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메2] Feel well 프메소설 2012. 7. 21. 22:36

나는 파티 홀을 빠져나왔다.
금방이라도 넘어질 듯 비틀거리면서도 나는 기합을 넣은 다리를 멈추지 않았다. 아니, 멈출 수 없었다고 해야 맞을까?
파티홀 안에서는 이제 막 댄스파티에서 1등을 거머쥔 참가자를 축하하는 박수 소리가 한 가득 울려 퍼지고 있었다.
그 곳에 내가 낄 자리는 없었다.
파티 홀에 모여든 구경꾼들의 시선을 사로잡은 것은 올해의 미스 왕국으로 뽑힌 댄싱 퀸이지, 입상에도 들지 못한 채 초라한 몰골로 아무도 모르게 조용히 파티 장소를 빠져나가는 패배자가 아니었으니까.
음악이 흐르기 시작한다.
신붓감을 찾으러 파티에 참석한 신사들과, 자신을 데려가 줄 지체 높은 남편감을 고르기 위해 참석한 숙녀들이 각자의 파트너를 찾았다는 신호다.
등 뒤로 그 소리를 들어가며, 먹먹한 가슴을 붙들고 나는 천천히 성 밖으로 나왔다.
뜨거운 소낙비를 떨구는 먹구름을 한 아름 껴안은 채로.

-1214년 10월 30일, 실크 다즐링의 꿈 일기에서

 

 


"아가씨, 잠깐 괜찮으세요?"

나는 노크를 통해 8년 간 충실히 섬겨온 나의 여주인에게 말을 걸었다.
하지만 대답이 없다. 아무래도 또 독서 삼매경에 빠져 계신 모양이다.
식사 시간을 알리는 것 같은 아무래도 좋은 일이었다면 나도 더 이상 방해하지 않고 물러났을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 나의 미스트리스를 찾아온 '기회'를 생각하면, 이대로 물러난다면 오히려 내 아가씨의 앞길을 가로막는 불상사가 되어버릴 터.
그렇다면 약간의 무례를 무릅쓰더라도 아가씨께 사실을 알리는 것이 좋을 것이다.
실례하겠다는 인사를 던지고(그래봤자 못 들으셨을 테지만) 벌컥 방문을 열었다.
예상대로.
아가씨께서는 책상의 가장자리에 우르르 산맥처럼 한 가득 책을 쌓아놓으시고, 정작 본인은 다른 책을 휘적이고 계셨다.
내 키마저도 훌쩍 뛰어넘을 만큼 층을 이룬 두꺼운 양장본들이 위태롭게 흔들리고 있다.
괜히 불러서 놀래켰다가 책이 쏟아지기라도 하면 낭패니까 조용히...

"우와앗!"

그러한 내 배려도 무색하게
어깨에 손을 올려놓았을 뿐인데 소스라치게 놀란 내 아가씨는 펄쩍 뛰어올라 팔꿈치로 흔들거리는 책의 산을 건드렸고0
쿠당탕탕탕!!!
살짝 스친 일그러짐을 신호로, 흔들리던 책의 산은 우레와 같은 굉음을 흘리며 주인을 덮쳤다.
가만히 있는다면 당연히 그들에게 깔려 무너질 것이고, 책 하나하나가 상당한 두께와 무게를 자랑하는 탓에 쏟아지는 책들에게 얻어맞았다간 상당한 데미지를 입었겠지만...
그렇게 되지 않도록 아가씨를 비호하는 것이 집사의 의무.

"괜찮아요?"

나는 빨려 들어갈 듯 오묘한 다즐링 빛 눈동자를 내려다보았다.

"네, 뭐... 덕분에..."

아가씨는 살짝 얼굴을 붉혔다.
아하, 결혼도 안 한 아가씨가 외간 남자의 팔에 기대 안겨 있다는 게 부끄러웠던 모양이다.
불가항력이었지만 어쩔 수 없지. 아가씨 같은 요조숙녀에게는 상당히 중요한 문제일 테니.

"근데 대체 무슨 일이죠? 용건이 있으면 부르지 않고..."

