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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겨진 과거를 알려고 하는 것은 판도라의 상자를 여는 것과 같다.
"에이미! 오랜만이에요!"
"크리스티나!"
서로를 발견한 두 소녀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치맛바람을 날리며 달려와 뜨거운 포옹을 나누었다.
치료를 이유로 임시 제대한 에이미는 어느 정도 몸을 움직일 수 있게 되자마자 기별도 없이 집을 나와 거리를 거닐며 사색에 잠기는 시간을 늘렸다.
다른 목적이나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꼭 이유를 꼽으라면, 움직일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일 없이 집에 틀어박혀 있는 것은 시간 낭비라고 여긴다는 인간적인 이유라고 할까.
오늘도 가벼운 재활 치료를 끝낸 에이미는 늘 그랬던 것처럼 거리를 두어 바퀴 정도 돈 뒤 마을의 소문난 장인 시라크가 운영하는 레스토랑에 들렀다.
몸을 움직이다 보면 당연히 찾아오는 공허한 허기.
먹을 것을 달라고 투정부리는 신호를 달래고자 혼자만의 티타임을 가지려 문을 열었다.
딸랑.
새로운 손님이 왔음을 알리는 차임벨이 맑은 선율의 울음소리를 흘렸고-
레스토랑 주인보다도 먼저 그것에 반응한 것은 가게의 한쪽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던 에이미의 절친 중 하나인 노더리 가의 영양, 크리스티나였던 것이다.
"대체 언제 돌아온 거예요? 리제는요? 아니, 그것보다 그 분은 잘 지내고 계씬 건가요? 아니면 당신처럼 돌아왔나요? 아무 연락도 받은 게 없어서 모르는 것투성이라니까요. 정말 답답해 죽겠어요."
주변의 손님들의 시선을 전부 끌어들인 뒤에야 포옹을 멈춘 크리스티나는 이번에는 에이미의 손을 잡아 붕붕 휘두르며 새된 소리로 물었다.
"크리스티나, 저... 진정해. 응? 그렇게 한꺼번에 물으면 대답할 수가 없잖아."
에이미는 평소의 도도한 페르소나를 벗어버리고 사랑에 빠진 소녀 특유의 돌발행동을 보이는 크리스티나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난처한 얼굴로 우물거렸다.
그제서야 자신의 모습을 돌아볼 여유가 생겼는지, 크리스티나는 헛기침을 하며 이내 멋적은 얼굴로 혀를 쑥 내밀어 보였다.
"미안해요. 당신을 본 나머지 너무 반가워서 나도 모르게 잠시 교양을 잃고 말았네요. 하지만 너무 궁금해서 참을 수가 있어야죠. 에이미, 여긴 어쩐 일이죠? 혹시 선약이 있는 건가요?"
"아니, 없어. 그냥 산책 겸 밖에 나왔다가 배가 고파서 잠시 들른 것뿐이니까. 집에 아무도 없는데 혼자 궁상맞게 밥 차려 먹기도 뭐해서. 근데 크리스티나 넌 혼자 여기서 뭐하는 거야?"
에이미는 특별한 용무가 없으면 혼자 광장이나 거리에는 잘 나오지 않는다고 언제가 그녀가 얘기했던 것을 떠올렸다.
적어도 에이미가 알기로, 크리스티나가 아는 평민은 자기 자시노가 리제 뿐. 즉, 이 부근으로 자주 오지 않는다는 크리스티나의 말을 믿는다면, 평민들을 주 고객으로 삼는 시라크의 레스토랑에 그녀가 혼자 있는 것 자체가 보통 일이 아니라는 뜻이었다.
단순히 소문을 확인하기 위한 맛집 탐방이라면 집사나 하녀들과 대동했을 것이고, 또는 자신들이 아닌 다른 레이디를 만나는 것이 목적이었다면 평민들로 북적이는 이 곳이 아니라 좀 더 아늑하고 비밀을 보장할 수 있는 - 예를 들면 서로의 집이나 귀족들만을 대상으로 하는 가게를 약속 장소로 지정했을 것이다.
