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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44년 12월, 새하얀 눈송이가 대지를 포근히 감싸 안은 날.
내 자질을 높이 사 신의 지팡이가 되는 것이 어떻겠냐는 톰스 주교님의 권유를 아버지께선 단박에 거절하셨다.
물론 그 당시에는 알지 못했다.
아버지의 마음속을 그토록 깊은 증오와 복수심이 차지하고 있었을 줄은.
문득, 나의 자질은 보다 좀 더 숭고한 목적을 이루는데 쓰여야 한다고 말씀하셨던 것이 살포시 떠오른다.
아버지께서 어떤 생각을 품고 그런 말씀을 하셨는지는 지금까지도 정확히는 알지 못한다.
-1450년 12월 25일, 에이미의 회고록에서
"있잖아, 무투회는 어떤 사람들이 출전하는 거야?"
줄어들 생각을 안 하는 줄이 줄어들기를 기다리다 지친 내가 아빠에게 툭 하고 질문을 던졌다.
집을 나설 때까지만 해도 나는 기대에 부풀어 있었으나 성에 도착한 시점에서는 반쯤 흥미를 잃고 있었다.
줄을 선지 30분은 족히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도대체가 줄이 줄어들 기미가 보이지 않은 것이다. 모처럼 싸움 구경 할 수 있다고 해서 무지 좋아했건만.
-아침도 뜨는 둥 마는 둥 하며 방방 뛰어 온 내 입장이란 것도 좀 생각을 해 줘야 할 거 아냐!
그런 내 기분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빠는 묘한 포즈를 취하며 어쩐지 들뜬 어조로 설명하고 있었다.
"그야 당연히 무투회라는 이름에 걸맞게 무술에 자신 있는 사람들이 출전하지. 쟁쟁한 실력가들이 한데 모여 자웅을 겨루는 거라고 생각하면 돼."
헤에, 실력을 겨룬다고... 가만.
예전에 엄마와 아빠가 나라를 위해 오래 전 벌어졌던 전쟁에서 싸웠다는 말을 어렴풋이 들은 기억이 떠올랐다.
전쟁에 나가 싸울 정도라면 그 실력은 이미 상당할 거라고 생각하는데...
"아빠는 안 나가?"
어디까지나 진지한 내 의견에, 아빠는 껄껄 웃으며 도리질을 했다.
"하하하, 아빠는 이미 나이가 있어서 말이다. 지난 전쟁의 상처도 있고 해서, 이제 이런 대회에는 더 이상 참가하지 않는단다. 젊은이들을 위해 물러설 줄도 알아야지."
왠지 세상 다 산 늙은이 같은 어조로 말씀하신다.
누가 들으면 나이가 5~60은 되는 줄 알겠다. 이상하게도 아빠는 아직 창창한 30대면서 가끔 이렇게 할아버지 같은 말을 하곤 한다.
"아, 그렇지. 아빠 대신 에이미가 나가보지 않으련? 의외로 잘 싸울지도 모르잖니?"
"그래 볼까...? 아니, 역시 관둘래. 접수기간도 끝난 것 같고, 지금 나가서 싸웠다가 다치면 웃음거리도 안 되니까. 난 싸움 같은 것도 전혀 배우지 않았잖아."
잠시 생각해 본 뒤, 고개를 뒤흔드는 나. 싸움 구경하는 건 재미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구경할 때의 얘기. 싸우는 당사자가 된다면 얘기가 달라진다.
상상해 보라. 구경꾼이 이만큼 몰려들었는데 그 가운데서 상대방한테 신나게 얻어맞는 자기 모습을. 군중 앞에서 감수해야 할 그 쪽팔림을.
"그건 그렇다 치고... 도대체 줄은 언제 줄어드는 거야!"
기어이 나는 짜증을 내고 말았다.
-아니, 무슨 사람들이 하나 같이 싸움 구경하는 데만 몰려가지고, 성을 이리 복잡하게 만든담? 그렇게도 할 일이 없나?
...너도 같은 짓을 하고 있잖아, 라는 의견은 상큼하게 무시하는 방향으로.
"에이미, 거기서 뭐하니? 혼자 멍하니 서 있으며 미아 된다!"
