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자 뷰란 운명이 흩뿌리는 가장 잔인한 상처이다.


- 1450년 7월 7일, 에이미의 회고록에서

 

 

"비나님, 무슨 일이십니까?"
 
부하들에게 몇 가지 간단한 지시를 내리고 자신의 집무실로 돌아온 그레이튼은 얼마 지나지 않아 성을 뒤덮은 소란스러운 목소리와 부산한 발걸음 소리에 얼굴을 찌푸린 채 집무실 밖으로 걸어 나와, 마침 자신의 앞을 달려 나가는 시녀장(長)을 불러 세웠다.
 
"그레이튼 님..."
 
비나는 그레이튼의 찌푸려진 얼굴을 보고 흠칫 놀라면서도 뜀박질을 멈추고 그에게 살짝 고개를 숙였다.
아아, 마왕님의 오른팔이라 불리는 저 맹호에게 걸려버리고 말았구나.
얼굴색으로 보아하니 아무래도 기분이 언짢은 상태에서 열을 받은 모양이다.
뭐하냐고 물어볼 게 뻔한데, 뭐라고 대답해야 불똥이 덜 튈까...
 
"그게 저... 급한 일이 있어서 본의 아니게 소란을 피웠습니다. 죄송합니다..."
 
그레이튼이 자신을 불러 세우고 질문을 던지기까지 수 초간 뇌를 풀가동시켰던 그녀의 노력도 부질없이, 어째서인지 그녀의 입에서는 자백의 말이 튀어나오고 있었다.
마족은 거짓말을 할 수 없다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저 호랑이 대신 앞에서 말을 꾸며냈다가는 훗날 치르게 될 뒷감당이 두렵다는 본능이 그렇게 지시하고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급한 일이 있다는 건 알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시종들이 저렇게 소란스럽게 몰려다닐 리가 없겠죠. 저는 비나 님이 저들에게 왜 그런 명령을 내렸는지 여쭙고 있는 겁니다."
 
"...제가 내린 명령이라는 건 어찌 아시고...?"
 
"감입니다."
 
딱 잘라 말하는 그레이튼의 눈에서 어서 빨리 불라는 무언의 메시지를 읽어낸 비나는 쭈뼛쭈뼛하면서도 순순히 털어놓기 시작했다.
마왕님의 명으로 돌보고 있던 공주님이 사라졌다는 것.
분명히 잠이 든 걸 보고 나왔는데 잠시 다른 볼일을 보고 들어와 보니 없었다는 것
방문을 지키던 시종의 말로는 아무도 출입했던 자가 없었다는 것.
아직 성 밖으로 나가지는 못했을 테니 시종들을 시켜 찾아보고 있었다는 것.
모든 걸 솔직히 털어놓은 시녀장은 불안한 기색을 역력히 드러내며 그레이튼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커다란 실수를 저 약속과 규율을 중요시하는 냉정한 수완가에게 들켜버렸다. 아마 잔소리만으로는 끝나지 않을 테지. 규율과 약속을 깬 자에게는 일말의 용서도 없다는 평이 자자하기 때문이다.
 
"풋... 아하하하하!! 그러셨군요. 난 또 뭐라고. 그 일 때문에 그리 허둥대신 겁니까?"
 
"...예?"
 
예상과는 다른 반응에 비나는 어깨를 들었다. 불호령이 떨어질 줄 알았는데... 저 대신이 웃고 있었다.
 
"혹시... 대신님께서는 공주님의 행방을 알고 계시는 겁니까?"
 
비나는 희망찬 어조로 질문을 던졌으나, 그레이튼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건 아닙니다. 하지만 왠지 공주님께서 어디 계신지 알 것 같군요. 아까 부하들에게 지시를 좀 내렸는데... 아무래도 곧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게 정말이신가요?!"
 
"예, 그렇습니다. 그러니 너무 심려치 마십시오. 잡아먹지 않을 테니 어깨에 힘도 좀 빼시고요."
 