"잠깐만요..."
크리스티나는 귀를 빌려달라며 에이미를 가까이 오게 만든 뒤 나직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물론 전 평소에 일 없이 사람이 많은 이런 곳은 혼자 다니는 법이 없지만... 지금은 보다시피 가끔 이렇게 몰래 나오곤 해요. 혹시라도 왕자님을 만날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요."
"샤를 왕자님 말이야? 하지만 크리스티나는 요청만 하면 성에서 얼마든지 만날 수 있잖아?"
에이미의 말에 크리스티나는 답답하다는 듯 발을 동동 굴렀다.
"에이미도 참! 리제랑 똑같은 반응을 보이다니! 그야 물론 곧 남편이 되실 분이니(크리스티나는 살짝 얼굴을 붉혔다), 먼저 연락을 드리면 언제든지 만날 수 있지만... 연인들만의 기분을 내기 위한 것이라는 게 당연하잖아요?"
"기분?"
"그렇다니까요. 이럴 때 보면 리제나 당신이나 똑같은 것 같다니까요. 전쟁터에서 병사들이랑 섞여 지내다 보면 성별의 차이가 무색해지는 건지도 모르지만..."
빠직.
앞머리에 가려진 에이미의 머릿속에서 별안간 푸른 힘줄 하나가 튀어나왔다.
네가 푹 빠져 있는 그 낭군님도 전쟁터에 나가 싸우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그런 말이 나오냐고 쏘아붙이려던 것을 겨우 참으며 에이미는 약간 경련을 일으키는 얼굴을 움직여 겨우 접대용 미소를 지어 보였다.
8년이나 알고 지낸 친구의 그 발언에는 악의가 없다는 것은 경험으로 잘 알고 있다. 선의도 없었지만.
크리스티나는 청순한 외모에 말씨도 정중하지만 상당히 거침없이 말하는 면을 가지고 있었다.
그걸 알면서도 굳이 자신의 기분을 풀겠다는 이유만으로 괜히 친구에게 가시 돋친 말을 퍼부을 만큼 철없는 짓을 하고 싶지는 않았던 것이다.
"뭘 말하고 싶은 지는 잘 알겠지만... 1년 전도 아니고 왕자님은 지금 성에 안 계시다는 거 크리스티나도 잘 알잖아. 이렇게 말하긴 뭣하지만... 그냥 헛수고 하는 거 아니야?"
머리를 긁적이면서 최대한 온유한 표현을 써서 자신이 생각하는 바를 알렸다.
"그야 그렇다고는 생각하지만... 만에 하나의 기적이라는 게 있잖아요. 무슨 이유가 생겨서 잠시 마을로 돌아올 수도 있는 거고, 오늘 당신을 만난 것처럼 이렇게 딱 만날 수도 있는 거고. 그리고 생각보다 재미있더라구요. 혼자 나와서 마을을 거니는 것이라든가, 소문이 자자한 맛집을 찾아내는 것이라든가."
"으응, 뭐... 그건 사실인 것 같아..."
테이블을 차지한 케이크 접시와 찻잔에 넌지시 눈길을 주며 에이미는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으면 여기 앉아요. 여기요! 추가 주문 받아 주세요!"
자신의 맞은 편 자리를 권하며 크리스티나는 누구나 빠져들 만한 사랑스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에이미, 혹시 헤르메스라는 점술가를 알아요?"
크리스티나가 질문을 던진 것은 추가 주문한 케이크와 각종 견과류를 듬뿍 넣은 달콤한 쿠키와 차를 내려놓은 웨이트리스가 그들의 테이블에서 완전히 사라졌을 때였다.
"헤르메스? 처음 듣는데?"
