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에 의미를 부여하지 마라.

사랑이란 그저 서로의 이해관계를 전제로 한 타협의 산물이자 공식적인 사회적 계약일 뿐이니.

 

 

누군가에게는 평범했을 일상 & 15. Danger Zone

 

 

꿈을 꾸었다.

나만을 사랑한다 속삭였던 남자는 그 입술로 나를 거짓말쟁이라고 힐난한다.

주어진 현실과 예정된 미래에 의지를 반납한 남자는 거짓된 울음으로 소야곡을 연주한다.

내게서 점점 멀어지는 뒷모습을 쫓아 달리면 어느 새 두꺼운 벽이 앞을 가로막는다.

곁에서 지저귀던 새는 자유를 찾아 홀연히 자취를 감추고, 만물을 아우르던 자비로운 대지는 뿌렸던 은혜를 거두고 한기를 끼얹는다.

당연한 것이라 여기며 누려왔던 만유가 내게서 등을 돌리고, 나는 공허한 메아리 속에 홀로 서 있다.

나는... 어디로 가야 하는 것일까?

눈과 비가 한데 섞여 추적추적 떨어진다.

잿빛 기운을 가득 머금고 칙칙한 색의 수건으로 얼굴을 가려버린 하늘.

짓궂은 거짓 울음은 거리의 사람들을 몰아냈고, 드문드문 서 있는 가로등만이 자신의 몸을 태워 빛을 뿜어냈다.

각자의 집에 틀어박힌 사람들은 바깥 세계로 향하는 문을 봉인하고 자신들만의 세상에 취해 꾸밈없는 미소를 쏘아 올렸다.

바람을 타고 분위기를 띄우는 예수의 탄생을 알리는 캐럴을 안주삼아, 히메미야 마을은 가족과 친지들이 모여 왁자지껄 떠드는 기분에 편승해 휘황찬란한 외면을 연출했다.

마을에 사는 모든 사람의 얼굴에는 소박한 행복감이 떠올라 있었다.

전 세계적으로 즐기는 축제날이다. 이 흥겨운 날, 분위기 파악 못 하고 꽁해 있는 사람은 단 한 명- 창가에 걸터앉아 세상의 모든 고민을 혼자 짊어진 듯 한 자세로 멍 때리는 소녀밖에 없었다.

덧없이 흐르는 진눈깨비를 따라 이따금 소녀의 눈동자가 오르락내리락 움직였다.

눈 밑에 달라붙은 거뭇한 잿덩이가 눈동자를 따라 힘없이 춤을 춘다.

예상했던 만큼 눈물은 나오지 않았다. 아니, 예상했던 것과는 달리 눈물을 거의 흘리지 않았다고 표현하는 것이 더 진실에 가까울 것이다.

불과 얼마 전에 맛봤던 공허한 기운이 다시 그녀의 어깨를 짓눌렀다. 그 때와 다른 점이라면 날카롭게 솟은 무언가가 그녀의 심장 밑바닥에서 서서히 똬리를 틀고 있다는 점이었다.

"하아..."

닿으면 바스러질 듯 한 작은 결정체가 바람을 타고 그녀의 손에 내렸다.

차가운 바람이 폐를 타고 웅크린 내면을 깨웠다. 추위를 먹은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른 것과는 반대로 그녀의 감정은 등 뒤의 온기를 먹고 차분히 가라앉았다.

그녀의 머릿속에는 이미 수십 번은 족히 되풀이한 문장이 떠다니고 있었다.

-속였다고? 내가? 너를?

나는 네게 괴로움을 안고 진실을 말해 주었는데... 왜 넌 날 가증스런 거짓말쟁이라 말하는 거지?

-왜냐니? 너도 그 답은 알고 있잖아?

또 다른 심술궂은 목소리가 머릿속에 울려 퍼졌다.

엄밀히 따져 보면 작정하고 그를 속인 것은 아니었지만, 상대에게 있어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라는 점은 마찬가지였다.

지구의, 아시아의, 일본의 한 시민이라고 굳게 믿고 있던 상대를 바보로 만들었다는 것도.