시녀장은 움찔거리면서도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살짝 긴장을 풀었다.
 
"저도 같이 찾으면 안 될까요?"
 
"아니, 됐습니다. 그리 많은 시종이 필요하진 않으니 그냥 성에서 기다려 주십시오. 그리 보기 좋지 않으니 성을 휘젓는 부하들에게서 명령도 좀 거두어 주시고... 그래, 차분해질 수 있도록 차라도 한 잔 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하, 하지만..."
 
그레이튼은 태평한 어조로 비나의 소심한 항의를 단칼에 잘랐다.
 
"한 번 더 말씀드리지만 공주님께서는 곧 돌아오실 겁니다. 성을 빠져나가는 일도 그리 희한한 일도 아니니 너무 놀라지도 마시고 말입니다."
 
"공주님께서... 이미 성을 나가셨다고요?"
 
"아마도요. 하지만 너무 걱정 마십시오. 믿을 수 있는 누군가와 같이 있을 테니 말입니다."
 
그레이튼은 더 이상 토달지 말라는 듯, 손을 가볍게 흔들며 고개를 돌렸다.
 
"하여간, 왕자건 공주건 방랑자 기질이 붙어가지고... 역마살이라도 낀 건지 원."
 
비나의 불안한 발걸음 소리를 등 뒤로 들으며 그레이튼은 낮은 목소리로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아무래도 자신이 직접 나서서 설교를 해야 할 것 같았다.
 
 
 
 
 

소년은 달렸다.
손발을 죄어오는 숨 막히는 의무감을 피해, 두 어깨를 짓누르는 고귀한 혈통의 짐을 막 벗어던진 찰나였다.
충언이랍시고 그를 붙드는 신하들의 잔소리는 지겹기 짝이 없었다.
그만하면 충분히 알아들었거늘, 매일같이 앉혀놓고 같은 말을 반복하는 저의는 무엇이란 말인가.
 
"하아..."
 
뒤쫓아 오는 이가 없다는 것을 확신한 소년의 입에서 숨 가쁜 탄성이 새어나왔다.
무사히 빠져나온데 대한 안도감? 머지않아 도로 끌려가게 될 것이라는 두려움?
아니, 그 어느 쪽도 아니었다.
손에 넣고자 발버둥 쳤던, 그토록 염원하던 자유.
유효기간이 붙긴 했지만 늘 바라마지 않던 것을 손에 넣고야 말았다는 성취감이 그를 흥분하게 만든 것이다.
그 작은 감정에 뛸 듯이 기뻐할 정도로, 그는 아직 어렸다.
 
"아차, 이럴 때가 아니지. 멍청하게 있다가는 그레이튼에게 잡혀서 또 꾸지람을 듣겠어."
 
시간을 놓아버린 사색에 빠졌던 소년의 의식이 겨우 돌아왔다.
어차피 들킬 수밖에 없지만, 가능하면 그 사이의 시간을 마음껏 즐기고 싶었던 것이다.
-어디로 도망치는 것이 좋을까...
소년은 침착하려 애쓰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부하들의 손을 빠져나왔다고는 해도 소년의 뒤에는 여전히 커다란 성이 위협적인 분위기를 뿌리고 있었다. 우물거리고 있다가는 곧 부하들에게 붙들려 긴 설교를 들어야 할 것이 틀림없었다.
소년이 고민하는 사이에도 시간을 담은 모래는 하염없이 흐르고 있었다.
일단은 성에서 벗어나자.
잠시 고민하던 소년은 곧 결론을 내렸다.
뭘 할지는 아직 정하지 못했지만 성 근처에서 멍하니 서 있는 것은 그다지 현명하지 못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렇게 정했으니 어서 성에서 멀어져야...
툭.
막 몸을 움직이려던 찰나, 소년은 자신의 머리를 쳐낸 가벼운 물체를 발견했다.
푸른 줄무늬 천으로 만들어진 곰 인형.
-여자가 갖고 노는 물건이 왜 내 머리에?
당연히 머리에 떠오르는 의문을 입에 담을 새도 없이.
우당탕탕탕!!!
요란스러운 효과음과 함께, 머리에 부딪혔던 인형과는 달리 둔탁한 격통이 등을 타고 달렸다.
자연스레 흘러나오는 신음을 틀어막으며, 소년은 잔뜩 인상을 쓰며 겁 없이 자신을 공격한 상대를 확인하기 위해 고개를 돌려 뒤를 보았고-
금방이라도 안개가 피어오를 것 같은 초콜릿 빛 눈동자와 딱 마주쳐 버렸다.
그것이 여자아이라는 것을 인식하기까지는 약간의 시간을 요했다.
말을 걸어야 할 지, 내팽개치고 무시해야 할 지 판단을 내리지 못한 소년이 여자아이를 멍하니 주시하며 엎드려 있을 무렵, 멀리서 누군가 대화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방금 뭔가 큰 소리가 났다!
-성 뒤쪽이다. 가보자!
 
