
"하지만 대장님, 저도 자세한 내막은 모르지만 그 애에게는 그럴 만한 사정이..."
방금 질책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절친을 감싸기 위해 리제가 항변하려 했다. 재스퍼는 한 손을 들어 리제의 발칙한 행위를 막고 설법을 이어나갔다.
"군인에게 감정은 필요 없다. 군인에게 필요한 것은 군주에 대한 충성과 그에 걸맞은 실력, 그리고 철저하고 완전하고 거만한 자신감일 뿐이다. 그건 뛰어난 군인의 자질이 되기도 하지. 전지(戰地)에선 그 외의 어떤 것도 품어서는 안 된다는 걸 명심해라. 소유하지 말라고까진 안 하겠지만 적어도 겉으로 드러내서는 안 돼. 순간의 컨디션이 싸움에서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모르지는 않을 텐데?"
"시정하겠습니다..."
몸을 일으킨 에이미는 훈련을 받는 자세로 꼿꼿이 세우고 시선을 아래에 고정한 채 입술을 깨물었다.
십여 쌍 정도 되는 유리구슬들이 자신을 쏘아보는 이목에 에이미는 창피해 죽고 싶었다.
동료들 앞에서 꾸중을 들어서가 아니다. 공과 사를 구분하지 못하고 실의에 빠져버린 자신 때문이다.
자신에게 마족의 피가 흐르건 말건 상관없이 전쟁은 현재진행형이었고, 자신이 실의에 빠지게 된 것이 동료들의 탓도 아니지 않은가..
그렇게 봤을 때 분명 근위대장의 말은 이치에 맞다. 이치에는 맞지만...
머리가 아닌 가슴은 명령을 쉬이 받아들이지 않는다.
"...밖으로 나와라. 오늘 밤이 가기 전, 네 썩어빠진 군기를 속성으로 바로잡아 주겠다."
친히 갈궈주겠다는 의사를 비교적 온후한 방식으로 표현한 근위대장은 우악스런 손길을 뻗어 에이미의 멱살을 잡고 강제로 막사 밖으로 끌어냈다.
"그렇게 괴롭나?"
에이미에게서 손을 떼고 엄숙한 목소리로 질문을 던진 것은 막사에서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풀숲에서였다.
"아닙니다."
직립부동의 자세를 취하고 바로 대답하는 에이미. 재스퍼는 기나긴 한숨을 쉬며 입을 열었다.
"네가 뭣 때문에 괴로워하는지 난 잘 모르겠다만... 네가 잊고 있는 사실 하나를 상기시켜 줘야겠군."
또 시작이구나. 분명히 군인 정신이 어쩌고 하는 설교를 늘어놓을 테지.
얼차려를 받는 것보다는 낫지만,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면에선 별반 차이가 없는데.
"말하지 않아도 알아준다 - 이딴 건 헛소리일 뿐이다. 아무 말도 안 하고, 어떤 행동도 하지 않는다면 결코 아무것도 전해지지 않아. 혼자 모든 걸 떠안을 셈이라면 말리지 않겠다만, 내가 보기에는 짐이 좀 무거워 보이는군."
예상과 다른 말을 듣고 에이미는 침묵했다.
그가 말한 것은 정론이었다. 혼자 어둠 속을 헤매는 그녀에게 빛이 될 만큼 깔끔한 정론 말이다.
어째서 깨닫지 못했을까.
모든 고민을 혼자 떠안고 있는 것은 괴롭다. 외롭다. 감당하기 어렵다.
하지만.
누군가에게 털어놓으면 근본 해결이 될지는 차치하더라도 마음의 짐은 덜 수 있을지도 모른다.
진실을 알고 있는 두 사람은 자신이 다가서려 하는 과거에 대해 말해주지 않는다. 아니, 애초에 이제까지 모든 걸 알고도 숨긴 그들에게 현재 자신이 품은 감정에 대해 털어놓고 싶지는 않았다.
