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어진 운명에 순응하는 것은 본인의 삶을 포기하겠다는 암묵적인 동의이다.

 

 

누군가에게는 평범했을 일상 & 3. 천사와 악마의 행진곡

 

 

히로코가 말했던 점술관은 뒷골목의 안쪽에 자리 잡고 있었다.

덕분에 두 여고생은 수상한 간판들이 즐비한 거리에 발을 디딜 수밖에 없었고, 그 덕에 카고메는 뒷골목 특유의 눅눅한 공기에 섣불리 점을 보겠다는데 동의한 자신의 행동을 후회하고 있었다.

아까 이상한 남자에게 말참견했던 것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상대의 요구에 섣불리 OK했다간 자신이 피를 볼 수도 있다는 걸 절절히 깨달은 참이었다.

"저기 히로코, 미안한데... 지금이라도 안 늦었으니까 우리 돌아가자, 응?"

"뭐어? 여기까지 와서 무슨 소리야. 너도 낭군님과의 상성... 아니, 원하는 대학에 갈 수 있는지 알고 싶다고 했잖아."

"그건 그렇지만... 뒷골목이 이런 분위기인 줄은 몰랐단 말이야. 지금 처음 와 본 건데... 분위기도 공기도 나랑 안 맞는 것 같고 분위기도 별로 안 좋아 보여. 불량배들이랑 만나기라도 하면 어떡하려고?"

"아직 낮이잖아. 사람들도 있고. 해 지기 전까지라면 문제없을 거야. 검술 대회에서 우승까지 한 애가 왜 이리 기가 약하니? 여차하면 다 때려 부수면 되잖아!"

-기가 약한 거하고 쓸데없는 싸움에 휘말리기 싫어하는 거는 전혀 다른 문젠데... 라기보다, 여차했을 때 싸워야 하는 건 나잖아!

마지막 말을 속으로 삼키면서 카고메는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자신을 이끄는 동급생의 얼굴에서 타인의 말에 군말 없이 따르던 12살 소녀의 모습을 떠올렸다.

소심한 미소로 타인의 안색을 살피던 작은 소녀의 마음에 이다지도 깊은 고집이 숨어 있었던가?

다른 친구들 - 특히 시라사키 학원 계간지를 책임지는 이마가와 에미리가 지금의 히로코를 본다면 편집장으로서의 호기심을 가지고 눈을 반짝이리라.

"왜 그래? 갑자기 정색을 하고."

생각이 밖으로 드러난 것인지, 히로코가 그녀의 안색을 살피며 이상하다는 듯 물었다.

"응? 아무것도 아냐. 난 그저... 히로코가 남의 의견에 무조건 따르지 않고 당당히 자기주장을 펼치는 모습을 보니까 신기해서 그래. 좀처럼 볼 수 없었던 모습이고."

사람이 안 하던 짓 하면 병난다는 말을 돌려 말하는 거지만, 다행이라 해야 할지 그녀는 카고메의 숨은 의도를 눈치 채지 못했다.

"치이, 난 또 뭐라고. 이게 바로 사랑의 힘이라는 거야. 신야 씨에 대한 내 사랑의 힘! 저번에도 신야 씨가 한국으로 해외 공연을 하러 간다기에 팬클럽 사람들이랑 비행기까지 타고 서울에 갔다 왔잖아! 물론 나중에 엄마에게 무진장 혼났지만 말야."

"우와... 그것 참 큰일이었겠네..."

"맞아. 엄마가 그렇게 화내시는 건 처음 봤다니까. 살다보면 그럴 수도 있는 거지. 그게 뭐 대수라고!"

-아니, 내가 큰일이라고 말한 건 네 어머니 쪽이었는데...

이번에도 마음속으로만 말참견을 하면서 카고메는 황급히 화제를 돌렸다.

"이미 지난 일은 접어두고, 네가 말한 그 점술관이란 곳은 대체 언제 도착하는 거니?"

"이제 곧 도착할 텐데... 아, 저기다! 다 왔네."

히로코가 가리킨 손가락 끝을 쫓아 달려간 시선 끝에 - '그것'이 있었다.