"이런 젠장."
 
소년은 작은 소리로 투덜거리며 서둘러 몸을 일으켰다. 그의 등 뒤에 올라타 있던 여자아이가 졸지에 엉덩방아를 찧고 울음을 터뜨리려 하자, 소년은 황급히 그 입을 틀어막고 곰 인형과 함께 소녀를 들어올렸다.
-귀찮은 꼬맹이 따위를 데리고 다니는 취미는 없지만-
이 꼬맹이를 내비뒀다간, 이곳으로 향하는 자신을 찾는 부하들에게 발견되어 자신이 어디로 도망쳤는지 일러바칠ㄷ지도 모른다.,
그럴 바에야 차라리 다소 걸리적거리더라도 데리고 다니는 편이 낫다.
생각보다 가벼운 무게에 살짝 놀라며, 소년은 언제나 자신이 몸을 숨기는데 애용하던 숲으로 향하는 오솔길을 향해 서둘러 달려 나갔다.
 
 
 
 
 

"후우... 겨우 따돌린 것 같은데..."
 
오솔길을 따라 한참 달려 숲에 도달한 소년은 겨우 안심하며, 안고 있던 소녀를 거칠게 내려놓은 채 허리춤까지 닿는 풀 내음을 훔치며 벌렁 뒤로 누워버렸다.
바람이 속삭이는 나직한 목소리에 의식의 끈을 놓아버릴 것 같은 기분이 소년의 코를 간질인다.
얼마 전에 소년이 찾아낸 이 숲은 소년만의 아늑한 은신처가 되어 주었다.
나만의 공간을 찾아냈다는 기쁨도 잠시, 자신이 알고 있는 곳이라면 자신보다 훨씬 오랜 세월을 견딘 누군가도 이곳을 알고 있는 것이 아닐까 걱정하였으나, 다행히도 소년이 이곳을 찾을 때마다 그의 사색을 방해하는 불청객은 나타나지 않았다.
물론 지금은 그렇지 않지만.
얼떨결에 끌고 온 꼬맹이라는 불청객이 인형을 끌어안고 소년의 곁에 찰싹 붙어 있다.
이걸 대체 어떻게 해야 하나 한숨을 쉴 때 소년의 곁에 붙어 있던 소녀가 불쑥 입을 열었다.
 
"저기 있잖아. 심심하니까 놀아줘."
 
...무시하자.
단 1초 만에 결정을 내렸다. 심심하니까 놀아달라니, 누굴 보모로 아는 건가.
 
"놀아줘 놀아줘-"
 
소년의 결심을 알 턱없는 소녀는 고사리 같은 손으로 소년의 어깨를 흔들며 조르기 시작했다.
 
"시끄러. 조용히 좀 해."
 
진심으로 귀찮다는 투로 한 마디 던지자 소녀는 입을 다물었다. 진작 그럴 것이지.
다시 눈을 감고 사색에 잠기려던 소년은 소녀가 중얼거리는 소리를 듣고 별안간 벌떡 일어나 앉았다.
 
