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외출하신 마리의 아빠를 대신해 나와 마리가 가게를 봤다.
손님이 없는 틈을 타 마리에게서 이것저것 장사 비결을 주워들었는데, 집에 돌아와 아빠에게 얘기하니 아빠가 불같이 화를 내셨다.
장사를 하는 사람은 함부로 믿어선 안 된다나?
아무래도 아빠는 장사를 싫어하시는 것 같다.
장사라는 것에 조금 흥미가 생겼지만... 그만 두어야지.
아빠 말 잘 듣는 착한 어린이가 되어야 하니까.

-1442년 6월 29일, 키르셰의 일기장에서

 

 

"어라... 뭔데 사람들이 이렇게 모여 있지?"

왕비님의 의뢰를 받들기 위해 광장으로 나온 키르셰는 광장 한가운데를 사람들이 빙 둘러싸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 작은 호기심을 느꼈다.
수확제를 목전에 두고 무술가나 무희들이 자신의 실력을 뽐내는 경우는 왕왕 있지만 지금은 겨우 5월. 수확제가 열리는 9월까지는 4개월이나 남았다.
사나티아 댄스 사범이 가끔 원생을 모으기 위해 거리나 광장에서 춤을 추기도 하지만 그것도 기각.
사나티아 선생님은 국왕 폐하께서 이 나라에 머물라고 직접 권유하실 정도로 수려한 춤 솜씨를 보유하신, 몰리뉴 왕국에서도 손꼽히는 실력가.
그런 분이 춤을 춘다면 사람들은 그 실력에 탄복하여 조용히 재주를 감상하지, 옆 사람과 내담을 즐기며 키득거리지는 않을 터.
아무리 머리를 굴려 봐도 그럴 듯한 모범 답안이 떠오르지 않는다.
안 돌아가는 머리를 굴려봐야 별 수 없다며, 키르셰는 양해를 구하며 어느 지점을 둘러싼 사람들 사이를 파고들었다.
-대체 무슨 일이길래 이렇게 야단들인지... 헐.
사이로 비집고 들어오는 자신에게 꽂히는 불쾌한 눈초리를 애써 무시하고 겨우 자리를 차지한 키르셰는 저도 모르게 성대하게 뿜어낼 뻔했다.
벌건 대낮에 사람들이 모여 키득거리는 걸 발견한 시점에서 뭔가 웃기거나 남부끄러운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쯤은 미리 예상했어야 했지만... 그 장본인이 광장 한 가운데 자리를 차지한 동상 바로 밑에서 大자로 뻗어 콧노래를 흥얼거리는 드래곤 소년이란 걸 알게 된다면 대체 어떻게 행동해야만 할지.
모르는 척 외면해야 할까, 아니면 옆 사람들처럼 손가락질하며 웃어야 할까.

"어, 키르셰다! 키르셰, 여기야, 여기!"

진지하게 다음 행보를 고민하는 키르셰의 선택권을 가차 없이 산산조각 내는 소리가 들렸다.
깨끗이 포기하자며 체념의 한숨을 띄우고 눈길을 준 그곳에는 키르셰를 알아본 리가 그녀를 향해 순박한 미소를 지으며 양손을 붕붕 흔들고 있었다. 정중하게 그녀의 이름까지 거론하면서.
-아무래도 좋지만... 아니, 여기서 내 이름 나오는 건 별로 좋지 않지만... 어쨌든 땅바닥에 누워서 팔 흔드는 건 그만둬 줬으면 좋겠는데...
점점 얼굴이 익어가는 키르셰.
멍청히 서 있는 그녀의 귀에 구경꾼들이 수근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던 것이다.

"이야... 저 녀석이랑 동료인가?"

"가정교육을 어떻게 받았길래..."

"근데 방금 키르셰라고 하지 않았어? 어디서 들어본 이름 같은데..."

리가 자신을 향해 이름을 부르며 마치 땅 위에서 배영을 하듯 붕붕 손을 흔든 것이 화근이었던 것 같다.
-아, 안 돼... 이대로 있다간 나까지 도매급으로 넘어가겠어...

"여러분! 이건 길 가다 쓰러진 것도 아니고 퍼포먼스도 아니에요!"

당황해서 키르셰는 말했다.

"리! 대체 길 한가운데 누워서 뭐하는 거야? 땅 짚고 헤엄치는 것도 아니고... 이런 데 누워 있으면 사람들이 불편해 하니까 얼른 일어나."

같이 웃음거리가 되긴 싫다는 의사를 교묘히 감춘 채 키르셰는 적당한 이유를 붙여 리의 손을 잡아끌었다.

