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살육에 대해 다시 생각해야 한다. 지금까지 얼마나 정의를 위한 학살이 되어왔는지를...

- 1450년 8월 29일, 에이미의 회고록에서

 

 


"카이 님, 문제가 생겼어요..."

가도 한 가운데의 자리를 차지한 마법학원.
자신의 개인 사무실에서 차 한 잔을 음미하며 잠시나마 달콤한 휴식을 즐기겠다는 마법학원장의 작은 소원을 가차 없이 짓밟는 고요한 목소리가 마법학원 전체로 퍼져나갔다.

"카렌, 대체 무슨 일이길래...?"

웬일로 행동 대신 말을 거는 것이냐는 뒷말을 간신히 삼킨 카이는 어떻게든 찌푸려지려는 포커페이스를 겨우 유지하며, 홀연히 뒤로 다가와 말을 붙인 옛 제자와 눈을 마주치기 위해 남은 차를 단숨에 들이켠 뒤 그녀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평소에 행동으로 자신의 의사를 표시하는 카렌은 일반인이 보기에는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말을 아끼는 습관이 있었다. 어지간히 급한 상황 혹은 행동으로는 자신의 의사를 표시하지 못하는 경우가 아니라면 웬만해선 입을 열지 않는 것이다.

"마법석이... 빛나지 않아요..."

쨍그랑!
왕국이 주도하는 마법석의 연구와, 넘쳐나는 마법석의 영향으로 물밀 듯 들이닥치는 원생들의 지도를 위해 뽑은 보조 사범 카렌 마쥬가 무심한 듯 내뱉은 한 마디는 비수가 되어 카이가 쥐고 있던 찻잔을 산산조각내었다.

"방금... 뭐랬죠?"

한 순간이라도 잘못 들었길 바라며 되묻는 카이의 목소리는 평정을 가하고는 있었지만 이미 살짝 떨리고 있었다. 무정하게도, 카렌은 대답 대신 손에 쥐고 있던 어린애 주먹만 한 마법석을 그녀의 눈 앞에 불쑥 들이밀었다.

"......!"

카이는 스스로의 얼굴이 흙빛으로 굳어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본인의 얼굴 표정 같은 아무래도 좋은 문제에 신경 쓸 때가 아니었다.
그녀는 카렌이 보여 준 마법석을 거의 뺏다시피 집어 들어, 자신의 손에 쥐고 정신을 집중하여 짧은 주문을 외웠다.
그러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꺼진 빛은 돌아오지도 않았고, 손에 쥔 감촉은 마력의 아우라가 아닌 뭉툭하고 차가운 돌멩이의 그것일 뿐이었다.
-이제 마법의 전성기는 끝났다.
인정하기 힘든 현실 앞에 끌려 나간 그녀는 가장 생각하고 싶지 않은, 당분간은 오지 않을 것 같았던 가능성을 떠올렸다.
기우일지도 모른다.
일시적인 현상일지도 모른다.
확률은 낮지만 카렌이나 자신이 뭔가 착각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미 마음을 차지한 불안감은 끈적하게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는다.
그 마음의 짐을 조금이라도 덜어내기 위해, 카이는 탁자에 굴러다니는 빈 양피지와 깃펜을 끌어다 휘갈기듯 문자를 써 내려갔다.
편지를 쓰는 것이 얼마나 도움이 되는지는 몰라도, 가만히 앉아 멍때리는 것보다는 훨씬 나았다.
같은 작업을 여러 번 반복하여 양피지 위에서 저마다의 개성을 뽐내며 춤추는 검은 아지랑이들을 대충 눈으로 주워 담은 뒤, 카이는 그것들을 가볍게 말아 봉인하여 카렌에게 건네며, 자신도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카렌, 마도사협회와 마법석 연구회, 무술도장의 관장, 왕궁마법사 클라로 닐슨 님께 이것들을 전달하고, 마법학원 전체에 휴원 소식을 알리도록 해요. 지금 당장! 난 블론디 님과 오스왈드 대신 알현을 위해 어서 성으로 갈 테니까."