"너 방금 뭐라고 했어?"
 
"안 놀아주면 울 거라고 했어."
 
소녀의 대답에, 처음의 귀찮은 마음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소년은 그녀에게서 묘한 호기심을 느꼈다.
이 꼬맹이는 여기서 시끄럽게 굴면 소년이 곤란해지는 것을 알고 말하는 것일까?
소년은 언젠가 그레이튼에게서 들은 충고를 떠올렸다. 이용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든 이용할 줄 알아야 한다고.
이 소녀는 그것을 알고 말하는 것인가?
소녀는 입 다물고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소년을 향해 때 묻지 않은 순수한 웃음을 보여 주었다.
 
"비나 아줌마가 그랬어. 남자는 여자가 울면 꼼짝 못 한다고."
 
얼굴은 한없이 순수하지만, 하고 있는 말은 충분 이상으로 세상에 찌들어 있다.
아니, 이건 그냥 꼬맹이한테 할 말 안 할 말 안 가리는 그 시녀장(長)에게 문제가 있는 건가.
 
"너, 이름이 뭐지?"
 
여자아이의 말에서 이상한 단어를 잡아낸 소년은 소녀에게 물었다.
시녀장의 이름을 허물없이 부를 수 있는 자는 그리 많지 않다. 혹시 그의 예상이 맞다면...
 
"난 이름이 없어."
 
소녀는 잠시 침묵했다가 침울한 어조로 대꾸했다.
 
"비나 아줌마나... 다른 아저씨들은 항상 날 공주님이라고만 불렀어. 그치만 그건 이름이 아니잖아, 그치...? 난 한 번도 이름으로 불린 적이 없어..."
 
예상이 적중했다.
소년은 자신의 얼굴에 살짝 감돌던 호기심의 그림자를 지우고 대신 심각한 표정을 끄집어냈다.
이 녀석과 함께 있는 것은 위험하다. 이 아이는... 소년이 소문으로만 듣던 그 소녀가 틀림없으므로.
성의 잡무를 맡은 도리아돌이나, 아까 이름이 거론된 시녀장, 소년의 교육을 맡은 그레이튼의 대화 속에서 간간이 등장하는 '공주님' 말이다.
몰래 엿들은 그들의 대화에 따르면 '공주님'은...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신하들의 보호 아래 몰래 키워지고 있었다.
그런데 자신이 그 공주님과 같이 있는 걸 누군가 발견한다면...
다른 녀석은 몰라도 그레이튼에게만은 절대 들켜선 안 된다. 그 냉혹한 녀석에게 들켰다간 무슨 꼴을 당할지 모른다.
 
"...집에 가자."
 
"싫어."
 
소년이 힘들게 내린 결정을, 소녀는 달 칼에 거절했다.
 
"그럼 너 혼자 여기 있던가. 난 갈 거야."
 
"난 성이 싫어. 비나 아줌마랑 큐브 말고는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고, 나랑 놀아주지도 않는단 말야. 안 가고 그냥 여기서 놀면 안 돼? 안 울게. 정말이야."
 
"안 돼. 여기 있으면 큰일 나. 위험해진다고."
 
소년은 다급히 소녀의 손을 잡아끌며 말했다. 물론 거짓말은 전혀 하지 않았다. 이 꼬마랑 계속 같이 있으면 소년 자신이 위험해진다는 뜻이지만.
물론 그 속뜻을 알 리 없는 소녀는 위험해진다는 말에 겁먹고 태도를 바꿔 소년의 허리에 매달렸다.
 
"그런데 아저씨는 어디 살아?"
 
소년의 손을 꼭 붙들고 종종걸음을 하던 소녀가 불쑥 던진 질문에 소년은 잠시 휘청거렸다.
 
"...누가 아저씨라는 거야."
 