어느새 움직인 건지, 저만치 앞에서 아빠가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놀라서 옆을 보니 낯선 사람이 내 얼굴을 말똥말똥.
"아빠, 같이 가!"
갑자기 부끄러워진 나는 사람들을 보지 않으려 애쓰면서 아빠에게 달려갔다.
"우와아아..."
아빠의 손에 이끌려 성을 찾은 나는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감탄의 한숨을 흘렸다.
재미있는 걸 보러 가자며 아침 댓바람부터 부산을 떨 때 뭘 잘못 드셨나 싶던 의혹은 이미 저 멀리 사라진 뒤였다.
동그란 모양으로 가운데가 움푹 파인 건축물은 흡사 커다란 도넛을 연상케 했다.
수많은 사람들이 페어티켓을 들고 높낮이가 제각각인 좌석을 찾아 분주히 움직이고, 나와 아빠처럼 자기 자리를 찾은 사람들은 뭔가 기대에 찬 눈빛을 하고 자기들끼리 수다를 즐긴다.
"아빠, 여기가 어디야?"
"여긴 콜로세움이라고 하는데. 성에서 준비한, 합법적으로 대결할 수 있는 투기장이란다."
아빠는 단정한 글씨로 오늘의 시합 일정이 찍힌 양피지를 이리저리 쫓으며 교과서에 실린 그대로의 대답을 들려주었다.
"콜로세움이란 건 뭔데?"
내 질문에 아빠는 다시 친절하게 설명해 주었다.
설명에 따르면, 무술대회를 치르는 콜로세움은 성 안쪽에 있다고 한다. 크기는 직경 긴 쪽 188m, 짧은 쪽 156m, 둘레는 527m로 정식 명칭은 플라비우스 원형극장이라나 뭐라나.
이 거대한 건물은 가로, 세로가 각각 190m, 155m에 이르며 4단으로 된 관람석은 45000개의 좌석과 5000개의 입석을 갖추었다고 한다. 물론 교과서에 기초한 아빠의 설명이 맞았을 경우의 얘기지만.
"쉽게 말해 나라에서 내노라하는 무인과 마도사들이 서로의 실력을 겨룰 수 있는 곳이지. 우리 딸한테는 싸움이라고 얘기하는 편이 더 알아듣기 쉬울라나?"
"너무해 아빠! 그럼 마치 내가 싸움을 좋아하는 것처럼 들리잖아!"
"어라, 무투회와 댄스대회, 예술제 중에서 무엇을 구경하겠냐고 물었을 때 바로 무술대회를 골랐던 게 누구였더라?"
"그, 그건... 아빠가 제일 좋아할 것 같았으니까 그렇지..."
예상치 못한 공격에 우물우물 대꾸하며, 나는 부우- 하고 양 뺨을 부풀렸다. 아빠는 싱글싱글 웃으며 양껏 부풀린 내 뺨을 손가락으로 콕콕 찔렀다.
"하지 마아... 그보다 아빠. 저기 무지무지 요상하게 생긴 의자들은 뭐야? 무지 안 어울려."
화제도 돌릴 겸, 아빠의 손을 밀치며 내가 가리킨 쪽에는 반대쪽에 앉은 우리들에게조차 똑똑히 보일 만큼 큰 보석이 박혀 있는 의자들이 색깔별로 나란히 모여 앉아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마치 돈이 넘쳐흐른다는 걸 온 몸으로 주장하고 있는 듯 했다. 아니꼽단 생각도 덤으로 딸려 왔다.
"저 쪽은 특등석이지. 국왕과 왕비, 그의 자녀들만 앉을 수 있는 자리야."
꼭 저렇게까지 해서 티를 내야 하나, 하고 생각하거나 말거나 관심 없다는 듯 아빠는 옆에서 안내책자를 읽었다.
"무술대회 남자부 예선전은 5일간, 여자부 예선은 4일에 걸쳐 치른다... 올해부터 경기에서 사용할 수 있는 무기의 폭을 크게 확대하는 대신 소지할 수 있는 무기나 도구의 종류를 하나로 축소한다... 또한 1402년부터 시행하였던 시간제한의 규칙을 개정... 조금 재밌어지겠군."