상대가 구태여 묻지 않았던 것을 미리 고백하지 않은 것이 사람을 속이는 행위가 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적절한 토의가 필요하겠지만, 상대가 그렇다고 판단을 내린 마당이니 시기적으로는 이미 한참 늦은 뒤였다.

구차한 변명은 이미 묵살 당했다. 앞으로는 변명할 기회도 두 번 다시 주어지지 않으리라.

핸드폰으로 연락해도 수신자의 사정으로 연결할 수 없다는 메시지만 반복될 뿐. 집으로 찾아간다한들 결과는 달라지지 않았으리라.

카고메는 자신이 어떻게 행동하고 싶은 것인지 갈피조차 잡지 못했다.

이대로 병들어 죽어버리고도 싶었다. 한겨울에 창문을 활짝 열어젖힌 것도 그 때문이었다.

그러나 마음과는 달리 그녀를 거짓말쟁이 취급한 켄이치에게 한 방 먹이고 싶다는 생각도 간절히 들었다. 또한 그와 동시에 이러한 생각을 하는 자신에 대해 놀라움과 혐오스러움이 섞인 감정이 치솟았다.

실연의 아픔으로 넋을 잃기는커녕, 사랑했던 사람에게 본 때를 보여주겠다는 생각을 하다니. 나한테... 이다지도 냉혹하고 이기적인 면이 숨어 있었다니.

카고메는 이기적인 생각을 하는 자신을 질타하면서도, 자신을 가차 없이 버린 옛 연인에 대한 분노를 피워 올리는 자신을 억제할 수 없었다.

-다 싫어... 날 사랑한다 말하던 입으로 날 괴물 취급했던 너도,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화가 나는 나 자신도, 이제까지 가만히 있다가 갑자기 튀어나와 내 행복을 짓밟은 그 사람도, 운명이라는 허울 좋은 면 마디로 내 인생을 결정해 버리려는 것도...!!

마음을 잡지 못 하고 우왕좌왕하는 모습을 비웃기라도 하듯, 아까 전 들렸던 목소리가 다시 말했다.

-아직도 헛된 망상을 품고 있는 게냐? 넌 속으로 이미 현실을 인정하면서도 같잖은 자존심을 위해 자신을 속이고 있어. 인정해. 넌 운명을 거스르려 한 벌을 받은 거야. 모든 것이 네 이기심에서 비롯된 일이야. 네가 믿었던 자가 널 버린 것도, 그를 이해하면서도 분노하고 미워하는 너 자신도!

"아니야... 아니라고! 아니란 말이야!!!!"

북받친 감정은 길을 잃고 그녀의 내부에서 폭발했다. 사정거리 내에 들어 온 물건들을 마치 부모의 원수인 양 혼신을 다해 집어던지며 카고메는 거친 고함을 내질렀다.

절친에게서 받은 관엽식물, 기념으로 찍었던 사진(대부분 그와 찍었던 것이었다), 생일 선물로 받았던 라디오, 휴대폰, 휴대용 게임기 등이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나가떨어졌다. 복구하지 못할 상처를 입고 신음을 흘리는 추억거리들에 둘러싸여 거친 숨을 몰아쉬던 그녀는 다시는 흘리지 않을 것만 같았던 눈물을 터뜨렸다.

뜨겁고, 쓰고, 애절한 감정은 고인 물이 되어 얼굴을 타고 하롱하롱 떨어져 바닥을 적셨다.

고함소리와 물건들이 깨지는 소리를 듣고 올라온 가족들은 괴롭게 일그러진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기만 했다. 그녀의 어머니는 딸을 달래주려 앞으로 나서는 집사를 엄한 눈빛으로 제지하고 물러나라는 뜻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하지만..."

항의의 뜻을 비치는 큐브의 곁을 지나쳐 소리 없이 딸에게 다가온 어머니는 목 놓아 우는 그녀의 머리를 끌어당겨 살며시 안고 등을 토닥였다. 아무 것도 묻지 않고,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태도를 무너뜨리고 주저앉은 딸과는 달리 그녀의 표정에는 어떠한 의지가 서려 있었다. 수심이 가득하고ㅡ 구겨진 휴지 조각처럼 잔뜩 짓이겨져 있었지만, 그 속에는 딸과 큐브가 알지 못 하는 이지적인 힘이 깃들어 있다. 무언가 분명한 목적을 가진 힘이.