높아질 것 같은 목소리를 필사적으로 억눌렀다.
10년을 조금 넘은 세월의 강줄기를 겨우 터놓았을 뿐인데, 갑자기 면전에 대고 아저씨 소리를 들을 거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아니야? 내 주변엔 다 아저씨 아줌마밖에 없어서... 그럼 뭐라고 불러야 돼?"
 
소녀가 미안한 듯 중얼거렸다.
 
"...됐어. 그냥 너 맘대로 불러."
 
소년의 의지와는 달리 꽤나 가시 돋친 말이 튀어나왔다.
소녀가 움찔하는 것을 본 소년은 아차 싶었지만, 사과하기도 멋쩍은 터라 조용히 입을 닫아 버렸다.
이 꼬마와 같이 있어봤자 좋을 것은 없다. 다신 마주칠 일 없는 꼬맹이가 날 뭐라고 부르든 그게 무슨 상관이라고 열을 내는 건가.
 
"난... 몹쓸 애인 거지?"
 
소년이 입을 다물고 대꾸하지 않자 소녀가 침울한 어조로 중얼거렸다.
무슨 소린가 싶어 내려다보니 소녀의 눈물이 짙게 깔려 있는 심록색 향취를 흐뜨려놓고 있었다.
 
"못 생기고... 징징거리고... 말도 안 듣는 못된 애라서 아무도 내 이름을 안 부르고... 아저씨도 그래서 내가 싫은 거지?"
 
눈물은 대지를 적시고 소년의 닫혀 있던 마음의 문을 애처롭게 두드렸다.
 
"아니, 그러니까... 싫은 건 아냐. 어린 꼬... 아니, 여자애가 징징거리는 걸 뭐라고 할 생각은 없고... 그리고 넌 못생기지 않았어. 혹시라도 누가 그런 얘길 한다면 그냥 무시해. 뭣도 모르고 떠드는 걸 테니까."
 
소년은 그렁그렁 눈물을 달고 있는 소녀의 얼굴을 훔치며 어색하게 말을 붙였다. 이럴 땐 대체 어떻게 대하면 좋을지 배우지 못한 탓에, 소년의 목소리에는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는 서투름이 가득 배어 있었다.
 
"...정말?"
 
"그, 그래. 정말이야. 싫지도 않고 못생겼다고 생각하지도 않아. 머리가 좀만 더 길면 진짜 예쁠 것 같... 아, 아니. 지금 말은 잊어버려."

소녀를 달래고자 별 생각 없이 말을 던지던 소년은 무심코 이 상황에 어울리지도 않는 엉뚱한 말을 던진 것을 깨닫고 창백한 얼굴을 살짝 붉혔다.
어지간히 말주변 없는 자신이 한심했고, 차라리 잡힐 걸, 대체 왜 이 녀석을 덜컥 끌고 온 것인지, 그런 자신이 바보같이 여겨졌다.
 
"저기 있지..."
 
"잊어버리라니까! 그냥 농담이었다고. 그건 그렇고,ㅡ 난 아저씨가 아니니까 다신 그렇게 부르지 마."
 
"그럼 뭐라고 부르면 돼?"
 
"...이름이면 충분해."
 
"이름이 뭔데?"
 
"내 이름은..."
 
부러운 기색을 숨기지 않고 묻는 소녀에게 대답하려던 소년은 별안간 말을 멈추고 소녀를 쓰러뜨렸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사정거리 밖에서 날아온 이글거리는 불덩이가 소년을 덮쳤다!
 
"꺄아아아아아악!!!"
 
뭔가 폭발하는 소리에 소년에게 덮쳐진 소녀가 자지러지는 비명을 질렀다.
그가 감싸준 덕에 소녀 자신은 전혀 피해를 입지 않았지만, 무방비 상태로 있던 소년은 그 공격을 고스란히 받아낼 수밖에 없었다.
힐끗 소녀가 무사한 것을 확인한 소년은 휘청거리는 다리를 지탱해 겨우 일어나면서 분노를 담아 자신의 앞으로 걸어오는 자를 쏘아보았다.
 
