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은 비겁한 자에겐 강하고 용기 있는 자에겐 온유하다.

 

 

 

에이미는 달리고 또 달렸다.
애타게 붙드는 간절한 목소리도, 볼을 타고 흐르는 상흔빛 눈물도 그녀의 다리를 붙잡지는 못했다.
뚜렷한 목적도 판단도 없이, 에이미는 정신없이 앞을 달려 나가는 것치곤 장애물에 부딪히는 일도 없이 비교적 순탄하게 마을을 달릴 수 있었다.
때는 모두가 잠든 한밤중. 당연하다고 해야 할 지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한참을 달려 숨이 턱까지 차오른 뒤에야 겨우 발은 멈춘 에이미는 길게 늘어선 담벼락에 등을 기대어 쓰러질 것만 같은 몸을 겨우 지탱하며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거짓말... 거짓말이야..."

감정을 억누른 나직한 목소리로 중얼거려보았다.
그래, 거짓말이 틀림없다. 내게 마족의 피가 흐르고 있다니, 질 나쁜 농담일 게 뻔하잖아.
나 에이미 글렌다 쿼츠는 군인으로서, 미들네임을 하사받은 대가로 왕국에 충성을 다하고 마족을 토벌하여 마계의 광맥을 차지한다는 막중한 임무를 수행하고 있는 중이 아니던가.
마족에 의하여 어머니를 잃은 그 슬픔을 왕국에 대한 충성으로 승화시켜 목숨 걸고 싸워왔지 않은가.
그런 나에게... 마족의 더러운 피 따위가 흐를 리가 없다.
마치 자신을 납득시키려는 듯 몇 번이고 되뇌였지만, 가슴에 뻥 뚫린 공허함은 채워지지 않는다.

"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거야..."

미친 듯이 날뛰던 심장이 제자리를 찾고, 정신없이 뛰던 호흡도 정상으로 회복됨에 따라 차츰 냉정해진 머리가 그녀를 강압했다.
만약 정말 거짓말이라면... 어째서 아버지는 큐브의 신랄한 비판에 반박을 하지 않았는가.
사실이라고 따져 묻는 자신을 어째서 방치한 것일까.
반대로 절대 그럴 리는 없겠지만... 만에 하나 둘이 나누던 밀담이 거짓이 아니라면, 어째서 그 둘은 자신에게 여지껏 그 사실을 숨기고 있었는가.

"에이, 아닐 거야... 아니겠지... 절대로 아냐!"

스스로를 다독이려는 말투도 소용없었다. 에이미는 저도 모르게 고함을 지르며 머리를 감싸 쥐었다.
애초에 인간이란 99개의 긍정적인 이야기보다 1개의 부정적인 이야기에 신경을 빼앗기는 경향이 있다. 만약 그것이 자신의 비밀이나 의문에 대한 것이라면 더더욱.
아롱지며 흐르던 작은 눈물은 봇물이 되어 터져 나왔고, 이 악물고 참아낸 신음은 오열이 되어 새어나갔다.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바닥에 엎어진 채 주먹에 피가 맺히도록 땅을 내리치는 것 말고는.

"여, 아가씨. 뭐가 못마땅해서 그리 서럽게 우는 거야? 남자한테 차이기라도 했어?"

"뭐하면 우리랑 같이 갈래?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우리가 기분 뿅 가게 해 줄 테니까."

어느 새 다가온 것인지, 이런 시간에 이런 장소에 늘 있는 녀석들이 기분 나쁜 웃음을 흘리며 다가왔다. 에이미의 오열을 들은 건지, 우연히 지나는 길이었는지 그것까지는 모르겠지만.

"뭔진 모르겠지만 그렇게 울면 예쁜 얼굴에 흠이..."

같잖은 위로를 던지며 한 건달이 에이미의 어깨에 부주의하게 손을 올렸고-
그 순간 울음소리가 뚝 끊겼다.

"잉? 그쳤네? 거 봐, 안 우니까 좋잖아!"

멋대로 헛소리를 지껄이는 건달들을 무시한 채 에이미는 주문을 외웠다.

"파이어 볼."

쿠과아아앙!
주문의 위력을 줄여 풀어낸 붉은 광구가 건달들을 덮쳤다.

"우와아아앗!!!"