어쩐지 책망하는 시선을 보낸다. 아니, 그건 오해라니까요.

"불러도 대답이 없으시길래 실례를 무릅썼습니다, 아가씨. 지금 크루거 장군님께서 아래층에 와 계셔서요. 잠시 아가씨를 뵙겠다고 하는데 말입니다..."

"장군님께서? 왜죠?"

글쎄요. 저도 따로 들은 얘기가 없는데, 저한테 물으셔봤자 알 리가 없죠.

"알았어요. 지금 바로 내려가죠. 큐브, 같이 가 줄래요?"

"저도요?"

내가 되물었다. 상관은 없지만... 사적인 자리 같은데 내가 끼어도 되는 건가?

"제발 부탁이에요! 크루거 장군님은 어쩐지 무서워서... 무슨 일로 찾아오셨는지 몰라도 도저히 혼자서는 마주할 수 없을 거 같단 말이에요... 뒤에 서 있어 주기만 해도 되니까... 네?"

내 팔을 붙든 채 제발 부탁한다는 말을 몇 번이고 반복하는 아가씨. 아니, 그렇게까지 말씀하신다면야 저야 거절할 수 없습니다만... 장군이 물러가라고 말한다면 그 때는 저도 어쩔 수 없습니다.
그렇게 얘기하려 했지만...
초롱초롱한 눈빛 공격을 받고 있자니 어쩐지 항변할 수가 없다.

"알겠습니다, 아가씨.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어떻게 내가 아가씨의 명을 거스를 수 있겠는가.
아가씨께서 이렇게까지 말씀하신다면 나로서는 그냥 받아들일 수밖에.

"진짜요? 고마워요!"

아가씨는 언제 그랬냐는 듯 곤란한 표정을 지우고 함박웃음을 지으며 내 품에 살짝 안겨왔다.
이런 이런. 아까 부끄러워할 때는 언제고, 참 곤란한 아가씨라니까.

 

 


"어서 오십시오, 장군님. 누추한 이 곳까지 무슨 일로 오셨는지요..."

가볍게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서둘러 응접실로 달려온 아가씨는 무서워서 단둘이 있기 싫다는 청이 무색할 만큼 완벽한 접대용 미소를 지으며 크루거 장군을 맞이했다.
나는 다즐링 티와 단맛을 줄인 사바이온 무스 접시를 탁자에 배치한 뒤 목석과도 같은 자세로 아가씨의 뒤에 섰다.
다행히 내가 같은 공간에 서 있는 것을 지적받지는 않았다.
차와 과자의 맛을 칭찬하는 것으로 시작하여 이번에 새로 들어온 병사들의 기초 훈련을 감독하는 것을 지나 크루거 장군의 딸 마리안느의 혼처에 대한 토론이 상당부분 진행된 후에야 겨우 크루거 장군이 탁자에 팔꿈치를 대고 방문한 목적을 입에 담았다.

"뭐, 세상사는 이야기는 이쯤 해 두고... 오늘 이렇게 자네를 찾은 이유는 다름이 아니네. 실크 양, 혹시 진로를 정했나?"

"아뇨, 아직입니다. 마음에 두고 있는 일은 몇 군데 있습니다만 아직 확실한 것이 없어서..."

아가씨는 말끝을 흐렸다. 뒤에 서 있는 나로서는 그 표정을 볼 수는 없었다.

"그것 참 잘됐구만. 아니, 이건 진심일세. 그럼 말이야... 자네 혹시 재판관이 될 생각 없나?"

"재판관? 제가 말입니까?"

아가씨께서 되물었다.
입 밖에는 내지 않았지만 나 역시 아가씨와 같은 의문을 가졌다.
한 나라의 장군이 별다른 언질 없이 방문하여 성에서 일(메이드 말고)하는 게 어떻겠냐는 제안을 하고 있는데, 그걸 태연히 받아들일 수 있다면 그 사람은 엄청난 거물이거나 아니면 아무 생각 안 하는 바보일 거다.

"너무 그렇게 놀라지 말게나."