카고메는 낯익은 목소리가 추임새를 넣듯 자신의 울음소리 속에 일정한 곡조를 흘려 넣는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하지만 그것이 실제로 들리는 목소리였는지, 충격을 받은 탓에 자신이 만들어낸 허상이었는지는 확신하지 못했다.

카고메는 품속으로 파고드는 으슬으슬한 한기에 눈을 떴다.

그녀가 기억하는 마지막은 방바닥에서 우는 자신을 어머니가 끌어안아주는 장면이었는데, 자신도 모르는 새 잠이 들었던 모양이다.

추위에 잠이 깬 것을 보아하니 열어 두었던 창문을 제대로 닫지 않은 것 같았다. 파고드는 바람을 막기 위해 주섬주섬 몸을 일으키던 그녀는 위화감을 느꼈다.

이곳은 어디지?

푹신한 매트리스의 감촉도, 따뜻하게 누르는 두터운 솜이불의 감촉도 전혀 느낄 수가 없다. 몸뚱이를 비비는 작은 공간은 딱딱하면서도 보슬보슬한 느낌으로, 장판지를 바른 바닥이나 아스팔트를 깐 도로와는 근본적으로 달랐다.

정신을 가다듬으며 뻗은 손끝에서 느껴지는 차갑고 포슬포슬한 감촉, 코끝으로 스며드는 자연의 내음.

직감적으로 자신의 방이 아님을 확신한 카고메는 바닥에서 올라오는 한기를 맨발로 딛고 일어서서 당황한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잠시 시간을 두고 어슴푸레한 빛을 머금은 시야가 천천히 주변을 밝혀 주었다. 쌀쌀맞은 바람은 창문이라는 한정된 입구가 아닌 사방에서 그녀에게 달려들고 있었다. 까만 색지 속에서 홀로 빛나는 달은 그녀가 방에서 보았던 것과 반대 모양이었으며, 주변 배경 역시 일상적으로 눈에 담던 살풍경한 경치와는 확연히 달랐다.

짙푸른 기운을 가득 머금고 칙칙한 표정으로 얼굴을 감춘 하늘. 황량한 벌판 속에서 혼자 우두커니 서 있는 소녀.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우거진 나무들을 방패삼아 수풀 속에서 을씨년스러운 기운을 내뿜는다.

카고메는 당장이라도 고함을 지르고 싶은 내면을 감추기 위해 하늘로 고개를 들어올렸다. 눈물이 고이지 않도록 여러 번 눈을 깜박이며, 어찌 해야 좋을지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다.

이곳이 자신이 살던 세계가 아니라는 것에는 목숨도 걸 수 있다. 근거는 없었지만 카고메는 이러한 결론으로 이끄는 자신의 직감에 찬성표를 던졌다.

단순히 느낌일 뿐이다. 그 느낌은 카고메 자신이 서 있는 이곳이 일본이 아닌, 언젠가 프린스 아스팔이 데려와 주었던 고향의 세계라고 속삭이고 있었다.

한 없이 낯설어 보이지만 동시에 어딘가 그립고 익숙한 냄새가 났기 때문이다.

일단 카고메는 이 황량한 벌판에서 벗어나 마을이 있는 곳을 찾아 사람을 불러내기로 마음먹었다. 그리고 프린스 아스팔을 찾자.

잠에서 막 깼을 때는 꿈인가도 생각해봤지만, 젠장 맞게도 이것은 현실이 틀림없으리라.

카고메 자신이 추위를 느끼고 있다는 점, 신발도 없이 집에서의 옷차림 그대로 이곳에 서 있다는 점, 이곳이 일본이나 미지의 세계가 아닌 자신의 원래 고향이라는 강한 확신이 든다는 점이 그녀에게 이것이 현실이라는 답으로 이끌어낸 것이다.

자신이 어째서 이곳에 오게 된 것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지금은 그 이유를 따지기에 그다지 좋은 때가 아니다.

그녀의 고향은 어쩐지 검과 마법이 양립하는 중세 판타지 세계.