-남이 모처럼 수심에 잠겨 분위기를 내고 있는데, 그걸 깨는 저 놈들이 나쁜 놈이지.
냅다 비명을 지르며 멀리멀리 날아가는 건달들을 예의상 잠시 바라봐 준 뒤, 에이미는 다시 눈물을 흘리며 이번에는 무릎을 끌어안았다.
그렇게 몇 분 정도 눈물을 쏟아내고 나서.
에이미는 문득 자신에게 향해 있는 눈초리를 느끼고 벌컥 고개를 들었다.
아까와 같은 건달...들은 아니었다.
그런 놈들이라면 기척을 보이기 전에 먼저 기척을 드러내거나 아까처럼 말을 걸어올 터였다.
평소 같았다면 무슨 용건이냐며 먼저 말이라도 걸어보겠지만, 지금의 에이미는 누군가에게 말을 걸 기력이 없었기 때문에, 아무 말 없이 근처 길바닥의 돌멩이를 주워 던져보았다.
퍼억- 하는 둔탁한 소리가 들릴 것이라는 예상과는 달리.
딱.
뭔가가 돌멩이를 맞춰 떨어뜨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흐르는 전개에 호기심을 느낀 그녀가 고개를 들자-
그녀가 주저앉은 곳 근처에 '검은 형체'가 있었다.


에이미는 눈물 자욱이 가득한 눈을 깜박여 '검은 형체'를 인식하려 애썼다.
방금까지는 자신과 건달들 말고는 아무도 없었는데, 저 꾸물거리는 이상한 거는 대체 어디서 나온 거지?
아까 분위기를 잡쳐 놓은 건달들은 분명 주문으로 전부 날려버렸는데.
속으로 무례한 생각을 떠올리며 눈길을 주던 에이미는 겨우 알아차릴 수 있었다.
꾸물꾸물하는 검은 것은 한 장소에 틀어박혀 뭔가를 연구하는 학자 타입의 마도사나 주술사들이 즐겨 입는 기다란 로브이고, 그 안쪽에 감춰진 주름 자글자글한 것은 나이든 사람의 얼굴이라는 것을.
어쩐지 기분 나쁜 감각에 조금 전처럼 공격주문을 먹여볼까 싶었지만, 아직 아무 짓도 하지 않은 상대에게 이유 없이 시비를 걸어서 좋을 것은 없었기에 일단 잠자코 있기로 했다.
자신을 빤히 쳐다보던 걸로 봐서는 아무래도 이쪽에 용건이 있는 것 같으니 저쪽에서 먼저 말을 걸어올 것이 틀림없었으므로.
그 예상은 곧 맞아떨어졌다.

"끌끌끌끌... 무슨 고민이 있기에 엄한 처자가 한밤중에 거리를 헤매고 다니는가?"

생각보다 덜 음침하고 또렷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남자의 가는 목소리로도, 여자의 낮은 목소리로도 들리는 탓에 성별조차 가늠할 수 없었지만 어째서인지 에이미는 그 목소리에 묘하게 끌리는 자기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마치, 정체모를 마력이 담기기라도 한 것처럼.

"아가씨는 무슨 사연이 있어서 이 밤중에 그리 서럽게 우는 건지 물어도 되겠나?"

"...누군지도 모르는 상대 앞에서 개인적인 얘기를 하고 싶지는 않은데요."

그닥 힘은 없지만 생각보다 단호한 어조로 질문을 묵살했다. 나야 그렇다 치더라도, 한밤중에 저 꼬라지로 돌아다니는 저 사람은 절대로 정상일 리가 없다.
아니, 애초에 인간인지 아닌지 파악도 되지 않는 상대다. 아무튼 어디를 어떻게 보더라도 '저는 수상한 녀석이니 안전을 위해서라면 가까이 하지 않는 것이 득책입니다'라는 오오라를 풍기는 자와 말을 길게 섞고 싶지는 않았던 것이다.

"끌끌끌끌... 안심하시오. 이 늙은이는 처자를 해칠 생각도 없고, 처자는 꽤나 강한 것 같으니까... 하지만, 그래. 처자의 말도 일리는 있어. 당연히 내키지 않겠지. 그럼... 이 늙은이가 레이디들 사이에서 유명한 점술가 헤르메스라는 거면 어떻겠소?"

"...예?"

딴죽을 걸어야 하나 마나 고민하던 에이미는 쇳소리를 냈다. 어디서 들어본 이름인데...

"어디서 들어본 것 같은 기분이 안 드는 것도 아닌 것은 분명 제 착각이겠죠?"

"아니, 아마 착각이 아닐 게야. 어디서 들어본 것 같다면 아가씨 친구에게서 들은 게 아닌가 싶소만."

"당신이 그걸 어떻... 아!"