짙은 바이올렛을 베이스로 깐 푸른 색이 겉도는 천막.

사이클롭스를 연상시키는 커다란 외눈이 진짜 의지를 가진 듯 두 소녀를 쏘아본다.

멀리서 딱 바라보기만 해도 그다지 가까이하고 싶은 분위기는 아니었다.

한없이 우중충하고 가까이 했다간 이상한 게 옮을 것 같은 오우라에도 굴하지 않은 채, 히로코는 결연한 표정을 지으며 미심쩍어하는 친구의 손을 강하게 잡아끌며 안으로 들어섰다.

"오오, 귀여운 아가씨들께서 이곳까지 무슨 일이실까?"

칙칙한 로브 속에서 하얗게 서리가 내린 머리만을 빠끔히 내민 남자가 얼굴을 이죽이며 음산한 어조로 말을 걸어왔다.

"점술관에 대체 뭐 하러 오겠어요? 당연히 점치러 왔죠. 듣자하니 사랑 운에 대해 기가 막히도록 잘 맞춘다면서요?"

'난 수상한 녀석이니 신변의 안전을 위해서라면 멀리하는 것이 득책입니다'라는 포스에 다소 겁을 먹으면서도 히로코는 뒤로 물러서지 않았다.

"흠, 사랑 운이라니 시시하군. 아가씨, 인간의 사랑놀이만큼 분명하고 알기 쉬운 문제는 없다네. 잘 된다, 헤어진다, 양자택일 문제 아니겠나? 그나저나 여자애 둘이서 사랑 운을 점치러 왔다... 혹시 둘 사이의 금단의 궁합이라도 알고 싶은 게요? 끌끌."

"뭐라고요?!"

항의하는 두 목소리가 동시에 튀어나왔다.

점술가는 눈앞에 놓인 수정구를 거칠게 쓰다듬으며 기분 나쁘게 히죽거렸다.

"그렇게 화내지들 말게나. 농담이었어. 그럼... 먼저 운명을 들여다 볼 손님은 누군가?"

점술가의 질문에 두 소녀는 잠시 서로를 마주보았다. 몸을 뒤로 빼며 고개를 젓는 카고메를 향해 고개를 끄덕인 히로코는 결연한 표정과 함께 점술가의 맞은편에 앉아 찾아온 목적을 상세히 밝혔다.

"연예인과의 러브스토리라... 10대 여자애들이 흔히들 떠안는 고민이지. 희소성이라곤 눈곱만큼도 찾을 수 없지만... 아가씨 생일과 혈액형이 어떻게 되지?"

"6월 25일, O형이에요. 취미는 피아노 치는 거랑 식물 키우는 거고, 좋아하는 건..."

묻지 않은 인적사항까지 술술 털어놓으려는 히로코를, 점술가는 손을 들어 중단시켰다.

"아가씨, 필요한 경우가 아니라면 자신의 정보를 아무에게나 나눠주는 건 현명한 행동이 아니야. 처음에야 모르겠지만 나중에 잘못하면 책잡히기 십상이지. 또한 불필요한 정보는 별의 속삭임을 따라가는데 방해만 될 뿐이고... 아가씨 정보는 그걸로 됐고, 아가씨가 얘기하는 상대의 정보는?"

이번에는 그녀도 점술사가 원하는 답만을 간단하가 알려주었다. 그만하면 됐다면서 점술가는 이따금 아무 의미도 없는 문자를 담담히 나열하며 수정구를 한참동안 들여다보고 있다가, 가장 단단한 보석이 가장 밝은 빛을 발하는 날에 그를 잊고 다른 남자를 잡게 될 것이라고 딱 잘라 말했다.

"그 쪽 아가씨는 뭘 알고 싶으신가?"

점술가가 그렇게 물어온 것은 불만을 토로하던 히로코가 갑자기 자기납득이라도 한 듯 순순히 자리에서 일어난 뒤였다.

말없이 손짓하는 점술가를 따라 바통 터치를 하듯 히로코와 자리를 바꿔 앉은 카고메는 그가 던질 질문을 예상하며 혹시라도 실수하는 일이 없도록 긴장의 끈을 다잡고 있었다.