어두운 밤에 인적 드문 곳에서 넋 놓고 있다가는 도적이나 몬스터의 먹잇감이 될지도 모른다.

인과관계를 따지는 것은 안전을 확보한 뒤 시작해도 늦지 않다.

그 재수탱이 왕자를 찾아야 한다는 사실이 그녀의 자존심을 상처 입혔지만 그것만은 어쩔 수 없었다. 어렸을 적 살던 세계라고는 해도 이미 8년이나 지났다. 그녀를 알아보는 사람도, 흔쾌히 도와줄 수 있는 사람도 없을 터.

안전을 확보하는 것부터 집으로 돌아가는 것까지 전부 그에게 의지해야만 했다. 제기랄.

카고메는 자신에게 잇따라 가혹한 시련을 내리는 누군가에게 욕지기를 하며 한 걸음 발을 내딛었다.

그 순간, 추위에 바들바들 떨리는 등줄기를 타고 기분 나쁜 오한이 한 방울 흘러내렸다.

한 발짝 움직였을 때... 바닥이 흔들리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던가?

기분 탓이라고 치부하는 것은 쉽다. 너무나도 신경이 곤두서 예민하게 반응하는 것 뿐, 실제로도 그냥 기분 탓일 가능성도 있었다.

하지만 섣불리 내린 판단 하나가 한없이 나쁜 방향으로 치닫을 가능성이 있는 한, 낙관은 하지 않는 편이 좋다. 카고메는 여러 번 검술 대회에 참가했던 경험을 살려 있을지도 모르는 상대의 기척을 살피며, 자연스럽게 걷는 것처럼 보이려 애썼다.

-기분 탓이 아니야...

카고메는 바삭바삭 흙이 부서지는 소리를 들으며 얼굴을 찌푸렸다. 일그러진 얼굴은 금방이라도 눈물을 떨굴 것처럼 우중충한 기색이 끼어 있다.

-판타지에서 나올 만한 몬스터는...

카고메는 뒤에서 끌어안는 공포의 기운을 떨쳐내려 애쓰며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들을 하나하나 끄집어냈다. 유괴범, 커다란 말벌, 트롤, 고블린, 늑대, 호랑이, 야만바...는 좀 아닌가?

무기가 될 만 한 건 없다. 험한 세상에 대비해 호신용으로 들고 다니는 스프레이 하나 뿐.

그녀가 공포에 떠는 것은 그녀에게 익숙한 무기가 현재 손에 없다는 현실 탓도 있었다. 그녀가 자주 휘두르던 검이라던가, 하다못해 나무 지팡이라도 있었으면 조금은 나았을지도 모르는데.

점점 가까워지는 소리 안에 섞인 살기를 감지함과 동시에 카고메는 땅을 차며 뒤로 뛰었다!

그 다음 순간, 그녀는 자신이 서 있던 자시를 정확하게 꿰뚫는 날카로운 살기를 보았다.

카고메는 태세를 정비하며 자신을 공격한 자를 시선으로 쫓았다. 어둠에 익숙해진 시야 속에 작달막한 인영이 채워졌다.

삭발이라도 한 것인지 머리칼을 찾아볼 수 없는 민둥산, 옷이라고 하기도 뭐한 넝마조각을 두른 착은 체구, 그나마 살점이 붙어 있는 상체와는 달리 앙상한 뼈만 남은 하체. 그리고... 가장 신경 쓰이는, 검붉은 얼룩이 가득한 묵직한 자루.

...뭐가 들었는지는 굳이 신경 쓰지 말자. 달라붙은 피냄새가 풍기는 것도.

카고메는 애써 자신을 타이르며 눈앞의 불청객을 매섭게 쏘아보았다.

"밤중에 숙녀의 뒤를 밟고 다짜고짜 기습이라니, 너무 과격한 거 아니야?"

제대로 된 대답은 기대하지 않은 채 카고메는 언성을 높였다. 어깨를 짓누르는 공포를 떨쳐내기 위해서였다.

"우히히히히... 목표물을 휘어잡는 건 야습이 제일이니까... 너처럼 도도한 인간 여자를 습격하는 건 아주 짜릿해서 그만둘 수가 없지, 암..."

