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연은 가끔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곳에서 사람을 찾아오기도 한다.

 

 

"이상하다... 항상 광장에 가면 만날 수 있었는데..."

하릴 없이 광장을 몇 바퀴나 돌아다니 키르셰는 허탕을 쳤다는 생각에 저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오늘도 의뢰를 위한 정보를 찾아 마을을 돌아보는 중이었던 것이다.
이틀 연속으로 마을을 돌아 퉁퉁 부은 다리와 피곤함을 얻고 나서야, 직접 발로 뛰어 정보를 모으는 것 외에 정보원을 통해 원하는 정보를 낚는 방법이 있다는 것을 깨닫고 뒤늦게 정보원을 찾아 다시 마을을 이 잡듯 뒤졌건만...
마을로 외출할 때마다 거의 매번 광장에서 볼 수 있었던 사람을, 용건이 있어 찾아온 오늘은 볼 수 없다고 생각하니 왠지 짜증이 났다.

"아 진짜, 정보는 신선도가 생명인데 왜 찾을 땐 없는 거야!"

속상한 마음에 투덜거렸지만 상황을 변하지 않는다. 오늘만 날인 것은 아니니 아무래도 다음을 기약해야만... 잠깐.
사람 찾기를 포기하고 돌아서려던 키르셰의 머릿속에서 문득 1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지금 자신이 찾으려던 사람이 예전에 말해 주었던 토막 정보.
키르셰는 일전에 테츠와 나누었던 짧은 대화를 상기하려 애썼다. 분명...

 

'다크타운은 아주 자극적인 장소야. 그 곳에만 정보들이 있어서 난 자주 들르는 편이지.'
'정말요? 재밌겠다. 저도 가 보고 싶어요!'
'아서라. 너 같이 귀하게 자란 여자애가 혼자서 갈 만한 곳은 아니니까 그만두는 게 좋을 걸. 특히 장래에 성에서 일하고 싶다면 절대 드나들어서는 안 돼.'

 

"맞아, 그랬었지..."

키르셰는 과거의 기억을 떠올리고 살짝 웃음을 흘렸다.
갖가지 정보를 갖고 있는 테츠를 찾지는 못했지만 모처럼 쓸모 있는 기억이 생각났다는 만족감 때문이었다.

"마을에서 탐문하는 것도 좋지만 역시 다크타운에도 가 보는 게 좋겠어. 테츠 씨가 분명 다크타운 내에서만 도는 정보들도 있다고 했으니까..."

키르셰는 고개를 세로로 흔들어 보이고 바로 다음 행선지를 정해버렸다.
어쩌면 테츠가 정보를 얻으러 다크타운에 가 있을지도 모르고, 설령 없다 해도 뭔가 쓸 만한 정보들을 건질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다크타운이 어떤지 쪼오금 궁금하기도 하고...
키르셰는 아무도 듣는 사람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괜시리 주변을 살피며 내심을 밝혔다.
얼마 전 크리스티나의 꾐에 빠져 친구들과 함께 다크타운에 들어섰다가 쓸데없는 자극을 받아버렸던 것이다.
얼떨결에 다크타운을 둘러보다가 불량배와 시비가 붙어 리제와 편먹고 신나게 날뛴 경험.
딱히 히어로 덕질을 추구하는 것은 아니지만, 크리스티나만큼은 아니더라도 키르셰 역시 싸움과는 별 인연 없이 평범하고 여자답게 자라왔기 때문에 다크타운에서의 새로운 경험의 그녀의 마음을 묘하게 사로잡았던 것이다.
다크타운에 들어선 것 역시 크리스티나의 꼬임이 있기도 했지만, 난생 처음으로 아버지께 반항하겠다는 무언의 시위이기도 했고.
이런저런 이유로 내심 다시 한 번 다크타운에 가보고 싶었던지라, 키르셰는 명분을 제공해 준 테츠에게 고마움마저 느꼈다.
저번처럼 질 나쁜 무리들이 치근댈 확률이 없지는 않았지만 그녀는 그 가능성을 가볍게 무시해 버렸다.
리제처럼 무술 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할 만큼 출중한 실력은 아니지만 키르셰는 나름대로 자신을 보호할 능력을 지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나는 어디까지나 왕비님을 기쁘게 해 드리기 위해 다크타운에 가는 거야... 단순한 호기심 때문이 아니라구...
키르셰는 자신을 납득시키기 위한 말투로 몇 번이고 반복해 중얼거리면서 살금살금 다크타운을 향해 발을 뻗었다.