에이미는 홍차에 우유를 섞어 맛을 가늠하며 대수롭지 않은 어조로 대꾸했다. 맛이 조금 강한 것이, 아무래도 우유를 좀 더 넣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어머, 그래요? 요새 레이디들 사이에서 자주 언급되는데. 그 점술가 말이죠. 점을 기가 막히게 잘 본다고 해요. 사랑운, 출세운, 금전운 등등, 꿀리는 데가 없다는 소문이 자자해요! 얼마 전에 결혼한 웨브 가문의 레이디 이시스도 그 점술가에게 사랑운에 대해 의뢰를 했다는데, 신랑될 귀족의 이름을 정확히 알아 맞혔다지 뭐예요."
에이미는 대놓고 관심 없다는 태도를 비췄지만, 크리스티나는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상대를 만났다는 것에 기쁨을 느꼈는지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이야기를 줄줄이 쏟아냈다.
그도 그럴 것이다. 상급 귀족 영애가 주변인들에게 할 수 있는 이야기의 종류는 그리 많지 않았다.
오늘 하루는 어땠냐느니 날씨는 좋다느니 나쁘다느니 하는 아무래도 좋은 얘기들이나, 다른 귀족들의 가십 뿐.
정치나 영지 경영에 관심이 있는 영애라면 이야기의 폭이 다소 늘어날지도 모르지만 거기에도 한계는 있었다.
귀족들도 사람인지라 취향에 따른 관심 분야는 많지만, 예의와 다른 이들의 시선이라는 갑옷으로 자신을 가둬 놓는 특성으로 인해 속에 쌓아 둔 이야기를 털어놓는 것은 쉽지 않았다.
섣불리 말을 꺼냈다가는 체통을 지키라는 설교를 듣기 십상이고, 혹은 아랫것들이나 다른 영애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릴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의 입이 상당히 가벼워졌다는 것은, 그만큼 상대를 신뢰하고 있다는 의미이고, 그렇게 따지자면 크리스티나의 행동이 이해가 안 가는 것도 아니지만... 그래도 관심 없는 얘기를 꾸준히 들어 주는 것이 지겨운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때문에 관심 없다는 태도를 대놓고 드러낸들, 누가 그녀를 비난할 수 있을까.
에이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친구의 말을 잘 들어 주고 있다는 뜻으로 중간 중간에 적절한 추임새와 질문을 던지는 것뿐이었다.
"근데 크리스티나. 그 소문은 대체 어디서 들은 거야?"
"그야 당연히 레이디 거미줄 네트워크를 통해서죠!"
-이름이 좀 그르타...
당연히 품을 만한 지적은 마음 한 구석으로 치워두고.
"에이미, 혹시 시간 있다면 나중에 같이 가 보지 않을래요?"
"나야 뭐... 같이 가는 거야 별로 상관없지만... 뭐 알고 싶은 거라도 있어? 역시 샤를 왕자님과의 궁합이겠지?"
"어머, 아니에요!"
어째서인지 크리스티나는 얼굴을 붉히며 손사래를 쳤다. 장난삼아 물어본 것 치고는 꽤 강렬한 반응이었다.
"절대 그럴 일은 없다고 생각하지만... 혹시라도 궁합에 대해 안 좋은 얘기를 하거나 하면 자꾸 생각날 게 뻔하잖아요. 그냥 미신이라고 치부하는 건 간단하지만, 그래도 신경이 쓰이는 건 어쩔 수 없으니까요. 그 리제한테 애인이 생길지를 물어본다든가, 아니면 가까운 미래에 일어날 일을 물어본다든가... 그런 걸 물어보는 게 훨씬 낫죠."
"헤에, 그런 것도 할 수 있어, 그 점술가?"
"가능할걸요. 출세운이나 사랑운도 결국 미래에 일어날 일 중 하나니까."
-아니, 난 그 자리에 없는 사람의 개인적인 일에 대해서도 알아낼 수 있느냐는 의미로 물은 건데...