생각했던 것보다는 정상적인 대답이 돌아왔다. 묘하게 초점이 어긋난 것은 잠시 제쳐두도록 하자.

카고메는 시선을 앞에 고정하고, 시야만으로 검 대신 쓸 만한 무기가 있는지 주변을 훑었다. 격투 스킬도 어느 정도 익혀놓기는 했지만 그것에만 의지하기에는 자신의 완력에 자신이 없었다.

물론 도망친다는 경우의 수는 말도 안 되는 생각. 적의 능력치도 전혀 파악하지 못했고, 이곳의 지리도 전혀 알지 못한다. 도망치다 막다른 곳에 몰리기라도 하면 그저 체력만 빼놓는 꼴이 되고 마는 것이다.

지금은 일단 시간을 버는 것이 급선무.

"한동안 이 근처에 있었던 것 같은데... 왜 아까는 날 건드리지 않았지?"

"죽은 장난감은 재미없다... 살아서 팔딱팔딱 뛰는 장난감이 망가뜨리기 좋아..."

시간도 벌 겸, 머릿속에 떠오른 질문을 던졌던 카고메는 적의 대답을 듣고 모욕감과 공포심에 잠시 휘청거렸다. 저 말을 해석하자면 아까는 의식이 없어서 내버려뒀고, 지금은 움직이기 때문에 건드린다는 것 아닌가.

-미친 XX... 완전히 돌았어.

그녀는 속으로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이래가지고서는 대화로 시간을 버는 것 따위는 부질없었다. 대화가 통하는 부류도 아니었을 뿐더러, 살기를 부풀리는 것을 보아하니 상대도 말장난 따위를 계속할 마음은 없는 듯했다.

우오오오오!

카고메는 별안간 적이 의미 없는 괴성을 지르며 달려드는 타이밍을 계산하여 땅에서 한 움큼 뽑아낸 흙덩어리를 그의 얼굴에 집어던졌다.

상대가 주춤한 순간을 노려 그녀는 적의 품에 파고들어 명치라 생각되는 부분에 주먹을 날렸다.

살이 움푹 파이는 소리와 함께 조금이라도 데미지를 입혔을 것이라고 확신한 순간-

날카롭고 끈적끈적한 살기가 외마디 울음을 토해냈다.

"...!"

뒤늦게 살기를 눈치 챈 카고메는 서둘러 몸을 뺐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 팔에 깊숙이 파고든 단검은 기분 나쁜 미소를 흘리며 굵은 핏방울을 훔쳐냈다.

-잘못하면 진짜 죽겠어...

카고메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가장 현실적이고 가장 빠른 판단을 내렸다.

아파하거나 공포에 떨 시간 따위는 없었다. 여기서 계속 주춤거렸다간 정말로 저 녀석의 먹잇감이 되어 장난감 취급을 받다 죽임을 당할 것이 틀림없기 때문이었다.

판단을 내림과 동시에 그녀는 자신의 팔에 흉기를 박아 넣은 놈의 팔과 어깨를 잡아채 뒤로 내팽개쳤다.

그 과정에서 검이 비틀려 톱니바퀴가 돌아가듯 그녀의 살에 새로운 상처를 새겼지만 그녀는 인상을 쓰는 것으로 그 아픔을 억눌렀다. 한 순간이라도 정신을 놓았다간 말짱 도루묵이 되어 버린다.

쿠당탕!

부드러운 흙바닥에 적을 메다꽂은 그녀는 그의 손을 비틀어 단검이 박힌 빨을 빼낸 뒤 태세가 무너진 적을 향해 치한 대비용으로 들고 다니던 호신용 스프레이를 있는 힘껏 뿌려댔다.

키이이이이이익!!

바람조차 불지 않는 고요한 밤에 적의 비명이 울려 퍼졌다.

혹시라도 효과가 없으면 어떡할지 걱정했었는데, 아무래도 기우였던 모양이다.

적이 비명과 함께 일시적으로 시력을 잃은 순간, 어떡할까 고심하던 카고메는 누군가 자신에게 명령을 내리는 소리를 들었다.

-죽여라...!

간결하고 강렬한 명령.