크루거 장군은 손사래를 쳤다.

"폐하께서도, 나도 다즐링 경에게 받은 은혜는 잊지 않고 있네. 그의 장녀인 자네가 성인이 됐을 때 반드시 얘기를 하려고 했지."

"......"

"물론 자네의 능력에 따라 얘기를 없던 걸로 할 수도 있었네만... 이렇게 우수한 인재로 자라 주었으니 기쁠 따름이네. 자네라면 분명 훌륭한 재판관이 될 수 있을 거라 생각하네."

장군은 풍성한 턱수염을 쓰다듬으며 아가씨를 설득했다. 그의 표정을 보아하니 아무래도 이미 당사자에게 오케이 승낙을 받은 것처럼 의기양양하다. 뭐, 당연하다면 당연한 거지만.
명예로운 직업을 거저 주겠다는데 바보가 아니고서야 누가 마다하겠는가.
하지만 아가씨께서는 우리들의 예상을 보기 좋게 깨뜨렸다.

"장군님, 말씀은 감사합니다만 저는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죄송합니다."

크루거 장군도 이 전개는 예상하지 못했는지 거칠게 찻잔을 내려놓았다.
솔직히 나도 전혀 예상 못했다.

"이유가 뭔가?"

"몇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대체 그 이유가 뭐냔 말일세!"

아가씨는 바다로 빠지는 강물처럼 은은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법관은 무거운 책임이 요구되는 중대한 직위입니다. 이제 막 성인이 된 제게 그 책임은 너무 과분합니다. 게다가, 공명정대해야 할 법관이 청탁을 받아 임용된다는 것은 사리에 맞지 아니합니다. 분명히 뒷말이 나올 것이고, 백성들도 손가락질할 것입니다. 하온대, 어찌 제가 감히 덥석 호의를 받을 수 있겠습니까?"

아, 그렇구나.
나는 아가씨 행동의 진의를 알아차렸다.
4년 전 아가씨께서는 귀족 영애 패트리시아의 제안(말이 제안이지, 거의 통보 수준이었다)을 받아들여 댄스파티에 나간 적이 있었다.
아가씨의 춤은 전혀 흠잡을 데가 없었고, 심사위원들로부터 큰 호평과 높은 점수를 받았다.
우승은 따 놓은 당상이라고, 본인을 비롯한 모두가 그렇게 예상했지만-
1등의 영광은 패트리시아에게 돌아갔다.
뿐만 아니라 아가씨께선 입상조차 받지 못한 채 밀려나셔야만 했다.
이 불공정한 심사를 두고 여러 말들이 나왔다. 그 중 가장 설득력이 있었던 소문은 최종 심사를 맡았던 대신이 자신의 권력과 인맥을 악용하여 실력 부족자를 우승시켰다는 내용이었다.
인맥으로 인해 피해를 입었던 아가씨께선 지금 상황을 그 때와 동일시하는 것이리라.
가해자를 비난했던 자신이, 비난 상대와 똑같은 짓을 할 수는 없다. 뭐, 그런 거지.

"......"

내막을 알 리 없는 크루거 장군은 아가씨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그것도 잠시.

"푸하하하하하!"

별안간 크루거 장군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역시 사람 보는 눈이 틀리지 않았군."

뜻 모를 말을 중얼거리자 아가씨께서도 참을 수 없었는지 살짝 고개를 돌려 나를 보았다. 그 아름다운 얼굴에 서려 있는 것은 순수한 당혹감.

"무슨 말씀이신지..."

"역시 실크 양은 폐하께서 점찍어 둔 인재라는 뜻일세. 보통 사람이었다면 얘기들은 시점에서 '어이쿠, 감사합니다'하며 넙죽 받아들 텐데. 자네처럼 이리 이치에 맞는 말을 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네. 아주 좋은 자세야."

"예, 감사합니다..."

크루거 장군은 계속해서 말했다.

"사법을 관장하는 법관에게 진실을 가늠하는 총명한 두뇌가 요구되는 것은 당연하지만, 동시에 높은 도덕성도 필요한 법이야. 지능은 시험으로 추릴 수 있지만, 도덕성은 가려내기 힘들어. 그런 의미에서 자네는 나무랄 데 없는 이상적인 재판관이 되겠지. 물론..."