에이미의 내심의 갈등을 알 리 없는 크리스티나는 살짝 한숨을 쉬었다.
"사실 말 나온 김에 지금 바로 가고는 싶지만... 만나고 싶을 때 바로바로 만날 수 있는 게 아니래요. 특정한 장소에서 자리를 펴는 것도 아니고, 시간도 들쭉날쭉하고... 참, 소문에는 한 달에 만월을 전후로 약 일주일 정도만 모습을 드러낸다고 해요."
"돈 벌 마음가짐이 없는 사람인가보네."
"그쵸? 근데 오히려 그 부분이 신비스러움과 맞물려서 오히려 사람들이 더 열광하는 것 같아요. 하긴 일반 상점처럼 언제 어디서나 만날 수 있다면 아무래도 희소성이 떨어질 수밖에 없으니까요.
어떤 의뢰인이 그렇게 뛰어난 실력을 가졌으면서도 왜 한 곳에 정착하지 않느냐고 물었는데, 그 점술가가 '별들의 움직임을 한 곳에 가둬 두면 영력이 떨어진다'고 했다나 뭐라나?"
"흐음..."
에이미는 의미를 알 수 없는 신음을 흘리며 뜨거운 홍차를 목구멍 속으로 흘려 넣었다.
별 거 아닌 가십일 거라고만 여겼는데, 크리스티나의와의 대화 중 한 부분이 목에 걸린 가시처럼 자리잡아 에이미의 사색의 공간을 빼앗았다.
-만월을 전후로 7일이라...
소문의 진위여부는 제쳐두더라도 어쩐지 구미가 당겼다. 크리스티나의 말을 믿는다면 그 점술가는 꽤 유능한 것 같으니까... 어차피 밑져야 본전이니 언제 시간이 되면 혼자 한 번 찾아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지도 몰라.
"아 맞다. 그리고 당신한테만 들려줄 얘기가 또 있는데요. 얼마 전에 하녀들이 하는 얘기를 우연히 들었는데..."
크리스티나는 새로 나온 쇼트케이크의 딸기를 집어 크림을 덜어내며 새로운 이야기보따리를 풀었다.
그제서야 겨우 정신을 차린 에이미는 이번에는 좀 더 관심을 기울이는 태도를 보이며 그녀의 이야기에 몸을 던졌다.
에이미는 눈을 떴다.
머리맡에서 누군가가 자꾸 일어나라고 말을 거는 듯 한 기분을 느낀 탓이었다.
군인으로서 생활한 지 몇 개월. 인간이 가진 놀라운 적응력에 따라 에이미는 군인의 생체리듬에 완벽히 길들여졌고...
그 덕에 자기 주변에서 조금이라도 시끄러운 소리가 들릴 경우 바로 잠에서 깨버리는 능력을 손에 넣게 되었다.
하지만 지금 방 안에 있는 것은 그녀 혼자였다. 다른 사람의 기척도 주변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자신의 기척을 지울 수 있는 프로가 침투했을 가능성도 없지는 않았지만, 에이미는 즉시 그 가능성을 지워버렸다.
이유는 간단.
그녀의 책상에 놓인 침입자 경보용 매직 아이템이 작동하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다.
집에서만큼은 편히 쉬고 싶다는 이유로 누군가 침략하면 바로 경보가 울리도록 만들어진 마법 도구.
제 아무리 노련한 프로라 하더라도 다른 사람에게 들키지 않을 정도로 살기를 억누르는 거라면 몰라도, 살기를 완벽히 지우는 것은 거의 불가능.
에이미는 그 점에 착안하여, 털끝만큼의 살기를 갖고 이 집에 접근하는 인간이 있다면 이 마법 도구가 냅다 비명을 지르도록 설계해 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쥐 죽은 듯 고요하다는 것은...
그냥 기분 탓이다.