"어라, 아가씨. 또 온 거야?"

다크타운이 가까워 오자 어디서랄 것도 없이 갑자기 문지기가 튀어나왔다,

"제가 누군지 아세요?"

키르셰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뒷골목이라고는 해도 하루에 수십 명은 드나들 텐데 어째서 이 문지기 아저씨는 내게 아는 척을 하는 걸까?
이제 겨우 두번째 입장일 뿐인데... 거기다 혼자 들어오는 건 이번이 처음인데 말이다.

"아가씨, 이런 곳에 오래 있다 보면 저절로 사람 구별하는 눈이 생기는 법이야. 거기다 아가씨는 여기 사람들에 비해 이질적인 편이라 눈에도 잘 띄고. 전에 당돌한 귀족 아가씨랑 같이 들어왔던 아가씨 맞지?"

"네..."

-진짜 귀신 같은 통찰력이구나.
키르셰는 내심 감탄했다.
문지기는 어쩔 수 없다는 듯 혀를 끌끌 차며 한 걸음 옮겨 옆으로 물러서 주었다.

"뭐, 아가씨는 더 이상 꼬마가 아니니까... 들어가고 싶다면 말릴 수 없지. 하지만 그래도 통행료는 내야 해."

"알았어요. 여기 통행료."

키르셰는 주머니에서 골드를 세어 문지기에게 쥐어주었다.

"자 그럼..."

어디서부터 둘러볼까 고민하던 키르셰의 눈에 한 간판이 들어왔다.
온갖 현란한 색이 한데 섞여 글라스 안에서 춤추는 그림이 그려진 간판. 아무래도 술집인 듯했다.
-그러고 보니... 술집에 있다 보면 이런저런 소문이 많이 들려온다고 레이브 씨가 얘기하신 적이 있었지. 여러 사람이 모여 떠드는 곳인 만큼 갖가지 정보다 돌아다닐 게 틀림없어.
그렇다면 괜히 주변을 어슬렁거리다 저번처럼 시정잡배들한테 붙들려 한바탕 날뛰는 것보다 차라리 여기 들어가는 편이 나을지 몰라.
키르셰는 탁월한 선택이라며 마음을 정하고 주저 없이 눈에 띈 조금 수상한 술집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만, 조금 뒤 그녀는 이 결정을 후회하게 된다).
달칵.
맥 빠진 듯 한 문소리가 손님이 들어왔음을 알린다.
흥미로운, 혹은 야릇한 시선으로 자신에게 쏟아지는 시선을 애써 무시하는 키르셰.
곧장 가게를 가로질러 웨이터 혹은 주인이 있을 법한 카운터로 향했다.

"저기, 말씀 좀 묻고 싶은데요."

주인으로 보이는 연륜의 남자를 발견한 키르셰는 그 쪽으로 몸을 숙이고 짐짓 목소리를 낮추어 말을 걸었다
손님이 왔는데도 환영은커녕 글라스만 닦고 있는 행동이 살짝 거슬렸지만, 지금은 그런 사소한 것에는 신경 쓰지 않도록 하자.

"요 근래 들어서 마법석이라든가 전쟁이라든가... 뭐 이런 것들에 대해 들리는 소문 같은 게 혹시 없나요?"

키르셰는 그 일에 지대한 관심을 보이지 않으려 애쓰면서 마을을 돌며 탐문할 때 수십 번씩 던졌던 질문을 입에 올렸다.

"저기... 제 말 안 들리세요?"

아무 반응이 돌아오지 않자 혹시 자기 말을 못 들은 건가 싶어 키르셰는 같은 질문을 반복했지만 상대의 반응은 달라지지 않았다. 그녀에게 흘깃 눈길을 주었다 다시 고개를 돌릴 뿐.
조바심이 난 키르셰가 들리지 않느냐며 언성을 높이려 할 무렵, 어디선가 들어본 듯 한 끈적거리는 목소리가 달라붙었다.

"이게 누구야~? 그 떄 그 당돌한 아가씨 아냐?"

"혼자서 여길 찾다니 배짱도 좋으셔라."

"얌전한 얼굴로 이런 곳에 드나들다니, 겉보기와는 달리 밝히는 모양이지?"

목소리들이 명백히 자신을 향해 있다는 걸 깨달은 키르셰는 굳이 불쾌함을 감추지 않으며 시선을 돌렸다.
전혀 본 적도 없는 남자들이 자신을 향해 저속한 시선을 주고받으며 그녀를 향해 빈정거리고 있었다.