게다가 이 곳은 전지(戰地). 믿을 수 있는 사람도, 털어놓을만한 사람도 그다지 많지 않다. 그 중에서 가장 적합한 인물이라면...
"잠시... 장군님을 알현해도 괜찮겠습니까? 다녀온 뒤 어떤 벌이라도 받도록 하겠습니다..."
"아, 그러냐...? 뭐, 상관은 없다만. 그럼 난 기왕 부하들을 모아 놨으니 가서 군인 정신에 대해 설교라도 좀 해야겠군. 얼.차.려. 다 받고 돌아오면, 먼저 돌아가도 좋다."
내심 '고민이 있으면 나한테 털어놔. 들어주기는 할 테니까'란 말을 구어체로 번역해 들려준 건데. 재스퍼는 끌끌 혀를 찼다.
실명을 입에 담진 않았지만 누군지는 바로 알 수 있었다.
재스퍼와 에이미를 한 가지 공통점으로 이어주는 인물.
오래 전부터 알고 지내 충분히 믿을 수 있는 인물.
실력도 성격도 관록도 풍부해 방황하는 어린별을 올바른 길로 이끌어줄 수 있는 인물.
'그 분'이라면 군인답지 않게 멋대로 실의에 빠져버린 부하 - 자신의 후배를 다독여줄 수 있으리라.
생각의 정리를 마친 재스퍼는 그녀에게 눈짓을 하고 손가락으로 한쪽 방향을 가리켰다.
나중에 부하들의 신임을 얻고 카리스마를 좀 더 잘 보여줄 주 있는 방도에 대해 상담을 해야겠다고 다짐하면서.
"...사는 게 허무합니다."
워볼프의 재촉을 받은 부하 - 에이미 쿼츠는 세상 다 살았다는 기색을 구태여 감추지 않고 거침없이 말했다.
"입맛도 없고, 잠도 안 오고... 난 여기서 무엇을 하고 있는 건가 하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습니다..."
조금씩 꼬리를 드러내는 에이미의 고충을 들으며 워볼프는 가벼운 한숨을 쉬었다.
이 한숨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었다.
하나는 자신이 감당하기 힘든... 아무래도 좋은 개인적 고민을 또 들어 줘야만 한다는 현실을 도피할 수 없다는데 대한 회한.
다른 하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대가 찾아온 목적을 맞췄다는데 대한 약간의 기쁨.
상충되는 두 감정이 어우러져, 그의 얼굴에는 복잡 미묘한 감정의 꽃이 봉오리를 피웠다.
이번 얘기는 어디서 끊어내면 좋을까 - 반쯤 상념에 빠져 있던 워볼프는 다음 순간 에이미가 툭 던지니 발언에 생각의 늪에서 헤어 나와야만 했다.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서로의 힘을 낭비할 뿐인 이 전쟁에 대해... 대체 어떤 의미가 있는지..."
"전쟁의 의미를 모르겠다고...?"
워볼프는 조용히 그녀의 마지막 말을 따라 중얼거렸다. 기껏해야 군 생활 힘들어서 못 해먹겠다는 투정 섞인 푸념일 거라고만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는 다시 한숨을 쉬었다.
이번에 섞인 감정은 회환도 기쁨도 아니었다. 그저 공허한 울음소리만이 담겼을 뿐.
"거꾸로 내가 하나 묻도록 하지. 자네는 전쟁에 의미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나?"
워볼프는 대답에 알맞은 관용구를 고르기 위해 심호흡을 하며 약간의 시간을 우겨넣었다.
"필요하지 않습니까? 전쟁을 결정하는 것은 지도자지만, 전쟁의 승패를 결정하는 것은 죄 없는 민초들이 흘리는 피나 다름없습니다. 그렇다면 당연히 전쟁의 의미를 파악하고 댓가를 치를 가치가 있는지를 파악해야만 하지 않습니까? 명분이 없는 전쟁, 이기심과 복수심으로 점철된 전쟁은 이기건 지건 양쪽 모두를 불행하게 만들 뿐입니다. 저는... 저는 정말 이 전쟁에서 마족에게 칼을 겨누는 것이 올바른 일인지, 확신할 수가 없습니다..."