신경이 너무 예민해진 것 같다며 스스로를 다독이며 에이미는 다시 침대에 드러누웠다.
"......"
밤하늘을 차지한 보름달이 둥그런 자태를 뽐내며 새하얀 달빛을 쏟아내고 있었다. 시간이 한 걸음 내딛을 때마다 똑딱거리는 시침 소리가 들려온다.
성큼 다가온 여름 향기가 물씬 풍기고...
"잠이 안 오잖아..."
에이미는 막연히 중얼거렸다.
어쩐지 잠에서 깬 것까지는 좋은데, 잠이 오지 않는다. 어쩌지?
딱히 할 것도 없는데 언제 올지 모르는 잠을 기다리며 멍하니 침대에 누워 있는 것은 성격에 맞지 않는다. 무작정 잠들 때까지 기다리는 것도 무료한 일이고, 생체 리듬이 깨질 위험도 있다. 그렇다면...
"라이팅!"
에이미는 벌떡 일어나 주문을 외웠다.
눈부시게 밝은 빛이 천장에 닿아 방 안을 환히 비추는 것을 만족스런 시선으로 잠시 바라본 뒤, 에이미는 조용히 문을 열고 방 밖으로 나왔다.
잠을 너무 많이 잤다거나 스트레스성 불면증에 지속적으로 시달리는 게 아니라, 일시적으로 잠들지 못할 때는 어려운 책을 읽는 것이 가장 효과가 빠르다는 소문을 떠올린 것이다.
따뜻한 음식을 먹는 것도 한 가지 방편이기는 하지만 여기에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다. 밤에 뭔가를 먹고 바로 자면 살이 찐다.
그런 사유로 에이미는 잠시 서서 눈이 익숙해지길 기다린 후 조용히 브라이언의 서재로 걸음을 옮겼다. 벽의 3면을 두터운 책장과 각종 책들로 감싸놓은 아버지의 서재에는 항상 읽을거리가 넘쳐난다.
자신이 소녀 시절 읽었던 그림책에서부터 박사 학위를 따야 이해할 수 있는 이론서까지.
머릿속으로 읽기 어려운 책들이 위치한 공간을 대충 그리며 서재로 향한 에이미는 갑자기 발을 멈췄다.
제 기능을 다하지 못한 문이 만들어낸 틈새 사이로 서재 밖으로 새어나오는 램프의 불빛, 두런두런 들려오는 익숙한 목소리들.
목소리의 주인공은 자신의 아버지와 충직한 집사 큐브, 두 사람.
-이 야심한 시각까지 잠도 안 자고 대체 무슨 얘기를 그리 열심히 하는 걸까?
속으로 당연히 떠오르는 의문을 품으며 에이미는 대수롭지 않게 안에 들어가려 했다.
"...차라리 아가씨께 솔직히 털어놓는 게 어떻겠습니까?"
틈을 타고 날아든 은밀하게 속삭이는 큐브의 의견을 들어버린 에이미는 무심코 움직임을 멈추었다.
내가 모르는 무언가를 저 둘은 알고 있다.
뇌리를 스치고 지나간 한 가지 가설이 에이미의 마음속에 의심암귀를 불어넣었다.
-별 거 아닐 거야. 누구든 감추고 있는 비밀 한 두개쯤은 있는 거잖아...?
가족을 두둔하려는 흰 목소리가 의견을 냈다.
-과연 그럴까. 별 것 아닌 비밀을 두고 야심한 시각을 택해 쑥덕이는 게 정상일까? 게다나 너 자신에 대한 비밀을?
마음 한 구석에 자리 잡은 의심암귀가 비웃으며 상당히 그럴 듯한 의견으로 반박했다.
에이미는 혼란스러워지려는 마음을 감추려 애쓰며, 무심코 다른 말이 들리지는 않는지 엿듣기 위해 고개를 들이밀었다.
"그 애에게 솔직히 얘기하라니,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는 건가?"