"어, 키르셰. 햇빛이 따뜻해서 기분이 좋길래, 해바라기처럼 누워서 광합성을 하던 참이었어. 괜찮으면 너도 같이 할래?"

리가 입을 열자 사람들이 큭큭거리는 웃음소리가 키르셰의 등에 달라붙어 마구 흔든다.
나이 먹을 대로 먹은 남녀가 길바닥에 누워 나란히 노숙자 행세라... 참 볼만하겠다.
자칭 드래곤이라는 리야 남의 시선을 도통 신경 쓰지 않으니 그렇다 치더라도, 키르셰가 그런 짓을 했다간 삽시간에 구설수에 오를 테고 입을 타고 소문이 퍼지면 혼삿길 막히는 건 시간문제다.
키르셰는 부끄러움에 발갛게 물든 뺨을 도리질하며 단호히 말했다.

"난 사양할래. 어쨌든 사람들이 이렇게 모여 있잖아. 이러고 있으면 폐가 된다고. 잘못하면 경비병들한테 붙들릴지도 몰라."

"그래? 네가 그렇게 말한다면 할 수 없지. 여러분, 불편하게 해서 죄송해요. 아하하..."

의외로 리는 순순히 자리를 털며 몸을 일으켰고, 시키지도 않은 사과까지 꾸벅.
그 꾸밈없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어쩐지 책망할 기분도 들지 않아 키르셰는 쓴웃음을 지으면서 일단 급한 불은 껐다는 생각에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옹기종기 모여 구경하던 사람들도 순진한 리를 보고 안심했는지 별 시비 없이 흩어져 주었고...

"너 말야... 가끔 말도 안 되는 짓을 하는구나. 저번엔 자기가 용이라고 하질 않나..."

"미안, 키르셰. 혹시 내가 너 귀찮게 한 거야...?"

따지려는 의도는 아니었는데, 금세 풀이 죽어 고개를 숙이는 리를 보고 있자니 왠지 키르셰는 자신이 리를 괴롭히는 것 같은 죄책감이 들어 황급히 손사래를 쳤다.

"그, 그렇지 않아! 좀 민망하고 부끄럽고 놀라긴 했지만... 귀찮지는 않았어. 정말이야. 아마 다른 사람들도 그랬을 거야..."

"다행이다... 그럼 오늘도 놀러 가자!"

방금까지 시무룩했던 얼굴은 온데간데없이 5월의 태양 에너지를 잔뜩 받은 리의 생기 넘치는 얼굴이 키르셰의 앞에 마주섰다.

"너말야, 아무리 그래도 노는 걸 너무 좋아하는 거 아냐, 리? 넌 조금은 노는데 질리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어."

"응? 방금 뭐라고 했어?"

키르셰는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아냐. 그것보다 나 오늘은 볼 일이 있어서 놀러갈 수 없을 것 같아. 모처럼 권해 줬는데 미안해."

"무슨 볼일인데? 장 보러 가는 거라면 내가 가서 짐 들어 줄게!"

"아니, 그게 아니라..."

키르셰는 잠시 망설였다.
쇼핑하러 나온 거라면 군말 없이 리의 제안을 받아들였겠지만... 안타깝게도 오늘은 아무것도 살 것이 없었다. 아이쇼핑에도 흥미가 없고.
게다가 무려 왕비님께서 명령하신 중요한 일이 있지 않은가.
-어떡한다지? 왕비님 얘기를 솔직하게 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차갑게 내치기도 그렇고... 아, 그래!

"저기, 리. 잠깐 가까이 와 봐."

키르셰는 누군가 엿듣고 있는 사람이 없는지 주변을 주시하며 리에게 손짓했다.

"말해두겠는데, 지금 내가 하는 얘기... 아무한테도 하면 안 돼. 알겠지?"

자신에게 바싹 다가온 리의 귀에 대고, 키르셰는 비밀의 말을 입에 담았다.
고개가 꺾어지도록 세로로 흔드는 리를 향해 만족스런 웃음을 보이고 키르셰는 비밀의 말을 입에 담았다.

"내가 누군가에게 부탁받은 게 있어서... 뭔가를 좀 조사해야 해. 그래서 마을 사람들을 상대로 탐문을 좀 해 보려고."

"우와, 재밌겠다! 나도 할래, 나도!"

"좋아. 그럼 나랑 같이 마을을 돌면서 요새 사는 거라든가, 들리는 소문 같은 거라든가, 사람들의 평가라든가 뭐 그런 걸 물어보는 거야. 대신 절대로 내 옆에서 떨어지면 안 돼. 알았어?"

"응! 알았어!"