흐트러진 옷매무새를 가다듬은 카이는 카렌의 흔들리는 무표정을 확인한 뒤, 주문을 외워 빛을 잃은 마법석의 샘플, 허가증, 연구 자료 등을 가방에 닥치는 대로 쑤셔 넣으며 잠시 분주히 뛰어다녔다.
성까지 자신을 데려다 줄 마차를 기다리는 카이의 얼굴에는 초조한 기색이 역력했다.
갑자기 벌어진 이 사단을 대체 어떻게 설명하면 좋을지, 이 때문에 마도사들이 얼마나 타격을 받을지 등을 걱정하며, 카이는 얼굴 가득 피어난 먹구름을 끝내 거두지 못한 채 발을 동동 구를 수밖에 없었다.
때는 1450년 8월 29일.
왕국에서 공식적으로 종전을 선포한지 딱 2년이 되던 날이었다.

 


마계의 하늘은 항시 우중충하다.
주변을 둘러싼 음기는 체감 온도와 분위기를 떨어뜨리는데 박차를 가한다.
하지만 그러한 곳에서도 살아가는 인간은 있었고, 그 인간의 무리가 모여 마을을 이룬 구역도 있었다.
대광맥에서 추출되는 마법석과 마도 재료로 쓰이는 이름 모를 풀들로 주머니를 채우는 인간의 마을에는 나름 활기가 넘쳤고, 다른 곳보다 더욱 윤택한 생활을 유지할 수 있었다.
이러한 생활은 영원할 것만 같았고, 지금이라도 잘 살아보자며 마계로 흘러들어오는 인간들도 상당했다.
오늘도 제각각의 욕망을 가지고 하루를 시작하는 인간들은 끝나지 않을 것만 같은 행복을 당연한 것이라 여겼다.
유복하고 안락한 생활이 보장된 권태로운 일상.
그리고 어느 날, 갑자기 '끝'은 찾아왔다.

 


"마을에 사람들이 별로 없는 것 같군요."

양 두어 마리를 이끌고 터벅터벅 걷던 늙은 농부의 발을 붙잡은 탁하고 흐릿한 목소리.
엔리코는 자기 말고도, 아무도 거주하지 않는 이 황량한 곳을 지나는 특이한 사람이 있다는 사실에 약간 놀라며 목소리가 들린 쪽으로 흘깃 시선을 두었다.

"예이, 마법석이 사라지고 나서 여기 살던 사람들 전부가 이 곳을 버리고 원래 살던 곳으로 돌아갔죠."

일단 질문을 던졌으니 대답한다는 식으로 무심히 말을 받은 그는 호기심 반, 수상함 반의 시선으로 나그네를 살폈다.
우중충한 로브로도 가리지 못 한 훤칠한 키, 로브 사이로 살짝 보이는 허리춤의 독특한 칼자루.
이 곳 특유의 음기를 받아서일까, 병약한 환자보다도 훨씬 더 파리해 보이는 흰 피부.
그리고 순간적으로, 붉게 번뜩이는 눈동자를 본 것만 같은 착각이 들었다.

"근데 여행 중인가 봅디다? 여기 사람이라면 마을의 내력을 모를 리가 없는디..."

"뭐, 그런 셈이죠. 예전에 살았던 적은 있는데, 오랜만에 돌아와서... 그 때하고 분위기가 너무 달라서 여쭤 본 겁니다."

"아, 그러쇼? 하긴, 옛날이 좋았지... 그 왜, 마법석이 빛나던 그 시절 말이요. 모든 게 풍족하던 그 시절이 이젠 한낱 꿈이 되어버렸지 뭐요, 끌끌...
 사람들도 다 떠나버리고, 이젠 이 곳에 사는 인간을 찾아볼 수도 없지, 암."

"...하지만 노인장은 여기 계시지 않습니까?"

농부는 양들을 한데 묶어 길게 늘어뜨린 가죽 끈을 들어보이며 처량하게 웃었다.

"난 여기 사는 게 아니오. 한 때 이 곳에서 둥지를 튼 적은 있었소만. 대광맥이 쇠퇴하면서 원래 살던 집으로 옮겼는데, 이 놈들이 자꾸 도망쳐서 말이오(그는 눈짓으로 양을 가리켰다).
 이 놈들이 자꾸 이 곳을 자기들 집으로 착각해서 도망쳐오지 않겠소? 그래서 아예 마도사에게 부탁해서, 풀리지 않는 마법의 끈으로 녀석들을 묶어서 이제 돌아가는 길이지."