"대체 여기서 뭘 하는 거지?"
 
"그건 제가 할 말입니다. 여기서 뭘 하고 계신 겁니까, 왕자님."
 
"알면서 물어? 네가 쏜 주문에 맞고 넘어가고 있었잖아."
 
상대가 누구든간에 규칙을 어기는 자는 용서치 않는다. 그것이 그레이튼의 신조였기에 일단 앞 뒤 잴 것 없이 일단 주문부터 날리고 본 것이었다.
왕자의 교육 및 마법 담당 책임자 - 그레이튼은 자신에게 대드는 발칙한 꼬맹이를 바라보며 끌끌 혀를 찼다.
왕자라는 지위를 믿고 까부는 것인지, 세상 물정을 모르는 것인지. 아마 둘 다이리라.
 
"제 말을 어기셨으니 벌을 받는 게 당연한 겝니다. 모쪼록 도망치지 마시라고 그리 말씀을 드렸거늘... 제가 너무 풀어준 듯 하군요."
 
"그래서 넌 네 말을 듣지 않는다면 상대가 누구건간에 함부로 주문을 날리나? 전혀 상관없는 녀석이 말려들어 다친다고 해도?"
 
소년은 자신의 뒤에서 꾸물거리며 울먹이는 소녀를 들먹이며 그레이튼을 도발했다. 이 애가 정말 공주님이라면 천하의 그레이튼이라 해도 막무가내로 나올 수는 없을 거...
 
"그게 어쨌다는 겁니까?"
 
라고 여겼던 소년의 예상은 완전히 빗나갔다. 분명 그레이튼은 소년의 옷자락을 붙들고 잔뜩 겁먹어 움츠러든 눈초리를 발견했을 터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리 태연하다는 것은...
 
"제 철칙을 잘 아시지 않습니까. 규율과 약속을 어기는 자는 용서하지 않는다. 열외는 없습니다. 그게 설령- 왕자나 공주라 하더라도 말입니다."
 
"...뭐라고...?"
 
"자아, 숨바꼭질은 끝났습니다. 이제 돌아갈 시간입니다."
 
소년과 소녀는 저도 모르게 그레이튼의 시선을 피해 고개를 떨구며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말투는 한없이 친절하고 미소도 부드럽지만 그 속에 감춰진 냉정한 본심을 읽어냈기 때문이었다.
 
"공주님, 이리 오시죠. 물건 띄우는 재주밖에 없으면서 창문 밖으로 뛰어내리는 것은 매우 위험한 행위랍니다. 더 이상 비나님을 걱정시키는 짓을 해선 안 됩니다."
 
한없이 상냥한 어조로 설교하며 다가온 그레이튼은 따뜻한 손길로 얼어붙은 소녀를 안아 올렸다.
왠지 모를 두려움에 움츠러든 소녀를 토닥이면서, 그레이튼은 소년을 향해 차가운 어조로 말했다.
 
"이 분은 제가 책임지고 안전하게 데려다 주도록 하겠습니다. 왕자님께서는 성에 돌아가셔서 근신할 준비나 하십시오. 또 중간에 빠지신다면, 이번에는 그 자리에서 근신하도록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흥."
 
잠시 얼굴을 찌푸렸던 소년은 이내 포기한 듯,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며 항복의 의사로 양손을 어깨 높이로 들어올렸다. 이번 '설교'는 몇 시간이나 계속될까 - 하는 생각을 떠올리면서.
 
 
 
 
 

글라스 안에 갇혀 요동치는 적빛 포도주의 힘을 빌어 과거의 상념에 빠져들었던 바로아는 나긋하고 부드러운 구두소리에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창백하기만 한 자신의 피부와는 달리 적당히 혈기가 도는 생명의 빛을 머금은 하얀 얼굴.
마계에는 들어오지 않는 햇빛을 잔뜩 빨아들인 상아색 머리카락. 모든 것을 초월한 듯 한 은은한 미소.
우연의 일치일까?"
바로아에게 다가온 여자는, 방금까지 그의 회상 속에서 춤추던 소녀와 어딘지 비슷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이자벨 님."
 
