곧 센터 시험이 얼마 남지 않았다.

어머니께선 내게 스스로 원하는 미래를 쟁취하라 하셨고, 성적은 미래를 쟁취하기 위한 수단일 뿐, 수단을 위해 목적을 잊지 말라고 신신당부하셨다.

어머니 말씀이 맞지만, 그래도 역시 시험에서 좋은 성적을 받는데 신경을 쓸 수밖에 없었다.

좋은 성적을 받아야만 선택의 폭이 늘 것이고, 선택의 폭을 넓혀야만 그와 같은 대학에 갈 수 있을 테니까.

 

 

누군가에게는 평범했을 일상 & 2. 소녀의 휴일

 

 

"카고메! 여기야."

카고메가 카페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그녀를 알아본 히로코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카고메는 얼굴 가득 미안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히로코가 권하는 자리에 앉아 황급히 사과의 말을 꺼냈다.

"히로코, 늦어서 미안해. 많이 기다렸지?"

"아니야. 나도 금방 왔는걸. 그런데 웬일이야? 카고메가 지각을 다 하고."

"아하하하... 그게 그러니까... 너무 여유를 부리다가 집에서 늦게 나왔지 뭐야. 나도 모르게 잠시 정신을 어디 빼놓고 있었나봐."

아까 만났던 이상한 남자에 대해 얘기할까 했으나, 곧 생각을 고쳐먹었다.

그런 사람하고 한순간이라도 엮였다는 걸 히로코가 안다면 다치지 않았냐며 호들갑스럽게 걱정할 것이 틀림없었다. 어차피 더 이상 만날 일도 없는 사람인데, 그냥 거지한테 적선한 셈 치고 잊지 뭐.

"그랬구나. 하긴 시험도 얼마 남지 않았으니 정신 빼놓고 다닐 만도 해. 좀 있음 진로 상담도 시작될 거구, 성적에 맞는 대학도 써내야 할 거고. 신경 쓸 것투성이잖아."

"음... 뭐 그렇지. 히로코는 어떻게 할 건지 정했어? 전에 무조건 음대를 갈 거라고 했지?"

카고메는 열심히 부활 동을 하며 꿈을 키우던 히로코의 열의를 떠올렸다. 목요일 수업에는 항상 음악을, 방과 후 활동에는 항상 합창부에서 활동하던 히로코는 항상 음악과 관련된 쪽으로 진로를 정하겠다고 초등학교 때부터 얘기해왔던 터였다.

"나 말야? 난... 어떻게 할지 고민 중이야. 어렸을 때부터 계속 음악과 관련된 직업을 갖겠다고 생각해 왔었는데... 막상 닥치고 보니까 쉽게 못 정하겠더라."

"그래? 의외네. 음악 선생님이 되거나 아님 어머니를 도와서 학원을 운영할 거라고 늘 얘기했었잖아."

"응... 그렇지만 그것 말고도 다른 일도 해보고 싶어. 예를 들면... 연예인 매니저라거나 코디라거나... 카고메는 어떻게 생각해?"

아하. 카고메는 우물쭈물하는 히로코의 말 속에서 그녀의 진심을 잡을 수 있었다.

히로코는 소심해 보이는 겉모습과는 달리 의외로 유행에 민감하며, 연예인에 대해서라면 자칭 정보통 에미링을 능가할 만큼의 정보력을 가지고 있었다. 수험생이 아이돌을 쫓아다니는 게 옳은지 어떤지는 차치하고서라도 말이다.

그리고 그녀가 특히 동경하는 아이돌 가수, 한창 떠오르는 별 아카즈키 신야. 그의 존재는 히로코의 진로에 영향을 줄 만큼 컸던 것이다.

"하, 한심하다고 생각하면 솔직히 그렇게 말해도 돼. 고3씩이나 돼서 연예인에게 푹 빠졌다고 하면 다들 한심하게 보잖아? 안 그래도 엄마도 그것 때문에 요새 잔소리가 부쩍 느셨어. 시험이 두 달밖에 안 남았는데 연예인을 쫓아다닐 정신이 있느냐고."

"아니, 한심하지 않아. 정말이야."

갑자기 풀이 죽은 듯 한 히로코의 표정에 괜스레 죄책감을 느낀 카고메는 서둘러 손사래를 쳤다.

뭐어, 솔직히 인생의 중요한 시험을 앞두고 연예인에게 신경을 쓴다는 게 한심하지 않다고 말한다면 거짓말이지만 적어도 카고메는 히로코의 심정에 충분히 공감하고 있었다.

