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평화롭고 권태로운 하루가 시작되었다. 지루하긴 하지만 무엇보다도 평범한 게 제일이니까.
그나저나 아가씨는 교양이론을 가르치는 사범이 되었다며 아침 댓바람부터 난리법석을 떠셨다.
오늘이 수업을 가르치는 첫 날이라나 뭐라나?
원생으로서 학원에 가시던 날에는 한 번도 이런 일이 없었는데 이상하다. 규칙이 바뀐 것일까?

1447년 4월 5일, 큐브의 집사 일지에서

 

 

"키르셰 양, 마침 잘 왔어요. 첫날부터 미안하지만 긴히 부탁할 것이 있는데..."

1447년 4월, 어렸을 때부터 문턱이 닳도록 드나들었던 학원에서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 후, 키르셰는 학생이 아닌 사범으로서 첫 발을 내딛었다.
어떤 방식으로 수업을 진행하면 좋을지 머릿속으로 온갖 계획을 구상하며 학원에 도착하지 얼마 지나지 않아, 키르셰는 구세주를 만났다는 얼굴로 마주친 니엘 교수에게 단단히 팔을 잡힌 채 문답무용으로 교장실로 끌려들어가 그 자리에서 난데없는 퀘스트 요청을 받은 것이었다.
난감한 기색을 떠올리는 초보 사범의 사정은 아랑곳하지 않고 니엘은 재차 말했다.

"다름이 아니라... 팬든 씨라고 알죠? 시장에서 장사하시는 분 중 하나고, 상공 연맹의 장(長) 중 한 분이기도 한데, 그 분께 긴히 드려야 할 게 있거든요. 그런데 공교롭게도 오늘은 왕립 아카데미에서 손님이 방문하시는 날이라 도저히 몸을 뺄 수가 없는 상태예요. 그래서 키르셰 양이 대신 좀 전해줬으면 좋겠어요. 할 수 있겠죠?"

"그건 상관없지만... 전 이제 곧 수업에 들어가 봐야 해서요... 사범으로서 첫 날인데, 벌써부터 수업을 빠지는 것도 좀..."

"어머, 그래요..."

니엘은 더듬더듬 자신의 입장을 설명하는 키르셰를 빤히 쳐다보았다.

"만약 오늘까지 물건을 전달해 주지 못한다면 사람들에 대한 내 신용과 평가가 낙엽이 떨어지듯 곤두박질칠 것이고, 지명도가 떨어지면 내 기분은 한없이 우울해 질 거고, 내 기분이 우울해지면 키르셰 양이 더 이상 오지 않도록 조치할 수도 있는데."

"......"

키르셰는 무심코 입을 다물었다.
-평범한 얼굴에 저녁 찬거리 고민하는 평범한 말투로 남의 밥줄을 들먹이다니...

"...그냥 제가 갔다 올게요, 선생님."

고민거리도 되지 않는다. 몇 초간의 짧은 침묵 속에 키르셰는 결국 백기를 들었다.
고용주가 저리 나오겠다는데 알바생이 무슨 배짱으로 패기를 부릴 수 있겠는가. 순한 양처럼 고분고분 부탁(을 빙자한 협박)을 들어주는 수밖에.

"어머, 흔쾌히 들어주시는군요. 고마워라. 자, 여기 이거. 그대로 팬든 씨에게 전달하기만 하면 돼요."

이미 그녀의 반응을 예상했다는 듯, 니엘은 기다렸다는 듯 묵직해 보이는 꾸러미를 그녀 앞에 턱 하고 내놓았다.

"그런데 수업은 어쩌죠?"

묵직해 보이는 외견에 비해 상대적으로 가벼운 꾸러미를 집어 들며 물었다. 니엘은 안경을 치켜올린 뒤 별 거 아니라는 듯 대꾸했다.

"오늘 수업은 없어요, 키르셰 양. 그러니까 그거 전달하고 바로 귀가해도 좋답니다."

"네? 하지만 전 별다른 전갈 같은 건 받은 적이 없었는데요."