크루거 장군은 말끝을 흐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네가 내키지 않는다면 어쩔 수 없지. 조만간 사자를 보내 자네를 왕국 최초의 여성 법관으로 임명한다는 폐하의 명을 하달하겠으니 그리 알도록 하게."

"네...?!"

나와 아가씨의 의문 부호가 멋지게 겹쳐 조화를 이루었다.

"아, 몰랐나 보군. 법관이 되는 게 어떻겠냐고 자네를 떠 보려고 제안하는 형식으로 말을 꺼냈지만... 실은 이미 폐하께서 명령을 내려 결정한 사안이거든. 나도 폐하께서도 자네의 장래에 거는 기대가 크니, 부디 명령을 받들어 크게 활약해 주게나. 차 잘 마셨네."

놀라서 할 말을 잃은 아가씨가 혹여나 반론을 펼까 싶어 우다다 할 말을 마친 크루거 장군은 남은 찻물을 단숨에 들이켠 뒤 재빨리 발길을 돌렸다.

"한 방 먹었네요, 아가씨."

내가 그렇게 말한 것은 용건을 마친 크루거 장군이 돌아가고 나서 응접실에 차렸던 차 세트를 말끔히 치운 뒤였다.

"응... 뭔가 속은 기분이야."

아가씨는 남은 사바이온 무스 한 조각을 털어 넣으며 비죽 하고 입을 내밀었다. 어린애 같은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왠지 모르게 평정심을 잃고 무슨 짓을 벌일 것만 같아 겨우 고개를 옆으로 돌린 찰나, 아가씨가 내게 말을 걸었다.

"저... 큐브가 보기엔 어때요? 아무리 폐하께서 명을 내리셨다 해도... 내가 잘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나는 잠시 생각하는 척 한 뒤 대답했다.

"걱정 마세요. 아가씨께선 분명 잘 해내실 테니까요. 한 나라를 다스리는 왕이 설마 사람 보는 눈이 없겠어요?"

"그야 그럴 지도 모르지만..."

내가 문득 생각났다는 듯 말했다.

"아, 맞다. 그러고 보니 주인님께서 생신날에 맞추어 수련에서 돌아오신다고 했죠? 곧 돌아오실 테니 오시면 바로 말씀드리세요. 판사라... 주인님 최고의 선물이 되겠네요."

"응... 그랬으면 좋겠다."

아가씨는 겨우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잘 해 보세요, 아가씨. 저도 응원해 드릴 테니까요."

"응? 무슨 소리 하는 거예요?"

아가씨께서 무슨 소리냐는 듯 되물었다. 어째... 불안한데...

"무슨 소리라니요? 아가씨께서 정도(正道)를 걸으실 수 있도록..."

"그러니까 왜 큐브는 뒤에서 구경만 할 거라는 뉘앙스로 얘기 하냐는 거죠!"

아가씨께서는 말도 안 된다는 듯 딱 잘라 말했다. 점점 더 불안한데...
불안한 기색을 감추며 나는 어떤 대답이 괜찮을지 잠시 머리를 굴렸다가, 마땅한 대답이 없다는 걸 깨닫고 질문을 위해 입을 열었다.

"예? 아니... 그럼 제가 뒤에서 지켜보는 거 말고 대체 뭘 할 수 있다고..."

아가씨께서는 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씨익 하고 장난기 가득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또 무슨 말씀을 하시려나 싶어 멀뚱히 서서 바라보고 있자니.
별안간 아가씨는 새하얀 두 손으로 내 손을 굳세게 잡아 쥐고, 붕붕 흔들며 소리쳤다.

"큐브가 할 수 있는 건 단 하나! 옆에서 날 보필하는 거예요! 여자가 어쩌니저쩌니 하는 그 의심암귀로 가득한 그 눈초리를 나 혼자 감당하는 건 무리니까, 큐브가 옆에서 도와 줘야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