순간 빛 한 줄기가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점술가 헤르메스. 크리스티나와의 티타임에서 오르내렸던 이름이었다. 그러고 보니 크리스티나 말로는 거처조차 알 수 없어 수상하다는 소문이 대세였다고 한 것 같았는데...

"이제 의심이 조금 풀린 것 같군. 그럼 한 번 털어보시게나. 이 늙은이가 해결해 준다고 장담할 수는 없지만 들어줄 수는 있으니."

"...아뇨, 됐어요."

잠시 생각의 늪에 들어가 고심하던 에이미는 이내 결정을 내렸다.
이유는 세 가지.
첫째. 자신을 '~거면 어떻겠소' 따위로 소개하는 녀석의 말 따위, 누가 신용하겠냐는 인간적인 이유.
둘째. 자신을 지금 괴롭히고 있는 문제는 그 어느 누구도 대신 해결해 줄 수 없는 문제라는 원초적인 이유.
셋째. 군인은 허락된 자 외에는 함부로 자신의 정보를 제공해선 안 된다는 직업적인 이유.
저 수상한 늙은이가 그 유명한 헤르메스이건 말건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끌끌끌... 벌써 본인의 답을 찾은 게로군? 내가 보기에, 아직 처자는 답은 알아도 그 답을 위해 아직 발을 내딛지는 못한 것 같은데."

"......"

에이미는 기묘한 투로 뜻 모를 소리를 중얼대는 점술가를 피해 도망치듯 바닥에서 몸을 일으켰다.
하지만 대체 어디로 가면 좋을까.
길바닥에서 시간을 보내면 보냈지, 이런 기분으로 다시 집으로 들어가고 싶지는 않았다.
크리스티나의 집? 방은 많아서 문제될 건 없겠지만, 이 시간에 문을 두드렸다간 숙녀의 교양이 어쩌구 하는 설법을 듣는 것은 물론이고 어째서 집에 들어가지 않는지 그 이유를 꼬치꼬치 캐물을 것이 틀림없었다. 기각.
밤늦게까지 영업하는 패트먼 씨의 여관? 아무 생각 없이 뛰쳐나오느라 수중에 돈이 한 푼도 없었다. 기각.
레이 씨나 레이브 씨의 술집? 비슷한 이유로 기각.
이런저런 이유로 선택지를 제외했더니, 남는 것은 하나밖에 없었다.
리제의 집. 손님 하나가 머물 정도의 여유는 있으며, 리제는 크리스티나처럼 이것저것 캐묻지 않는다. 오케이.
겨우 마음을 정한 에이미는 돌덩이처럼 무거운 발을 질질 끌며 어정어정 남서쪽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한밤중에 쳐들어온 그럴 듯한 이유를 대기 위해 머릿속에 저장된 방대한 기억과 경험을 이것저것 들추며.

 

 

그 시각.
샤를은 목에 걸린 펜던트를 움켜잡고, 다시금 신에 대한 충성을 맹세하는 약속의 말을 올리고 있었다.
그가 움켜잡은 것은 그의 삶을 지탱해 주는 든든한 버팀목.
펜던트 속 약혼녀의 초상화를 어루만지며 샤를은 현재 자신의 위치를 자각하려 애썼다.
이 곳은 마계, 적진의 한복판이었다.
조금이라도 방심하고 있다간 적들에게 소재를 들켜 농락당하다 목숨을 잃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나는 폐하와는 다르다.
샤를은 결연한 빛을 담아 막사에 걸린 성녀의 초상화를 주시하며 마음을 다잡았다.
국왕 폐하 - 레긴은 마법석을 탐내면서도 마족의 대응에 신경 쓰지 않았고, 그 결과 왕국을 커다란 혼돈으로 내몰 뻔했다.
초상화 속 성녀가 아니었으면 그리 되는 건 시간 문제였을 터.
종전 직후 태어난 샤를은 비록 전쟁의 실체를 알지는 못했지만, 마족들의 횡포에 신음하는 국토와 백성들을 질리도록 보며 자라온 탓에, 그들 못지않게 마족에 대해 거부감을 갖고 있었다.
그는 그 간정을 잘 달래어 냉정함으로 승화시켰고, 아비가 벌였던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하루에도 몇 번씩 짧은 주문을 중얼거리며 복수를 위한 힘을 기르는데 총력을 기울였다.
그 노력이 빛을 볼 수 있을지는 이번 전쟁에 달린 셈이다.
지난 번 전쟁을 막아 주었던 성녀는 이제 없다. 같은 피가 흐르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성녀의 딸에게 희생을 강요할 수도 없다. 이제는 불똥이 날아들어도 스스로의 힘으로 떨어내야만 한다.