"받은 적이 없는 게 당연하죠. 난 아무 전갈도 보내지 않았으니까요."

"예?"

키르셰는 무심코 큰 소리를 냈다. 이건 해도 해도 너무한 게 아닌가!
아랫사람에게 개인 심부름을 시키는 건 그렇다고 치더라도, 별다른 사유 없이 수업을 하지 않는다면 미리 언질이라도 주는 것이 세상의 관례 아니었나?

"뭐 문제 있나요?"

"예. 혹시 손님을 맞는 것 때문에 휴원하시는 거라면 적어도 미리 알려주셨어야 했다고 생각하는데요."

니엘은 얘가 지금 무슨 소릴 하냐는 듯 한 표정으로 키르셰를 주시했다. 그녀의 코발트 블루 눈동자에는 불쌍한 동물을 보는 듯한 연민의 빛이 깃들어 있었다.

"무슨 말을 하는 거예요, 키르셰 양. 오늘은 일요일이잖아요. 일요일에 수업을 하지 않는다는 건 일일이 말하지 않아도 통하는 이야기가 아닌가요?"

"......"

키르셰는 그만 속으로 자신을 질책하고 말았다.
키르셰 틴시클, 이 바보 같은 것! 처음으로 수업을 가르치게 되었단 기대에만 부풀어 그만 날짜를 착각하다니!
그제서야 키르셰는 학원에 가겠다는 아침 인사를 듣고 큐브가 이상한 표정으로 자신을 배웅했었던 일을 떠올릴 수 있었다. 알고 있었으면 한 마디 좀 해 줄 것이지.

"그럼 이제 문제없는 거죠?"

싱글거리는 목소리 덕에 키르셰는 겨우 도망치는 정신을 붙잡아 현실로 돌아올 수 있었다.

"...다녀오겠습니다..."

키르셰는 한숨을 담은 인사를 건네고 꾸러미를 들고 교장실을 뒤로 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선생님도 참 너무하셔. 날짜를 착각하고 있다는 걸 아셨으면 그냥 알려주시면 될 걸, 남의 밥줄을 걸고 장난을 치시다니!"

키르셰는 시장을 돌아다니는 내내 볼을 부풀린 채 불평을 했다. 시간이 지나 냉정히 생각해 보니 니엘 교수가 자신을 골탕 먹였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그 선량하고 이지적인 눈동자 속에 그런 앙큼한 장난기가 숨어 있을 줄 누가 알았겠는가.
사람은 정말 겉보기만으로 판단해서는 안 된다는 교훈을 얻은 셈이다.

"아가씨, 예쁜 얼굴을 왜 그렇게 찡그리고 있어? 좋은 물건들이 많으니 쇼핑이라도 하면서 기분 풀라구!"

어느 새 시장에 도착하여, 문득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발길을 멈춘 키르셰.
쇼핑이라는 매혹적인 유혹에 그녀의 초콜릿 빛 눈동자가 사알짝 흔들린다.

"저도 그러고는 싶지만... 오늘은 쇼핑하러 온 게 아니에요, 아주머니. 니엘 선생님께서 아주머니께 전달해 달라는 물건이 있어서요."

"내게?"

자신이 받아야 할 것이라는 말에 호객행위를 하던 팬든이 앞치마에 손을 쓱 닦고 키르셰에게 다가왔다.

"이게 뭐니? 혹시 그건가?"

팬든은 키르셰에 건네받은 꾸러미의 무게를 가늠해 보며 물었다.

"글쎄요... 저도 꾸러미 째로 받았고 뭘 전달해야 하는지는 아무 얘기도 들으 게 없어서 안에 뭐가 들어있는지는 잘 모르겠어요. 그럼 저, 물건도 전해드렸으니 이만 가볼게요 아주머니. 많이 파세요~"

키르셰는 적당히 말을 받아넘기고 가게 밖으로 나왔다. 오늘 시장에서 살 것은 아무것도 없었지만, 쇼핑이라는 말에 자극을 받은 탓에 좀 더 돌아다녀보고 싶었던 것이다.
-이대로 집에 들어가기도 좀 그러니까, 번화가에 가서 아이 쇼핑이라도 해 볼까...
예쁜 장신구며 액세서리는 보는 것만으로도 기분을 들뜨게 만들 뿐 아니라, 운이 좋다면 친구를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갑자기 생긴 자유 시간을 만끽하기 위한 작은 계획을 짜는데 열중해 있던 키르셰는 그만 앞을 보는데 소홀하여 반대편에서 걸어오던 누군가와 부딪히고 말았다.