바로아는 황급히 예를 갖추며 여자의 이름을 입에 올렸다.
 
"이 곳까지 어쩐 일이십니까. 폐하와 함께 계신 줄 알았는데요."
 
"아까까지는 그랬지요. 하지만... 떠나기 전에 마지막으로 이곳을 둘러보고 싶었거든요. 다이쿤에게 졸라 허락을 받았죠."
 
덕분에 그 고지식한 그레이튼에게 한 소리 들어버렸다고 덧붙이며, 이자벨은 혀를 쑥 내밀어 보였다.
 
"내일이면... 이 대지와도 이제 영원히 안녕이로군요."
 
이자벨은 부동의 자세로 딱딱하게 굳은 바로아의 곁을 지나쳐, 발코니 아래 펼쳐진 광활한 숲을 주시하며 서글픈 어조로 중얼거렸다.
 
"이 또한 숙명이겠지요. 주어진 것을 지키는 것도, 버리고 떠나는 것도, 나아가 신척지를 개척하는 것도... 전부 말입니다."
 
바로아는 이자벨의 뒤에 서서 담담한 어조로 그녀의 말에 답했다.
 
"바로아... 그대는 아무렇지도 않은가요? 이 땅을 버리고 어딘지도 모를 곳으로 이주하는 것에 대해..."
 
"폐하께서 내리신 결정입니다. 좋든 싫든 따라야 하지 않겠습니까."
 
"난 그대의 개인적인 의견을 묻는 거랍니다... 그대는 다른 누구보다도 나와 폐하를 원망해야 할 처지가 아닌가요? 물론 그대는 그럴 권리가 있지요. 누구보다도 이 마계를 좋아하는 자로서..."
 
이자벨은 난간에 손을 대고 쓸쓸한 빛을 담은 눈으로 그를 돌아보았다. 바로아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자, 이자벨은 다시 고개를 돌리고 스스로를 납득시키려는 듯 조용히 말을 이었다.
 
"나는 씻을 수 없는 죄를 저질렀어요. 기사로서 섬기던 주인을 배신하고, 나를 아끼던 전우의 손을 뿌리치고, 나를 사랑하는 이에게서 보불을 빼앗아 감추고, 자식에게는 어미의 사랑 대신 희생이라는 이름의 굴레를 지우고, 이제는 그대가 좋아하는 마계를 적에게 넘겨주게 되었지요..."
 
"......"
 
"18년 전, 그 아이가 태어났을 때 다이쿤께서 약조해 주셨답니다. 무슨 일이 있든 그 아이가 본인들로 인해 다치는 일은 없도록 하겠다고. 그것이 설령, 자신이 다스리는 마계를 포기하는 결과가 빚어지더라도..."
 
바로아는 묵묵히 이자벨의 말을 들었다. 그녀의 말이 끝나고 수 분 뒤, 바로아는 겨우 입을 열었다.
 
"폐하께서 제게 그 아이의 의중을 알아보라 하신 것도... 오늘, 모두의 앞에서 마계를 포기하고 떠나겠다고 선언하신 것도... 전부 당신과의 맹약 때문이었던 겁니까?"

"......"

이자벨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녀의 우수에 찬 미소 속에서 대답을 읽은 바로아는 그제서야 이해가 간다는 듯 혼자 중얼거렸다.

"그 아이가 인간으로서의 삶을 선택하면 인간에게 투항하셨을 것이고, 마족으로서의 삶을 선택하면 목숨을 걸고 싸워 어떻게든 마계를 지켜낼 요량이셨을 터... 하지만 그 아이는 어느 쪽도 선택하지 못하고 혼자 고민에 빠져 있었을 뿐. 그래서 폐하께서는 마계에서 손을 떼고 신천지를 찾아 떠나겠다고 말씀하신 것이군요."
 