초콜릿이 녹은 부드러운 눈망울을 깊게 덮은 속눈썹이 사시나무 떨듯 파르르 흔들렸다.
일단 어떻게든 자신이 궁금해 하던 질문을 내려놓는데는 성공한 것 같았다.
자신의 팔에 반쯤 흐르고 있는 혈통과 싸우고 싶지 않다는 말 한 마디를 꺼내기 위해 쏟아 부은 쓸데 없는 단어는 과연 몇 개나 될까.
돌려 말하는 건 별로 취미가 아니지만 이번만큼은 어쩔 수 없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을 붙들고 '저기, 내가 반마족이라는데 그들과 싸워야 하는 걸까요?'라고 솔직히 털어놓을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현재 우리가 서 있는 때와 장소를 감안해서 대답하도록 하지. 미스 쿼츠, 나와 자네는 사범과 제자로서가 아니라, 상관과 부하로서 이 자리에 서 있다는 걸 참작하고 듣도록 하게."
워볼프는 고개를 흔들며 대답에 무게를 실었다. 흔들리는 표정과는 반대로 그의 눈동자는 한 치의 움직임도 없이 올곧게 우뚝 서 있었다.
"자네의 질문에 먼저 대답하자면, 전쟁의 의미 따위는 없다. 적어도 그것은 군인들이 판단할 문제는 아니다."
워볼프의 대답은 에이미가 예상했던 것과는 조금 달랐다.
"자네도 역사를 공부해 왔으니 알고 있겠지? 역사는 살아남은 쪽이 기록하는 전서(全書)에 불과하다. 결국 전쟁의 가치가 있느냐 의미가 있느냐 하는 문제는 살아남은 후세가 판단하는 것이다. 군인은, 쓸데없는 생각은 관두고 잘 싸워서 승리하면 되는 것이다."
"......"
생각과는 다른 전개에, 에이미는 말을 잃고 고개를 숙였다.
기껏해야, 그 질문의 답은 본인이 열심히 고민해서 스스로 답에 이르러야 한다'는 상투적인 대답이 돌아올 거라고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큰 대답을 들어버렸다.
워볼프의 말을 구어체로 요약하자면 이런 것이다. 가치가 있니 없니 하는 되도 않는 헛소리는 집어치우고, 넌 그저 네가 충성을 맹세한 군주를 위해 싸우기나 해라.
하지만, 충성을 맹세한 군주라니, 대체 그게 누구란 말인가?
기억은 없지만 내가 태어난 마계를 지배하는 마왕? 아니면 내가 자라온 왕국을 지배하는 레긴 국왕?
그녀의 내심의 갈등을 알 리 없는 워볼프는 자리에서 일어나 한층 무거워진 공기를 걷어냈다.
"만약 자네가... 전지(戰地)가 아닌 도장에서, 혹은 전시가 아닌 평시에 같은 질문을 했었다면, 대답은 조금 달랐을지도 모른다. 허나 지금 이 자리에서 내가 해 줄 수 있는 답은 이 정도인 것 같구나."
워볼프는 친히 막사를 걷어 입구를 터주며 에이미에게 눈짓을 했다.
이제 갓 무인의 길에 발을 들여놓은 저 햇병아리는 과연 자신의 의중을 짐작할 수나 있을까.
마음 같아서는 좀 더 대화를 나누고 싶었지만 주어진 여건 속에서 그것은 그리 현명한 일이 아니었기에, 워볼프는 남은 말을 삼키며 일부러 딱딱한 얼굴을 하고 막사를 나서는 수제자의 등에 대고 여러 의미를 함축한 짧은 한 마디를 던졌다.
"...건투를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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