키르셰는 사정을 대충 얼버무려 마무리 짓고, 리와 함께 탐문을 시작했다.
왕비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백성들이 직접 들려주는 생생한 정보. 그 때문에 마을에서의 탐문조사는 절대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작업이었다.
사실 리와 동행하든 안 하든 크게 달라지는 것은 없지만 옛 말에도 있잖은가. 하나보단 둘, 둘보다는 셋. 동행자는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고.
혼자 질문하면 대답하기 꺼릴 수 있는 문제도, 다른 이가 동행하면 의외로 쉽게 대답해 줄 수도 있다.
쓸데없는 짓은 하지 말라고 못 박아 뒀으니 아까처럼 기이한 짓을 하지 않을 테지.
혹시 있을지 모르는 불확정 요소를 모두 제거하고,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장소들을 집중적으로 돌며 모은 증언들은 다음과 같았다.

"앞전의 전쟁에서 그 정도로 마법이 활약했는데 학교에 대한 원조는 너무 부족해. 그 대신을 납득시키기 위해서라도 확실한 성과를 내야 해." (카이, 마법 사범)

"이상한 일이라... 그러고 보니, 늘 식재를 대량으로 사 가는 아가씨가 있던데 결혼한 것 같지는 않고, 혼자 사는 사람한테는 너무 많고... 아차, 쓸데없는 데 관심 끄자." (팬든, 시장 주인)

"대신 오스왈드 님과 집정관 네이섬 님은 별로 사이가 좋지 않은 것 같아. 의회에서도 의견이 부딪히는 일이 많다고 불평하셨어. 누가 불평했냐고? 그건 비밀이야. 후후훗." (사나티아, 댄스 사범)

"세율이 더 낮아져야 할 텐데. 농장의 경영이 좀... 대신님한테 편지를 써서 부탁하면 혹시... 될 리가 없지." (하무르, 농장 주인)

"대신은 이번 전쟁을 지지한 급진파라고 하던데, 어지간히 마족이 싫은 건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는 건지..." (워볼프, 무술 사범)

"집정관 네이섬 님은 멋져... 물론 왕자님만큼은 아니지만." (파멜라, 마을 소녀)

이런 패턴이 태반이고 개중에는 이런 증언도 있었다.

"마족은 지금까지 계속 인간을 간섭하지 않는 입장이었다고 들었어. 사악한 종족이라고들 하지만 누가 그걸 확인했을까?" (니엘, 교양이론 사범)

"앞 전쟁에서 마족이 왕궁을 습격했다고 하지만 그 원인은 잘 몰라. 분명 거짓은 아니지만, 진실을 전부 말하지 않은 것도 사실이지." (레이브, 주점 주인)

"보통 마족을 만악의 근원이라느니, 어둠의 화신이라느니 하는데 개인적으로는 그렇게 나쁜 녀석들은 아니지 않을까 해. 분명히 전쟁 중이기는 하지만 그런 건 인간들끼리도 얼마든지 하는 거고." (패트먼, 여관 주인)

아무래도 마을 사람들 역시 대놓고 말하지는 않아도 전쟁에 대해 이런저런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았다.
적어도 성에서 공포하는 내용을 곧이곧대로 믿지 않는다는 것만은 확실한 듯했다.

"리, 지금까지 우리 질문에 대답하면서 거짓말을 하는 것 같다든가, 침착성을 잃는 것 같다든가 하는 사람 혹시 못 봤... 리?"

사람들의 진술을 가볍게 정리한 양피지를 훑으며 생각을 정리하던 키르셰는 리에게 가벼운 질문을 던지던 중 기묘한 위화감을 느끼고 눈을 들었다.

"아이 참! 방금까지 옆에 있던 애가 또 어디 간..."

"키르셰!"

키르셰의 생각의 고리를 끊어내듯 리의 우렁찬 목소리가 그녀의 손을 붙들었다.

"저 앞 가도에 사람들이 잔뜩 모여 있어. 재밌을 것 같으니까 얼른 가 보자, 얼른!"

"잠깐만, 아직 탐문 안 끝났... 꺅!"

"좋은 자리 맡아야 하니까, 빨리 빨리!"

리가 이끄는 대로 끌려가던 키르셰의 시선에 문득 누군가의 모습이 들어왔다.
잘못 본 건가 싶어 눈을 깜박이던 중, 어떤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설마 오늘이... 하지만 날짜로 보면 얼추 맞는데... 어라?

"잠깐 기다려 봐, 리."

아무래도 확인을 해 봐야겠다 싶은 생각이 든 키르셰는 리를 불러 세웠다.

"나 잠깐 어디 좀 갔다 와야 할 것 같아."