어쩐지 푸근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던 아빠는 양피지를 품에 다시 집어넣으며 콜로세움의 한쪽 입구를 가리켰다.
"자자, 이제 곧 시합이 시작되니까 집중해서 보도록 하자꾸나. 저어기, 저쪽 입구에서 나오는 사람이 보이니?"
"응."
아빠는 우리가 앉은 좌석 기준으로 1시 방향에서 걸어 나오는 한 무리의 사람들을 가리켰다.
"지금 선수들이 입장하고 있는 중이란다. 국왕 폐하가 개회 연설을 한 뒤 바로 예선 1시합이 시작될 거야."
입구에서는 대회 참가자들이 줄줄이 나오고 있었다. 족히 100명은 되어 보이는 규모에 나는 혀를 내둘렀다.
참가자들이 전부 정렬하자 언제 왔는지 아까 무진장 돈 들인 것 같은 특등석 근처에서 큰 함성이 들려왔다.
어린아이의 눈으로도 한 눈에 알 수 있을 만큼 고귀한 느낌이 물씬 풍기는 인상.
평민들은 가져 보기도 힘든 최고급 비단과 눈이 멀어버릴 듯 한 휘황찬란한 보석들, 그리고 머리에 얹은 신분을 상징하는 - 여러 가지 의미에서 굉장히 눈에 띌 것 같은 왕관.
국왕 폐하께서 자리에서 일어나자 방금까지 부산스러웠던 분위기는 온데간데없고, 대신 무거운 적막감만이 감돌았다.
그 조용한 분위기는 중앙에 나선 왕의 연설이 끝나고 사회를 맡은 네이섬 집정관이 시합의 규칙과 금지사항과 오늘의 일정(아까 아빠가 읽어준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을 낭독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추가하자면 연설 내용은 별 것 없었다. 무술대회에 참가한 전원을 응원한다는 둥, 올해도 불미스러운 일 없이 넘어가면 좋겠다는 둥, 이 자리에서 무술인들이 긍지를 갖고 싸워 주길 바란다는 말을 무려 25분에 걸쳐 설파했을 뿐.
"국왕이란 건 긴 얘기를 굉장히 좋아하나 봐... 근질거려서 혼났어~."
집정관님의 설명이 끝나고 경기장에 줄을 섰던 참가자들이 대기실로 돌아가고도 한참이 지나고서야 나는 참았던 숨을 내쉴 수 있었다. 아무도 숨 쉬지 말라고 명령한 사람은 없었지만, 분위기가 자아내는 박력에 압도당한 탓이었다.
아무 생각 없이 실없는 말을 한 마디 던졌을 때 다시 집정관님의 의욕이 실린 목소리가 들렸다.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곧바로 제 1시합을 시작합니다! 페르낭 프랑수아vs클립 아그레망, 입장해 주십시오!"
"아빠, 저기 저 밑에서 나온 사람은 누구야?"
잠시 사이를 두고 사람들의 환호성에 화답하듯 손을 흔들며 나오는 두 사람을 보고, 다시 호기심이 동한 나는 그들을 자세히 보기 위해 앞으로 몸을 내밀었다.
"저 사람이 서로의 실력을 겨룰 선수들 중 하나야."
"음, 그럼... 두 사람이 싸워서 이긴 사람은 위로 올라가고, 진 사람은 탈락하는 거야?"
"그렇지."
아빠를 따라 나는 다시 선수들이 서 있는 아래로 눈길을 주었다.
경기장으로 나온 한 사람은 우람한 체격에 창을 집어 든 장발의 남자였다.
크다고는 했지만 대부분의 귀족 부류처럼 피둥피둥 살찐 타입은 아니었다. 필요한 부분에만 살이 적당히 찐 사람이었다. 프랑수아인지 아그레망인지 모를 사람이 한 가운데 섰고...
그뿐이었다.
대전할 상대가 나오지 않았던 것이다.
"...아빠, 어떻게 된 거야? 나머지 한 사람은?"
"뭐, 가끔 저런 일이 있곤 하지. 자기가 우승하기 위해 상대방에게 고용한 건달들을 보낸다거나. 하지만 그건 준결승이나 결승에서나 가능한 일이고... 경기 당일 날 대전 상대를 알려주기 때문에 예선전에 방해공작을 펼칠 수는 없는 걸로 아는데 거 참 이상하군."