브라이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직한 아버지의 목소리 속에서 살짝 감도는 분노의 기색을 알아챈 에이미는 자신의 의심이 맞았구나 하는 확신에 부르르 몸을 떨었다.
"...주인님께서도 아시다시피, 아가씨께서는 지금 찬전을 이유로 마계에 몇 개월씩 머무르셨습니다. 마계에 깃든 마력이 아가씨의 잠든 마성을 조금씩 깨우고 있단 말입니다. 성수 따위는 임시방편일 뿐, 완벽한 대책은 되지 못합니다. 이대로는 아가씨가 자신의 과거에 대해 자각하는 것도 시간 문제입니다. 아가씨가 자각하여 얻게 될 충격을 생각하면, 지금이라도 솔직하게 얘기하거나 아니면 이제라도 마계와 연관되지 않도록 설득하는 편이 낫지요 영원한 비밀은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 않습니까."
"난 그 애에게 솔직히 얘기할 생각도, 제대하라고 설득할 생각도 없네. 우리만 입 다물고 있다면 비밀이 새어나갈 일은 없어. 됐으니까 다 된 밥에 재뿌릴 생각 말고 자네 입단속이나 제대로 하게"
브라이언은 단호한 어조로 큐브의 의견을 잘랐다. 하지만 그 목소리에는 약간의 조바심이 뿌려져 있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데미지를 입히기 위해 주인님께서 앞으로의 일과 절차를 헤아려 작정한 내용에 차질이 생긴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고, 또한 그 내용의 주축에 문제가 생길 경우 앞으로의 행동방침을 결정하는데 다소 장해가 생길 수 있기 때문이십니까?"
"그게 무슨 뜻이지?"
"주인님의 알량한 욕심을 채우기 위해 아가씨를 이용하고 있을 뿐이라는 의미의 감상을 조금 길게 토로한 것뿐입니다."
"닥치거라!"
브라이언의 불호령과 함께, 둔탁한 소리와 함께 책상의 비명 소리가 튀어나왔다.
"성질을 좀 죽이십시오. 그러다 아가씨께서 깨겠습니다."
"집사 나부랭이 주제에 어디서 함부로 입을 놀리느냐? 10년 전 맺은 계약을 잊은 게냐?"
"물론 기억하고 있습니다. 계약의 내용도, 계약을 어겨서는 안 된다는 것도. 그래서 싫어도 주인님(큐브는 이 부분을 특히 강조했다)을 모시고 있는 게 아닙니까? 하지만 계약 내용 외의 나머지는 전부 자유입니다. 그래서 주인님께 감히 의견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마지막으로 경고하건대, 앞으로 다시는 주제넘게 나서지 말거라. 한번만 더 잘난 주장을 내세운다면 가만두지 않겠다. 같은 잘못은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알겠나?"
"제게 잘못이 있다면, 그 분의 부탁을 곧이곧대로 들었다는 것뿐입니다."
"건방진 것... 모르는 것 같은데, 8년 전 수확제에서 그 아이는 본인 의지로 나와 같은 길을 걷겠다고 했네. 난 그저 그 바람을 들어줬을 뿐이란 말이다."
"지금 10살짜리 꼬맹이가 자기 인생을 스스로 결정했을 뿐이라고 변명하시는 겁니까? 그 나이 대 꼬맹이가 가장 가까운 사람을 맹목적으로 동경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일 터. 하지만 주인님은 아가씨의 말을 구실로 내세워 본인이 원하는 대로 휘두르고 있을 뿐이지 않습니까. 그게 아가씨가 스스로 삶을 선택할 권리를 박탈하고 주인님의 욕심을 채우는 게 아닌가요?"
"내가 내 딸을 키우는 방침에 네가 뭐라고 훈수를 두는 거냐?"
"호오... 딸로 생각하기는 하시는 겁니까? 적의 핏덩이를 키워야 한다고 한탄하실 때는 언제고요!"