명령하는 자가 누군지, 어디서 명령을 내리는 것인지 신경 쓸 겨를도 없이 카고메는 자신도 모르게 꽂혀 있던 단검을 뽑아들고 흔들리는 적을 향해 무기를 휘둘렀다!

길이가 짧다고는 해도 검은 검. 특유의 익숙한 감촉에 반응한 손은 6년 간 열심히 익혔던 검술 스킬을 깨워 그늘에 가려졌던 그녀의 본 실력을 끌어냈다.

"헉, 헉..."

카고메는 급소 깊숙이 칼날이 파고드는 소리를 듣고 나서야 숨을 몰아쉬며 몇 걸음 뒤로 물러섰다. 한층 창백해진 얼굴에서 뽀얀 열기가 피어오르는 기색이 느껴진다.

생명이 위협당한 탓에 예민해진 그녀의 감은 이제는 안전하다는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카고메는 약간의 피를 튀기고 널브러진 채 꿈쩍도 않는 적의 몸체를 내려다보았다. 있는 힘껏 휘둘렀던 검은 적의 두개골에 박혀 차가운 빛을 떨어뜨리고 있었다. 도무지 건드릴 용기는 짜낼 수 없었지만, 숨통이 끊어진 사실은 자명하다.

"제길..."

안심이 되자 수그러들었다고 생각했던 고통이 물밀 듯 밀려 와 그녀를 덮쳤다.

탈진감에 풀썩 무릎을 꿇은 카고메는 살짝 팔을 들어 올려 상처 입은 부위가 심장보다 높은 위치에 설 수 있도록 조절하며, 앞으로 취해야 할 행동을 떠올리려 애썼다.

일단 자신을 위협하던 몬스터는 죽였다. 어떻게든 상처를 지혈한 뒤 당초의 목적대로 프린스를 찾아야만 한다.

하지만... 어떻게?

카고메는 울상을 지으면서 고요한 벌판을 공허한 눈빛으로 쫓았다.

습격당하기 전까지만 해도, 어떻게든 할 수 있으리라는 근거 없는 확신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것마저도 사라져 버린 지 오래.

참고 참았던 눈물이 기어이 터지는 것을 망연히 바라보며 그녀는 지혈되지 않은 채 흘러내리는 피가 팔을 타고 땅에 떨어지는 것을 그대로 방치했다. 뭔가가 맞부딪히며 딱딱거리는 소리도 축 늘어진 기분을 위로하지는 못했다.

-...잠깐...

카고메는 미묘한 위화감을 알아차리고 살며시 고개를 들었다.

딱딱거리는 소리라니, 자신이 잘못 들었을 것이라며 질책하면서도, 그녀의 젖은 눈동자는 근원지를 찾기 위해 쉼 없이 달렸다. 그리고...

"여, 또 만났네. 기가 센 아가씨. 좋은 싸움이었어."

만날 때마다 사람 속을 뒤집던 그 목소리가 지금은 천사의 합창으로 들렸다.

어떻게 찾아야 할지 막막했던 사람이 어째서인지 제 발로 그녀에게 걸어오며 박수를 치고 있었던 것이다.

"우... 으흑..."

어두운 공간에서 더 이상 혼자가 아니어도 된다는 점, 그토록 찾고자 했던 인물이 제 발로 와 주었다는 점이 카고메의 남은 경계심과 눈물샘을 날려버리고 말았다.

자신에게로 천천히 다가와 어깨를 감싸 쥐는 손길은 예상 외로 따뜻했고, 자신의 몸에 손을 댄다는 사실에 화를 내는 것도 잊은 채 그녀는 남은 눈물을 쏟아냈다.

우스운 일이었다. 이 남자 때문에 평범하게 잘 사귀던 사람과 이별하게 되었는데, 변함없이 빛나는 바다빛 눈동자와 수려한 미소를 보고 안심해 버리다니.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카고메는 피가 덜 묻은 소매를 들어 올려 흐르는 눈물을 닦았다. 상황이 어찌됐든 간에, 이 남자 앞에서는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다는 마지막 자존심이 고개를 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눈물을 채 닦기도 전에 그의 억센 팔이 그녀의 손목을 홱 낚아챘다.