"무슨 소리야? 이제 곧 재밌는 걸 볼 수 있을 텐데. 앞에 가야 제대로 볼 수 있다구."

"나도 알아. 근데 정말 급해서 그래. 미안하지만 너 먼저 가서 자리 좀 맡아줄래? 좀 있다 나도 갈게."

"...알았어. 그치만 금방 와야 해!"

자신의 손을 잡고 몇 번이고 다짐을 받는 리를 향해 연거푸 고개를 흔들어준 뒤 키르셰는 자신의 눈에 들어온 남자를 쫓아 달려나갔다.

"분명 이쪽으로 온 것 같았는데... 아, 저기 있다."

먼발치에서 크라이스의 모습을 발견한 키르셰는 근처 벽에 숨어 동태를 살폈다.
벽에 찰싹 달라붙어 크라이스를 훔쳐보면서도 키르셰는 어째서 자신이 이런 스파이 같은 행동을 하는지 납득할 수 없었다.
그냥 나가서 인사를 하든가, 아니면 무시하고 갈 길 가든가 하면 될 것을, 왜 뒤에 숨어 저 사람을 엿보는 거지?
대체 자신이 지금 무슨 짓을 하는 건가 싶어 밖으로 나오려던 찰나, 크라이스에게 말을 거는 다른 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누군가 싶어 살짝 고개를 내민 키르셰는 전혀 예상치 못한 조합에 눈이 휘둥그레졌다.
-오스왈드 대신님이 왜 이런 곳에... 애당초, 둘이 저런 후미진 곳에 만나서 대체 뭐하는 거야?
심각한 얼굴을 하고 밀담을 나누는 모습에 호기심이 인 키르셰는 살짝 몸을 숙여 그들의 대화에 몰래 끼어들었다.

"...그거라면 문제없다. 내게 맡겨 둬라."

"감사합니다, 대신님. 이 건만 성공한다면 몰리뉴 왕국은 좀 더 발전할 수 있을 겁니다. 대신님께도 결코 나쁜 일이 아닙니다."

"자네만 믿겠네. 허나 그를 위해선 마법석의 힘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걸 알고 있겠지? 구태여 강조할 것도 없겠지만... 절대 실수하지 않도록."

"여부가 있겠습니까. 걱정하지 마십시오."

벌써 이야기가 끝난 모양인지, 두 사람이 움직이는 모습이 보였다.
-이키...!
움직임에 놀라 허둥지둥 자리를 빠져나온 키르셰는 재빨리 모여드는 사람들 틈에 끼어들었다.
이대로 사람들 틈에 섞여 리와 합류할 생각이었지만, 불행히도 크라이스가 그녀를 발견하고 말았다.

"여기다, 틴시클 양! 역시 교역선을 보러 와줬구나."

으아아아아아.
이미 들켜버렸다면 어쩔 수 없다. 들키지 않도록 억지 한숨을 내쉰 키르셰는 억지 미소를 지으며 크라이스에게 조금씩 다가갔다.

"네... 안녕하세요. 저... 교역선이 어떻게 생겼는지 너무 궁금해서요."

"그래, 그럴 거라 생각했어. 그럼 이쪽으로 오너라. 좋은 위치를 가르쳐 줄 테니까."

크라이스는 턱짓으로 바다와 인접한 부두를 가리키고 그녀를 에스코트했다.
키르셰와 크라이스는 부두에 정박하는 교역선을 보러 몰려드는 사람들 사이를 헤치고, 경비병들이 서 있는 덕에 일반인들의 발길이 뜸한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어때, 이게 나의 배들이야. 훌륭하지?"

키르셰는 크라이스가 보여 준 배들을 보고 입을 쩍 벌렸다.
옆에 서 있는 이 남자의 기본 됨됨이야 어쨌든 자신의 시선을 사로잡은 배들은 저마다의 위용을 과시하고 있었다.
그녀가 보고 있는 배 뿐만이 아니라, 몇 척이나 되는 교역선들이 차례차례 정박하는 중이었고, 아마 다른 교역선들을 구경하는 사람들의 기분도 자신과 그다지 다르지 않으리라.

"예, 무척 큰 배들이네요."

"이것들 말고도 여러 척이 더 있단다. 아직 항해 중이라 보여줄 수는 없다만."

"대단하네요. 크라이스는 정말 부자셨군요."

"하하, 이제야 겨우 믿어주는구나."

크라이스는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그런데 말이죠... 혹시 아까 누군가하고 얘기하고 있지 않았나요? 여자분 같았는데요. 붉은색 긴 머리의..."