"죄송합니다...! 제가 한 눈을 팔다가 그만... 다친 데는 없으세요?"

오늘 참 일진 사납다며 마음 속 깊은 곳에서부터 투덜거리면서도 키르셰는 자신과 부딪힌 사람에게 사과를 건넸다.

"저기..."

아무리 기다려도 반응이 없자 키르셰는 고개를 들어 자신의 맞은편을 주시했다.
시들어 버린 듯 기운 없는 싯누런 머리칼에 햇빛을 받지 못해 허옇게 뜬 피부, 고급스럽지만 귀티보다는 생각 없이 돈만 들인 듯 한 티가 역력한 갈색 양복.
그리고... 키르셰와 방금 그녀가 나온 가게를 번갈아 보는 다크 블루 눈동자 1쌍.

"저기... 괜찮으세요?"

"너, 방금 이 가게에서 나왔지? 장사에 흥미가 있나?"

남자에게서 나온 대답은 질문과는 전혀 상관없는 생뚱맞은 것이었다.

"예, 뭐... 없지는 않다고 생각해요. 예전엔 가끔 여기서 일하기도 했구요..."

실수로 부딪힌 거하고 장사에 관심이 있는지 없는지가 무슨 관계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물어보았으므로 대답을 하자 남자는 얼굴을 찌푸리며 고개를 저었다.

"안 돼, 안 되지. 종업원으로서는 아무리 일해도 사업을 배우기 힘들어. 장사에 흥미가 있다면 지금 나랑 같이 어디 좀 가자."

"난데없이 무슨 말을... 이봐요?!"

대체 무슨 말을 하느냐며 따지려던 키르셰는 자신의 손목을 붙드는 묵직한 감촉을 느끼고 무심코 언성을 높였다. 뭐 이런 사람이 다 있어!

"그냥 뭘 좀 보여주려는 것뿐이니까 걱정 말고 따라와 봐."

키르셰의 항의를 멋대로 해석한 남자가 자기 합리화를 위한 변명을 흘렸다. 전혀 설득력이 없었다는 게 문제지만.
-기분 나쁜 사람이야...
키르셰는 속으로 욕지거리를 했다. 혹시라도 이상한 곳으로 끌고 가려는 거라면 워볼프 사범님 아래서 배운 무술 실력으로 제압해 버려야지...

"자, 봐라. 여기가 내 가게다."

언제 실력 발휘를 할 지 타이밍을 재던 키르셰는 남자의 언질에 김빠진 얼굴로 그가 가리킨 가게에 시선을 주었다.
어두침침한 곳이나 수상쩍은 곳으로 데려갈 거라는 예상과는 달리 남자가 데려온 곳은 키르셰 자신도 이따금 들르던 곳으로, 말해두지만 무지무지 평범한 곳이었던 것이다.

"아... 당신 가게라고요?"

남자의 말에서 묘한 이질감을 잡아낸 키르셰는 그의 얼굴을 돌아보았다. 무심코 아저씨라고 부르려던 혀를 제 때 단속할 수 있었던 것은 행운이었다.
키르셰의 얼굴에 떠오른 감정을 눈치 챘는지 남자는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얼마 전까지는 아니었지만 이제는 내 것이지. 매입을 했거든."

"하지만..."

키르셰는 다시 한 번 가게를 들여다보았다. 사람들은 그대로인 것 같은데...

"분명 일하는 사람들은 그대로야. 하지만 사장은 나지. 조만간 시장 전체를 내 것으로 만들 생각이란다. 어때?"