"예쁜 얼굴이 눈물로 얼룩이 졌군. 당찬 레이디에게 눈물은 어울리지 않는다고."

아스팔은 그녀가 말을 앓은 틈을 타, 재빨리 움직였다. 그녀의 피로 얼룩진 소매를 찢어내고, 상처 위에 브로콜리 비스 무리한 식물을 올린 뒤 깨끗한 천으로 단단히 동여매었다.

"지금 뭐하는... 어...?"

눈살을 찌푸리던 카고메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상처를 내려다보았다. 쿡쿡 쑤시던 상처가 서서히 아물고 있었고, 따뜻한 기운이 상처를 감싸여 잔뜩 달라붙었던 고통을 덜어내고 있었던 것이다.

의아한 시선으로 그를 올려다보자, 아스팔은 별 것 아니라는 투로 입을 열었다.

"어지간해선 내가 직접 치료해 주고 싶었지만, 별자리 속성 상 치료 주문을 사용할 수가 없어서 말이지. 그래도 상처가 낫는 데는 전혀 문제없을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마라."

"이게... 뭐죠?"

카고메는 자신의 피와 아픔을 서서히 빨아들이는 식물을 신기한 눈빛으로 어루만졌다. 아스팔은 작은 천을 따로 꺼내 그녀의 얼굴에 달라붙은 눈물 자국을 하나하나 지우며 대답했다.

"정확한 명칭은 아직 없지만 우린 그걸 치료의 허브라 부르지. 약초나 연고에 비해 가격은 센 편이지만, 성능도 좋고 회복 시간도 빨라서 전투에 나설 때 항상 챙기곤 한다. 일어날 수는 있나?"

아스팔은 질문과 동시에 대답할 시간도 주지 않고, 양 손을 이용하여 그녀를 반강제로 일으켜 세웠다. 여전히 변하지 않은 마이페이스 성향에 혀를 차면서도, 카고메는 눈앞의 이 남자가 자신이 찾으려 했던 진짜 왕자임을 확신할 수 있었다.

"항상 자기 멋대로 행동하는 성격은 전혀 변한 게 없군요... 그나저나 대체 어떻게 내가 여기 있는 걸 알고 온 거죠?"

"신부로 맞으려는 레이디가 어디 있는지 파악하는 것쯤은 당연한 의무가 아닌가?"

아스팔은 기다렸다는 듯 바로 받아쳤다.

"어디 있는지 파악하고 있었으면 좀 더 빨리 오지 그랬어요? 안 그러면 내가 습격당할 일도 없었을 거고, 당신이 안 어울리는 친절을 베풀 필요도 없었잖아요?"

카고메는 아직도 그 소리냐, 너 때문에 내가 무슨 꼴을 당했는데- 라고 쏘아붙이고 싶은 것을 참으며 말했다. '안 어울리는'이란 부분에 특히 힘을 주면서.

"아, 그 부분은 조금 오해가 있는 것 같은데. 난 네가 정신을 잃고 이곳에 있을 무렵부터 계속 근처에 있었어. 네가 혼자서 어디까지 할 수 있는지 이 눈으로 똑똑히 볼 요량으로."

"뭐...? 그, 그럼...!"

아스팔은 소스라치게 놀라는 카고메의 표정을 즐겁게 바라보며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네가 깨어나는 것, 몬스터와 싸우는 것 모두 지켜보고 있었다."

"잠깐 기다려!"

카고메는 다치지 않은 팔을 휘두르며 그의 말을 끊었다. 다른 것은 다 제쳐두더라도...

"방금 그 말은 대체 뭐야?! 숨어서 내가 싸우는 걸 계속 보고 있었다는 거예요?! 구해준다든가, 대신 싸워준다는 생각은 요만금도 안 했냐고요!"

"정말 네가 위험했다면 구했겠지. 하지만 그럴 필요가 없더군."

"......"

당당하다고 해야 할지, 뻔뻔하다고 해야 할지...

카고메는 벙찐 얼굴로 멍하니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고, 아스팔은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어나갔다.

"정말 다행이야. 적어도 자기 몸 정도는 스스로 지킬 수 있는 것 같아서. 덕분에 한층 더 확신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무슨 확신을 가졌다는 거죠...?"