"영양을 지나치게 보충하다가 화장실한테 잡혔다거나 길을 잃었다거나 순서를 헷갈렸다는 바보 같은 이유로 안 나오고 있는 건 아니겠지?"
"설마."
아빠는 내 말을 정면으로 부정했다. 하긴, 설마 그런 바보 같은 이유로...
"여러분, 죄송합니다. 프랑수아 씨가 현재 배탈이 나서 기권하겠다는 의사를 그의 가족분이 방금 알려 주셨습니다. 프랑수아 선수는 기권 패로 처리되었기 때문에, 이 시합은 아그레망 씨의 승리입니다!"
...경기에 안 나온 멍청이가 정말로 있었구나.
시합 결과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약간의 시간이 필요했다.
집정관 님(아마 본인도 꽤 어이가 없었는지 표정이 가관이셨다)의 싱거운 발표에 우리를 포함한 관중들, 그리고 경기장 한가운데서 한껏 폼 잡고 있던 아그레망이라는 선수는 벌레 씹은 표정으로 집정관님을 노려보았다.
그 심정은 충분히 이해가 간다. 한껏 폼 잡고 기다리고 있었는데 상대는 과식하다 시합에 못 나오니, 그냥 너 이긴 걸로 해 줄게 라고 하면...
별 볼일 없는 실력자였다면 기뻐했을지도 모르겠지만 자기 실력에 대해 어느 정도 우월감을 갖고 있었다면 기뻐하기보다는 먼저 화부터 날 것이 틀림없다.
"오오..."
아그레망이란 선수는 의욕 없는 소리를 내며 손을 머리 위로 치켜들었다.
30분의 휴식 후 예선 제 2시합이 시작되었다. 말할 필요도 없이 이번에는 양쪽 모두 무사히 나왔다.
하지만 이번에는 승패가 너무 쉽게 갈릴 것 같았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로브를 뒤집어 쓴 작은 몸집의 사람. 얼굴까지 가린 탓에 남자인지 여자인지조차도 모르겠다.
들고 있는 거라곤 가느다란 막대기 하나 뿐. 그 단촐한 모습에 나도 모르게 실웃음을 흘렸다.
그에 비해 맞은편에 선 남자는 여러 가지 의미에서 상대와 대조적인 모습이었다.
머리 2개는 더 갖다 붙인 듯 한 커다란 키와(아마 몸길이가 2m는 가볍게 넘을 것 같았다) 우람한 체격.
딱 봐도 무지 무거워 보이는 배틀 엑스와 벗어제낀 웃통을 크로스로 감아 반짝이는 쇠사슬에 그와 맞추기라도 한 것인지 완전히 벗겨진 대머리.
길에서 말이라도 붙였다간 험한 꼴을 볼 것만 같은 무서운 얼굴과 험상궂은 분위기.
그 모습과 어딘지 상대를 깔보는 것 같은 웃음이 '나는 어딜 봐도 훌륭한 표준형 건달이다!' 라고 광고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누가 이길지 뻔히 들여다보이는 시합이 있긴 있구나 하는 생각을 하며 나는 다시 아빠에게 말을 걸었다.
"아빠, 다음엔 어디가 이길까?"
나는 자신만만한 얼굴로 거구 건달 쪽을 가리켰다.
"난 저기 큰 사람! 강해 보여. 아빠는?"
"아빠는 저기 저 마도사가 이길 것 같은데."
"마도사 누구? 아, 혹시 거구 말고 다른 사람? 말도 안 돼. 비실비실하고 몸도 작아 보이는 게 무진장 약해 보이는데... 어, 시작한다!"
작은 내기 판이 벌어지는 것과는 상관없이, 휘슬이 울림과 동시에 양 선수가 동시에 땅을 찼다.
덩치에 걸맞지 않는 속도로 마도사에게 접근한 거구의 남자는 우렁찬 함성을 지르며 배틀 엑스를 휘둘렀다. 햇빛을 받아 묘하게 푸른빛을 띠는 도끼날이 마도사의 머리를 향해 울부짖는다.
"끼악...!"