" 이 짓은 오래 할 게 못 되는군..."

샤를은 살짝 긴장이 섞인 목소리로 조용히 중얼거렸다.
그는 장차 왕국을 이어 받을 정통 계승자로서 항상 그에 걸맞는 품위를 유지해야만 했다. 피로가 쌓이는 게 정상이었다.
평상시라면 혼자만의 시간을 갖거나 몰래 마을로 빠져나오는 등 피로를 날릴 수 있는 일탈의 시간을 가질 수 있었지만, 전시이자 적진에 발을 들여 놓은 지금은 불가능했다.
이 지긋지긋한 전쟁을 하루라도 빨리 매듭지어야겠다며 중얼거린 순간, 허리춤에 찬 검의 도신이 잠시 푸른빛으로 물들었다.
샤를이 잠시 눈살을 찌푸리는 사이 누군가 그의 영역을 침범하는 소리가 들렸다.

"어떻게 되었소, 근위대장?"

샤를은 긴장의 색을 깨끗이 몰아내고 수장의 얼굴에 어울리는 미소와 여유로움을 덧바른 뒤 부드러운 목소리로 질문을 던졌다.
왕자의 영역을 침범한 근위대장은 투구와 갑옷으로 무장한 몸을 숙이고 예를 갖춰 답했다.

"아뢰옵니다, 폐하. 방금 정찰을 보냈던 무리로부터 답신이 돌아왔습니다. 석양이 지는 방향으로 현재 아무 움직임도 없으며, 마왕이 사는 성까지 이렇다 할 걸림돌도 없다는 보고입니다. 이러한 기회는 흔치 않으니 서둘러 불의를 치면 생각보다 빨리 목표한 바를 이룰 수 있을 겁니다."

"목표한 바? 대체 그게 뭐요? 녀석들의 우두머리를 치고 무리들을 내쫓아 광맥을 차지하는 것 말인가?"

샤를은 냉담한 목소리로 그의 말을 잘랐다. 근위대장에 오른 지 얼마 되지 않은 이 젊은이는 패기는 좋지만 너무 앞서나가는 경향이 있다. 혈기왕성한 젊음 때문인지, 아니면...

"잘 듣게, 재스퍼, 우리의 궁극적인 목표는 자네가 말한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아. 우두머리를 치고 싶어 하는 자네의 이유와 각오도 잘 알고 있어. 하지만 굳이 목숨을 버리면서까지 매달릴 필요는 없다네."

"하오나 폐하. 천재일우의 기회가 아닙니까!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라면 다소의 희생이 나오더라도..."

목에 핏대를 세우고 주장을 펼치려던 재스퍼는 샤를이 조용히 들어 올린 손을 의식하고 재빨리 입을 다물었다. 샤를은 자신의 앞에 무릎 꿇은 가신의 어깨에 가볍게 손을 올리며 조용히 말했다.

"나는 단 1명의 부하도 개죽음을 당하도록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네. 전시인 만큼 다 같이 살아 돌아가자는 현실성 없는 이상론을 주장할 수는 없지만, 아무 이득도 없이 그저 목숨만 잃을 뿐인 사지일 가능성이 있는 곳으로 아유 없이 부하들을 함부로 내몰 수는 없어."

"하지만...!"

"이건 명령이네."

재스퍼는 감정을 숨기려 고개를 숙인 채 말없이 입술을 깨물었다. 샤를은 그의 어깨에서 손을 거두고 슬픈 듯 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물론 자네의 마음은 잘 알고 있다네. 전쟁에 집착하는 이유도 말이야. 아버님을 잃은 건 정말 유감이네. 마족은 물론 왕국에도 그대의 아버님의 죽음에 대해 책임이 있는 셈이니..."

"...그렇지 않습니다. 아버님께선 이자벨 님의 수색 참가에 자원하셨다 들었고, 왕국에서는 전쟁을 멈춘 이자벨 님을 되찾기 위한 수색대를 조직하는 것은 당연지사. 게다가 수색 종료를 명하였음에도 돌아가지 않은 아버님께도 책임은 있습니다. 하지만 결국 이 모든 일의 원인은 먼저 전쟁을 일으킨 마족에게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이 먼저 우리를 공격하지 않았다면..."

"옛 이야기는 그만 하세. 감상에 젖는 건 전쟁에서 승리한 후로 양보하도록 하게나. 지난 전쟁으로 가족을 잃지 않은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자네도 그렇고, 쿼츠 님과 그 외동딸, 톨버즈 양, 워볼프 님... 모두 전쟁으로 가족을 잃은 사람들이지. 그렇기 때문에 더욱 신중히 접근해야 하지 않나?"