"어이 아가씨. 설마 우릴 잊지는 않았겠지?"

키르셰의 시선을 붙잡는데 성공한 불량배 하나가 그녀에게 다가오며 말을 걸었다.

"잊을 리가 없지. 애초에 기억도 안 했으니까!"

"뭣이라고!"

"이게 지금 누굴 놀리나!"

그저 솔직히 대답했을 뿐인데, 어째서인지 화를 내는 불량배들.

"남을 실컷 두들겨 패놓고서 기억이 안 난다고? 웃기지 마!"

아하.
키르셰는 탄성을 질렀다.
이 인간들, 아무래도 그 때 자신과 리제에게 실컷 얻어맞고 도망친 건달 무리였던 것 같다. 그래도 그렇지, 처음 들어간 곳에서 딱 마주치다니 재수도 없네.
키르셰는 쯧쯧 혀를 찼다. 귀찮게 됐는걸.
쓰러뜨리는 게 아니라 조용히 상대하는 게 말이다.

"하여간에 너 잘 만났다. 그 때 당한 보복을 해야겠군. 좋은 말로 할 때 따라 와!"

그 중 성질 급한 녀석 하나가 성큼성큼 다가와 그녀의 손목을 붙들었고-
그와 동시에 키르셰가 움직였다.
재빨리 자신을 붙든 녀석의 정강이를 걷어차고 갑작스런 아픔에 손을 놓고 한 발로 깡충깡충 뒤는 그의 뒤통수를 향해 반쯤 몸을 돌려 발차기를 꽂아 넣었다.

"크헉..."

견디지 못하고 쓰러지는 건달을 곁눈으로 확인한 뒤 다음 상대를 위해 태세를 갖추는 키르셰의 주위로 불량배들이 모여들었다.

"여자 하나 잡겠다고 여럿이서 덤벼드는 건 비겁한 짓 아냐?"

험악한 분위기를 조금이라도 죽여볼 요량으로 실없는 개그를 한 마디 던졌다.
그에 대한 대답은...

"붙잡아라!"

낭만도 정취도 없는 불량배들을 향해, 키르셰는 자신을 향해 주먹을 휘두르는 남자의 움직임을 벗어나며 살짝 주문을 걸었다.

"으아악!"

주문을 정통으로 먹은 남자의 비명소리가 울려 퍼졌다.
술자의 손과 접촉하는 모든 것에 약한 전류를 흘려보내는 기술이다.
어지간히 심장이 약한 게 아닌 이상 죽거나 하지는 않겠지만 얼마 동안은 전투불능이 되어버리는 건 확실.

"이 계집이 건방지게!"

"까불고 있어!"

눈앞에서 동료 둘이 당한 것이 수틀렸는지 주변을 둘러싸며 거리를 재던 건달들이 한꺼번에 그녀에게 달려들었지만 그것도 예상한 바.
키르셰는 여유롭게 뒤로 물러나면서 눈대중으로 거리를 취해-

"?!"

별안간 예상치 못한 방향에서 끼어든 뭔가에 걸려 한순간 비틀거린다.
그리고 그 틈을 정확히 파고든 남자의 주먹이 정확히 그녀의 명치에 박혔다.

"허억...!"

무심코 신음을 흘리는 그녀의 한쪽 팔을 꺾어 움직임을 봉하고 근처 테이블 위에 거칠게 내리꽂는다.

"어이 형씨. 도와줘서 고맙수."

"고맙긴 뭘, 동생 같은 놈이 여자에게 얻어맞게 생겼는데 그냥 보고 있을 수가 있어야지."

"나중에 꼭 보답하겠수."

...아무래도 건달들과 안면이 있는 손님이 중간에 끼어든 것 같았다. 사람들은 싸움 구경하는 건 좋아해도 말려드는 건 싫어할 거라 지레짐작하고 그들을 불확정요소로 단정 지었던 키르셰는 자신의 결증을 후회했다.

"보답은 됐고... 이 여자랑 재미 볼 때 나도 좀 끼워주면 돼. 여리여리하게 생긴 게 아무래도 아직 남자 맛을 모르는 것 같은데..."

겨우 눈을 돌려 올려다보니, 입맛을 쩝쩝 다시는 남자의 게슴츠레한 시선과 딱 마주쳤다.
저속한 중얼거림의 뜻을 파악한 키르셰는 살짝 몸을 떨었다.
이대로 가만히 앉아 당할 수는 없다. 어떻게든 빠져나가기 위해 몰래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으나-

"엇차, 그럼 안 되지! 아가씨, 얌전히 있으라고!"