"실력이 좋은 마도사인가 보군요."

나그네는 로브 속에 감춘 얼굴을 어떤 감정으로 물들이며, 슬쩍 이야기의 방향을 바꾸었다.
주제가 의도적으로 유도되었다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늙은 농부는 의욕 없는 손길로 어느 방향을 가리켰다.

"아마 인간이 이쪽으로 막 몰려들었을 무렵이었을 거요. 그 뭐라카더라... 하여튼 널찍한 광장 같은 곳의 한 귀퉁이에 다 쓰러져가는 낡은 오두막이 한 채 있는데, 거기에 살고 있는 마도사에게 도움을 받은 거요.
 사람들도 다 떠난 마당에 혼자 그 음침한 곳에 처박혀 있는 이유는 모르겠지만 말이오."

아직 아무 질문도 던지지 않았건만, 엔리코는 알아서 정보를 술술 털어놓았다. 혼자 심심한 걸음을 하던 중, 누군지는 몰라도 무료함을 달래 줄 사람을 만났다는 즐거움이 농부의 경계심을 풀어놓은 것이 분명했다.

"친절한 설명 감사합니다. 그런데 아무 대가 없이 이렇게 정보를 받아도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뭐, 정보랄 것까지도 없는 걸. 나도 적적하던 차에 말동무가 생겨서 잘 됐지 뭐유. 근데 그 쪽 나그네는 여기 언제 살았었소? 1년 전?"

엔리코가 별 생각 없이 질문을 던지자마자 주변 공기가 변했다. 무심코 걸음을 멈춘 나그네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는 계속 말을 이어나갔다.

"아니, 그보다 더 오래되었나? 하지만 마족놈들이 지배하고 있었을 때 여기 살던 인간은 없었으니 오래됐다고 해봤자 몇 년 안 되었을 텐데..."

옆을 맴돌던 기척이 사라진 것을 느끼고 엔리코는 발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잠시 같이 걷던 나그네는 몇 발자국 뒤에 서 있었지만 아까와도 같은 기척은 더 이상 느낄 수 없었다.

"...인간들이 이 곳을 더럽히기 전부터 줄곧 이 곳에서 살고 있었지. 군주의 맹약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마계를 버릴 수밖에 없었을 뿐."

아까의 사람 좋은 흐릿한 목소리는 온데간데없고, 얼음 같은 날카로운 목소리가 주변을 울렸다.

"맹약? 마계? 대체 그게 무신..."

사정 파악은 못 해도 분위기 파악은 할 줄 알았는지, 농부는 뒷걸음질 치며 말을 더듬었다.
분명 눈앞에 서 있건만, 어째서 기척을 느낄 수 없는 것일까. 아니, 기척을 느낄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전신을 위협하는 이 커다란 존재감은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나그네는 대답 대신 얼굴을 가렸던 두건을 살며시 걷어 올렸다.
무심코 얼굴에 시선을 준 엔리코는 몸 속에 흐르는 피보다 더욱 붉은 눈동자를 정면으로 마주하고 공포로 얼어붙었다.

"잊어라."

거역할 수 없는 목소리로 '그'는 명령을 내렸다.

"지금 본 것은 모두 기억에서 지워라."

한 음절 한 음절의 말이 최면을 걸 듯, 엔리코에게 달라붙어 그의 머리를 지배하기 시작했다.
약간의 시간을 두고, 초점이 풀린 동공을 가지고 농부는 몸을 돌려 원래 가던 방향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자신의 뒤에 서 있는 - 홀연히 모습을 감췄던 마족들의 수장을 등 뒤에 남겨둔 채.