"...그래요. 마족은 약속을 어길 수 없고, 자신에 대한 책임은 자신이 져야 한다는 규율 때문에, 다이쿤은 그 같은 결정을 내렸지요. 눈앞의 이익에 눈 먼 인간의 흑심 속에서 자신의 딸이 목숨을 걸고 싸우고 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정말이지 그대들은 모를 거예요. 내가 다이쿤과 그대에게 얼마나 미안해하고 있는지... 내 이기적인 결정의 대가를 내가 아닌 다른 자들이 치르다니..."
 
"마음 쓰실 필요는 없습니다. 폐하께서는 충분히 고민하시고 결정을 내리셨을 터. 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뭐, 아무렇지도 않다면 거짓말이겠지만... 어쨌든 인간의 병력은 지난 전쟁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막강해졌고, 지난 전쟁의 패배를 그대로 돌려주겠다는 일념으로 진격하고 있습니다. 그들과 싸워 지지 않을지는 모르겠지만 마계가 막대한 피해를 입는 것은 일목요연.
 어쩌면 단기간 내로는 복구하지 못할 상처를 입을지도 모릅니다. 그럴 바에야 차라리... 부하들이 들으면 무책임하다고 힐난하겠지만, 인간에게 이곳을 내주고 떠나는 편이 나을 수도 있습니다."
 
바로아는 한참을 망설인 끝에 마지막 한 마디를 덧붙였다.
 
"어차피 인간은 머지않아 자신들의 탐욕이 불러온 대가를 치르게 될 테니 말입니다.“
 
"마법석을 가리키는 거로군요."
 
그의 생각을 눈치 챈 이자벨이 대꾸했다.
 
"그렇습니다. 인간이 이곳을 차지하고 마법석을 채굴한다 한들, 그것도 일시적일 뿐입니다. 마법석이 내뿜는 허무의 빛의 원천은 마계의 땅에 스며든 마력. 그 마력은 이 땅에 사는 마족의 것.
 우리가 이곳을 떠난 뒤에 마법석의 빛을 유지할 수 있는 마력은 머잖아 고갈될 것이고, 마법석 역시 그 기능을 잃겠죠. 마법석을 유지, 사용하는데 있어 인간이 가진 마력은 턱없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바로아는 무표정한 얼굴로 테이블로 다가가 손가락을 딱 하고 튕겼다. 동시에 갑자기 공중에서 모습을 내보인 글라스를 붙잡아 포도주를 채우며 재차 말했다.
 
"마법석은 '적당히'라는 것을 모르는 광물입니다. 마법석을 사용하면 할수록 그 빛은 줄기 마련이고, 빛을 벌충할 마력이 부족하다면 기력을, 그마저도 부족하다면 생명력을 잡아먹을 겁니다. 그런 점에서는 끝없이 욕심을 부리는 인간과 비슷하군요.
 그러고 보니 지난 전쟁에서 인간 마도사들은 마법석의 힘을 제대로 써보지도 못한 채 죽었다죠? 동향을 보아하니 마력이나 생명력을 뺏기지 않기 위한 나름의 장치는 개발한 듯 하지만 정작 근본 원인은 파악하지 못한 듯 하니... 지난번에는 인간이 죽음을 맞았지만, 이번엔 반대로 마법석이 고이 자취를 감추겠지요.
 관상용으로 놔둔다면 모를까, 어떻게든 사용하려 든다면 유지할 빛이 필요하기 마련인데 인간의 마력이 필요 이상으로 빠져나가는 걸 막았으니 마법석은 그 빛을 잃을 수밖에 없겠죠. 인간은 본인들도 모르게 그토록 갈구하던 빛을 자신들의 손으로 끊어버릴 것입니다."
 
바로아가 말을 마칠 무렵, 글라스에 담긴 적정량의 와인이 흔들리며 붉은 광채를 내뿜었다. 그것을 이자벨에게 건넨 바로아는 소리 없이 자신의 잔을 들어올렸다.
 
"곧 사라질 마법석의 존재를 기억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