-아니, 거기서 어떠냐고 물어봤자...
키르셰는 떨떠름한 얼굴로 남자의 시선을 피했다. 그는 고개를 숙여 딴청을 피우는 키르셰를 향해 씨익 하고 짓궂은 웃음을 지어 보였다.

"믿질 않는군. 좋아, 알았어. 내 특별히 좋은 것을 알려 주지. 한 달 뒤에 큰 길로 나오면 굉장한 걸 볼 수 있을 거다. 항구에 내 교역선이 도착할 예정이거든."

"배를 가지고 계신 건가요?"

키르셰가 물었다.
가격은 잘 모르겠지만, 배는 굉장히 비싼 게 아니었나...?

"물론이지. 무역이야말로 부를 낳는 수단이니까. 그리고 무역을 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배가 필요하고 말야. 물론 최초의 배를 손에 넣기까지는 무척 고생했지만."

"무척 부자이신가 봐요."

키르셰가 중얼거렸다. 남자는 마치 그 말을 기다리기라도 한 듯 그녀의 어깨를 가볍게 툭툭 치며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하하! 이제야 겨우 알아주는구나. 그러고 보니 아직 통성명도 하지 않았었군, 나는 크라이스. 몰리뉴 왕국 제일의 대상인이 될 예정인 남자지."

"저는 키르셰 틴시클이라고 해요."

상대의 이름까지 들은 마당에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홧김에 가명을 댈까도 생각해 봤으나 그만두기로 했다. 그렇게 한다고 해서 기분이 풀리는 것도 아니고, 상대를 골탕먹일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게다가 처음 이 남자를 만났을 때 자신의 입으로 팬든 씨의 가게에서 아르바이트해 본 적도 있다는 이야기까지 흘렸으니, 혹시라도 이 남자가 팬든 씨와 가볍게 이야기라도 나눈다면 금방 들통날 일이었다.
키르셰는 자신의 이름을 대면서도 크라이스에 대한 호감을 전혀 가질 수가 없었다.

"좋아, 틴시클 양. 선배로서 충고 하나 하지. 장사라는 건 말이다, 직접 일만 하는 걸로는 성공하기 어려워. 사람과 돈을 움직일 줄 알아야지. 내가 봤을 때 네게는 장래성이 있어. 장사에 생각이 있다면 이것저것 가르쳐 줄 테니, 한 달 뒤에 보도록 하자꾸나. 하하하."

크라이스는 저 하고 싶은 말을 실컷 늘어놓은 뒤 손을 흔들며 가게 안으로 사라졌다.
-내가 싫어하는 타입이야. 거만하고 콧대만 높고...
가게에서 물러난 키르셰는 눈살을 찌푸렸다.
교역선에 대해서는 약간의 호기심이 일었지만, 저 거만한 남자를 또 봐야 한다면 차라리 신경을 끄는 게 나을 듯싶었다.

"기분도 잡쳤는데 그냥 집에나 가야겠군."

공기가 위장을 멋대로 휘젓고 있다는 걸 깨달은 키르셰는 아이 쇼핑은 관두고 집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아침부터 이리저리 힘을 뺀 탓에 배가 고파졌던 것이다.

"이봐, 거기 앞에 가는 귀여운 아가씨. 잠깐 나 좀 볼래?"

시장을 빠져 나와 거리에 들어섰을 때, 키르셰는 뒤에서 진부한 문구로 누군가를 부르는 소리를 듣고 속으로 투덜거렸다.
혹시라도 다른 사람을 부르는 건가 싶어 좌우를 둘러보았지만 애석하게도 아가씨라 불릴 만한 여자는 자기 하나 뿐.
-이번엔 또 뭐야...?
대체 다들 오늘따라 왜 이렇게 날 귀찮게 하는 거지?
아까의 크라이스 같은 사람이 불러 세운 거라면 이번엔 정말 가만있지 않으리라.
또 무슨 용건이냐며 따지기 위해 키르셰는 자신을 부른 목소리가 들린 방향으로 몸을 틀었다.
방향을 튼 그 쪽에 '그 소년'이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