무심코 그 다음 순간을 상상한 나는 재빨리 양손으로 얼굴을 덮었다. 분수처럼 뿜어져 오르는 탁한 피가 초콜릿 빛 눈망울로 덤벼들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니 시합 전, 집정관님께서 말씀하신 금지 사항 중에 '상대를 죽여선 안 된다'는 조항이 있지 않았었나...?
-아니, 그것보다... 저런 걸 맞았으면 틀림없이 죽었을 텐데, 이 함성소리는 대체 뭐야?
예상과는 조금 다른 함성 소리에 살짝 실눈을 뜬 나는 나도 모르게 탄성을 질렀다.
방금 들었던 둔탁한 소리는 목표물을 정확히 맞춰낸 포효가 아니었다. 거구가 내지른 배틀 엑스는 허망하게 콜로세움 바닥을 움푹 도려냈을 뿐.
힘이 과했는지 빼내는데 애를 먹고 있었다.
그 기회를 놓칠세라, 상대에게서 거리를 취한 마도사가 이상한 막대기를 꺼내 흔들면서 이상한 포즈를 취했다.
입술이 움직이는 걸로 봐서 뭔가를 중얼거리는 것 같은데 알아들을 수가 없다. 목소리가 작은 탓도 있었지만, 나는 생전 처음 듣는 말이었던 것이다.
"chaos words로군."
옆에서 말하는 아빠의 목소리조차 생소하게 느껴졌다.
잠시 후 작은 선수의 손에서 이상하게 생긴 날카로운 물체가 몇 개 출현했고(이렇게밖에 표현할 수 없었다. 갑자기 나타나다니!) 그의 지시에 따라 화살들은 상대 선수의 머리와 배틀 엑스를 노리고 날아들었다.
-아프겠다!
그렇게 생각한 나는 아빠의 팔에 매달렸다. 이번에는 아까와는 달리 살짝 실눈을 뜨고서.
그러나 상대 역시 만만치 않았다. 상체에 감아놓았던 사슬을 재빨리 빼내 휘둘러 날아오는 주문을 하나하나 격침시켰다.
쫘아악 하며 얼어붙는 것을 보아하니 아무래도 마도사가 던진 주문은 얼음 계열인 것 같았다.
갈라지는 소리를 내며 얼음이 달라붙은 사슬을 미련 없이 내버리며 배틀 엑스를 뽑는다.
"그런데 아빠. 왜 저 마도사는 저 큰 사람 앞에서 주문을 쏘지 않는 거야? 바로 코앞에서 날리면 바로 맞출 수 있잖아."
거구의 남자가 접근하려 들면 마도사는 그만큼 거리를 벌린다. 그 과정에서 잠깐잠깐 주문을 날려보지만 거구의 남자 역시 잽싸게 피해낸다.
같은 공방이 계속되면서 싸움은 랠리에 빠졌다.
싸움 구경이 재미있다고는 해도,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스릴이 없다면 그저 지루해질 뿐이다.
답답한 마음에(그러면서도 눈은 시합장에 고정해 두고), 나는 왕년에 기사로 활동했던 아빠에게 물었다.
"나라면 저렇게 먼 데서 맞추지도 못할 주문을 던지지는 않을 텐데."
아빠는 무슨 소리냐는 듯 내 머리를 거칠게 쓰다듬으며 대꾸했다.
"참격이나 타격용 무기는 아무리 훌륭한 것이라도 결국 접근전용이니까, 무기의 사정거리 안에 상대를 몰아넣지 않으면 의미가 없단다.
요컨대 저 마도사가 가까이 접근하면 주문을 쏘는 것보다 저 선수의 무기가 마도사를 동강내는 게 더 빠르다는 거야. 지팡이만으로 접근하는 건 자살 행위지."
"그치만... 아까 집정관님이 말씀하신 금지사항에 생명을 빼앗으면 안 된다고 하지 않았어?"
"그렇기는 하지만... 싸움이라는 건 항시 자기 생각대로 흘러가는 게 아니라서 말이다. 가끔은 힘이 너무 넘치는 경우도 있고, 의도치 않게 힘이 들어가는 경우도 있지... 저길 보거라."
아빠는 왠지 씁쓸한 어조로 대답하며 경기장 한 구석을 가리켰다.