주문을 외우는 것을 눈치 챈 남자가 그녀의 머리를 움켜잡고 테이블에 박아버렸다.

"야, 이 여자 또 날뛰기 전에 뭐 묶을 만한 것 좀 찾아봐라. 오랜만에 결박 플레이 좀 즐겨보자고."

"그거 좋지. 하하."

불량배들이 지껄이는 저속한 대화를 듣던 키르셰는 공포로 얼어버릴 것만 같았다.
왜 여길 들어온 걸까.
왜 다크타운에 발을 들여놓았을까.
왜 왕비님께서 주신 의뢰를 가벼이 받아들인 걸까.
왜 호기심을 누르지 못하고 경거망동하고 말았을까...!
마치 품평회를 하듯 자신을 사이에 두고 이러쿵저러쿵 지껄이며 킬킬거리는 자태들을 가만히 보고 있자니, 곧 닥칠 위험에 대한 두려움과 즉흥적으로 행동한 자신의 안일함에 대한 후회가 밀려들어왔다.
한순간 음유시인이 들려주는 전승가에 곧잘 나오는 패턴대로 누군가 구해주러 오지 않을까 기대했지만, 그것은 희망을 걸어볼 가치조차도 없는 완벽한 기우.
건달들에게 찍혀 끌려가는 여자를 도와줄 위인이 있었다면 애초에 부외자가 끼어들었을 때 어떻게든 행동에 나섰을 테지.
-누가... 좀 도와줘요...!
소용없다는 걸 알면서도 있을지 없을지도 모르는 요행에 매달려야만 하는 자신의 상황이 너무 분한 나머지, 키르셰는 그만 한 방울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어디서 밧줄을 구해왔는지 까칠하고 따끔따끔한 감촉이 우악스럽게 다가와 그녀의 손목을 파고들 무렵-

"...비켜라."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져내리던 그녀에게 한 줄기 빛이 내려온다.

"뭐? 이건 또 어디서 굴러먹다온 말 뼈다귀야?"

"분위기 파악 못 하는 거냐, 지금?"

"...비키라고 했다."

한 바탕 제대로 놀아제끼려던 건달들은 (본인들 입장에서) 난데없이 나타나 찬물을 끼얹는 불청객에게 살의가 담긴 시선을 보냈다. 아무래도 말로 해선 듣지 않을 것 같으니 실력 행사를 해 줘야...

"우아아아악!"

기껏 달아오른 기분을 잡쳐놓는다며 다가간 남자가 자지러지는 고함을 질렀다. 그 다음 순간 들리는, 뭔가가 와장창 깨지는 소리.

"손님들, 가게 안에서 싸우시면 안 됩니다...!"

키르셰가 질문을 던졌을 때만 해도 입을 꾹 다물고 있던 주인이 우는 소리를 냈으나, 세끼 밥보다 싸움을 더 좋아하는 건달들에게 그러한 호소가 통할 리는 만무한 노릇.

"저 자식이... 얘들아, 밟아 드려라1"

동료가 나가떨어지는 것을 똑똑히 목격한 건달들은 비로소 그가 만만한 상대가 아님을 깨달았는지 그들만의 전매특허- 연계 플레이(지역에 따라선 몰매라고도 한다)에 나섰다.

"아야...!"

새 불청객이 건달들의 관심을 독점해 준 탓에 움직임이 제압되어 있던 키르셰는 겨우 빠져 나올 수 있었다.
그녀가 빠져 나왔다기보다는 그녀를 붙들고 있던 건달이 새로운 전투에 참가하면서 밀쳐 냈다고 해야 옳겠지만... 그런 사소한 문제는 저쪽 구석으로 치워두도록 하자.
속박이 풀려 주저앉은 키르셰는 겨우 중간에 난입한 사람이 누군지 관찰할 시간을 얻었다.
심연 속에서 피어오르는 차분한 물안개.
순간 그녀의 머릿속에 떠오른 이미지였다.
왜 그런 이미지가 떠올랐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아마 그게 상대에 대한 첫인상이 아닐까.
키르셰 본인보다 머리 하나 이상은 더 클 것 같은 훤칠한 키.
그 키에 맞먹는 길이를 뽐내며 위협적인 자태를 선보이는 장검.
푸른색 비단으로 재단한 귀티가 흐르는 의복.
등을 돌리고 있었기 때문에 얼굴을 볼 수는 없었지만, 그에게서 흘러나오는 오오라는 주변을 압도할 만큼의 위용을 과시하고 있었다.
뒤태만으로도 충분한 오오라를 자랑하는데, 앞에서 그를 조우하는 건달들은 과연 어떨지.
그 상황에서도 호기심을 이기지 못한 키르셰는 본인 대신 건달들을 맡아 준 남자를 향해 시선을 던졌고, 뭔가를 알아차렸다.
희미하게 흘러나오는 불규칙한 리듬.
내용을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무엇인지 짐작하는 것은 그닥 어렵지 않다.
마법 주문이다.
한 순간에 리듬의 정체를 깨달은 키르셰는 강 건너 불구경하듯 멍청히 있는 다른 손님들의 시선을 등에 업고 허둥지둥 몸을 일으켜 나동그라진 테이블을 방패삼아 그 뒤로 뛰어들었다.
그와 동시에.
붉은 빛이 가게를 집어삼켰다.