경우는 다르지만 그녀 역시 히로코와 비슷한 고민을 떠안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건 아마 그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한심하다니, 말도 안 돼. 솔직히 말해서 남한테 피해만 안 준다면 무슨 생각을 하던 그건 자기 자유고 남들이 뭐라 할 만한 자격은 없다고 봐. 애초에 생각이란 건 우리 맘대로 조절할 수 없는 거잖아? 공부하다 잠시 쉬는 개념이라고 하면 전혀 이해 못 할 것도 없구. 우리 어머니도 내 사정은 잘 알고 계시지만 거기에 대해선 크게 뭐라고 하신 적은 없으셔. 지금까지는."

"하지만 카고메는 공부 잘 하잖아. 성적도 항상 반에서 톱이구."

"톱은 무슨! 그냥 10등 안에 드는 것뿐이야. 공부 괴물이라고 한다면... 그래, 아셰트 제노와즈지. 걘 언제부턴가 항상 모든 시험에서 만점을 받았잖아."

"그건 걔가 이상한 거야. 어떻게 사람이 한 문제도 안 틀리고 올백을 맞을 수가 있는 거니? 아 맞다. 걔도 목요일에 음악 수업 듣잖아. 걔가 나더러 뭐라는지 알아? 만날 친구들이랑 화장실 같이 다닌다고, 병원에나 가보라는 거야. 허 참! 누가 신경 써 달랬나? 기가 막혀서 정말!

풀 죽은 모습을 순식간에 지운 히로코는 홍차에 우유를 넣으면서 분통을 터뜨렸다.

"전에 쿠로다 군이 너한테 고백했다 차였잖아. 듣자하니 제노와즈가 쿠로다 군에게 단 것만 밝히니까 뚱뚱해서 차인 거라고 했다나? 말도 참 이쁘게도 하지. 그러고 보니 이마가와한테는 오래 살고 싶으면 입 좀 다물라고 하질 않나. 하긴 뭐, 그 말은 맞지만!"

히로코의 진로에 대한 고뇌는 순식간에 사라지고, 잘난 동급생의 험담에 열이 올랐다. 카고메도 우유를 약간 넣어 맛을 가늠하며 히로코의 말에 적당히 맞장구치며 그녀를 달랬다.

"신경 쓰지 마. 걔가 언제 애들한테 좋은 소리 하는 거 봤어? 항상 독설뿐이잖아. 그냥 뉘 집 개가 짖나보다 생각하고 흘려버려."

-독설 치곤 입바른 소리만 한다는 게 좀 그렇지만.

물론 마지막 말은 마음속으로만 삼킨 채, 카고메는 히로코의 험담에 동참했다.

"그리고 아셰트가 정말 못 잡아먹어 안달하는 대상은 나라구, 나. 다른 애들한테 어쩌고저쩌고 하는 건 나에 비하면 별 거 아냐. 번데기 앞에서 주름 잡는 것도 아니구. 아, 생각하니까 또 열 받네! 학원 모의고사에서 또 만점 받아놓고 내 앞에서 한다는 소리가 뭔 줄 알아? 정확히는 기억 안 나지만, '난 우월하고 넌 열등하니 잘난 척 하지 마'라는 거야! 아우, 생각하니까 또 열 받네!"

"아, 미안해. 내가 괜히 화나게 해서. 잠깐 쉬자고 만나기로 한 건데 괜히 내가 성적 얘기 꺼내가지고 그 재수탱이 기집애 얘기가 나와 버렸네. 우리 딴 얘기하자. 혹시 묘안석이라는 얘기 들어본 적 있어?"

"묘안석?"

열 내는 것도 한 순간이지만, 식는 것도 한 순간이다. 카고메는 히로코의 빠른 감정 변화에 약간 감탄하며 화를 누르고 그녀의 질문에 장단을 맞추었다.

"응. 뒷골목에 있는 수상한 점술관 이름인데 거기 있는 점술가가 내는 점괘가 글쎄, 기가 막히게 잘 맞아 떨어진다는 거야. 재물 운이라거나 장래 운이라거나 건강 운이라거나... 근데 그 중에서 가장 탁월한 게 뭔지 알아?"

"설마 사랑 운은 아니겠지?"

머릿속으로는 이미 정답을 예상하면서도 일단 물어는 보았다.

"정답이야! 그래서 여자 애들한테 인기가 많대. 그 뿐만이 아냐. 남자들도 종종 가본다는 것 같더라. TV에서도 그것 때문에 취재까지 했다고."

"히로코 넌 대체 그런 얘기를 어디서 듣는 거야?"