 


저벅저벅.
구둣발에 밟혀 아스라지는 드라이한 흙먼지가 그의 발목을 지나 애달픈 울음소리를 흘렸다.
자리에 못 박힌 듯 서 있던 그가 움직이기 시작한 것은 기억을 지운 인간이 시야에서 사라지고 나서도 꽤 시간이 흐른 뒤였다.
그는 인간이 지나쳐 온 방향을 거슬러 올라가며 혼자 이 곳에 살고 있다는 마도사가 거취하는 오두막으로 향했다.
주변은 황량하기 그지없었다.
여기저기 세워진 집들은 세월의 공격을 받아 폐옥으로 전락했고, 틈바귀에 스며든 을씨년스러운 기운은 제 세상을 만난 양 그 영역을 점점 넓혀가는 중이었다.
바닥에 차이는 돌멩이는 한 때 마법석이라 불리며 그 위용을 과시하던 귀중품이었으나, 시간이 흐른 지금에 와서는 그저 미천한 돌멩이에 불과할 뿐.
허리를 굽혀 집어든 그것은 그의 손에 닿자마자 바스러져, 거친 가루가 되어 바람이 부르는 곡조를 따라 자취를 감추었다.

"그네들이 바라던 것은 고작 이것이었나..."

누구에게랄것도 없이 홀로 중얼거리며, 그는 걷어 올렸던 두건을 다시 내려버렸다.
이 얼마만에 느껴보는 감정인가. 이미 다 잊었다고 생각했던 것은 나만의 착각이었나.
막상 눈에 담긴 광경은 그가 내려놓았다고 생각했던 그것을 다시 수면 위로 띄어 올렸다.
그도 알고 있었다.
이런 광경을 보여주려고 그렇게 목숨 걸고 싸웠던 것은 아니었다. 그저, 욕망에 혼을 판 추악한 무리들로서는 예상하지 못했던 결과였을 뿐이다.
본인들만의 욕심을 채우기에 급급하여, 바로 앞의 이익에만 눈이 멀어 결국 제 목을 조르는 결과를 가져온 것 뿐. 자신들이 저지른 일에 대한 대가를 치른 것이다.
그러나.
그로 인해 피해를 본 자신들의 울분은 대체 어디서 풀어야 좋을까.
그저, 군주에게 충성을 맹세했다는 이유로 고향을 등져야만 했던 부하들을 어떻게 설득해야 좋을까.
그는 머리 한 구석을 울리는 고뇌를 애써 무시하며, 성령의 성채를 방불케 하는 길을 지나 일찍이 마계의 광장이라 불렸던 널찍한 곳으로 접어들었다.
다행이라고 할 지, 이 곳은 그나마 인간의 손을 덜 탄 것 같았다.
이유는 간단. 자신들이 마계를 떠나기 전과 그리 달라진 것이 없었던 것이다. 음습한 공기, 마이너스 에너지가 가득 배인 대지, 실드를 치듯 주변을 듬성듬성 에워싼 앙상한 나무들.
그 중에서 마력만이 빠져나가, 닿으면 부서질 듯 말라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전쟁 중 자신이 인간계로 가는 게이트로 애용했던 오두막까지.
그 게이트는 마계를 떠나기 전 날, 자신의 손으로 스스로 메워버렸다. 매개체를 없애버린 이상 다시 발동하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외관을 제외하고 아무것도 남지 않은 이 초라한 곳에 대체 누가 살고 있는 것이란 말인가.
단순한 괴짜일 수도 있다. 인간은 수가 많으니, 별난 녀석 한 둘 쯤은 이상하지 않은 것이 당연하다. 마왕을 사로잡은 여자도 있는 마당에, 취향이 조금 독특한 녀석이 있다 한들 그리 대수로운 일은 아닐 터.
게다가 누가 살든 말든, 한 번 이 곳을 버린 마당에 이제 와서 신경 쓸 필요도 없는 노릇.
차가운 머리는 그렇게 생각하도록 명령하고 있었지만 - 그보다 낮은 위치에 있는 심장은 다른 행동을 지시하고 있었다.
불에 뛰어드는 나방처럼, 빛에 몰려드는 곤충처럼, 그는 자신도 모르게 천천히 오두막으로 발을 옮겼다.
문 너머로도 확실히 전해져 오는 누군가의 기척.
귀신에 홀리기라도 한 것처럼, 안과 밖을 가로막은 낡고 작은 세계의 문의 봉인을 풀기 위해, 그는 서서히 손을 뻗어 문고리를 잡았다.
차가운 감촉이 끈적하게 달라붙는다.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두근거리는 가슴을 감추려 애쓰며, 그는 천천히 손에 힘을 주어 단단하게 박힌 고리를 비틀어 살며시 문을 열어 크게 한 걸음을 내딛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