크라이스를 칭찬하던 키르셰는 은근슬쩍 묻고 싶었던 것을 끼워 넣었다. 혹여나 의심을 받을까 싶어 교묘하게 사실이 아닌 것을 집어넣는 것도 잊지 않고.

"그렇지 않아. 네가 잘못 봤겠지. 자랑하는 건 아니지만, 열심히 일만 하다 보니 아직까지 변변히 여자도 만나지 못했는걸. 뭐, 새로운 장사 얘기라면 신물 날 정도로 접하고 있지만 말야."

다행히도 크라이스는 키르셰의 말을 전혀 의심하지 않았다.

"그래요?"

"그래. 이런 개인적인 얘기는 그만하고. 너 말이야, 장사에 대해 좀 더 공부하는 게 어떨까? 다른 길을 걷기엔 그 상재가 너무 아까운데."

"상재요?"

키르셰가 물었다.

"상업적 재능 말이다. 장사의 세계에서 그건 매우 귀중한 능력이거든. 뭐, 지금은 일단 여러 곳에서 경험을 쌓아 보는 눈을 길러 두는 게 선제지만 말이다."

"글쎄요..."

키르셰는 말끝을 흐렸다.
어렸을 때라면 모를까, 지금은 딱히 장사에 관심도 없었고 뭣보다 발을 들여 놓았다가 이 사람처럼 성격이 바뀌면 어쩌나 싶은 걱정이 앞섰던 것이다.
그 순간, 어떻게 빠져나갈지 궁리하던 키르셰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민 이가 있었으니...

"크라이스 님! 교역선 물품 검증이 다 끝났습니다!"

"그래? 알겠네. 곧 가도록 하지."

키르셰를 조금 더 설득할 요량이었던 크라이스는 아쉽다는 듯 쩝쩝 입맛을 다셨다.
어쩔 수 없다는 듯 작은 한숨을 내쉬고 크라이스는 키르셰에게 말했다.

"미래를 결정할 문제니까 시간을 두고 천천히 고민해 보거라. 보다시피 나는 바빠서 그만 가봐야겠다. 뭐, 네 인생은 네가 결정해야만 하겠지만... 빨리 우리들의 세계로 와 줬으면 좋겠구나."

크라이스는 빙긋 미소 짓고 마지막 말을 덧붙였다.

"기다리고 있겠다."

 

 

"키르셰! 왜 이제 오는 거야? 얼마나 기다렸는데!"

실컷 교역선을 구경하고 사람들이 자리를 뜰 무렵 터덜터덜 걸어 나온 키르셰를 발견한 리가 볼멘소리를 했다.

"미, 미안... 볼 일이 생각보다 오래 걸려서..."

"난 너 언제 오나 싶어서 기다리느라 구경도 제대로 못했단 말야. 듣자니까 동방에서 온갖 진귀한 물건을 싣고 돌아온 교역선이라던데, 크기가 정말 굉장했어! 너도 보면 깜짝 놀랐을 거야!"

"그, 그래...?"

차마 딴 사람과 봤다고 솔직하게 말할 수는 없어서, 키르셰는 난처한 얼굴로 말끝을 흐렸다.

"아무튼 정말 너무했어. 온다고 약속해 놓고선... 난 네가 잊어버리고 그냥 집으로 간 줄 알았다고."

"정말 미안해, 리. 저... 대신 내가 맛있는 거 사 줄 테니까 화 풀어. 응?"

"...정말?"

기분 탓이었을까.
심통이 나 있던 리의 목소리가 살짝 누그러진 듯 한 기분이 들었다.

"응, 네가 먹고 싶은 거 다 사줄게."

"그럼 나 마늘 소스 파스타랑... 갈릭 챠오즈, 핫케이크, 크라운 소시지 볶음, 모듬 튀김, 체리 파이... 그리고 또..."

양 손가락을 하나하나 꼽아가며 먹고 싶은 음식을 차례로 나열하는 리의 모습은 굉장히 진지했다.

"......"

역시 기분 탓이었나 보다.
리가 얘기하는 음식들은, 적어도 절대 혼자서 먹을 수 있는 양은 아니었다.
역시 혼자 기다리게 한 것 때문에 삐져서, 골탕 먹일 속셈으로 그 많은 음식들을 입에 올리는 건지도.

"리, 뭘 먹을 지는 식당에서 메뉴판 보면서 고민하기로 하고, 일단 여기를 뜨자. 아직 사람들이 많아서 좀 불편해."

남기기만 해 봐, 라는 속마음은 감춘 채 키르셰는 애써 밝게 대꾸하며 이 자리를 뜨자는 뜻으로 손을 내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