카고메는 가자미눈을 하고 질린 어조로 일단 물어는 보았다. 대답은 대충 상상이 가지만.

"너야말로 진정한 프린세스에 어울린다는 걸 말이다. 스스로 자신을 보호하는 힘, 돌발 상황에 대처할 수 있는 순간적인 기지, 자신이 놓인 상황에서 가장 유리한 방책을 끌어내는 지식과 근성, 통치자로서 지녀야 할 기품과 매력 등 모든 면에서 말이지."

"...말만큼은 청산유수로군요. 성격은 꼬이다 못해 잔뜩 비틀어진 것 같지만."

"하하하... 그렇게 불평하지 마. 어쨌든 다 끝났잖아, 네 앞에도 나왔고. 이 세계에서는 너 혼자 할 수 있는 일이 거의 없을 테니, 어차피 날 찾을 생각 아니었나?"

"...시끄러워요."

카고메는 짧게 쏘아붙이며 고개를 돌렸다. 아스팔이 한 말은 사실이었지만 어쩐지 그의 말을 액면 그대로 인정하는 것은 분했다.

고맙다는 인사를 해야만 할지-그와의 관계가 어떻든 일단 도움 받은 것은 사실이므로 해야 할지, 싸우는 걸 뒤에서 구경만 했다는 것이 괘씸하니 안 해도 될지-, 집과 연결되는 게이트를 열어 달라고 어떻게 말해야만 할지 고민하는 틈을 타, 아스팔은 그녀의 손을 잡으며 선수를 쳤다.

"불평이 있다면 나중에 하기로 하고, 네게 보여주고 싶은 것이 있으니 잠깐 같이 가도록 하지. 말해 두지만 네게 거부권은 없어."

솔직히 어딜 따라가고 뭘 보고 싶은 기분은 아니었지만(그녀가 이 순간 간절히 원하는 것은 뜨거운 샤워와 푹신한 침대였다), 왜 자신이 이 세계로 갑자기 떨어졌는지 묻고 싶었으므로 그에게 협조할 생각이 아주 없지는 않았다.

하지만 아까도 밝혔듯 아스팔의 말을 인정하는 것, 순순히 오케이 하는 건 지는 것 같았기 때문에 카고메는 샐쭉한 어조로 그의 말에 트집을 잡기로 했다.

"하아... 이봐요. 전부터 생각했던 거지만 대체 그 근거 없는 자신감은 어디서 나오는 건가요? 거부권이 없다니, 내가 죽어도 안 따라가겠다고 말하면 어떻게 하려고요? 협박이라도 할 참이에요?"

그녀의 말에 아스팔은 짐짓 꾸민 듯 한 어조로 바로 되받아쳤다.

"협박이라니 당치도 않아. 레이디께서 죽어도 싫다면 그 의견을 존중해 드려야지. 이 황량한 곳에서 생각이 바뀔 때까지 기다리면서-"

"...생각을 바꾸지 않으면 이곳에 계속 내버려 두겠다고요?"

"그렇지."

"협박이잖아요!!!"

"응, 실은 나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어."

"......"

할 말을 잃고 입을 다무는 그녀에게 아스팔은 예의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그렇지만 네게도 나쁜 얘기가 아닐 거라는 것을 보증하지. 어차피 너도 내게 이것저것 묻고 싶은 게 있을 테고, 이 세계에서 어느 정도 시간을 날릴 것 정도는 각오한 거 아닌가? 그렇다고 네가 호기심을 누를 수 있을 만큼 인내력이 높은 것도 아니고 말이지.

지금 보여주려는 건 저번처럼 마을을 한 바퀴 둘러본 것 같은 게 아니야. 네 호기심을 채우고, 어쩌면 네가 내게 물어보려던 질문에 대한 답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르지."

"...대체 뭘 보여주려는 거죠?"

이쯤 되면 이미 결과는 나온 셈이다. 카고메는 이번에도 자신의 패배라는 사실-어차피 이긴 적도 없지만-에 씁쓸함을 느끼며 될 대로 되라는 어조로 물었다.

"묘지다. 네 친부모님의."

그녀는 이번에도 아스팔의 생각이 맞았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