덜컹!
"지금 이게 다 무슨 소리죠?"
벽을 부수기라도 할 듯 한 기세로 문을 열어젖힌 에이미는 생각 외로 차분한 목소리로 질문을 던졌다.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에이미의 얼굴을 감싼 검은 오라는 차츰차츰 주변의 공기를 갉아먹고 있었다.
"아, 아가씨..."
에이미의 동요와 혼란이 어른어른 피어오르는 눈동자를 직면하고 나서야 큐브는 자신이 이제껏 마음 속 깊숙이 감춰두었던 감정을 필요 이상으로 내세웠다는 것을 깨닫고 얼굴을 흙빛으로 물들였다.
그녀는 자신의 눈치를 살피며 우물거리는 큐브를 무시하고 한 걸은 나서서 자신의 아버지에게 따졌다.
"지금 주고받은 말... 전부 사실인가요? 저는... 저는 아버지의 친딸이... 아닌 건가요? 나한테는... 마족의 피가 흐르는 거예요?"
정중한 어조를 두른 차분한 목소리가 차츰 떨리기 시작했다.
서서히 차오르는 물안개를 거친 눈동자는 겨우 정신을 차려 쩔쩔매는 큐브를 지나 브라이언에게 머물렀다.
무슨 말이든 해보라는 무언의 압력에도 불구하고, 브라이언은 베일 속에 표정을 숨기고 서 있을 뿐이었다.
뭔가에 홀린 듯 그에게 천천히 다가 온 에이미는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아버지의 소매를 움켜잡고 몸을 흔들었다.
"왜 말씀을 안 하시는 거죠? 대답이든 변명이든 좋으니까 무슨 말씀이든 해 보시라고요!"
브라이언은 아까까지의 그를 지배했던 격앙의 감정을 싹 지우고, 무표정한 가면을 쓰고 거친 손길로 에이미의 손길을 뿌리쳤다.
"무슨 말을 듣고 싶은 게냐?"
되레 날 선 목소리로 진실을 요구하는 딸의 요청을 묵살한다.
"이미 다 알아들었다면 이 이상 말할 필요가 없는 것이고, 알아듣지 못했다면 말할 가치가 없다. ...어느 쪽이든 네게 해 줄 말은 없다."
아버지의 서슬 퍼런 반응에 에이미는 할 말을 잃고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다른 의미로 에이미가 던졌던 질문에 대한 대답을 한 것이다.
그의 현재 의중을 알아버린 에이미는 휘청거리는 몸을 가누기 위해 팔을 휘저었다.
손에 닿는 차갑고 딱딱한 감촉.
넘어지는 것을 겨우 모면한 에이미는 건조한 숨을 몰아쉬며 차츰차츰 뒤로 물러섰다.
"아가씨... 저기, 이건 그러니까..."
"됐어..."
어떻게든 사태를 수습해 보고자 조심스런 어조로 큐브가 말을 걸었지만, 그것은 오히려 불에 기름을 붓는 격이 되어버렸다.
에이미는 눈물을 보이지 않기 위해 연신 눈을 깜박이며 겨우 마지막 남은 힘을 쥐어짜내 소리를 질렀다.
"이제 됐다고! 말하고 싶지 않다면 안 해도 좋아! 비켜!!"
억눌린 비명소리는 틈을 비집고 새어나와 서재를 가득 채웠다.
에이미는 그 기세를 이용하여 그대로 문 쪽으로 돌진했다.
"아가씨?! 잠깐만요!"
큐브의 다급한 목소리도 그녀를 붙잡는 데는 실패하고 말았다.
브라이언의 얼굴에는 분노와 만족감이 뒤섞인 미묘한 표정이 감돌고 있었다.
한 집안의 때 늦은 소란을 전부 목격한 달빛은 아무 말 없이 뿌리던 달빛을 거두고, 흐르는 먹구름에 싸늘한 몸을 숨겨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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