그 손가락을 따라 나 역시 고개를 돌렸고-
꽈당.
동시에, 무겁게 한 걸음을 내딛은 거구의 남자가 경기장 바닥을 밟고 성대하게 미끄러지고 있었다.
"아무래도, 아까 마도사가 날렸던 프리즈 애로가 박힌 땅을 밟고 미끄러진 것 같구나."
'뭐야, 저거? 왜 저래?' 라는 표정을 덮어쓴 나를 알아보았는지, 아빠는 친절하게 굳이 안 해도 되는 설명을 덧붙여 주었다.
"저 사람 그냥 바보 아니야?"
나는 어이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시합 전 자신이 그 '바보'가 이길 거라고 호언장담했던 사실은 저 뒷구석으로 치워둔 채 말이다.
"바보라기보단 초보적인 트릭에 걸린 것뿐이 아닐까? 성미 급하고 눈앞까지밖에 못 보는 탓에 본인이 피했던 프리즈 애로가 땅에 맞아 얼어붙었다는 걸 깨닫지 못한 거지."
"흐응..."
세간에선 그런 걸 바보라고 하지 않나 - 라고 생각하며 나는 얼음판 위에서 서둘러 일어나려다 다시 엎어지는 거구 사내에게 파이어 볼을 날리는 마도사를 흥미로운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심판이 나와 카운트다운을 외치고 관중들은 한층 거센 고함을 지른다.
몇 초의 시간이 흐른 후, 심판이 카운트다운을 끝내고 크로스 자세를 취함과 동시에 2시합이 종료되었다는 집정관님의 선언이 울려퍼졌다.
진짜로 승패가 일찍 갈렸구나. 승자는 달랐지만.
"와, 저 작은 사람, 정말 이겼다! 아빠가 말한 그대로야! 정말 굉장해! 상대가 바보 같았다는 것만 빼면. 나도 저 사람하고, 아빠처럼 되고 싶어!"
들것에 실려 나가는 큰 사람과 손을 흔들며 제 발로 걸어 나가는 마도사를 가리키며 신나게 떠드는 나.
"그럼, 누구 딸인데. 넌 분명 이 아빠를 뛰어넘는 훌륭한 전사가 될 수 있을 게다..."
아빠의 격려에 난 고개를 끄덕이며 주먹을 쥐었다.
"응, 그래! 난 아빠 딸인걸. 분명 강해질 거야!"
"......"
아빠는 의욕에 불타오르는 나를 바라보며 어째서인지 복잡해 보이는 표정을 지었다.
"아빠...? 왜 그래? 내 얼굴에 뭐 묻었어?"
나는 한 번도 본 적 없는 아빠의 심각한 표정에 살짝 겁을 먹고, 불안감에 못 이겨 아빠의 소매를 잡아 이리저리 흔들었다.
"...아니, 아무것도 아니란다. 갑자기 뭐가 생각나서. 우리 딸이 강해지고 싶다고 했으니까..."
겨우 다시 언제나의 미소를 보여 준 아빠는 부드러운 손길로 내 어깨를 톡톡 두드려 주었다.
"아빠가 하는 귀족 중에 아주 뛰어난 검술 실력을 지닌 분이 있단다. 마침 무술 도장을 운영하고 계시니까 그 분께 부탁해서 널 가르쳐 달라고 부탁하도록 하마."
"정말? 신난다♡"
"대신, 아빠 얼굴에 먹칠하지 않도록 열심히 기술을 연마해야만 한다. 사범님이 가르쳐 주시는 건 무조건 네 걸로 만들 수 있도록 노력해야만 해. 아빠랑 약속할 수 있겠지?"
"응! 맡겨만 줘요! 열심히 할 테니까!"
나는 작은 주먹을 불끈 쥐며 미래를 열기 위한 작은 서약을 앞에 두고 굳은 맹세의 말을 올렸다.
그런 모습을 만족스런 얼굴로 바라보던 아빠는 내 어깨를 살짝 감싸 쥐며 다시 경기장을 가리켰다.
"그 각오는 수확제가 끝난 다음에 보여주도록 하렴. 지금은 일단 미래를 위해 시합을 구경하도록 하자꾸나."
"응, 알았어! 힘내라, 힘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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