샤를은 한숨을 쉬며 자리에서 일어나 막사 주변을 거닐기 시작했다.

"얼마 전 나의 잘못된 판단으로 적이 쳐놓은 함정에 빠져 부하들을 잃은 적이 있었지. 쿼츠 양이 목숨을 걸고 적의 눈을 돌리지 않았다면 나 역시 살아 돌아오지 못했을지도 모르네. 나의 섣부른 결정 때문에 충신이 죽음을 당했고, 병력도 타격을 입었으며, 무엇보다 부하들의 사기를 빼앗는 결과를 낳았지..."

"...그렇군요."

재스퍼는 샤를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깨닫고 그에 동의했다.

"모두 이 내가 부족한 탓이네. 좀 더 신중하고 냉정하게 지휘했다면 그 같은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지도 몰라. 지금도 마찬가지일세. 놈들의 목적이 뭔지 확실히 알지도 못할 뿐 아니라, 안전하다는 확증이 없는 이상 함부로 출전을 명할 수 없어. 최소한 놈들이 함정을 파놓은 것은 아닌지 확인이라도 해야 하지 않겠나?"

"그래서 쿼츠 양을 기다리시는 겁니까? 마법사가 필요한 거라면 그녀가 아니더라도 얼마든지 벌충할 수 있지 않습니까! 고작 마법기사 하나 때문에 군의 발이 묶이다니, 말도 안 됩니다."

샤를은 의외라는 눈초리로 근위대장을 내려다보았다.

"자네는 모르는 건가? 마법석을 이용하여 주문을 쓸 수 있는 것은 왕국에서 그녀밖에 없다는 것을. 물론 마법석이 없어도 마법은 쓸 수는 있지. 하지만 그 위력은 견줄 바가 못 돼."

"예...?"

"또 주문을 외워 힘을 방출하는데는 그만큼 시간이 걸리고, 그 동안 마도사는 자신을 방어할 수 없어. 요점은 교전 시 마도사가 주문을 외운다는 것은 자신의 목숨을 걸어야 할 만큼 위험한 행위란 말일세. 물론 쿼츠 양처럼 체술과 검술을 익혔다면 얘긴 다르지만, 대부분의 마도사들은 주문을 너무 믿는 탓에 그 방면에는 서투르거든."

"그렇습니까..."

샤를은 자조적인 미소를 머금은 얼굴을 끄덕여 그의 말에 긍정해 보였다.

"현재 마법석을 전투에 이용할 수 있는 방법을 찾지 못한 이상, 아직까지는 그녀에게 기댈 수밖에 없어. 실력과 충성과 각오를 의심할 여지가 없는 전사를 부린다는 것은 크나큰 행운이지 않나?"

벌컥.
샤를의 혼잣말이 섞인 질문에 대답하기도 전에, 약간의 노크와 함께 막사의 문이 열렸다.

"왕자님, 미스터 쿼츠로부터의 전갈입니다!"

완전무장한 병사 하나가 급히 무릎을 꿇으며 투박하게 봉인된 양피지를 그에게 내밀었다.
급하다는 현시를 이용하여 멋대로 예의와 절차를 생략한 병사를 나무라는 내색을 비치면서도, 샤를의 눈은 봉인이 해제된 양피지의 문자를 좇아 다망하게 움직였다.

"...잘 됐군."

샤를은 송신자의 의의를 전부 건져 올려 제 기능을 잃어버린 양피지를 가볍게 말아 등잔불에 태우며 겨우 희미한 미소를 떠올릴 수 있었다.
그는 손을 들어 편지를 가져온 병사를 내보낸 후, 계속 자신의 곁을 지키고 있던 재스퍼에게 다시 말을 붙였다.

"쿼츠 양의 상처가 전부 회복되었으니 언제든 돌아올 수 있다는군. 더 이상 시간을 끌 필요 없겠어. 자네는 어서 가서 쿼츠 양과 톨버즈 양에게 전선에 복귀하라는 명령서를 보내고, 수장들을 이리 부르도록 하게. 아까 얘기하던 문제의 매듭을 지어야지."

"예, 알겠습니다."

재스퍼는 기사의 예를 갖추어 인사를 올리고 서둘러 막사를 빠져나갔다.
다시 혼자 남은 샤를은 막사에 걸린 성녀의 초상화에 차분한 눈길을 주었다. 이 지긋지긋한 전쟁의 종지부를 찍을 수 있도록, 그는 절실한 마음을 담아 간청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