".....!"

잠시 후 고개를 든 키르셰는 말을 잃고 멍 하니 서 있어야만 했다.
파이어 볼과 같은 폭발형 공격주문이 될 거라 예상했던 것과는 달리, 가게 안의 술병이며 테이블들은 기존의 자세를 유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달라진 것은 1가지, 낌새를 느끼고 자리를 피한 키르셰 본인을 제외한 모든 인간들이 의식을 잃고 바닥에 널브러져 있다는 것.
상체가 위아래로 가볍게 흔들리는 걸로 봐선 아무래도 단순히 기절한 것일 테지.
말을 잃고 주변을 구경하던 키르셰는 주문을 날린 장본인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태연하게 문을 열고 나가는 것을 발견하고 서둘러 그를 쫓아 나왔다.
탐문은 이미 물 건너 가버린 마당에 그 가게에 계속 머물러 있다가는 또 건달들과 싸워야 할지도 모르고, 가게 주인으로부터 배상이 어쩌고 하는 잔소리를 들어야 할지도 몰랐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우연이건 아니건 자신을 구해준 남자에게 감사 인사를 건네야만 했으니까. 어떻게 생겼는지 궁금하다는 이유는 차치하고서라도 말이다.

"잠깐만요...!"

키르셰가 남자를 불러 세운 것은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뭐지?"

무심한 대꾸와 함께 돌아선 그의 얼굴을 마주한 키르셰는 무심코 꿀꺽 하고 침을 삼켰다.
겨울 한정으로 온 세상을 뒤덮는 하얀 기운을 빼다 박은 피부.
전체적으로 푸르스름한 빛을 띠고 있는 남자에게서 유일하게 돋보이는, 날이 선 진홍색 루비 한 쌍.
얼음을 타고 흐르는 새빨간 핏빛 눈동자를 차마 직시할 수 없어 키르셰는 저도 모르게 얼굴을 숙였다.
하지만 불러 세운 목적은 이야기해야 했기에 그녀는 고개를 숙인 채 고맙다는 인사를 중얼거렸다.

"아까... 술비에서 도와 주신 거... 고, 고맙다는 인사를 못 드린 것 같아서..."

"뭔가 오해하고 있군."

"...네?"

상대가 보인 뜻밖의 반응에 키르셰는 고개를 들었다.

"입구에 걸리적거리는 게 있어서 치운 것뿐이다. 딱히 널 도운 기억은 없어."

다시 말붙이는 것조차 주저할 만큼 차갑게 대꾸한 남자는 벙찐 표정을 떠올리는 키르셰를 한 번 위아래로 훑어본 뒤 그대로 등을 돌려 사라져 버렸다.
뭐 저런 사람이 다 있나 싶어 멍 하니 서 있던 키르셰는 약간의 시간이 흐른 뒤에야 겨우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이상하네.
키르셰는 개운치 못한 뒷맛을 느끼며 한 동안 남자가 사라진 다크타운의 안쪽을 향해 시선을 던졌다.
특이한 사람이었다. 말 거는 것조차 용기를 걸어야 할 만큼 무뚝뚝한 남자라는 것도 알았다.
하지만... 말이야 어쨌든 결과적으로는 자신을 도와준 사람이 아닌가.
기분도 잡쳤고, 집으로 가야겠다면 다크타운을 나오던 키르셰는 뒷맛이 나빴던 이유를 은연중에 깨닫고 걸음을 멈췄다.

"이름... 이름이라도 물어볼 걸..."