카고메는 신기하다는 듯 절친한 마음의 친구의 얼굴을 요모조모 뜯어보았다. 정보의 질은 한쪽으로 편중되어 있다 하더라도, 대체 이 아이는 그 정보들을 대체 어디서 입수하는 걸까.

히로코는 약간 복잡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선선히 대답했다.

"일단 기본은 에미링 뉴스. 이마가와는 뭐... 별로 나랑 상성이 좋지는 않은 것 같지만 에미링 뉴스는 정말 굉장하잖아. 이마가와가 직접 발로 뛰어서 캐내는 정보니까. 난 그런 건 꿈도 못 꿔. 그리고 인터넷이랑 각종 블로그에서도 정보를 얻고 있어. 물론 공부하지 않을 때 남는 시간을 이용해서 말야."

"헤에, 그렇구나. 난 인터넷은 메일이랑 메신저만 써서 그런 쪽으로는 잘 몰라서 그런지 정말 굉장해 보인다."

"그래서 말인데... 우리 점 보러 가지 않을래? 복채는... 싼 편은 아니지만 적중률에 비하면 비싼 건 아니고 운만 좋다면 플라시보 효과라도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르지. 그리고 카고메라면 네 낭군님과의 애정 운을 한 번쯤 알아봐도 좋지 않겠어?"

히로코가 덧붙인 마지막 문장에 카고메는 그만 먹던 홍차에 사레가 들리고 말았다.

"....야! 그 얘기 하지 말랬지!"

콜록콜록콜록콜록콜록!

카고메는 사레가 들려 놀란 속을 진정시키기 위해 한 컵 가득히 들어 있던 물을 모두 위장으로 쏟아 붓고, 가슴을 두드리며 내용물을 내려 보냈다.

히로코는 이 모든 광경을 가만히 지켜보며 재미있다는 듯 장난기 가득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걱정 마. 아무한테도 얘기 안 했으니까. 비밀 연애라는 거, 상당히 로맨틱한 거잖아? 난 그런 걸 발설할 만큼 가볍지도, 눈치 없지도 않다구."

"그래도 누가 듣고 있을지도 모르잖아...! 안 그래도 이마가와, 요새 뭘 눈치 챘는지 누구랑 사귀냐고 끈질기게 물어보고 있단 말야!"

카고메의 항변에 히로코는 불쌍한 사람을 보는 듯 한 눈빛을 보이며 중얼거렸다.

"그치만... 빈 부실... 아니, 비밀 장소에서 항상 둘이 같이 밥 먹고, 계~속 같은 부에서 활동하고, 자주 같이 집에 가고, 쉬는 날에도 같이 있는 게 여러 번 목격되면 이마가와가 아니더라도 누구나 눈치 챌 거라고 생각하는데..."

"그, 그건... 하지만 우리 둘 다 말은 조심하는데다가 취미도 비슷하고... 또 8년지기 친구라면 그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싶은데..."

"너 이마가와를 너무 과소평가하는 거 아냐? 걘 이미 모든 걸 다 알고 있을지도 몰라. 단지 본인에게 직접 답을 듣고 확인 사살을 할 때까지 기다리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구. 너 조심해. 실은 얼마 전에 쿠로다 군이 날 붙들고 묻더라. 삐- 소년이랑 너랑 혹시 사귀냐고-"

"그만! 그만해."

히로코의 놀림인지 걱정인지 애매한 공격이 수위를 넘기 전에 카고메는 서둘러 그녀의 말을 잘랐다.

"아까 점 보러 가자고 했지. 까짓 거 보러 가지 뭐. 하지만 절대로 연애 운인지 애정 운인지를 보러 가겠다는 건 아냐. 시험이 두 달밖에 안 남았으니까... 아 맞다. 내가 원하는 대학에 갈 수 있는지 아닌지 확인하려는 것뿐이야. 단지 그것뿐이라고. 알았지?"

"어.. 으, 응..."

무슨 뜻인지는 잘 알 수 없었지만 카고메에게서 살며시 보이는 이글거리는 눈동자를 본 듯한 기분이 든 히로코는 황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알 수는 없지만 그녀의 감이 경종을 울리고 있었다. 이 이상 입을 놀리면 위험하다-고.

"내가 늦었으니 이건 내가 계산할게. 넌 먼저 밖에서 기다려."

서둘러 가방을 챙겨들고 테이블에서 빠져나온 카고메는 남은 차를 단숨에 들이켜며 구석에 놓여 있던 계산서를 거칠게 끌어당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