아까와 마찬가지로 점술가는 그녀의 인적사항을 물었고 수정구의 위치를 바꾸느라 점술가의 주의가 잠시 산만한 틈을 타고 카고메는 무엇을 질문해야 할 지 결정할 수 있는 시간을 아주 약간 얻을 수 있었다.

"저... 질문 안 하세요?"

카고메가 그렇게 물어온 것은 그녀가 마음의 갈등을 정리하고 자신에게 솔직해지기로 결심하고 나서도 한참의 시간이 흐른 뒤였다.

어째서인지 점술가는 의뢰인을 눈앞에 두고도 눈을 감은 채 팔짱을 끼고 조용히 명상에 잠겨 있었던 것이다.

카고메의 재촉에 겨우 눈을 뜬 점술가는 모노클 너머의 청회색 눈동자를 수정구에 맞추면서 이상하다는 말을 중얼거렸다.

"저기, 대체 뭐가 그렇게 이상하다는 건가요? 전 아직 어떤 점을 보겠다고 얘기하지도 않았는데요."

수상하기로 따지자면 점술가 본인이 훨씬 레벨이 높은 주제에, 마치 자신을 이상한 사람 취급하는 것 같은 불쾌감을 가라앉히고자 쌀쌀맞은 어조로 쏘아붙였다.

점술가는 카고메의 무례한 언동에도 기분나빠하는 티 없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아가씨를 이끄는 별이 이 세상 것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만큼 신비한 색채를 가지고 있군. 그만큼 가능성의 폭도 넓어서, 고귀하고 깨끗한 성녀가 될 수도, 끝없이 타락하는 요부가 될 수도 있는 움직임이지. 어느 길을 가든 아가씨 본인이 선택할 문제이지만, 아가씨의 별이 평범한 자리에 안주할 수 있는 위치가 아니로군."

점술가의 말을 가만히 듣고만 있던 카고메는 말참견할 타이밍을 놓치고 멍하니 점술가를 바라보았다.

이거 혹시 개그인가? 어디서 웃어야 하는 거야?

개그의 포인트가 어디인지 고심하는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고 점술가는 담담히 말을 이었다.

"그런데 쯧쯧... 별에 겁살(劫煞)이 끼어 있구먼. 아가씨의 능력은 아주 뛰어나지만 스스로의 의지로 그 능력을 사용하지는 못할 걸세."

정확한 뜻은 알 수 없었지만 분위기로 보아 그다지 좋은 말은 아닌 듯했다.

카고메는 차오르는 불안감을 억누르며 조용히 물었다.

"겁살이란 게 정확히 뭐죠?"

"흐음... 살 중에서 으뜸으로 작용하는 흉살 중의 흉살이지. 재살(災煞)과 세살(歲煞)과 함께 삼살방을 이루는 건데, 겁살이 끼어 있는 사람은 본인의 의지와는 상관 없이 외부로부터 그 힘을 빼앗길 명운의 소지가 있다네."

"........."

"아까 아가씨의 별은 가능성의 폭이 굉장히 넓다고 말했지? 어느 쪽을 택하든 평범한 생을 살 거란 생각을 버려야만 한다네. 아가씨의 별에는 아주 거대한 운명이 드리워져 있으니까 말이야. 내 진심으로 충고 하나 하지. 거스를 생각 말고 운명이 시키는 대로 순순히 따르도록 하게나. 행여나 운명을 거스르려 했다간 그 대가로 수많은 피를 바쳐야만 할 게야. 스스로의 의지로 선택하는 것은 가능하다만, 그건 아주 커다란 책임이 따르는 일이라네. 내 장담하건대, 아가씨는 그것을 견디지 못할 게야."

"...네에?"

너무하다면 너무한 이야기에 카고메는 달리 반박할 말을 찾지 못하고, 입을 딱 벌린 채 가만히 앉아 있을 수밖에 없었다. 항의의 소리가 들려오지 않는 것으로 보아 히로코 역시 자신과 비슷한 반응을 보이고 있음이 틀림없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